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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차례] 300
서문 Avant-Propre 1
제1장 유기적 총체성 Totalités organiques 5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장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80
제4장 생명 La vie 132
제5장 영웅주의와 성성(聖性) L'héroïsme et la sainteté 182
제6장 개념들의 무와 정신의 충만 Le néant des concepts et le plein de l'esprit 200
제7장 단순성: 환희에 대하여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부록: 벩송과 유대주의 Appenice: Bergson et le judaïsme 255
영혼 전체와 더불어 Avec l'âme tout entière 286
참고문헌 Bibliographie 297
차례 Table des matières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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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단순성, 그리고 환희에 대하여 La simplicité. Et de la joie 229
제1절 단순성에 대하여 De la simplicité 229
제2절 벩송의 낙관주의 L’optimisme bergsonien 244
제2절 벩송의 낙관주의 L’optimisme bergsonien 244
벩송은 스스로 감히 낙관주의라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근본적인 낙관주의인데, 이 낙관주의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를 고려해보면, 오늘날 시시콜콜함과 폭력들의 흥미상실[애착이 없음]을 설명해준다. 아마도 학설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이 운동주의(le mobilisme)는 피조물의 불행조건을 표현하지 않는다.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에 공통하며, 크리스트교의 신학과 19세기 비관주의에 공통하는 까마득한 태고적 편견이 지복을 안정성과 위계적인 부동성의 사유에게 연결하는 한, 생성은 인간에 관한한 저주처럼 제시되었다. 창조적 진화의 철학은 영원한 정지 상태에 의해 전념하였던 전통적 연관들을 전복하고, 머리를 바닥으로 걸었던 철학은 거꾸로 다시 놓는다. 그것은 목표의 기대로써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중단 없는 과정으로서 정거장이다. 개념은 공중에 매달린 사유이다. 그것은 영원성의 움직이는 이미지와 낮은 등급으로써 시간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시간의 환영(le fantasme)과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로써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영원성의 부정 또는 희석화로써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오히려 탁월하게 긍정적인 실증성이다: 영원성은 실증성의 결핍(la privation)이다. 시간은 이완 또는 실추에 의해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결과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은 절대적으로 독창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특수성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표상할 수 없는 영원성에 도피함으로써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간적인 현존 속에 자기를 심고 뿌리 내림으로써 해방된다. “나는 자신들의 욕망이 땅위에 있는 자들 중에 있다”고 가브리엘 포레가 곡을 붙여준 한 시인이 말했다. 비관주의는 실망에 젖은 관조주의일 뿐이다. 적어도 거기에는 쇼펜하우어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ément d'Alexandrie, lat. Clemens, 150경–215경)와 파이돈편과 심지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 그 점은 피조물의 소명이 변질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달아나다(Fuir) - 따라서 그러한 것은 이 형이상학이 공상적 초월과 탈영[탈당]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치료제이다. 그런데 우울감이 환희로 바뀌는 때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생성의 아름다운 환경에서 추방된 것으로 간주되기를 그만둔 피조물이 자기의 진실한 조국과 자신의 실체 자체를 변화 속에서 재인식 하는 때이다. 따라서 벩송의 “운동주의(mobilisme)”를 불평하는 자들은 엘레아 학자들이며, 이들은 벩송보다 훨씬 더 많이 불평하도다! 시간[지속]의 인간은 원죄에 속죄하지 않듯이 자기의 시간성에 속죄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세정(씻는)의식이 지복을 마치 향수에 젖은 과거 또는 초자연적 미래처럼, 다시 말하자면, 뿌리 뽑힌 의식들에게 약속한 불행한 희망처럼 흘낏 들여다보았다면, 지속의 인간, 그는 현장에서 내재성 자체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바로 이곳(Ici-bas)의 정열적인 현재에서 환희를 발견한다. 지속의 인간은 지상에서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며, 그 지속의 인간은 의미가 박탈된 헛된 우회도 하지 않는다. 생성이 한가한 회로, 진저리나게 에두르는 말투, 즉 영원한 것의 완곡어법인 한, 역사는 징벌로써 또는 최후의 심판의 지겨운 기대로서 나타났다. 벩송은 잃어버린 시간 모두를 회복시킨다. 이리하여 벩송은 삶의 성찰(vitae meditatio)에 새로운 강도성을 부여하였고, 스피노자는 이미 파이돈편의 죽음론적인 지혜 대신에 이것을 대체하고자 이해했다. 생성한다는 것은 작은 불로 죽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을 기다리며 십자말풀이를 하면서 굳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무한히 스스로를 실현하는 것이다(49TKB).
1) 완전히 현재로써 제시된 충만 속에서, 항상 살아왔고 또 특히 생성의 충만 속에서, 불행한 형이상학의 우상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우상들이란, 무, 부정, 혼돈, 가능적인 것, 빈 것, 잘못[악], 차별두지 않은 은혜(beneplacitum indifferens) 등이다. 왜냐하면 부정 또한 입장(une position)이며, 심지어는 이중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는 어떤 것이며, 빈 것은 충만이며, 무질서는 예기치 않은 질서이며, 가증적인 것은 그 방식에 따라서는 현실적 경험이다. 스칼라(scalaires) 양의 강등들과 하향등급들은 제작의 필요들에 의해 발명된 언어적 신화들로 환원된다. 우연(le Hasard), 또 잘못 (le Mal)처럼, 희망 없음(le Désespoir, 절망)은 비실재적 극한[한계]이다. 불행을 전부 끌어 모은 절대적 불가능성인 한에서 절망은 아마도 허깨비일 것이다. 비극으로부터 태어난 절망은 미래화의 무한한 기회들과 위험의 객관적인 증가 사이에서 혼동에 기인하지 않는가? 하루하루 지나서 생성의 긍정적이고 치료적인 실증성은 부조리를 정상화하고, 우리들의 존엄성은 부끄럽게 타협안(un modus vivendi)을 채택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적 낙관주의는 불운과 고통의 주위에 다시 형성된다. 이것은 불행의 연속적인 소화[감내]와 변모이며, 희망의 지칠 줄 모르는 재생성 작업이도다! 생명의 질서가 보다 일찍 질병에 방해받지 않듯이, 이미 의식은 보다 세밀한 질서 안에서 습관된(repli) 자기 입장들을 발견한다. 매순간마다 그리고 무한히 열림[개방]은 다시 형성되고, 이를 통하여 우리는 “미래의 즐거운 노래”에 도달한다. 이리하여 반대되는 수단들에 의하여, 지속의 경험에 의하여, 영원한 필연의 초자연적 관점에 의하여, 벩송의 유명론과 스피노자의 현실주의(l'actualisme)는 동일한 지혜에, 생명의 동일한 성찰에 이른다. 이 지혜는 형이상학적 고뇌의 검은 나비들을 패주하게 한다. 근대 고뇌와 근대 패배주의 참피온들[승리자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문제거리”를 마치 오늘날 프랑스식으로 독일어를 말하는 자들처럼, 이렇게 하찮게 한다고 그에게 원망한다. 이들은 그가 “심리학주의자의”, 주관주의자의, 심지어는 그의 비평의 인간주의자의, 낙관주의라고 비난한다. 이들이 항의하기를 거짓문제들에 대해, - 이것은 곧바로 약속된 것이다! 모든 것은 너무 잘, 너무 성급히, 너무 단순하게 정돈[배열]될 필요 없다. 한 번 더 페늘롱을 상기해보자. 페늘롱은 그들에게 “모든 괴물들은 결코 실재적이 아니다”라고 이미 대답했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것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검은 나비들로부터 기꺼이 스스로를 따로 떼어 놓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의 경험 속에 경험적인 무를 실패하게 하면서, 벩송의 현재주의가 문학적 속임수를 배타적으로 반박한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이 속임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형태가 없는 것을 경험의 실증적 대상으로써 비존재를 수립한다. 그것은 비극적이지 않아야 하며, 신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회고작업의 환영들(fantasmes)이 흩어지게 되고, 엘레아 학자들의 조심스런 난제들이 해소되고, 모든 오해들이 설명되는 직관의 기적적인 단순성이 있다. 이 단순성은 일상적인 제국의 효과적인 경험임과 동시에 피조물과 상층제국(métempirie)과의 순간적인 연관이다. 우리가 초대받았던 거대한 하플로시스(ἅπλωσις)가 어떻게 신지적 사랑에 비추어서 순수화가 아니라 했겠는가?
2) 벩송은 비극적 대립관계[이항대립]이 존재의 핵심에 거주한다고 믿지 않았다. 게다가 유대(le vinculum, 속박)가, 즉 달리 말하면 영혼과 신체의 공생이, 역설적으로 불가능하고 동시에 필연적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벩송은, 눈이 시각의 기관임과 동시에 시각에 장애물이라고 종종 말했다. 또한 두뇌는 기억의 도구이자 동시에 방해물이라고도 말했다. 결국에는 언어는 사유를 막으면서 또 왜곡하면서 사유를 표현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아(le Quia, 왜냐하면)와 콰뮈스(le Quamvis, 아무리 ···라도, 몹시)의 모순은 해결할 수 없는 긴장을 전혀 생겨나게 하지 않고, 이 마지막 단어 [긴장]은 이의제기 없이 콰뮈스(Quamvis, 몹시)에 속한다. 따라서 찢어진 의식은 없으며, 모순되는 것들 사이에 변증법적 논쟁도 더 이상 없다. 결국 모순[과정]은 통과할 수 있고 안정적인 구조들에 이른다. 이리하여 율리우스 반젠(Julius Bahnsen 1830–1881)이 실재적인 것의 핵심에서 발견했던 비극적 충돌(불화 le conflit)은 벩송에게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게오르그 짐멜은 벤젠이 우리들의 불가사의한 조건의 비극주의(le tragisme)를 잘못 이해했다고 비난했다(장애물은 정확히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벩송에 따르면, 모호성(l'amphibolie, 칸트 용어)은 해결된 운명에 처해 있었다. 텔레파시에 관한 그의 반성은 도구없는(ἄνευ ὀργάνου) 영혼의 가설을 그럴듯한 것으로써 그가 인정하였다. 그 영혼은 고통 속에 있는 영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억의 거대성 속에서, 추억들의 무한한 덩어리에 의해 두뇌의 넘쳐남에서, 벩송이 정신적 원리의 독립성 덕분에, 따라서 잔존의 덕분에 하나의 추측(une présomption)을 보았다는 것을 안다. 행복한 결말이 종말론적인 미친 희망의 수평선상에[미래에] 그만큼 쉽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불명성은 아마도 이것임(l'ipséité)의 생성에서 발견된 긍정적 충만의 한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창조적 진화와 그 책의 제3장의 서사적 종말을 상기해보세요. 거기에서 인류는 말달리는 기사단에 비유되는데, 기사단의 저항할 수 없는 임무는 장애물들을 전복할 수 있고, 심지어는 아마도 죽음까지도 전복할 수 있다. 만일 우연에 의하여 죽음이 있다면, 다시 말하면 무가 있다면, 죽음 그 자체는 - 돌연변이를 잘못 인식함으로써, 그리고 단순성의 부재로써 생겨난 - 제논의 과도한 난문제처럼, 어떤 것으로써 특히 유사-문제일 뿐이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죽음은 오해일 뿐이었는가? 왜냐하면 완전히 충만인 생명적 생성은 이미 연속된 초실체화를, 다시 말하면 급진적 돌연변이의 연속화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왜 특히 급진적 돌연변이인 죽음[致死 치사]의 돌연변이가 가득 찬 충만에서 조작되지 않을 것인가? 전부에서 아무 것도 없는 것에로 이행이라기보다 왜 죽음은 전체에서 전체로(du tout au tout)의 변화가 아닐 것인가? 특히 필연적인 불가능성, 즉 우리들의 조건의 부조리를 영원히 봉인하는 필연적 불가능성, 이 필연적인 불가능성은 아마도 그 자체 매우 불가피하고, 매우 피할 수 없고, [상층]형이상학적으로 정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공상주의(le chimérisme)와 유토피아주의는 사실들에 매인 경험주의자만큼이나 멀리 과장[법]을 밀고 나가지 않았던가? 생명도약은 죽음보다 훨씬 더 강하다. 자유는 타자를 위한 희생 신적 광기 속에서 죽음을 죽인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 καὶ ὁ θάνατος οὐκ ἔσται ἔτι. 벩송은 예언자들과 묵시록의 강조점을 재발견하였다. 인간적인 것의 신격화, 이것이 결국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의 마지막이 아닌가? 마치 개인적 지속에서 출발했던 “무비극적(atragique)” 철학의 유언이 역사적 소명과 우주론적 진화를 재발견 했던 것처럼 말이다. (49TKD)
3) 죽음의[에 대한] 죽음과 무의 무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궁지의 궁지와 패배주의의 패배를 의미한다. 직관은, 경계 중간에 있는 피조물이 자기의 중간성의 감옥을 떠나면서 자기의 유한한 양성의 본성을 깨뜨릴 수 있다고, 또한 실재적인 것을 가지고 신지학적인 범주들 밖에서 또 실재적인 것에 유대(le vinculum, 속박)를 부과하는 상대성의 바깥에서 일치시킬 수 있다고, 결국에는 존재의 기원적 근원들과 생명의 생성적 “아르케(l'archée, 원질로써 불)”와 다시 접촉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직관은 자연생산된(naturée) 피조물이 자연생산하는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절단되지 않는다. 벩송의 “실재론”은 비관주의에 대한 승리가 아닌가? 인간의 진화에서 한 점 위에서 생명도약이 방벽(울타리)을 걸터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몇 점들에서 몇몇 순간들에서 경험제국의 피조물은 상위 경험제국에 자기 관통로를 내는데 마찬가지로 성공한다. 마치 생명도약으로써 직관은 온선천성(l'Apriori)의 심층을 파고든다. 생명도약, 즉 호르메(ὁρμή, 도약)는 자유의 승리를 소명으로 삼는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 속에 증가하는 비결정성의 일정분량을 주입한다. 단호히 말하자면, 진보란 마지막 단어이다. 따라서 벩송주의에서는 궁지, 막다른 골목, 환멸(déception, 실망)이라는 복잡계들을 위한 자리도 없고, 쇼펜하우어의 무-의미(le Non-sens)의 죄수들(les forçats, 갤리선에 묶인 죄수), 즉 익시온(Ixion)과 시지프스(Sisyphe)를 위한 자리도 없다. 부조리의 기사들은 벩송 속에서 동맹을 맺지 못할 것이다. 이 승리들의 징후는 환희(le Joie)이다: 즉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가우디움(le Gaudium, 기쁨, 복락), 행복한 기분, 좋은 의식, 좋은 소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피노자의 라에티티아(la Laetitia, 기쁨, 희열), 즉 중대한 완전화(ad majorem perfectionem)로 이행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감화를 받거나 반대로 슬픔에 젖는 라에티티아가 아니라, 오히려 인격상으로 스피노자의 지복(la Béatitude), 쾌락과 수고 저 너머에 있는 지복, 모든 선언법들(disjonctions)과 모든 이분법을 초월하는 지복, 마치 혼합 없는 순수 빛처럼 불과 암흑들의 반명제를 초월하는 지복이다. 벩송에 있어서 그것은 초월하는 작동(l'acte) 자체이며, 승리의 섬광을 솟아나게 하는 승리의 순간 자체이다. 거기에는 연속하는 다시 말하면 여전히 남아있고 간직하는 만족, 거주하고 모방하고 또는 보존하는 만족이 있다. 그런데 시작하고 창조하는 환희도 있다. 행복감과 안녕은 완성된 의무의 균형 속에서 태어[생겨]난다. 이 완성된 의무는 [문법적으로, 내용적으로] 소유의 수동과거분사형이다. 그러나 환희는 완수하려는 노력으로부터 태어[생겨]난다. 가우디움이 실용주의자의 평범한 성공으로부터 산출될 때, 생명도약의 철학은 역설적으로 스피노자의 관대(la Generositas)를 재발견한다. 환희의(즐거운, joyeux) 인간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축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며,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는 것이다. 이 인간은 문자 그대로 환희로 미쳐 있다(fou). 왜냐하면 그의 희열은 광기, 즉 현명한 광기, 경제와 보존의 원리의 미친 듯한 합리적 지혜보다 훨씬 더 현명한 광기이기 때문이다. 만족, 소위 사티스!(Satis! 족해!)라고 한다. 자 그것으로 충분해! 그 만족은 동일자(le même)를 보존하는데 열망할 뿐인데, 이에 반해 환희는 이점에서 사랑을 닮았으며 결코 너무 과도 하지마! 항상 좀 더! 라고 말한다. 따라서 환희는 더 많음의 징후이다. 환희는 문자 그대로 ‘그대로 됨’(우아)의 상태이며, 다시 말하면, 반대급부 없이, 딴 생각도 없이, 반성의 회귀도 없이 순수히 창조적으로 퍼져나감(l'efférence)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환희가 존재의 용솟음 자체라고 그리고 이 존재의 충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벩송은 아무튼 낙천주의자이지만, 라이프니츠의 의미에서 최상의 낙관(l'optimum)에 싫증난 부르주아는 아니다. [아침]식사를 잘했던 현자는 선량하고 정직한 우주에 거주하는데 매우 만족한다(bien content). 이 우주에는 많은 거짓말쟁이들과 욕심쟁이들이 있으나, 그러나 이 우주는 (모든 것이 신에게 가능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어서) 또한 가능세계들 중의 최상의 세계이다. 그러한 것은 “낙관주의자들” 또는 “최대주의자들”이라는 거주자[소유자]들이 갖는 방식이다. 만일 아낭케 스테아이(ἀνάγκη στήναι)가 끊임없이 스스로 닫혀지고자 하는 경계선상의 지혜의 형이상학 전체였다면, 데이 아나베나이(δεί ἀναβήναι)는 열려진 형이상학의 좌우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을 향해 열려진 체 있는 전능한 자유를 위하여 현실태로써 최고 낙관도 최대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유가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며, 그 자유는 희생의 미친 과장법 안에서 죽음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문자 그대로 전부일 수 있도다. 본능과 지성의 교대는 역설적으로 초월적이 되었다. 갑작스런 단 하나의 도약으로써 의식은 모든 반명제들의 저 넘어 세상으로 튀어 오른다. 그러나 만일 행복(l'eudémonie)이 간격들을 죽 따라서 계속된다면, 환희는 최소한의 순간에 피아트(Fiat, 심사숙고 후 결단) 또는 피트(Fit, 행해진 것) 속에서 통째로[전체로] 모여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시론이 “~함에 따라” 살았던 거대한 연속성의 안녕을 한 번 더 환대했을 때,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란 책은 간격 가운데 불연속적 돌출들을 떼어 놓은데, 이 돌출들은 돌연변이의 불가사의, 모험적인 신통력, 경험계(l'empirie)와 절대의 접점이다. 환희가 선언되는 것이 그 순간의 섬광 속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타는(brûlant) 환희는, 파스칼이 회상(Mémorial)에서 말한 것이기도 하고, 거대한 확신의 징후이다. 이 환희는 벩송에서는 침착(l'équanimité)에 이른다. 라에티티아, 폭력적인 것, 그리고 승리의 정념에서 고통스럽게 태어난 열광적인 것은 야망과는 반대이다. 따라서 청명함과 환희는 매우 우애적인 분위기이다. 환희의 축제들(la jubilation et l'exultation)은 소심함의 불안들로부터 그리고 반성의 회귀로부터 해방된 의식에게서 다시 말하면 순수한 심정(un coeur)에서 가능하게 된다. 또한 단순한 심정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 우아한 환희는 디오니소스적이라기보다는 정적주의적이다. 변화는 존재의 실체 자체이며, 생성의 철학은 지속의 의미에서 풍부한 자들을 운동주의(le mobilisme)에로가 아니라 영혼의 정적(고요)에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라에티티아는 정적(고요)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갈레네(γαλήνη)처럼 정태적이 아니라 오히려 고요함(calme)이고 조급하지 않음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했듯이 환희와 철학은 똑같은 순간의 딸들이다. 우리에게 가느다란 뾰쪽점으로 나타나는 이 순간은 정말로 확실하게 일종의 영원한 현재가 아닐까? 확실히 비시간적 영원성이 아니라, 오히려 생성으로 가득 찬 영원성, 즉 생명의 영원성이로다!
따라서 벩송의 작품은 “절망론”과는 반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을 수 있을 만큼이나 키에르케고르의 작품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키에르케고르와 벩송은 동일한 근대성의 반대적이고도 상호보충적인 두 측면을 재현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불행한 근대성의 비극적 구원에, 벩송의 순간적 즐거움이 응답한다. 그 즐거운 것은 영혼의 꼭대기에서, 절대자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gracieuse) 첨단의 직관이다. 순수사랑으로써 또 영웅적 노력으로써 직관은 한 순간의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만을 지속한다. 다시 말하면 지속하지 않지만, 이 “거의 무(ce quasi-nihil)”는 절망의 부조리한 허무(Nihil)와 연관하여 이미 영원처럼 있다. 게다가 벩송은 “생의 비극적 감정”을 낌새도 알지 못했었다. 이 “생의 비극적 감정”은 우나무노(Unamuno, 1864-1936)에게 있어서는 또 레온 체스톱(Léon Chestov, 1866-1938)의 비애의 철학에서는 아주 심오하게 진지한 것이었다. 그러나 벩송은 부조리에 항의했고, 고뇌(l'angoisse)를 거부했다. 직관은 갑작스레 온절대자(l'Absolue)를 찾고, 그러나 직관은 그것을 찾고.... 무한한 희망, 엘피디앙(elpidien)의 강력한 도약은 창조적 진화와 개방적 윤리를 추진한다. 생명 에너지, 정신적 도약! 전후 동안에 젊은이였던 자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절망(le disperato 단념)과 [젊은 날의] 몇 해 동안의 희열을 아마도 우울하게 비교할 것이다. 이 몇 해의 희열인 때에는 사육제들이 붕괴되고 난 후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던 때이다. “우리는 잘 살아보자!”고 페넬노페(Pénélope, 1913)의 3막 마지막에서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가 메아리로 응답하여 말한다. 벩송의 환희를, 다리우스 밀로(Darius Milhaud, 1892-1974), 쾨쉬랑(Charles Koechlin, 1867-1950), 몽푸(Mompou, 1893-1987), 라벨(Ravel, 1875-1937)(Je bois à la joie!)의 빛의 음악들을, “공상적 수평선”을 향해 가브리엘 포레의 최후의 음악들을 선동하는 희망의 물결은 동일한 질서의 현상이었다. 벩송은 단순하고 유쾌하다. 벩송은 포레의 페넬노페처럼 신뢰가 있었다. 신뢰가 없다면, 잔인한 제논에게 또 메피스토텔레스의 궤변론들에게 최상의 응답은 어떤 것인가? 일종의 봄의 희열은 벩송의 만년의 저작들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또한 이것은 저 세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숙명이 사는 것인 이 세상 자체를 위해서, 자유의 철학은 우리를 빛 속으로 해방과 창발을 제안한다. Libera me de morte aeterna. 가브리엘 포레가 매우 숭고한 탄원을 끌어냈던 장송곡(Requiem)의 교회 예배적 산문을 정말로 누가 생각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사망자들인 고인들에게, 어두운 호수에 매료된 자동인형들에게, 일상적인 좌절에서도 살아있는 듯한 죽은 자들에게, 그들의 자유에 대해 훈련하게 해보세요. 우리를 깊은 암흑들 속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생성의 고요함과 자유의 만취, 현명한 지속과 행복한 짧은 시간, 저녁의 평화와 아침의 환희를 동시에 우리에게 주세요. (본문끝 49TKD)
(253쪽) 벩송의 편지 글씨[잡문집(Mélanges) 속에 있다]
앙리 벩송이 저자(장켈레비치)에게 보낸 - 출판되지 않은 - 편지의 부분 복사(1928년 7월 7일).
(쟌 벩송[벩송의 딸]의 특별한 허가로 게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