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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5. 인후 仁厚
5.1. 윤회尹淮
윤회尹淮의 자字는 청경淸卿으로 무송茂松 사람이다.
병조전서兵曹典書와 전문형典文衡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윤회가 젊었을 때,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었는데,
주인이 자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윤회는 뜰 곁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주인의 아이가 커다란 진주眞珠를가지고 놀다가 뜰 가운데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곧 삼켜 버렸다.
얼마 안 되어 주인이 구슬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윤회가 훔친 것으로 의심하여 묶어 두었다가 아침에 관에 고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윤회는 변명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저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고 했다.
아침이 되자 구슬이 거위 뒷구멍에서 나오자 주인은부끄러워 사죄하며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라고 했다. 이에 윤회는 “만일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필시 거위의 배를 째어 구슬을 찾았을 것이오.
그래서 욕됨을 참으면서 기다렸소.”라고 말했다.
다(茶)
5.2. 정홍제鄭弘濟
참의參議 정홍제鄭弘濟는 대대로 옥천沃川에서 살았다.
영남嶺南에 한 노비가 있었는데,돈을 바치고 노비에서 풀려나기를 원했다.
정홍제는 곧바로 가서 천금을 받고, 돌아오는길에 충주忠州 단월丹月에 이르렀는데,
너무 슬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정홍제는마을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예천醴泉의 황주서黃注書가 아내와 노비를 데리고 서울의 여관에서 지냈는데,
완두창豌豆瘡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동생이 땅을 팔아 상喪을 치르고,
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단월에 이르자 관을 메고 오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관을 단월 고을의 시골집에 두고,
형수에게 그 관을 지키게 하고서는 자신은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돈을 구해서 다시 관을 운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동생이 돌아오지 않기에,
그 형수가 밤낮으로 저렇게 울부짖는다”.
정홍제가 이 말을 듣고 가여운 마음이 들어 곧바로 관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여인과 노비를 불러 그 연유를 상세하게 묻고,
관을 운반하고자 하는 뜻을 황 씨 부인에게 말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황 씨 부인의 마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짓게 하니,
비록 나는 지나가는 나그네이지만,
그 관을 운반하고자 한다.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말라.
당신들이 원하는 만큼 줄 것이다. 오늘 밤에 사람과 말을 사서, 내일 아침에 관을 운반할 것이다” .
마을 사람들은 정홍제의 의義로움에 감탄했고,
또 돈을 많이 준다고 하기에 기뻐하며 정홍제의 말에 따라 굳센 말과 관을 짊어지고 갈 사람을 샀다. 그러고는 새벽녘에 관을 운반하여 황주서의 본가本家에 도착했다.
정홍제 또한 종종걸음으로 상가喪家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문에 노비를 풀어주고 받았던 돈은 다 써버렸고,
황주서의 동생이 팔았던 땅까지돌려주고 나니, 천금 중에 백금만 남게 되었다.
그 돈으로 황주서의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정홍제가 밤에 꿈을 꾸는데, 꿈속에 두창痘瘡이 얼굴에 가득한 사람이
자신에게 와서 고맙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은혜 덕분에 죽은 혼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은혜에 보답할 만한 것이없습니다. 다만 내게 겉을 싼 책 한 권이 있으니,
그대께서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정홍제가 잠에서 깨어 기이하게 생각했다. 다음날 날이 밝았는데,
여종이 갑자기 황 씨 부인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잠시 후 황주서의 처가 정홍제 앞에 와서 절을 하며 이렇게말했다.
“공이 베푸신 공덕은 너무도 커서 제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다 갚기 어렸습니다.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죽은 지아비가 공에게 겉 포장한 책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가지고 왔으니, 공께서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황씨 부인이 애써 권하기에 정홍제는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책 한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해 가을, 정홍제는 증광초시增廣初試 시험장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꿈에 황주서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준 책을 그대께서는 어찌 잊으셨습니까?”
정홍제는 놀라 깨어 생각해 보니, 그 책은 여전히 책 상자 속에 있었다.
이에 그 책을 찾아서 보자기에 싸서 들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황주서가 준 책 속에 써진 글을 바쳐서 급제하게 되었고,
회시會試에서도 또한 장원급제했다.
이때가 바로 경묘景廟 원년元年 즉위卽位 해의 경과慶科이다.
이후에 정홍제의 관직이 형조참의刑曹參議에까지 이르렀다.
5.3. 송유원宋有元
송유원宋有元은 말단 벼슬아치의 아들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친척인 이생李姓의 집에서 자랐다.
이생은 무척 부유하였으나, 송유원을 박절하게 대했다.
이생의 집 자식들은모두 비단옷을 입고 좋은 곡식과 고기를 맘껏 먹었다.
그러나 송유원은 겨울에도 따뜻한옷을 입지 못했고, 여름에도 시원한 옷을 입지 못했다.
마른 풀 더미 속에서 잠을 자고, 남이 먹다 남은 것을 먹으며 지냈는데7 살 때부터 14살 때까지
그렇게 지냈다.
송유원은 나이 15세가 되자 이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친척의 두터운 돌봄을 받아 보잘것없는 이 몸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건장하게 성장했으니,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곳으로 가서 살고자 합니다.”
이생이 기뻐하여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송유원은 곧바로 산사山寺로 들어가 스님들에게 의지하며 살아갔는데,
날마다 나물을 캐는 것을 일로 삼았다. 하루는 늙은 스님이 다른 산으로부터 와서 송유원을 보고,
송유원과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후미진 곳으로 송유원을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너의 관상을 보니 진실로 덕이 큰, 복된 사람이다.
하늘이 대단한 보물을 감추어두고서복된 사람을 기다렸다.
저 바위 아래 몇 번째 소나무 아래에 그 보물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이 너의 보물이다. 너는 반드시 7일 동안 깨끗이 재계齋戒하고, 그 보물을 꺼내거라.
그러나 너는 가난한 젊은이라, 그 보물을 꺼낸다 하더라도 돈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보물을 꺼내서, 내 편지를 가지고 송경松京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간다면,
그 사람이너를 위해서 그 보물을 돈으로 바꿔 줄 것이다”.
송유원은 그 말처럼 7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땅을 몇 자 파 보니, 과연 큰 항아리가 있었고,
그 속에는 은자銀子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침내 잔디로 그 항아리를 덮어 두고서 늙은 스님을 찾아가서 편지를 받았다.
이어 송경에 가서 늙은 스님이 말한 사람을 찾아뵙고 편지를 전했는데,
그 사람은 송경의 큰 부자였다. 그 사람은 편지를 보고서는 기이하게 여기며이렇게 말했다.
“이 분은 나의 종조從祖이다. 출가出家하신지 벌써 70여 년이 되었고,
불도佛道도 대단히 높으신 분이다. 그 분의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그 분의 편지를 받아보았으니, 어찌 감히 그 분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러고는 곧바로 사람과 말을 이끌고 송유원과 함께 그 바위 아래로 가서,
은자銀子가 가득 담겨 있는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마침내 자신의 딸을 송유원에게 시집보냈다.
항아리의 은자銀子를 돈으로 바꾸니, 돈이 몇 천 만금에 이르렀다.
송유원은 이때부터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10여 년이 흐른 뒤, 송유원은 마침 호서湖西 지방을 지나게 되었다.
가는 길에 구걸하는한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예전 이생의 자식이었다.
송유원은 그의 손을 붙잡고 슬퍼하며어떻게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생의 자식은 부끄러워하며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생의 아들은 “그대가 우리 집을 떠난 이후,
재산이 날로 줄어들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송유원은 곧바로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 주었고 함께 객사客舍에 투숙했다.
자신이 갖고있던 새 갓과 두건을 꺼내 그에게 입혀주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송유원은 그와 더불어거의 3년을 함께 지낸 뒤 5백금을 주고서 그를 보냈다.
그 뒤로 그 사람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 후 6, 7년이 지나 송유원은 금강산金剛山에 가기 위해 철원鐵原을 지나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생의 자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생의 자식이 누더기 옷을 입고 지나가
고 있었다. 이에 송유원은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이렇게 말했다.
“집안 살림을 돌보면서 함께 살아가지 않았으니, 내가 잘못한 것이로구나” .
드디어 그와 함께 돌아와 천금을 떼어주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그 뒤 송유원의 자손은 호중湖中에서 살면서 번성했다고 한다.
다향(多香)
5.4. 권이진權以鎭
판서判書 권이진權以鎭의 사촌 누이[從妹]는 역적인 정희량鄭希亮의 어머니이다.
무신년戊申年 변란 때 정희량은 역적의 우두머리였으므로,
노적籍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여 그 어머니를 잡아다가 금오부金吾府의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권이진은 호조판서戶曹判書 겸지의금兼知義禁으로 있으면서,
사족士族의 부녀자가 비록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도, 요강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요강을 만들어 나장羅將을 시켜 사촌 누이가 있는 곳으로 보내고자 했으나,
나졸羅卒이전해주지 않고 몰래 이것을 팔아 버렸다.
권이진은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화가 났다.
권이진이 하루는 금오부金吾府에 갔다가 요당僚堂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이 비록 죄인이지만, 내 아주 가까운 친척입니다.
소홀히 대할 수 없어서 요강을만들어서 보냈는데,
나졸羅卒이 나도 노비의 무리라고 여겨서 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중간에 그 요강을 훔쳐 팔았으니, 그 죄를 마땅히 엄중히 다스려야 합니다” .
마침내 그 나졸羅卒을 곤장으로 엄중히 다스렸다.
권이진은 사촌 누이의 유배지가 정해지자, 유배지가 멀어 자신은 갈 수가 없었다.
권이진은 근심하다가 이에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희량希亮이 비록 극악한 역적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나이가 많은 부녀자이니,
어찌 함께역모를 도모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먼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가다가 중간에쓰러질 것입니다.
사촌 누이가 신에게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니 의리상 마땅히 돌봐야 합니다.
그래서 사촌 누이가 떠나는 것을 전송하고자 합니다”.
임금은 권이진의 뜻을 가상히 여겨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권이진은 사촌 누이가 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갖추어 주며 전송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권이진의의로움을 칭송했다.
.... 우하영의 천일록 - 잡록 상 중에서 ...
첫댓글 귀중한 우리 유산의 글과 소중한 작품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성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