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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1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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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生 평시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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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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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주 文 북청부사 문천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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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휘 文 병조참지 제주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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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중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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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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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수 文 사간헌납 사헌집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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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휘 유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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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우 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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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휘 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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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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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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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온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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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환 상의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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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덕 부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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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연 관리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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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환 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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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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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신 내부주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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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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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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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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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중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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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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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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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식 합천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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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학 초등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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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현 농어촌 공사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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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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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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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 부 | 성 명 | 주요 직책‧행장 |
10 | 사호 (賜湖) | 정성원(鄭星源) (自然亭) (1612 ~ 1675) 志操 | 병자·정묘호란 이후 대의를 쫓아 청주의 화곡촌에 집을 짓고 은둔하여 조용히 금서를 벗 삼아 살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벼슬 한자리 얻으면 어찌 스스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하고 유연자적하였다. 유고가 있다
丙丁亂後 秉執大義就 淸州山東禾谷村卜築 杜門靜居琴書自娛 嘗曰 “此時 得一官 寧不自愧於心” 悠然自適 有遺稿 |
11 | 성원 (星源) | 정의창(鄭儀昌) 子强國副 (1633 ~ 1708) 隱士
配 仁川蔡氏 孝婦 旌閭 | 의를 행하며 은거하여 경사를 즐기고 시와 예로서 집안을 이끌었다. 秉義遯跡經史自娛詩禮治家一鄕稱之
배 인천채씨(配 仁川蔡氏)
시어머니가 늙어 젖을 짜드려 봉양함이 당부인 고사와 같았다. 이러한 효도에 호남유림들이 공론하여 이준백 등 20여인이 글을 보내고 진사 변희적 등 3백여 인이 조정에 천거하니 영조 기유년(1729년)에 정려를 내렸다
姑老乳養如唐夫人故事 以孝湖儒公儀 齊發 李俊白等 二十餘人 發文 卞進士熙績等 三百餘人 薦于朝 英祖己酉(1729년) 旌閭 |
13 | 언상 (彦相) | 정후기(鄭垕基) (1674 ~ 1747)
관직(官職) | 숙종34년(170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1732년 숭릉참봉(崇陵參奉) 1733년 평시서봉사(平市奉事) 만년에 무송정을 짓고 장암 정호가 제액을 썼다. 증손 희승이 수승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아들 희주가 가장을 짓고, 손자 진사 국휘가 행장을 쓰고, 지평 김일주가 묘표를 쓰고, 5대손 일수가 무송정 유허비를 세웠다 晩築撫松亭 丈岩鄭澔題額 以曾孫姬升貴贈司僕寺正 姬柱述家狀 孫進士國輝述行狀 持平金日柱撰墓表 五代孫一洙立撫松亭遺墟碑 |
14 | 후기 (垕基) | 정문주(鄭文柱) (1717 ~ 1772)
관직(官職)
| 영조29년(1753)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문과 1755년 가주서(假注書), 율봉찰방(栗峯察訪), 1761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1761년 병조좌랑(兵曹佐郞) 1762년 이조정랑(吏曹正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763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66년 통례원우통례(通禮院右通禮),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67년 풍기군수(豐基郡守), 1769년 북청부사(北靑府使) 1771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문천군수(文川郡守)
* 사위 고령(高靈) 신익빈(申益彬) 영조35년 문과, 병조참판, 예조참판, 대사간, 도총관 |
15 | 문주 (文柱) | 정관휘(鄭觀輝) (1744 ~ 1803)
관직(官職) | 정조7년(17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문과 1783년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가주서(假注書) 1784년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 1785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788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병조정랑(兵曹正郞) 1789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79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영월부사(寧越府使) 1795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796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복시정(司僕寺正) 1797년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1799년 명월만호(明月萬戶) 1799년 제주목사(濟州牧使) 겸 전라도방어사 1802년 병조참지(兵曹參知) 1802년 강릉부사(江陵府使), 1803년 6월 직소에서 별세 |
15 | 문주 (文柱) | 정규휘(鄭奎輝) (1744 ~ 1774) 유림 | 본암 김종후 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며 경학에 밝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나 불행이 일찍 세상을 뜨니 선비와 벗들이 아쉬워했다 受業于 本菴金先生*門 經行高明 不幸早世 士友嗟惜
* 김종후(金鍾厚) : 1721년 ~ 1780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고(伯高) 또는 자정(子靜),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아버지는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이며, 어머니는 홍석보(洪錫輔)의 딸이다. 동생이 김종수(金鍾秀)이며, 민우수(閔遇洙)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
15 | 문주 (文柱) | 정국휘(鄭國輝) (1752 ~ 1813) | 정조 을유년(1789년) 생원 |
16 | 관휘 (觀輝) | 정희중(鄭喜重) (1767 ~ ?) | 통덕랑(通德郞) |
16 | 규휘 (奎輝) | 정희우(鄭喜遇) (1780 ~ ?) | 진사(進士) |
18 | 석민 (錫民) | 정면수(鄭勉洙) (1821 ~ 1896)
관직(官職) 義 | 철종12년(1861)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문과 1861년 가주서(假注書) 1864년 원릉별제(元陵別檢) 1865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867년 이조좌랑(吏曹佐郞) 1868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874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874.12월 영의정 이유원(領議政 李裕元)의 비석사건을 탄핵 1882년 부사과(副司果) 1884년 봉상시정(奉常寺正) 1887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1991년 통례원좌통례(通禮院右通禮) 1894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족손 문학박사 기호 찬 묘표
* 1874년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사사로운 “화성(華城)의 비석 사취 건”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1875년 원악도(멀고 외진 섬, 신안군 임자도)로 유배 가셨다가 1879년 12월 28일에야 풀려나셨다(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 : 8년 출사공백 * 정면수공의 “화성(華城)의 비석 사건” 영의정 탄핵(왕조실록) -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12월 24일
전 정언(正言) 정면수(鄭勉洙)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은 대대로 벼슬을 한 세신(世臣)이며 훌륭한 시대의 영의정으로서 현명한 임금을 만나 이처럼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손영로(孫永老)가 상소를 올려 주제넘게 헐뜯고 방자하게 멸시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상신(相臣)으로서 공격을 받은 사람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처럼 법도가 없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몹시 노하여 국문(鞫問)하고 형신(刑訊)하고서 외진 섬에 귀양을 보냈고 전 영의정에 대해서는 여러 번 돈유(敦諭)하고 융숭한 대우를 베풀고서 잠깐 파면시켰다가는 곧바로 임명하여 반드시 나오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전하의 이 조치는 대신을 예의로 대하고 나라의 체통을 중하게 여기는 데서 나온 것이니 누군들 만만번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에게는 한 가지 개탄스러운 일이 있으므로 이렇게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이니 전하께서는 살피시기 바랍니다.
옛날 우리 정종 대왕(正宗大王)이 수성(隋城)에 새 고을을 만들면서 능침(陵寢) 아래에 있는 다른 산에 한 조각의 돌을 묻어둔 것은 임금의 뜻으로서는 아마도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 저 영의정은 지난 기미년(1859)에 망령되게도 탐욕을 부려 사적으로 돌을 파내고 나무를 찍어서 수레를 만들어 거리낌 없이 운반하여 자기 조상의 묘 앞에 우뚝 세워놓았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들었으며 본 고을의 선비들도 상소를 올려 규탄한 일입니다. 돌 하나를 다듬어도 정성껏 하고 나무 한 그루를 북돋우어도 조심스럽게 하는 판에 선대 임금의 손때 묻은 것을 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으니 이것을 차마 한다면 무엇을 차마 못하겠습니까? 이 일을 놓아두고 그 심보를 용서해준다면 설사 무기고를 청하거나 무덤길을 만들 것을 청하는 것도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백 가지 죄를 속죄할 수 있어도 이 죄만은 속죄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였다. |
19 | 면수 (勉洙) | 정낙온(鄭樂溫) (1841 ~ 1899) | 통덕랑(通德郞) |
19 | 면수 (勉洙) | 정낙연(鄭樂淵) (1849 ~ 1909) 관직(官職) | 1903년 관리서주사(管理署主事)
* 승정원일기 확인 |
19 | 면수 (勉洙) | 정낙신(鄭樂臣) (1856 ~ 1926) 관직(官職) | 음 참서(蔭 參書) 1901년 내부주사(內部主事) * 승정원일기 확인 |
20 | 낙온 (樂溫) | 정태환(鄭台煥) (1876 ~ 1940) 관직(官職) | 1902년 충청북도관찰부 주사(忠淸北道觀察府 主事) 중의원 의관(中樞院 議官), 상의원 주사(尙衣院 主事) * 승정원일기 확인 |
20 | 낙연 (樂淵) | 정성환(鄭成煥) (1871 ~ 1938) 관직(官職) | 음 시종원시종(蔭 侍從院侍從) |
20 | 화성 (和成) | 정주환(鄭宙煥) (1946 ~ ) 관직(官職) | 한국방송공사 주간, 심의실 심의위원 - 13세 후기 - 14세 한주 - 15세 내휘 - 16세 희간 - 17세 석준 - 18세 철수 - 19세 화성 |
21 | 창환 (昌煥) | 정용학(鄭用學) (1927 ~ ) 관직(官職) | 은석, 직산초등학교 교장, 동백장(冬栢章) - 13세 후기 - 14세 문주 - 15세 관휘 - 16세 희중 - 17세 석민 - 18세 면수 - 19세 낙신 - 20세 창환 |
22 | 용학 (用學) | 정성현(鄭成鉉) (1955 ~ ) 관직(官職) | 농어촌공사 팀장, 우경엔지니어링 전무 * 학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집성 71, 양주 광주정씨 편에 도곡재 유물과 같이 선조유물 등록(정문주, 정관휘, 정면수공 등) |
23 | 옥현 (玉鉉) | 정영식(鄭永植) (1971 ~ )
배 합천이윤주 관직(官職) | 육군중령, 육군본부 배 합천 이윤주 육군소령 - 13세 후기 - 14세 문주 - 15세 관휘 - 16세 희중 - 17세 석민 - 18세 면수 - 19세 낙신 - 20세 창환 - 21세 용칠 - 22세 옥현 |
* 정호(鄭澔) : 1648(인조 26)∼1736(영조12).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철(澈)의 현손이며, 종명(宗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溭)이고, 아버지는 감찰 경연(慶演)이다. 어머니는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하로 매우 촉망받았으며,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에 힘썼다. 그 뒤 여러 형제의 권유로 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자, 오도일(吳道一)이 붕당을 키우고 권세를 부린다고 탄핵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풀려나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1696년 이사상(李師尙)을 논핵하는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1698년 다시 수찬·집의·사간을 거쳐 이듬해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00년에 신은(新銀) 12만여 냥을 왜에 상매(商買)한 관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기용되었고, 1702년 승지·부제학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대사헌을 지냈는데,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갑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兪棨)의 유저(遺著)인 ≪가례원류≫의 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 때 윤선거(尹宣擧)의 문집 ≪노서유고 魯西遺稿≫가 간행되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毁板)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하게 하였다.
1717년 세자(世子 : 뒤위 경종)의 대리청정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 4대신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 김종후(金鍾厚) : 1721년 ~ 1780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고(伯高) 또는 자정(子靜),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 할아버지는 참판 김희로(金希魯)이고, 아버지는 시직(侍直) 김치만(金致萬)이며, 어머니는 홍석보(洪錫輔)의 딸이다. 동생이 김종수(金鍾秀)이며, 민우수(閔遇洙)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영조대 신임사화 때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궁지에 몰아넣은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의 모의에 가담하였다. 또, 김종수가 벽파(僻派)인 김구주(金龜柱)와 일당이 되자, 행동을 같이하여 장헌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을 공격하였다.
그 뒤, 김구주 일당이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는 등 보신에 급급하였다.
후세 학자들은 권력에 추종하는 이같은 정치적 행적을 비난하여, 유자(儒者) 또는 선비로 자칭하면서도 유가(儒家)의 진의(眞義)를 해치고 국가의 흉화와 세도의 극치를 초래하는 역할에 가담하였다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본암집(本庵集)』이 있고, 편서로 『가례집고(家禮集考)』·『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 고산 임헌회(任憲晦) : 1811년 ~ 1876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익화(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 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숭덕사(崇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전재문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