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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결별하기 위하여(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들뢰즈, in 비평과 진단(김현수, 인간사랑, 2000) pp. 221-236.
G. Deleuze, Critique et clinique(비평과 진단), 1993, XV.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pp. 158-169. [이 논문은 미 발표문인데 이 단행본에 실렸다.]
참조: «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de dieu », est une création radiophonique du poète français Antonin Artaud qui fut enregistrée dans les studios de la radio française entre le 22 et 29 novembre 1947. / C'est dans «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de dieu » qu'Artaud introduit l'expression popularisée par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de « corps sans organes » :
* 신의 심판과 끝장을 내야 하는 것은 이런 다섯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1] 무한한 체벌에 반대하는 잔인성, [2] 꿈에 반대하는 잠 또는 취기, [3] 조직화에 맞서는 생명성, [4]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에 반대하여 권능의 의지, [5]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 (168, 235)> 이 다섯 가지가 이 논문의 주제인 셈이다. / 심판 또는 판단한다는 것은 기준을 정해 놓고서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 보편이나 절대라는 이름으로 횡횡한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 가치생산에는 그런 기준은 없다. 그런데 만일 기준이란 것이 있다 라고 하려면, 그 기준은 지난 시절의 한 시점에서 좋았던(실용적이었던) 방식(상태)를 기준으로 삼아 아제에는 그보다 더 편한 또는 더 적용하기 쉬운 방식을 발명 또는 제작해 내는 것이다. 기준의 보편성이란 개념은 자의적이고 임시적이다. 그런 기준으로 판단, 심판한다는 것, 그것과 투쟁하는 것은 철학의 당연한 과제이자 임무이고, 권리이다. 천동설을 지동설로 무너뜨리듯이, 유크리트 기하학의 사고를 비유크리트 사유로 전환하고 확장하는 것은 당연한 비판이자 투쟁이다. 봉건성을 타파하고 자주 자치 자유를 추구하는 길을 만든다는 것도 투쟁이자 전투이다. 이 인민의 투쟁과 전투(또는 저항, 항거, 봉기, 항쟁, 혁명)는 정주적 기득권이 자기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종족보존의 이름으로 인민에게 거는 전쟁과는 다르다. 인민은 당연히 노마드로서 싸움(투쟁)을 잘해야 한다. 일본에 대한 전투는 인민의 것이다. 인민도 용어도 배워가면서 전투하는 것이다. (52SMG)
** 들뢰즈는 스피노자에게서 후세대에 제자로서 칭할 수 있는 자들로서, 니체, 로렌스, 카프카, 아르토를 꼽고 있다. 이들은 인민에 겁주는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런 판단이라 이야기를 지어내는 자들을 판단을 박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연의 자기 생성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기원적인 죽음에 대한 의식이 없다. / 최후의 심판이나 저 세상에서 염라대왕이나 하는 이야기는 현세에 사는 이들이 현재의 코드 속에서 살아가라는 권고 또는 우화이다. 이런 이야기는 같잖은 생각이든 달리 사유하든 딴 마음을 먹고 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서 사회를 정태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벩송이 정태적 종교의 우화적 기능을 말한 것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계약과 법을 존중하는 주지주의자들은 우화의 순기능을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으니 현실에서 착하게 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착하게 살기는 조폭이 착하게 살기와 차이가 없다. 조폭도 법과 계약을 존중한다. 이렇게 제도 속에서 법과 계약의 존중과 코드화는 상위의 제국이 명령과 절대권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또 믿기 때문이다. 요즘 어벙이 부대가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 가끔은 일장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데, 이들이 명령과 절대권에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조폭의 똘마니 행세를 하는 것과 같다. (52SLF)
* 들뢰즈가 스피노자의 제자라고 부르는 니체, 로렌스, 카프카, 아르토는 모두 정주적 또는 전제군주 지배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항거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2천년 크리스트교가 얼마나 인민을 억압하고 예속화하여 처참하고 야만적 사회를 만들었지에 대한 고민이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사회라는 감옥 속에 갇혔다는 루소의 명제와도 부합한다. 그런데, 루소가 종교와 달리 자연이 인성에 미치는 감화를 보고 쓴 것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반박이라기 보다 속박의 사회에 대한 반박이다. 또한 벩송은 철학사를 보면서 특히 지성을 통한 존재의 단일성 또는 보편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지주의에 반대하였다. 이 반대가 카톨릭에 반대에 부딪혔으나, 그는 유대계 출신이지만 프랑스인으로 자유롭게 살았다. 박홍규 선생의 말씀대로 허무주의 극복에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벩송(플로티노스, 스피노자 포함)과 같이 자연에 의한 자연의 연속성에서 해결하는 길이다. 여기서 종교는 유일신앙 종교들이다. 그리고 연속성의 해결에는 영겁회귀의 문제가 걸려 있는데, 불교의 영겁회귀의 고리를 끊는 해탈은 불교의 상좌부 이야기인 것 같고, 싣달다의 이야기는 과정을 열심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고 할 것이다. 이 후자에서 가기는 가는 데 놀이 또는 투쟁을 좀 더 나은 방식으로 하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 것이 니체인 것 같다. 그리고 놀이를 잘 하기 위해서 신의 심판하고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이다. - 결국 이 논문은 크리스트교에 젖은 유럽 인민들에게 각성하라고 쓴 것이다. 미국민은 각성의 대상이 될까?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입은 일본은 아직 멀었을 것 같다. 홍콩도 영국의 총독밑에서 90여년을 살아서 인민의 자각에 의한 저항, 항거, 항쟁일까하는 생각이든다. 마치 오늘 아침 김어준의 뉴스 공장이야기처럼 조국찬성과 조국반대 중에서 ‘구글 트랜드(?)’를 돌려보면 조국 찬성은 전국에 골고루인데 조국반대는 특정지역 서울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장난인지 또는 이 지역이 갖는 감화(affect)받는 방식이 그러한지 알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홍콩은 서울보다 좁은, 게다가 영국의 못된(mechant) 식민지 감화 속에서 3대를 넘게 지냈는데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였다. 한글 쓰는 인민이 투쟁, 저항, 항거, 봉기, 항쟁을 해온 것과 비교해서 안 될 것이다. - 이 글을 올리는 날에는 무슨 놀이를 할지 모르지만, 어제 오후 3시에 조국 힘내세요! 이제 오후 3시에 기레기 꺼져! 란다. 아제는 오지 않앗다. 그러면서 지속성을 갖는 것이 문제해결의 방식, 들뢰즈가 말하는 드라마화의 방식이다. 잘라서 해결하자는 것은 전제적이다. 인민은 이미 오래 잘려져 있어서 아픔, 고통, 고뇌, 분열을 너무나 겪어왔다.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유,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 (52SMH) ]
# 제15장 「심판과 결별하기 위하여(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Gilles Deleuze, 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158-169
[[서언]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판단의 학설이 정교화되어 가고 발전되고 있다. 비참하다는 것은 행동이라기보다 판단이다. 그리스 비극은 우선 법정(tribunal)을 세운다. 칸트는 진솔한 판단의 비판을 발명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반대로 이 책(판단력 비판)은 일종의 주관적인 환상적 법정[재판소]를 세운다. 스피노자는 유대-크리스트교의 전통과는 단절한 채 비판을 이끈다. 그는 니체(Nietzsche, 1844-1900), 로렌스(D.H.Lawrence, 1885-1930), 카프카(Kafka, 1883-1924), 아르토(Artaud, 1896-1948)라는 네 명의 위대한 제자를 두었는데, 이들이 비판을 재개한다. (156, 221)
니체는 모든 가구 딸린 하숙집들을 당당하게 가로 질러가는데, 이 하숙집들에게 그는 거대한 도전을 대립시킨다. 로렌스는 자신의 최소한 수채화 위에 솟아오른 반(反)도덕적주의 이자 포르노그라프라는 고발 속에서 살아간다. 카프카는 사람들이 자기의 무한한 약혼에 대해 판단하는 “호텔의 법정”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전적으로 순진한 악마성”임을 보여 준다. 그러면 아르토와 반 고흐 중에서 누가 가장 혹독한 형식의 심판을, 즉 무서운 정신의학적 감정(鑑定, l‘expertise)을 더 많이 겪는가? (156, 221)
니체가 구별할 줄 알았던 것은 판단의 조건이다: 즉 “신성에게 빚(une dette)이 있다는 의식”, 즉 그 빚이 무한하고 따라서 갚을 수 없게 되어 있는 한에서 빚의 모험. .. 빚의 무한성과 현존의 부도덕성은 “판단의 학설”을 구성하기 위하여 서로 주고 받는다. 채무자는 자신의 빚이 끝이 없다 하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로렌스가 말하듯이 크리스트교는 권력(le pouvoir)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심판하는 온권력(Pouvoir de juger)과 같은 새로운 권력 형식을 발명했다. .. 판단의 학설은 「묵시록」 또는 최후의 심판뿐만 아니라, 연극 「아메리카(Amerika)」속에도 나타난다. 카프카는 자기 나름대로 무한한 빚을 “드러난 면제(l’acquittement, 청산)” 속에, 지연된(différé) 운명을 “무제한적인 연기(l’atermoiement illimité)” 속에, 제시한다. 청산과 연기는 심판자들을 우리 경험과 우리 개념작업 저세상에 유지하게 한다. 아르또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작업 대 무한을 끊임없이 대립시킨다. 이 네 사람에게서, 심판[판단]의 논리는 성직자의 심리학과 혼동되는데, 그 성직자는 마치 가장 어두운 조직화의 발명자와 같다. (158-159, 222)
판단은 시간의 질서(l’ordre) 속에서, 현존과 무한 사이에 가정된 연관의 자기 조건을 유지한다. 이런 연관 속에 유지되어 있는 사람에게 판단할 능력(pouvoir 권력)과 판단되는 능력이 주어졌다. .. 그러나 인식의 판단은 이런 의미에서 초기의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형식을 포함하는데, 이 형식에 따르면 현존은 시간의 질서를 따라가는 무한과 연관되어 있다; 즉 신에게 빚진 자로서 현존상태(l’existant, 현존자)이다. (159, 222-223)
그런데 판단[심판]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인가? 땅(le sol)이자 동시에 지평선일 것 같은 “편견적인 것(un préjudicatif, 선입견)”을 불러오는 것으로 충분할까? .. 땅이라기보다는 붕괴, 대지의 미끄러짐, 지평선의 상실[이 아니겠는가?] (159, 223) [최후의 심판이 있기는 한가? 사실은 땅이나 지평선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면 편견 또는 선입견 정도로 여기는 데. 사실상 심판과 구별되는 현존의 파국 또는 소멸은 차라리 땅의 꺼짐, 기울어짐과 같은 것에서 오듯이, 인간사의 삶에서 기준과 질서의 상실이 아니겠는가? 그런 상태가 또는 리스본의 지진 상태, 일본의 후쿠시마의 질서 상실이 파국과 소멸로 가는 심판[판단]이 아니겠는가? 인류의 또 다른 상실이란 인공지능(빅데이터)과 같은 판단이 삶의 창조적 창발적 행위를 붕괴시키거나 상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공지능에게 묻자고? 묻지 않고 사는 것이 질서없고 두서없는 잔혹의 세상일까? (52SMG)]
니체의 위대함은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모든 교환과 연관하여 첫째 관계였다는 것을 주저함이 없이 제시했다는 것이다. (159-160, 223)
모든 것은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신명재판(神明裁判, l’ordalie)은 신의 심판이 아닌데, 왜냐하면 신도 [최후의] 심판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스에 이어서 레비스트로스가 아직도 주저하는데, 니체 주저하지 않았다.(160, 223-224)
육체들을 공들이며, 또 육체들을 채색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기호들(de terribles signes) 이다. [이 기호들이] 주름들(traits)과 색소들(pigments)일 진대, [이들은] 각각이 해야 하는 것과 각각에게 책임지워 지는 것을 살(살갗)에 드러낸다. [이 기호들이] 잔혹의 체계 전체인데, 사람들은 이 체계의 반향(메아리)소리를 아낙시만드로스(Anaxímandros 전610-전546)의 철학과 아에스킬로스(Eschyle, Αἰσχύλος 전525-전456)의 비극에서 듣는다. (160, 224)
아르또는 숭고한 전개들로 된 잔혹의 체계에다가, 책의 글쓰기와 대립되는 피와 생명의 글쓰기(écriture)를, 마치 심판에다가 정의를 부여하는 것처럼, 부여할 것이다. 그는 기호의 진실한 전도를 이끌어간다. 카프카가 심판(Procès)이라는 위대한 책에다가 감화원/유형지(La Colonie pénitentaire)이란 기계를 대립시킬 때, 카프카에게서 또한 이 경우가 아닐까? 그 유형지의 기계란 신체들 속에 글쓰기[등록하기]인데, 계약, 기소, 변호, 평결 등이 뒤섞여 있는 정의를 증거하듯이 옛 질서를 증거한다. 잔혹의 체계는 신체를 감화시키는 힘들과 함께 현존하는 그 신체의 유한한 연관들을 진술하고(énoncer), 반면에 무한한 빚의 학설은 불멸의 영혼과 심판들의 연관들을 규정한다. 도처에서 판단[심판]의 학설과 대립되는 것은 잔혹의 체계이다. (160-161, 224-225)
[[1] 무한한 체벌에 반대하는 잔인성]
판단[심판]은 토양(le sol) 위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토양은 매우 다를지라도 판단의 개화를 촉진하였으리라: [판단이 토양 위에서는] 단절이 필요했고 가지치기가 필요했다. 빚은 신들을 향해 이루어져야만 했다. (161, 225) [자연을 떠난 지성의 판단은 자연과 단절하고 다른 방식으로 뻗어나가야 했다. 토양에서 나온 지성이 토양과 단절하여 지식(이데아)을 상층에게 빌려온 것으로 여길 때 지성은 이미 빚진 것으로 여긴다. (52SMH)]
왜냐하면 신들은 우선 판단할 수 없었던 수동적 증인들 또는 불평하는 소송인들이었기 때문이다(아에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Eumenides)에서도 이러하다). .. 판단 학설의 요소들은 신들이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운수들(des lots)을 준다고 가정하며, 인간들은 자신들의 운수들에 따라 그러그러한 형식에서 또 그러그러한 유기적 목적에서 선하다고 가정한다. 나의 운수(mon lot)는 나에게 어떤 형식으로 헌신할까(이르게 할까)? 또한 나의 운수는 내가 주장하는(우기는) 형식에 상응할까? 바로 여기에 판단의 본질이 있다. 여러 개의 운수들로 잘려진 현존, 여러 개의 우수들로 분배된 감화들(les affects)은 여러 상위 형식들과 연관있다(이것은 니체나 로렌스의 일관된 테마인데, 상위 가치의 이름으로 삶을 “판단하다”는 이런 주장을 고발한다).(161, 225)
인간이 자신의 운수와 신의 판단에 관해 잘못 생각할 때, 형식이 또 하나의 운수를 강요할 때, 판단은 착란과 광기로까지 이어지는 거짓 판단의 형식으로 세계 속에 불쑥 나타난다. 아이아스(Ajax, Aias)가 좋은 예일 것이다. (161, 226)
아마도 외디푸스 .. 동주앙 .. 이 모든 판단의 일반성에서, 판단 학설의 둘째 움직임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즉 우리는 형식들 또는 목적들에 의해 신들의 채무자가 더 이상 아니며, 우리는 우리의 전존재 속에서 유일신의 무한한 채무자이다. (162, 226-227) [판단학설의 첫째 움직임은 광기로까지 가는 것으로 아이아스가 예이라면, 둘째 움직임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채무자인데 이를 유일신의 채무자로 바꾸어 놓는 것이리라. - 그런 유일신에 대한 채무를 무한한 체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체벌에 맞서는 것은 잔인성이라고 하는데, 운수들을 운수들로 내버려 두는 삶은 잔인한 삶일까? 들뢰즈가 외디푸스 와 동주앙을 끌어들여, 이 두 주인공이 운수(숙명)를 거스르지 못한 인간으로 잔인한 삶을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잔인성은 나중에 보게 되지만 투쟁과 전투의 삶이지 않는가. (52SMG)]
[[2] 꿈에 반대하는 잠 또는 취기
판단[심판]의 세계는 꿈속에서처럼 자리 잡는다. 운수들을 회전하게 하는, 즉 에제키엘(Ézéchiel)의 바퀴를 돌리게 하는, 형식들을 풀어놓게 하는 것이 꿈이다.(162, 227)
사람들은 취기의 상황들 – 음주, 약물 중독, 법열(extases) -에서 꿈과 판단에 동시에 쓰이는 해독제(l’antidote)를 찾을 것이다. .. 이 네 작가는 꿈속에서 여전히 너무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들, 너무 이끌려지는 상태들, 너무 지배된 상태들을 고발한다. (162, 227-228)
아르또에 의한 멕시코 선인장에 대한 제의들(les rites), 로렌스에 의한 멕시코 숲의 노래들은 꿈들이 아니라 취기나 수면(잠)의 상태이다. 꿈 없은 이러한 수면은 우리가 자는 잠들과는 다른 것이다. (163, 228)
그래서 꿈은 수면의 꿈이나 백일몽으로서가 아니라, 불면(insomnie)의 꿈으로 재발견된다. 새로운 꿈은 불면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카프카의 꿈은 수면 중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면의 곁에서(à côté) 행해진다. (163, 228)
[[3] 조직화에 맞서는 생명성
잔혹성의 물리적 체계는 신체의 수준에서 제3의 측면 아래서 판단의 신학적 학설과는 여전히 대립된다. 판단은 육체의 진정한 조직화를 함축하고 있는데 그 조직화에 의해 판단이 움직인다: 기관들은 심판자들이자 심판받는 자들이다. 정확히 말해서, 신의 판단은 무한히 조직하는 능력(le pouvoir d’organiser)이다. (163, 229)
아르또는 “기관없는 신체”를 소개한다. 신은 그것[신체] 없이는 자신의 판단이 행사될 수 없을 조직된 육체를 통과하기 위하여 우리에게서 “기관없는 신체”를 빼앗아 갔다. ... 로렌스는 태양과 달이라는 자신의 극(極), 평면, 단면도, 신경총(神經叢, plexus) 등을 가지고 그러한 신체를 그려나간다. (164, 229)
아르또 작품에서 무정부주의자 엘라가발루스(Heliogabalus, Elagabalus)는 수많은 광물적, 식물적, 동물적 생성과 같은 이러한 힘들과 권능들에 맞서기 위하여 증언하기를 끊이지 않는다. 스스로 기관없는 신체가 된다든가 기관없는 신체를 찾는다는 것은 판단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이미 니체의 기획이었다: 생성중이고 강도성이 있고 마치 감화하고 감화되는 능력(pouvoir)[권능]을 정의하는 것, 말하자면 권능의 의지이다. (164, 230) [기관없는 신체가 자연의 권능, 즉 자연의 자기 힘의 발현인 셈이다. 기관없는 신체로부터 여성되기, 동물되기, 광물되기로 진행할 수 있다. 기관이 작동하고 있으면 되기에는 걸림돌이 될 것이니까 말이다. (52SMH)]
그리고 처음부터 카프카는 이런 흐름에는 참여치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은 두 세계 또는 두 신체를 서로 공존하게 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하고 서로 상대방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두 신체 중에서 하나인] 판단의 신체는 자기 조직화, 자기 분절(사무실의 인접성), 자기 분화(집달리, 변호사, 판사), 자기 위계(판사의 직급들, 공무원의 계급들)와 더불어 있고, [다른 하나인] 정의의 신체에서는 사람들이 분절들을 [실을 뽑아내듯이] 가닥을 나열하게 하는데, 그 가닥에서 사람들은 분화를 상실하고, 위계들을 휘젓고, 강도성들만을 간직하는데, 이 강도성들은 불확실한 지대를 형성하고, 전속력으로 이 지대를 돌아다니고, 거기에서 자기 자신에게 반환된 무정부적 신체에서 권능들과 맞선다(대치한다). (정의(la justice)는 너에 대해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정의는 너가 올 때 너를 붙잡고, 너가 떠날 때 너를 그대로 둔다.) (165, 230-231) [여기서 정의는 심층의 권능의 내용이다.]
거기서 제4성격이 잔혹성의 체계를 위해 흘러 나온다; 투쟁(combat), 도처에서 투쟁, 이것은 판단을 대체하는 투쟁이다. 아마도 투쟁은 판단, 판단의 심급, 판단의 등장인물들에 반대하여 나타난다. (165, 231) [투쟁과 전투는 전쟁이 아니다. 같은 또래 꼬마들이 놀 때 같은 개념 또는 관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날 놀고 다음날 다른 또래들과는 다른 용어를 쓴다. 어른의 놀이는 투쟁이다. 사물의 생성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투쟁이다. /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투쟁과 전투를 할 줄 안다. SNS움직임은 매끈한 공간에서 놀이하는 노마드이다. 반대세력은 지배와 명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선을 그은 전쟁이다. 신문지나 공중파에서 퍼져나가는 홈패인 공간으로 한 줄을 서는 위계적인 정주자들이다.(52SMH)]
따라서 카프카의 모든 작품은 “투쟁의 서술”이라는 제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투쟁은 한 마디로 성, 판단, 아버지, 약혼녀들에 대한 투쟁이다. ...대타자에 반대하는 투쟁과 온자기(Soi) 사이에서 투쟁을 구별해야 한다. 반대하는 투쟁은 힘을 파괴하거나 배척한다. .. 사이에서 전투는 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힘을 독점하려 애쓴다. .. 연애편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은 약혼녀에 대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65, 231) [기레기는 반대투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려 한다. 인민의 소통은 서로가 성장하기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힘들을 서로 가지려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명, 창안, 창발, 창조가 나온다. 한글 가로쓰기를 한 인민은 30년 만에 성장하여 박근혜를 쫓아낼 수 있었고, 이제 적폐들과 투쟁하며, 일본불매로 전투를 벌이며 전선을 형성하려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인민도 저항, 항거, 봉기, 항쟁, 혁명과정을 해본 권능이다. (52SMH)]
아르또에게서 투쟁은 신에 반대, 도둑에 반대, 위조자에 반대하는 투쟁(le combat)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시도]는 다음 이유 때문에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돌, 동물, 여성에서 효과로 이루어지는 원리들과 권능들의 투쟁을 전투원이 전달하기 때문이다. (166, 232)
로렌스에게는 비슷한 주제가 영속적으로 나온다: 남자와 여자는 종종 두 적들인 것처럼 서로 취급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가정의 장면에서는 맞는 것이고, 그들 투쟁의 가장 평범한 측면이다. 더 깊이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는 두 흐름(deux flux)이며, 두 흐름은 서로 투쟁해야만 하고 또 서로 서로 교대로 독점할 수 있고 또는 서로 서로 순결성(la chasteté)을 – 순결성은 그 자체로 힘이며 흐름인데 - 부여하면서도 서로 분리되어 있다. (166, 232)
로렌스는 열심히 니체를 재발견한다: 좋다는 모든 것은 투쟁에서 유래하며, 그들의 공통스승은 투쟁의 사상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아르또도 로렌스도 니체도 동방(l’Orient)과 동방의 비(非)투쟁의 이상(son idéal)을 지지하지 않는다. .. 그들에게서 가장 고귀한 곳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멕시코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투쟁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곳 어디서나,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의지 없음(néant de volonté)”이고, 꿈의 예언이고, 죽음의 숭배이며, 심지어 가장 부드러운 형식 하에서 부타(le Bouddha)의 숭배이며 또한 (바울이 만든 것과는 상관없이) 인격으로서 크리스트(le Christ)의 숭배이다. (166, 232-233) [여기서 부타나 크리스트는 성부의 자격으로 올라간 신격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의 크리스트가 투쟁이라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크리스트는 부활과 심판의 크리스트이다. 부타와 예수는 각자 자기의 삶과 과정을 이야기했다. 숫타니파타와 산상수훈은 닮았다.]
[5]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
그러나 투쟁은 “무의 의지(volonté de néant)”가 더욱 아니다. 투쟁은 전쟁(la querre)이 전혀 아니다. .. 신의 심판[판단]은 전쟁과 나란히 가지만, 투쟁은 전혀 아니다. (166, 233)
니체와 로렌스는 전쟁에서 권능의 의지의 가장 낮은 등급을, 즉 질병[파라노이아]을 볼 것이다. 아르또는 미국-소련의 전쟁 연관[냉전]을 환기시키면서 시작한다. 로렌스는 고대 로마인들에서부터 현대 파시즘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제국주의를 설명한다. 투쟁이 그렇게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 잘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167, 233)
왜냐하면 아기(le bébé)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 꼬마는 힘들의 환원불가능한 장소이며, 힘들의 가장 계시적인 시련(l’épreuve)이기 때문이다. 이 네 작가들은 “소형화(miniaturation)”와 “축소화/평가(minoration)”의 과정들 속에 처해 있다. 니체는 놀이 또는 어린이-놀이하는 자를 사유하며, 로렌스는 놀이 또는 “꼬마 독신”을, 아르또는 모모(le mômo) 즉 “어린이라는 자아, 어린이라는 의식”을, 카프카는 “완전히 꼬마로 행복한 어른”을 사유한다. (167, 233-234)
[4]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에 반대하여 권능의 의지
권능은 힘들의 특이체질(une idiosyncrasie)인데, 마치 지배하는 힘은 지배받는 힘 속으로 들어가면서 변형되며, 지배받는 힘은 지해하는 힘으로 들어가면서 변형된다[상호침투적이다, 기억처럼]. 변형의 중심, 이러한 것을 로렌스는 상징(un symbole)이라 부른다. 다. (234) - [로렌스의 상징은 심층이다. 이 심층의 권능이 변화무쌍한 왕관 쓴 아나키스트이다. 일반적으로 언어와 사물의 상징도 아니고 라깡의 상징도 아니다. 왜 프랑스 책이 인덱스를 만들지 않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 단어를 따로 떼어내면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논하고 있는 네 작가[니체, 로렌스, 카프카, 아르또]는 상징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상징들의 책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는 특히 투쟁하는 책이다. 힘들을 배가시키고 풍부하게 하는 것과, 또한 각각의 힘이 다른 힘들에게 재작용하는 최대한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과도 유사한 경향이다. 그 최대한의 힘은 니체의 경구에서 카프카의 잠언(箴言, la parabole)에서 나타난다. 연극과 페스트[치명적 질병] 사이에서 아르또는 두 힘의 각각이 상대방을 배가하고 다시금 활력을 주는 상징을 창조한다. (168, 234)
[[소결론]
전투(le combat)는 신의 심판이 아니라, 신과 더불어 그리고 [최후]심판과 더불어 [전투를] 끝내는 방식이다. 어느 누구도 판단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판단도 들어있지 않은 전투에 의해 전개된다. 우리가 보기에 다섯 가지 특성들이 현존을 판단에 대립시키는 같았다. [1] 무한한 체벌에 반대하는 잔인성, [2] 꿈에 반대하는 잠 또는 취기, [3] 조직화에 맞서는 생명성, [4] 지배하기를 바라는 것에 반대하여 권능의 의지, [5] 전쟁에 반대하여 전투. (168, 235)
아마도 거기에 비밀이 있다: 현존하게 하기 이지 판단하기가 아니다. 만일 판단하는 것이 매우 싫은(기분 나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가치 있는 모든 것이, 판단에 도전하면서 만이, 스스로 행해질 수 있고 또 스스로를 구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169, 235)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사랑과 증오의 문제이지,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나의 영혼과 나의 신체는 하나를 이룬다. … 내 영혼이 사랑하는 것, 나는[신체는] 또한 그것을 사랑한다. 내 영혼이 미워하는 것, 나는 그것을 미워한다 … 셀 수 없을 정도의 [여러 모습을 갖는] 영혼의 모든 미묘한 공감들, 즉 가장 쓰라린 증오에서 가장 열렬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영혼과 신체 양자 사이에 공감들이 있다]” 이것은 주관주의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용어들로가 아니라 힘의 용어들[항목들]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미 모든 주관성을 넘어선다. (169, 236)
(8:34, 52S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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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k 에제키엘(Ézéchiel, arb. hazkyal) 구약의 예언자.(ou Tanakh selon la tradition hébraïque), 전6세기경에 살았다. 그의 이름은 « Que le Seigneur le fortifie »(견고한 영주)이다. 기록상으로 597년에 바빌론에 의해 잡혀 갔다. [587년 성전파괴 예언] - [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은 시대이다. 서로 교류가 있었을까?]
624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전624년?-전544년)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sakyas 갈대족)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610-546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e, Ἀναξίμανδρος/Anaxímandros 기원전 610-546): 무규정자(l'indétermine, apeiron)
544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d'Éphèse, Ἡράκλειτος/Hêrákleitos, 전544-전480) 고대 그리스 철학자 est un philosophe grec de la fin du vie siècle av. J.-C., natif de la cité d'Éphèse.
525 아이스퀼로스(Eschyle, Αἰσχύλος / Aiskhúlos, Sicile 525-Eleusis 456) 비극 시인이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Prométhée enchainé)』/ 아이스퀼로스. 고대 아테네의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최초의 인물. 철학자 도덕론자로서 그는 복수의 욕망에 관한 권리의 우월, 법에 관한 정의의 우월, 힘에 관한 정신의 우월을 표현했다. [유리피데스는 후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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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리베리아 반도에서 온 유태인 가계의 출신으로 네델란드에서 낸 철학자이다. 그는 그리스트교나 유태교가 지닌 유일신의 불변성과 독자적 고유성에 대해 부정하고, 살아있고 움직이는 자연 즉 신을 주장한다.
172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관념론 철학자. 삼 비판서를 썼다.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쉰여섯) 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Fluch auf das Christentum. 1888)(출판 1906)
1858 뒤르껭(Émile Durkheim, 1858-1917) 프랑스 사회학자. 현대 사회학 정초자 중의 하나.
1853 반 고흐(Van Gogh, 1853-1890) 네덜란드 화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를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어냈다.
1872 위베르(Henri Hubert, 1872-1927) 프랑스 고고학자, 비교 종교학 전공의 사회학자. / avec Marcel Mauss, 희생의 본성과 기능에 관한 시론(Essai sur la nature et la fonction du sacrifice, 1899)와 주술의 일반이론의 개요(Esquisse d'une théorie générale de la magie, 1902-1903 / avec Émile Durkheim, 분류의 원시적 형태들(De quelques formes primitives de classification: contribution à l’étude des représentations collectives, 1903) ,
1873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3-1950) 프랑스 사회학자, 민족학자. 뒤르켐 제자. Essai sur le don. Forme et raison de l'échange dans les sociétés archaïques (1925)
1882 제르네(Louis Gernet, 1882-1962), 프랑스 문헌학자, 법학자, 고대그리스전공 역사학자. Anthropologie de la Grèce antique(Maspero).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 거주 작가. Franz Kafka, souvenirs et documents (Franz Kafka, eine Biographie) (1937), Franz Kafkas Glauben und Lehre (1948)
1885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 소설가, 시인 겸 비평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 1928)은 그의 성철학(性哲學)을 펼친 작품이며 외설시비로 오랜 재판을 겪은 후 미국에서는 1959년에, 영국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완본 출판이 허용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중편 및 단편소설, 시집, 여행기, 평론집, 서간집 등이 있다. 『아들과 연인, 1913)
1896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연출가다. 1932년에는 다시 '잔혹의 연극(Theater of Cruelty)'을 설립, <쌍시>를 상연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 후 발광하여 병원에 수용되었고, 전후에 퇴원을 하자 곧 사망하였다.
1905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 불가리아 태생 세파라드 유대인, 독일어 작가, 영국국적(1952), 스위스 거주. 1981년 노벨 문학상.
1908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 프랑스의 인류학자, 인간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구조주의를 개척하고 문화상대주의를 발전시킨 사람(
1936 카다렐(Ismaël Kadaré, Ismail KadareI, 1936-) 알바니아 작가. 알바니아 공산당 가입 경력. Ismaël Kadaré Eschyle ou l’éternel perd.ant(Fayard, ch 4.)
1955 뒤무이에(Camille Dumoulié, 1955-) 프랑스 작가, 파리-낭떼르 대학 비교문학 교수 Nietzsche et Artaud. Pour une éthique de la cruauté, 1922).(PUF).
(10:18, 52SMH)
참조:
첫댓글 * ‘심판’과 결별하기 위하여(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이 심판이 검찰 또는 법원 등에 관련있기도 하지만 종교의 최후의 심판에 더 관련 있다. 그럼에도 이 양자의 심판은 상층의 심판이며 보편성과 절대성에 기대고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인민은 경험성과 주체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는 ‘기레기꺼져’가 아니라, 투쟁(lutte)의 구호는 “가짜뉴스 아웃”이었다.
내일은 ‘정치검찰 아웃’이라 하는데, 다중지성은 또 다른 착상이 창안될까? (52S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