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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25권
40. 초품 중 사무외(四無畏)의 뜻을 풀이함
4무소외(無所畏)라 했는데,
부처님께서 성심(誠心)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바로 온갖 바른 지혜를 지닌 사람[一切正智人]1)이라,
설령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의 다른 무리가 마치 사실인 듯 말하기를,
‘이 법은 알지 못한다’고 하여도,
아주 조그마한 두려운 모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조용하고 편안해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성주(聖主)의 처소2)에 안주함이 마치 소의 왕[牛王]인 듯 대중 속에 있나니,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에 다른 대중으로서는 실로 굴릴 수 없다”고 하나니,
이것이 첫 번째의 무외(無畏)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온갖 번뇌[漏]를 다한지라,
설령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의 다른 무리가 마치 사실인 듯 말하기를,
‘이 번뇌는 다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아주 조그마한 두려운 모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조용하고 편안해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없고, 성주의 처소에 안주함이 마치 소의 왕과 같으며, 대중 속에 있을 적에는 사자처럼 외치면서 범륜을 능히 굴리나니,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에 다른 대중으로서는 실로 굴릴 수 없다”고 하나니,
이것이 두 번째의 무외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장애되는 법[障法]3)을 말할 때에,
설령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에 무리가 마치 사실인 듯 말하기를,
‘이 장애되는 법을 받아도 도를 장애하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아주 조그마한 두려운 모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조용하고 편안해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도 없고 성주의 처소에 안주함이 마치 소의 왕과 같으며, 대중 속에 있을 때에는 사자처럼 외치면서 범륜을 능히 굴리나니,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에 다른 대중으로서는 실로 굴릴 수 없다”고 하나니,
이것이 세 번째의 무외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말한 거룩한 도는 세간을 벗어날 수 있고 이 도를 따르면 모든 괴로움을 다하게 되므로,
설령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에 다른 무리가 마치 사실인 듯 말하기를,
‘이 도를 행하여도 세간을 벗어날 수 없고 괴로움을 다 할 수도 없다’고 하여도,
아주 조그마한 두려운 모양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조용하고 편안해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도 없고 성주의 처소에 안주함이 마치 소의 왕과 같으며, 대중 속에 있을 때에는 사자처럼 외치면서 범륜을 능히 굴리나니,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천 또는 그 밖에 다른 대중으로서는 실로 굴릴 수 없다”고 하나니,
이것이 네 번째의 무외이다.
【문】 무슨 일 때문에 4무소외를 말씀하신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스스로 ‘일체지(一切智)요 일체견(一切見)이다’고 일컫지만,
세간의 온갖 경서(經書)와 기술과 지혜의 교묘함과 방편은 매우 한량없이 많다.
설령 온갖 중생이 힘을 합해 이런 일을 알려고 하여도 오히려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부처님 한 사람으로서 온갖 것을 알 수 있겠는가”고 하며,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런 일을 알고 본다 해도 이런 일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부처님은 장차 두려워함이 없으시어 이런 의심과 허망을 끊고 이러한 힐난을 끊게 하시려고 짐짓 부처님은 4무소외를 말씀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아직 세간에 출현하기 전에는 외도들은 갖가지 인연으로 도를 구하고 복을 구하는 사람들을 속여 왔다.
그들은 갖가지 열매를 먹거나 혹은 갖가지 나물을 먹기도 하고 혹은 갖가지 풀뿌리를 먹기도 하고 혹은 소똥을 먹기도 하고,
혹은 하루에 한 끼 돌피[稊稗]를 먹기도 하며, 혹은 이틀, 혹은 열흘, 한 달, 두 달에 한 끼의 밥만 먹기도 하며,
혹은 바람을 빨아들이고 물만 마시기도 하며, 혹은 이끼 등의 갖가지 것을 먹는다.
혹은 나무껍질이나 나무의 잎사귀나 풀이나 사슴가죽으로 옷을 해 입기도 하고 혹은 나무판자로 옷을 해 입기도 하며,
혹은 땅에 누워 있기도 하고 혹은 절굿공이 위ㆍ나뭇가지 위ㆍ재 위ㆍ가시나무 위에 눕기도 하며,
혹은 추울 때에 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더울 때에 5열(熱)4)로써 제 몸을 지지기도 하며,
혹은 물에 들어가 죽기도 하고 혹은 불에 들어가 죽기도 하며,
바위에 몸을 던져 죽기도 하고 음식을 끊어 죽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고행(苦行)하는 법으로 천상에 나기를 구하고 열반을 얻기를 구하며 또한 제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법을 버리지 않게 한다.
이와 같이 지혜가 적은 중생들을 끌어 모아서 공양을 얻고 있었다.
비유하건대 마치 반딧불과 같으니, 해가 나오기 전에는 다소 비출 수 있었지만 해가 나오게 되면 천 개의 광명으로 비춘다 해도 소용이 없다.
달이나 뭇 별조차도 모두 광명이 사라지거늘 하물며 반딧불이겠는가.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기 전에는 모든 외도들은 작은 광명으로 세간을 비추면서 공양을 얻었지만,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큰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외도들과 그의 제자들을 굴복시키게 되자 모두가 다시는 공양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공양의 이양(利養)을 잃게 되자 곧 거짓말로써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게 된 것이다.
마치 『손타리경(孫陀利經)』5)의 얘기와 같다.
자신들이 손타리(孫陀利)를 죽이고서 부처님을 비방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세간의 몹쓸 사람[弊人]조차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세간의 예법(禮法)조차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열반이겠는가”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비방을 없애려고 하여 스스로 이 진실한 공덕인 4무소외를 말씀하셨다.
“나만이 홀로 일체지(一切智)의 사람이다.
어떤 이라도 마치 사실인 듯,
‘부처님은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는 이는 없나니,
나는 이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만이 홀로 온갖 모든 번뇌와 습기가 다하였다.
어떤 이라도,
‘부처님은 아직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고
마치 사실인 듯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나니, 나는 이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열반의 길을 장애하는 가르침을 말할 때에 어떤 이라도,
‘이 가르침은 열반을 막을 수 없다’고
마치 사실인 듯할 수 있는 이는 없나니, 부처님은 이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괴로움을 소멸하는 도가 열반에 도달한다고 설명할 때에 어떤 이라도,
‘이 도는 열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마치 사실인 듯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나니, 부처님은 이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4무소외의 체성[體]을 간략하게 말하면,
첫째는 바르게 온갖 법을 깨닫는 것이고,
둘째는 온갖 번뇌와 습기를 다한 것이며,
셋째는 온갖 길을 장애하는 법을 말씀한 것이고,
넷째는 괴로움을 다하는 길을 말씀한 것이다.
이 네 가지 법 안에서 만일 어떤 이라도,
“모두 두루 알지 못한다”고,
마치 사실인 듯 말한다면 부처님은 이런 일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고 두루 아신 분[正遍知]으로서 분명히 아시기 때문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무외(無畏)는 스스로의 공덕이 두루 갖추어지기 때문이요,
나중의 두 가지 무외는 두루 갖추어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첫 번째와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무외에서는 지혜[智]를 말씀하셨고,
두 번째 무외에서는 끊음[斷]을 말씀하셨나니, 지단(智斷)이 구족되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문】 10력은 모두 지혜라고 하고 4무소외 역시 이것은 지혜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자세히 말하면 부처님의 모든 공덕은 곧 힘[力]이요, 간략히 말하면 그것이 바로 무외(無畏)이다.
또 할 일이 있는 것은 바로 힘이고, 의심[疑]과 어려움[難]이 없는 것은 바로 무외이다.
지혜가 쌓이기 때문에 힘이라 하고, 모든 무명(無明)을 흩어지게 하기 때문에 무외라 하며,
모든 착한 법을 쌓았기 때문에 힘이라 하고, 모든 착하지 않은 법을 없애기 때문에 무외라 한다.
스스로 지혜가 있기 때문에 힘이라 하고, 파괴할 자가 없기 때문에 무외라 하며,
지혜가 맹렬하여 센 것이 곧 힘이고, 문난(問難)6)을 받아 낼 만한 것이 곧 무외이다.
모든 지혜를 쌓는 것을 바로 힘이라 하고, 지혜가 밖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무외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전륜성왕이 7보(寶)를 성취함이 바로 힘인데, 이 7보를 얻은 뒤에 사천하를 두루 돌면서 항복 받지 않음이 없는 것을 바로 무외라 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용한 의사가 약방문을 잘 아는 것은 바로 힘이요, 모든 약을 섞어 지어서 사람에게 주는 것을 바로 무외라 하는 것과 같다.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을 바로 힘이라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무외이다.
스스로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힘이라 하고, 다른 이의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무외라 하며,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을 바로 힘이라 하고, 거리끼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 것을 무외라 한다.
스스로 자기의 선(善)을 이루는 것을 힘이라 하고, 다른 이의 선을 이루게 하는 것을 무외라 한다.
교묘한 방편의 지혜를 힘이라 하고, 교묘한 지혜를 쓰는 것을 무외라 하며,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7)를 힘이라 하고, 일체지와 일체종지가 드러나고 일어나는 것을 무외라 하며,
18불공법(不共法)을 힘이라 하고, 18불공법이 바깥에서 드러나고 일어나는 것을 무외라 한다.
법의 성품[法性]을 두루 통달하는 것을 힘이라 하고, 만일 갖가지 문난이 있으면 다시 더 생각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잘 대답하는 것을 무외라 한다.
불안(佛眼)을 얻는 것을 힘이라 하고, 불안으로써 이미 제도할 만한 이를 보고 나서 그를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무외라 하며,
세 가지 무애지(無礙智)8)를 얻는 것을 힘이라 하고, 말재주로 처리함이 걸림 없는 것을 무외라 한다.
걸림이 없는 지혜[無礙智]를 힘이라 하고, 요설무애지(樂說無礙智)9)를 무외라 한다.
온갖 지혜가 자재함을 힘이라 하고, 갖가지의 비유와 갖가지의 인연과 장엄한 언어로 설법하는 것을 무외라 하며,
마의 무리를 깨뜨리는 것을 힘이라 하고, 모든 외도(外道)의 논의사(論議師)를 깨뜨리는 것을 무외라 하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써 힘과 무외를 분별한다.
【문】 어떤 것을 무소외(無所畏)라 하는가?
【답】 의심할 것이 없고 꺼리거나 어려운 것도 없으며, 물러나지도 침몰하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으며,
어디서나 법 가운데서 말씀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무외이다.
【문】 어떻게 부처님의 무소외를 알아야 하는가?
【답】 만일 두려운 것이 있으면 대중을 잘 거느리거나 포섭하거나 간절한 말로써 다스리거나 또는 부드러운 말로써 다스리거나 또는 부드러운 말로써 가르칠 수가 없다.
마치 부처님께서는 한때 사리불과 목련 등을 내보냈다가 다시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신 것과 같다.
만일 꺼리거나 어려운 것이 있다면 저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이 교만이 산꼭대기에 있으면서 외지(外智)로써 마음이 미쳐 날뛰며 모두 말하기를,
“천하에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없다” 하며,
자기의 경서(經書)만을 알기 때문에 다른 이의 경서를 찢고 욕설로써 헐뜯게 되나니,
마치 미친 코끼리가 제 몸을 보호하거나 아끼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미치광이로서는 암발타(菴跋咤)ㆍ장조(長爪)ㆍ살차기니건(薩遮祈尼揵)10)ㆍ곤로지(昆盧坻)11) 등의 대논의사들이 있었지만 모두 다 항복 받았나니,
만일 두려운 것이 있었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교진여(憍陳如)12) 등의 출가한 다섯 사람과 우루빈라가섭(優樓頻螺迦葉)13) 등의 머리를 묶은[結髮] 천 명의 선인(仙人) 및 사리불ㆍ목련ㆍ마하가섭 등이 부처님 법 안에서 출가했으며,
그리고 백천(百千)의 석씨 자손[釋子]과 아울러 모든 염부제의 대왕인 바사닉왕(波斯匿王)14)과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과 전다파수제왕(旃陀波殊提王)15)과 우전왕(優塡王)16)과 불가라바리왕(弗迦羅婆利王)17)과 범마달왕(梵摩達王)18) 등이 모두 제자가 되었다.
모든 재가(在家)의 바라문도 모두 제도했고, 온갖 세간의 지혜로서 큰 국왕들의 스승이요 숭앙을 받던 범마유(梵摩喩)19)와 불가라바리(弗迦羅婆利)20)와 구라단타(鳩羅檀陀)21) 등이 모두 제자가 되었으니 초도(初道)를 얻은 이도 있고, 제2ㆍ제3ㆍ제4의 도를 얻은 이도 있다.
또 모든 큰 귀신으로서는 아라바가(阿羅婆迦)22)와 비사가(鞞沙迦) 등과 모든 큰 용왕으로서는 아바라라(阿波羅羅)23)와 이라발다라(伊羅鉢多羅)24) 등이며 앙군리마라(鴦群梨摩羅) 등 모든 나쁜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고 귀화한 것이다.
만일 두려운 것이 있었다면 혼자 나무 아래 사자좌(師子座)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으리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 할 적에 악마왕의 군사들이 변화로 사자와 범ㆍ이리ㆍ곰 등의 머리에 눈은 한 개가 붙고, 혹은 여러 개가 붙기도 하고, 혹은 귀가 한 개 또는 여러 개가 붙기도 한 채, 산을 짊어지고 불을 내뿜으면서 사방에서 포위해 왔는데,
이때 부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을 누르자 순식간에 모두가 이내 소멸되었었다.
또 모든 하늘과 아수라로서 비마질제예(鞞摩質帝隸)25)와 석제바나민(釋提婆那民)26)과 범천왕(梵天王) 등도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모두 제자로 삼았나니,
만일 두려운 것이 있었다면 이런 대중 가운데서 설법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하늘과 귀신이며 대중들 가운데서 설법할 수 있었나니, 그러므로 무소외라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온갖 중생들 중에 가장 높고 맨 위이며 모두를 온갖 법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하여 큰 명문(名聞)을 얻으시기 때문에 스스로 무소외를 말씀하신다.
또 우선 이 부처님의 공덕은 그만두고라도 부처님께서 지닌 온갖 세간의 공덕도 역시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나니, 두려운 법 일체가 이미 그 근본부터 뽑아졌기 때문이다.
두려운 법[所畏法]이란,
하천한 집안에 태어나거나[弊家生]27) 하천한 생처[幣生處]28)를 받으며, 빛깔이 나쁘고[惡色] 위의가 없으며[無威儀], 말이 추악한 것[麤惡語] 등을 말한다.
하천한 집안에 태어났다 함은,
마치 수다라(首陀羅)29)와 같다. 이른바 죽은 사람을 메다 주며, 거름을 푸고 닭과 돼지를 기르며, 사냥을 하고 짐승을 죽이며, 술을 팔거나 병사가 되는 등 비천한 집에 태어나는 것이다.
만일 대중 속에 있게 되면 두려움이 많게 되지만 부처님은 본래부터 전륜성왕의 성바지, 이른바 정생왕(頂生王)30)ㆍ쾌견왕(快見王)31)ㆍ사갈왕(婆竭王)32)ㆍ마하제바왕(摩訶提婆王)33) 등의 이러한 태양왕의 종족[日王種]인 집안에서 태어나셨나니, 이 때문에 역시 두려울 것이 없다.
하천한 생처[幣生處]란,
안타라(安陀羅)34)ㆍ사바라舍婆羅:벌거숭이의 나라35)ㆍ도거라兜呿羅36):小月氏ㆍ수리(修利)37)ㆍ안식(安息)38)ㆍ대진(大秦) 등의 나라이다.
이 나라들은 변두리에 있는데, 여기에서 태어나 만일 대중 속에 있으면 두려움이 많게 되지만 부처님께서는 중인도(中印度) 가비라바(迦毘羅婆)에서 태어나셨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빛깔이 나쁘다[惡色]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의 몸이 바짝 마르고 파리하면 사람들이 보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만일 대중 속에 있으면 역시 두려움이 있겠지만,
부처님은 황금빛이라 광명이 윤택하여 마치 불이 붉은 금산[赤金山]39)을 비추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빛깔이 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위의가 없다[無威儀]고 했는데,
가고 서고 앉고 일어나는 행동거지에 사람으로서의 위의가 없으면 두려움이 있겠지만,
부처님께는 이러한 일이 없다.
추악한 말[麤惡語]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이 음성이 나쁘고 말을 떠듬거리며 되풀이하면서 순서도 없으면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두려움이 많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런 일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부드러우면서 차례가 정연하므로 알기 쉬우며,
빠르지도 않고 더디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고 때 끼지도 않고 실없지도 않으며,
가릉빈가 새[迦陵毘伽鳥]의 음성보다 뛰어나고 말씨와 뜻이 분명하여 남을 중상(中傷)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을 여의었기 때문에 물듦이 없고,
성냄을 없앴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으며,
어리석음을 제거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고,
법희(法喜)40)가 더욱 자라기 때문에 좋아할 만하며 죄를 막았기 때문에 안온하고,
다른 이의 마음을 따르면서 해설하기 때문에 뜻이 깊고, 말씀이 묘하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말씀에 이치가 있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때문에 잘 드러나며,
일이 끝나기 때문에 그 일에 잘 계합되고,
갖가지 중생들의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섞어서 말씀하며,
오래오래 하므로 모두가 듣기 때문에 한 맛[一味]41)이 된다.
이와 같이 갖가지 한량없는 장엄한 말씀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서는 두려울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다만 이와 같은 세간의 법으로써도 오히려 두려워함이 없는데 하물며 출세간법(出世間法)이겠는가.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4무소외가 있다고 설명한다.
【문】 부처님의 10력(力) 중에는 무소외가 있는가?
만일 무소외가 있다면 다만 네 가지뿐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무외(無畏)가 성취되었다고 하는가?
【답】 하나의 지혜가 열 곳[十處]에 있으므로 부처님이라 한다.
10력을 성취하되 마치 한 사람이 열 가지 일을 알므로 그 일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이 10력이 네 곳으로 나와서 작용하는 것이 무소외이다.
시처불시처력(是處不是處力)과 누진력(漏盡力)은 바로 처음 두 가지 무외이다.
여덟 가지의 힘[八力]은 비록 광대하기는 하나 이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무외를 설명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10력 가운데에 비록 무외가 있다 하더라도 따로 설명하는 것 역시 잘못은 없다.
정변지(正遍知)라 함은 온갖 법을 알면서 뒤바뀌지 않고 바르며 삿되지 않음이 마치 다른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같나니, 이를 삼먁삼불타(三貌三佛陀)42)라 한다.
마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부처님은 두루 알기 때문에 삼먁삼불타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문】 그는 어떠한 사람인가?
【답】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사문과 바라문과 하늘과 마와 범천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함께 논의(論議)하려는 사람이다”고 하셨다.
어떤 법을 논의하는가?
곧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외도[外]의 경서(經書)43)들과 폐가란나(弊迦蘭那)44)ㆍ승거(僧佉)45)ㆍ위타(韋陀)46) 등의 18종의 큰 경서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수미산(須彌山)의 무게[斤兩]와 대지(大地)의 깊고 얕음과 온갖 초목의 두수(頭數)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항상한가, 항상하지 않은가,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등의 열네 가지 질문[問難]이니, 부처님은 대답하지 못한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법은 빛깔이 있는 법인가, 빛깔이 없는 법인가,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는가, 대상이 있는가, 대상이 없는가, 번뇌[漏]가 있는가, 번뇌가 없는가, 지어진 것[爲]인가, 지어지지 않은 것인가 등 부처님은 다만 한 가지 도(道)에 관한 일과 인연만 아실 뿐이요 이러한 다른 법의 갖가지 인연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혹은 다 알지 못한다”고 한다.
사문(沙門)이라 함은 출가한 사람을 말하고,
바라문(婆羅門)이라 함은 집에 있는 이로서 지혜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하늘[天]이라 함은 지천(地天)과 허공천(虛空天)을 말하고,
마(魔)라 함은 6욕천(欲天)을 말하며,
범천[梵]이라 함은 범천왕을 첫째로 하여 온갖 색계(色界)를 말한다.
그 밖의 다른 이[餘者]라 함은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고,
마치 사실인 듯[如實]이라 함은 현재의 일 또는 인연으로써 묻는 것이다.
아주 작은 두려운 모양도 보지 않는다[乃至不見是微畏相]고 했는데,
그 모양[相]은 인연을 말하며,
“나는 누가 법답게 와서 나를 깨뜨리는 소소한 인연조차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지 않기 때문에 성심으로 말하되,
“아리사(阿梨沙)47)진나라 말(秦言)로는 성주(聖主)라 한다.가 머무는 곳에 안주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온갖 번뇌가 다했으나 설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번뇌를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두려워함이 없다”고 하셨다.
어떤 것이 번뇌[漏]인가?
번뇌란 곧 세 가지 번뇌를 말하는데,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또 이 번뇌는 6정(情)에서 나와 때 낀 마음[垢心]과 상응하는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이라 한다.
또 마치 『일체루장경(一切漏障經)』48)에서 분별하여 7루(漏)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도를 장애하는 법[障道法]이라 함은,
모든 유루의 업[有漏業]과 온갖 번뇌와 악도의 보장(報障)과 세간을 위하여 보시하고 계율을 지니고 10선도(善道)를 닦고 모든 미선(味禪)을 느끼는 것 등이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능히 열반을 장애하는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라면, 이것을 이름하여 도를 장애하는 법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란 두 법을 말하나니, 거룩한 선정[定]과 거룩한 지혜[慧]이다. 이 두 가지 일로써 열반에 도달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거룩한 도[三聖道], 즉 무루의 계율과 선정과 지혜이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네 법이 있으니, 이른바 4성제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간을 벗어나는[出世間] 5근(根)이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6출성(出性)이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7각의(覺意)이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8성도(聖道)로 열반에 도달한다”고 하고,
또 논의사(論議師)들은 말하기를,
“온갖 무루의 도(道)로 열반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등이 와서 마치 사실인 듯 말하기를,
“이 일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이에
“아주 작은 두려운 모양까지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되,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히 선다”고 하시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히 선다”고 하시는가?
【답】 스스로의 공덕도 완전히 갖추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일 부처님 자신만이 편안하고 즐겁게 머무를 곳을 얻고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없다면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지 못하며,
만일 중생만을 이익되게 하고 스스로 공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다면 역시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지 못한다.
만일 스스로의 공덕도 있고 또한 중생도 이익되게 한다면 이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히 선다”고 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자신이 악(惡)을 없애고 또한 중생의 악도 없애신다.
두 가지 악을 다 소멸하게 하셨기 때문에 제일 청정하며,
미묘한 법을 설하시기 때문에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안주하신다.
또 4성제(聖諦)를 3전(轉) 12행상(行相)으로 잘 굴리고 잘 분별하여 드러내 보이고 널리 펴셨기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히 선다”고 하신다.
또 온갖 의심과 뉘우침과 삿된 소견을 잘 없앴기 때문에 매우 깊고 어려운 온갖 물음[問難]에도 모두 잘 해석하시나니, 그 때문에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에 편히 선다고 한다.
[아리사는 첫째가고 맨 위이고 극히 높으며 물러나지도 않고 되돌려 보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고 공덕을 구족해 줄어드는 일이 없으므로 이것을 아리사가 머무르는 곳이라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과 공덕의 힘 때문에 성심으로 말씀하시되,
“나는 아리사가 머무른 곳에 편히 선다”고 하신다.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를 하신다[衆中師子吼]고 했는데,
여기에서 대중이란 여덟 무리[八衆]를 말한다. 곧 사문의 무리와 바라문의 무리와 찰리(刹利)의 무리와 하늘의 무리와 사천왕(四天王)49)의 무리와 삼십삼천(三十三天)50)의 무리와 마51)의 무리와 범천52)의 무리이다.
중생들은 이 여덟 가지 대중에 대하여 지혜를 희망하나니, 이 때문에 경에서는 다만 이 여덟 가지 대중만을 설명한다.
이 안에서, 부처님께서 사자후를 하실 적에는 역시 온갖 대중 속에 계시게 되나니,
이 때문에 이 경에서 말씀하시되,
“그 밖의 다른 대중[復餘衆]이라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음성을 듣는 이면 모두가 다 대중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혼자 으슥한 곳에서 법을 말씀하시나니, 이 때문에 대중 안에 계실 때는 성심으로 말씀하신다 하시면서,
‘나는 10력과 4무소외가 있다’고 하셨다”고 한다.
이것을 바로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를 외친다”고 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은,
“나는 성심으로 말한다”고 하시면서,
“나는 온갖 세간의 스승이요 일체지(一切智)를 지닌 사람이다.
의심이 있고 믿지 않은 이들은 모두 오라. 내가 해석해 주리라”고 하셨나니,
이 때문에 “대중 가운데서 사자후를 외친다”고 한다.
[사자후]
사자후(師子吼)라고 했는데,
사자왕은 청정한 종자에서 태어나 깊은 산의 큰 골짜기에 머무르며,
네모진 뺨과 큰 뼈에 몸의 살은 뚱뚱하고 머리는 크며,
눈은 길면서 그 광택은 맑고 깨끗하고 눈썹은 우뚝하고 넓은 어금니는 날카롭고 깨끗하다.
입과 코는 크고 두꺼우면서 굳고 원만하여 이는 촘촘하고 가지런하면서 날카로우며,
붉고도 흰 혀를 내뱉고 두 귀는 위로 치켜졌으며,
갈기와 털은 윤기가 흐르고 윗몸은 넓고 크며,
피부와 살은 단단하게 붙고 등골은 길며,
허리는 날씬하면서 배는 나오지 않고 꼬리는 아주 길며,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발로 땅을 의젓하게 딛고 선다.
거대한 몸과 큰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등골을 길게 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입으로는 땅을 찧으면서 큰 위세를 나타낸다.
때를 맞춰 먹이를 먹고 이른 아침부터 모습을 나타내어 사자왕으로서의 힘을 과시하면서,
사슴ㆍ곰ㆍ범 및 멧돼지 족속들을 위압하며,
늦게까지 잠자는 짐승들을 깨우고 힘이 센 놈들을 항복 받으며,
힘이 솟아나면 스스로 갈 길을 헤치면서 크게 으르렁거린다.
이와 같이 으르렁거릴 적에, 그 소리를 듣게 되는 짐승들은 혹 기뻐하기도 하고 혹은 두려워하기도 하나니, 구멍 속에 있던 놈은 움츠려 숨고 물에 사는 고기는 깊숙이 들어가며, 산에 있던 놈은 몰래 숨어 엎드리고, 마굿간의 코끼리는 쇠사슬을 떨치면서 미친 듯이 달아나며, 날던 새는 공중 높이 날아 멀리 달아난다.
부처님이라는 사자 또한 그와 같아서,
6바라밀(婆羅蜜)에 의해 옛 네 가지 거룩한 큰 성바지53)에서 태어나 적멸(寂滅)의 큰 산 깊은 선정(禪定)의 골짜기에 머무신다.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어 머리로 삼고,
모든 선근을 쌓아 뺨을 삼았으며,
무루(無漏)로 바르게 보는 긴 눈은 번쩍이고,
정혜(定慧)로 평등히 행하는 눈썹은 높고 넓으며,
4무소외(無所畏)의 어금니는 희고도 날카롭다.
무애해탈(無礙解脫)로 두루 갖추어진 입이요,
4정근(正勤)으로 굳고 원만한 턱이며,
37품(品)의 이는 촘촘하고 가지런하면서 날카롭고,
부정관(不淨觀)을 수행한 붉고도 흰 혀를 토(吐)하며,
염혜(念慧)의 귀는 높이 솟아 우뚝하고,
18불공법(不共法)의 갈기와 털은 빛나면서 산뜻하며,
3해탈문(解脫門)의 윗몸의 살은 단단하고,
3시현(示現)의 등골은 길며,
명행(明行)이 구족된 배는 나오지 않고,
인욕(忍辱)의 허리는 날씬하며,
멀리 여의는 행[遠離行]의 꼬리는 길고,
4여의족(如意足)으로 편안히 서며,
무학(無學)의 5근(根)의 손발톱은 날카롭다.
열 가지 힘의 기세는 한량없고 무루의 법을 두루 갖춘 몸이시니,
모든 부처님의 삼매왕(三昧王) 등이 머무르는 곳에서 나와 4무애지(無礙智)로써 읊조리고,
모든 법 자리에서 무애해탈의 말씀 드러내며,
이 10력(力)에 의지하여 중생을 널리 제도하되 때를 맞춰서 하고,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에게 이른 새벽부터 모습을 나타낸다.
모든 법왕(法王)으로서의 덕을 드러내어 모든 외도의 논의사(論議師)와 삿된 소견을 지닌 무리를 위압하며,
4제 속에서 잠든 중생들을 깨우고 나와,
5중(衆)에 집착한 이의 교만스런 힘을 항복 받으며,
이학(異學)의 논의와 삿된 소견을 지닌 도(道)를 헤치고 삿된 행을 하는 이를 두렵게 하고 믿음이 바른 이를 기쁘게 하며,
둔한 이들을 영리하게 하고 제자들을 위로하면서 외도를 파괴하며,
장수천(長壽天)의 신54)들이 오래도록 하늘의 쾌락을 받으면서도 그 무상함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4제에 대한 사자의 외침을 듣고 모두가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여의게 되며 여의게 되기 때문에 열반에 드나니, 이것을 일컬어 대중 가운데서 사자처럼 외친다고 한다.
또 부처님의 사자후(師子吼)와 사자의 외침에는 차별이 있다.
사자의 외침에서는 짐승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혹은 죽기도 하고 죽을 뻔하는 고통을 받게 되지만,
부처님의 사자후에서는 죽음의 두려움을 면하게 된다.
사자의 외침에서는 세상마다 죽음의 고통을 두려워하지만,
부처님의 사자후에서는 지금 세상에서만 죽음이 있을 뿐 그 후에 다시 고통이 없게 된다.
사자가 외치면 그 소리가 추악하므로 만물이 듣기를 좋아하지 않고 생사(生死)의 두려움이 있지만,
부처님의 사자후는 그 소리가 부드러운지라 듣는 이마다 싫어하는 마음이 없고 모두가 몹시 좋아하게 되며 두루 멀리까지 들리면서 두 가지의 즐거움을 주나니, 곧 천상에 나는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이다.
이런 것이 차별이 된다.
【문】 부처님의 사자후도 역시 듣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이 생기게 한다. 사자의 외침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 부처님의 사자후를 들으면 당시는 조금 두렵기는 하나 뒤에는 크게 이익이 된다.
나라는 마음에 집착하는 이와 세간의 쾌락을 갈망하는 사람과 항상 뒤바뀌어서 삿된 소견의 마음에 속박된 이면 두려움이 생기게 되나니, 마치 경전에서의 말씀과 같다.
“부처님께서 4제를 말씀하시자 위로 모든 하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두려워하면서,
‘우리들에게는 무상한 모양(無常相)과 괴로운 모양[苦相]과 나 없는 모양[無我相]과 공한 모양[空相]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뒤바뀐 마음으로 항상하고 즐거운 모양[常樂相]에 집착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에 차별이 있다.
또 사자의 외침을 들으면 욕망을 여읜 사람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지만,
부처님의 사자후는 열반을 구하면서 욕망을 여읜 사람까지도 모두 두려워한다.
또 사자가 외치면 착한 사람이나 착하지 않은 사람이나 다 두려워하지만,
부처님의 사자후는 다만 착한 사람만이 두려워한다.
또 사자가 외치면 언제나 두렵지만,
부처님의 사자후는 비록 조금 두렵기는 하나,
중생들에게 세간의 나쁜 죄악을 보이면서 세간에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게 하고,
열반의 공덕과 이익을 관찰하여 능히 세간의 갖가지 두려움을 제거하게 하며,
악취(惡趣)55)를 닫고 선취(善趣)를 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열반의 성(城)에 도달하게 한다.
또 스무 가지의 일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사자후라 하나니,
이른바 10력(力)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움츠러들지 않기 때문이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고,
맑은 음성[梵音]이기 때문이고,
전에 없던 일[未曾有]이기 때문이고,
대중을 잘 이끌기 때문이고,
악마가 놀라고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악마의 백성을 혼란하게 하기 때문이고,
모든 하늘들이 기뻐하기 때문이고,
악마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
악마의 속박을 끊기 때문이고,
악마의 갈고리를 파괴하기 때문이고,
악마의 세계를 초월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법이 더욱 자라기 때문이고,
다른 이의 법을 줄이기 때문이고,
과보(果報)가 속이지 않기 때문이고,
설법이 헛되지 않기 때문이고,
범부가 성인의 도에 들기 때문이고,
성인의 도에 든 이가 완전히 번뇌를 다하게 됨을 구족하기 때문이고,
응하는 바에 따라 3승(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말씀을 사자후라 한다.
이것을 사자후의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의 이치라 한다.
[법륜, 법의 바퀴]
범륜을 굴린다[轉梵輪]고 함은,
청정하기 때문에 범[梵]이라 하고,
부처님의 지혜 및 지혜와 상응하는 법을 수레바퀴[輪]라 하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받는 이가 그 법에 따라 행함을 굴린다[轉]고 한다.
이 수레바퀴[輪]는 4념처(念處)를 두루 갖춤으로써 바퀴통을 삼고, 5근(根)과 5력(力)으로써 바퀴살을 삼는다.
4여의족(如意足)으로써 견고한 바퀴테를 삼고, 4정근(正勤)으로서 촘촘히 합친 바퀴를 삼으며,
3해탈(解脫)로써 굴대를 삼고, 선정과 지혜로써 잘 어울림[調適]을 삼는다.
무루의 계율[無漏戒]로써 바퀴에 바르는 향(香)을 삼고, 7각의(覺意)로써 여러 가지의 꽃과 영락(瓔珞)을 삼으며,
바른 소견[正見]으로써 오른편으로 따라 도는 바퀴를 삼고, 믿는 마음이 청정함으로써 사랑과 기쁨을 삼으며,
바른 정진[正精進]으로써 빨리 가고 두려움이 없는 사자후로써 묘한 음성을 내어 악마를 두렵게 하는 바퀴를 삼는다.
또 12인연(因緣)의 절개를 푸는 바퀴를 깨뜨리고 생사의 바퀴를 무너뜨리며,
번뇌의 바퀴를 여의고 업의 바퀴를 끊고 세간의 바퀴를 가로 막으며,
세간을 장애하는 바퀴를 끊고 괴로움의 바퀴를 깨뜨리면서,
수행하는 이로 하여금 기쁘게 하고 하늘과 사람들이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게 하나니,
이런 바퀴는 굴릴 수 있는 이가 없다.
이 바퀴는 부처님 법을 유지하게 하나니, 이 때문에 범륜(梵輪)을 굴린다 한다.
또 부처님은 법륜(法輪)을 굴리심이 마치 전륜성왕이 보륜(寶輪)을 굴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과 전륜성왕]
【문】 부처님과 전륜성왕은 무엇이 서로 비슷한가?
【답】 마치 왕은 청정하고 뒤섞이지 않은 종성(種姓)에서 태어나고 성바지를 따라 가업(家業)이 성취되며,
뭇 몸매[相]로 몸을 장엄하고 왕으로서의 덕을 두루 갖추어서 보륜을 능히 굴리며,
향탕(香湯)을 정수리에 부어 왕위를 받고 사천하(四天下)의 우두머리가 되어 온갖 도적의 법을 파괴하고 제거하되 감히 어기는 이가 없게 한다.
보배의 창고가 차서 넘치고 군사의 위용은 7보(寶)로써 장식을 삼으며,
4섭법(攝法)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고 왕법을 잘 써서 귀성(貴姓)에게 위임하며,
주병대신(主兵大臣)으로써 국정을 다스리고 으뜸가는 진기한 보배로써 즐거이 보시하며,
알거나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다.
부처님이신 법왕(法王)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석가모니부처님과 연등(燃燈)부처님56)과 보화(寶華)부처님57) 등은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성바지에서 태어나셨고,
먼저 부처님으로서의 위의와 행업(行業)으로 32상(相)을 두루 갖추어 스스로 장엄하셨으며,
성주(聖主)58)로서의 위덕을 구비하고 진실한 법륜을 굴리시며,
지혜의 감로미(甘露味)를 부어 삼계(三界) 가운데에서 존귀하며,
온갖 번뇌의 도적을 파괴하고 배울 것이 있거나[學] 배울 것이 없는[無學] 대중을 기쁘게 하니 결성된 금계(禁戒)를 감히 어기는 이가 없다.
한량없는 법의 보배 창고[法寶藏]를 완전히 갖추고 7각분(覺分)을 보배로 장엄하며,
8만 4천의 법취의 군대[法聚軍]로 세간을 벗어나고 4섭법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되 방편을 알며,
4성제를 말씀하시면서 법왕(法王)으로서의 위의를 삼고,
사리불ㆍ미륵 등을 대장으로 삼아 불국(佛國)의 법을 잘 다스리며,
모든 무루의 근(根)ㆍ역(力)ㆍ각(覺)의 갖가지 묘한 보배로써 즐거이 보시하고 깊이 온갖 중생의 착한 일을 구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견고하시나니,
이것이 서로 비슷하다.
또 부처님은 전륜성왕보다 수승함이 있다.
전륜성왕은 번뇌를 여의지 않았지만 부처님은 이미 모든 번뇌를 영원히 여의셨다.
전륜성왕은 늙어 죽음의 구렁에 빠져 있지만 부처님은 이미 벗어나셨고,
전륜성왕은 은애(恩愛)의 종이 되어 있지만 부처님은 이미 초월하셨으며,
전륜성왕은 나고 죽는 험한 길속을 가고 있지만 부처님은 이미 건너가셨으며,
전륜성왕은 어리석음의 어둠 속에 있지만 부처님은 으뜸가는 광명 속에 머물러 계신다.
전륜성왕은 기껏해야 사천하(四天下)에서 자유자재하지만 부처님은 한량없고 끝없는 세계에서 자유자재하시다.
전륜성왕은 재보(財寶)가 자유자재하지만 부처님은 마음의 보배[心寶]가 자유자재하고,
전륜성왕은 천상의 즐거움을 갈망하지만 부처님은 유정천(有頂天)의 즐거움까지도 이미 여의셨으며,
전륜성왕은 다른 이로부터 즐거움을 구하지만 부처님은 자기 마음으로부터 즐거움을 내시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전륜성왕보다 더 수승하시다.
또 전륜성왕은 손수 보륜을 굴리면서 공중에서 장애가 없고 부처님은 온갖 세간의 하늘과 인간 속에서 굴리시되 장애도 없고 막힘도 없으시다.
그 보륜을 보는 이면 많은 독이 모두 소멸되고 부처님의 법륜을 만나면 온갖 번뇌의 독이 모두 소멸되며,
보륜을 보는 이는 모든 재앙과 해악이 모두 소멸되고 부처님의 법륜을 만나면 온갖 삿된 소견과 의심과 뉘우침과 재해가 모두 다 소멸된다.
왕은 이 보륜으로써 사천하를 다스리고 부처님은 법륜으로써 온갖 세간 및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얻게 함이 자재하시니,
이런 것이 서로 비슷하다.
또 법륜은 보륜보다 크게 수승함이 있다.
보륜은 거짓으로 되었지만 법륜은 견실하다. 보륜은 3독(毒)의 불을 자라게 하지만 법륜은 3독의 불을 거두고, 보륜은 유루(有漏)이지만 법륜은 무루이며, 보륜은 5욕락(欲樂)을 즐거워하지만 법륜은 법락(法樂)을 즐거워하며 보륜은 결사(結使)의 처소이지만59) 법륜은 결사의 처소가 아니다.
보륜은 한량이 있는 처소로 가지만 법륜은 한량이 없는 나라로 간다.
보륜은 한마음의 청정한 보시 때문에 세상마다 얻을 수 있지만 법륜은 한량없는 아승기겁동안 온갖 착한 업의 인연과 지혜를 쌓았기 때문에 얻으며,
보륜은 왕이 죽은 뒤에 다시는 구르지 않지만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도 법륜은 여전히 구르며,
보륜은 한 사람에게 딸려 있지만 법륜은 온갖 제도될 수 있는 이에게 다 딸려 있다.
또 범(梵)이라 함은 넓은 것[廣]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굴리는 법륜은 시방에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넓다고 한다.
또 4범행(梵行)의 마음에서 말씀하기 때문에 범륜(梵輪)이라 하고,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얻으신 때에 범천왕(梵天王)이 법륜 굴리기를 청했기 때문에 법륜이라 하며,
부처님께서 바라내(波羅奈)에서 법문을 굴리실 적에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가 도를 얻은 소리가 범천에까지 사무쳤기 때문에 법륜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범천을 귀히 여기므로 그들을 기쁘게 하려고 이름하여 범륜이라 한다 하나니, 이 때문에 범륜이라 부르는 것이다.
[법륜과 범륜]
【문】 부처님께서는 간혹 법륜(法輪)이라 하기도 하고 범륜(梵輪)이라 하기도 하시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법륜이나 범륜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범륜이라 말함은 4무량심(無量心)을 나타내는 것이고,
법륜이라 말함은 4제법(諦法)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 범륜은 4무량심으로 인하여 도를 얻은지라 이름하여 범륜이라 하고, 그 밖의 도에 의거하여 법을 얻으면 이름하여 법륜이라 한다.
범륜은 4선(禪)을 나타내 보이고 법륜은 37품(品)을 나타내 보이며,
범륜은 선정을 닦는 거룩한 도임을 나타내 보이고 법륜은 지혜를 닦는 거룩한 도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으로 범륜과 법륜의 차별을 분별할 수 있다.
【문】 어떤 법이 곧 무외의 성품[無畏性]인가?
【답】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얻으실 적에 온갖 부처님의 법과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을 얻으셨는데,
이 가운데에서 미래 세상에 4무소외의 지혜와 상응하는 법을 얻게 되면 무소외라 한다.
마치 보시를 할 때 마음속의 생각과 상응하는 버림[捨法]이 생기는 것과 같으며, 또한 마치 4무량심과 상응하면 자법문(慈法門)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 이 4무소외 중에는 어떠한 차례가 있는가?
【답】 첫 번째의 무외에서는 사람들에게 “온갖 법을 안다” 함을 보이는 것이고,
온갖 법을 알기 때문에 “나는 번뇌가 다하였도다”는 것이며,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에 “번뇌가 다함을 장애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고,
이 장애가 되는 법을 끊었기 때문에 “도(道)를 말한다”는 것이다.
또 첫 번째의 무외는 마치 약사(藥師)가 온갖 약초를 보이는 것과 같고,
두 번째는 온갖 병이 낫는 것을 보이며,
세 번째는 금기(禁忌)60)를 알리며,
네 번째는 먹어야 할 것을 보이는 것이다.
또 첫 번째 무외에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임을 말씀하고,
두 번째 무외에서는 온갖 번뇌와 습기가 없음을 말씀하며,
세 번째 무외에서는 법에 잘못이 없음을 말씀하고,
네 번째 무외에서는 일을 다 마치고 열반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신다.
【문】 마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61)에서의 말씀과 같이 5음(陰)에서 10력ㆍ4무소외ㆍ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공하다.
그런데 이제 무엇 때문에 그 모양[相]을 분별하여 말하는가?
【답】 불법에서의 불가득공(不可得空)은 모든 법에서 장애가 없나니, 이 불가득공으로 인하여 온갖 불법의 12부경(部經)을 설명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온갖 만물이 모두 그곳에 의거하여 자라고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또 이 10력과 4무소외는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하는 마음으로써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중생은 이런 인연을 좇아 해탈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약초는 다만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약초의 모양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과 같다.
『중론(中論)』62)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만일 모든 법이 공함을 믿으면
이것은 곧 이치에 순응함이거니와
만일 법이 공함을 믿지 않으면
온갖 것이 모두 어긋나서 잃게 된다.
만일 아무것도 없는 것이 공이라면
마땅히 조작(造作)해야 할 것도 없으리니,
아직 짓지 않았는데 이미 업이 있고
짓지 않았는데 짓는 이가 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모양을
누가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으랴.
오직 청정하고 곧은 마음 있어서
말하는 것에 의지함이 없고
있다 없다 하는 소견을 여의어
마음 저절로 속에서 소멸한다.
[성분과 보살의 10력과 4무소외]
【문】 성문의 법에서는 10력과 4무소외를 이와 같이 설명했는데, 마하연(摩訶衍)에서는 10력과 4무소외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답】 이 10력과 4무소외 가운데에서 모두 다 알고[盡知] 두루 아는[遍知] 것이니, 이것이 마하연 가운데에서 말하는 10력과 4무소외이다.
【문】 성문의 법에서도 역시 모두 다 알고 두루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어찌하여 마하연에서도 모두 다 알고 두루 안다고 하는가?
【답】 모든 논의사(論議師)들이,
“부처님은 모두 다 알고 두루 아신다”고 말한 것이지, 부처님 스스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제 마하연에서의 10력과 4무소외를 설명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나는 모두 다 알고 두루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성문의 사람을 위하여 10력과 4무소외를 설명하면서 4제와 12인연(因緣) 등을 합하여 설명하셨으니, 모든 성문의 법으로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마하연 가운데에서 10력과 4무소외를 설명한 것은 대비(大悲)와 합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63)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말씀한 것이다.
【문】 부처님은 10력과 4무소외가 있지만 보살에게도 있는가?
【답】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첫째는 온갖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는 굳고 깊고 단단한 힘이고,
둘째는 대자(大慈)를 구족했기 때문에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는 힘이며,
셋째는 온갖 공양과 공경과 이양(利養)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대비(大悲)를 구족한 힘이며,
넷째는 온갖 부처님의 법을 믿고 온갖 부처님 법을 구족하여 내는 마음에 싫어함이 없기 때문에 크게 정진하는 힘이며,
다섯째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혜로운 행과 위의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선정의 힘이다.
여섯째는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제거했고, 12인연을 따라 행했고, 온갖 삿된 소견을 끊었고, 온갖 생각과 분별과 쓸모없는 다른 논리를 없앴기 때문에 지혜를 구족한 힘이며,
일곱째는 온갖 중생을 성취했기 때문에 한량없는 생사를 받았고, 모든 선근을 쌓았으면서도 만족해 함이 없었고, 온갖 세간은 마치 꿈과 같은 줄 알기 때문에 나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는 힘이다.
여덟째는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하고, 나도 없고 중생도 없음을 알고, 모든 법은 나오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음을 알기 때문에 생사가 없는 법인[無生法忍]의 힘이며,
아홉째는 공(空)하고 모양 없고[無相] 조작 없는[無作] 해탈문의 관(觀)에 들었고, 성문과 벽지불의 해탈을 지견하기 때문에 해탈을 얻은 힘이며,
열째는 깊은 법이 자재하고, 온갖 중생의 마음의 작용이 나아가는 바를 알기 때문에 무애지(無礙智)를 구족한 힘이다. 이것이 보살이 지닌 10력이다.
무엇이 보살의 4무소외인가?
첫째는 온갖 것을 들어 지녔고, 모든 다라니(陀羅尼)를 얻었고, 기억하여 잊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 앞에서 설법할 적에 두려워함이 없다.
둘째는 온갖 법 가운데서 해탈을 얻었고, 온갖 법약(法藥)을 분별하고 알아 쓰고, 온갖 중생의 근기를 알기 때문에 대중 속에 있으면서 알맞게 설법하여 두려워함이 없다.
셋째는 보살은 항상 온갖 두려움을 여의었으므로,
“시방에서 모두 와서 나에게 힐난한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으리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이런 모양을 보지 않기 때문에 대중 속에 있으면서 설법할 적에 두려워함이 없다.
넷째는 제멋대로 온갖 사람들이 와서 묻고 힐난하여도 낱낱이 모두 대답하여 의혹을 끊어 줄 수 있으므로 대중 앞에 설법할 때에 두려워함이 없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4무소외이다.
[4무애지]
4무애지(無礙智)라 함은 의무애지(義無礙智)ㆍ법무애지(法無礙智)ㆍ사무애지(辭無礙智)ㆍ요설무애지(樂說無礙智)이다.
의(義)무애지란, 이름과 언어로써 말하는 일이 저마다 모든 법의 모양[法相]임을 말한다.
이른바 굳은 모양의 땅이라 할 때,
여기에서 땅의 굳은 모양은 의(義)이고,
땅이라는 이름은 바로 법(法)이며,
언어로써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사(辭)이다.
이 세 가지의 지혜 가운데서 “기분 좋게 말해줌에 자유자재한 것”이 바로 요설(樂說)64)이다.
이 네 가지 일에서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것”을 바로 무애지(無礙智)라 한다.
축축한[濕] 모양은 물이요 더운[熱] 모양은 불이며, 움직이는[動] 모양은 바람이요,
마음으로 생각하는[思] 모양과, 5음[衆]의 무상한[無常] 모양과, 5수중(受衆)의 무상하고 괴롭고[苦] 공한 모양과, 온갖 법의 나 없는[無我] 모양 등은 이와 같은 총괄적인 모양[總相]과 개별적인 모양[別相]이니,
모든 법을 분별함도 역시 그와 같다.
이것을 의(義)무애지라 한다.
법(法) 무애지라 함은,
이 뜻[義]과 이름[名字]을 알고서 그 굳은 모양을 땅이라 하는데,
이와 같은 등의 온갖 이름을 분별하는 가운데서 막힘이 없는 것을 법무애지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름을 여의고는 뜻을 얻을 수 없고 그 뜻은 반드시 이름으로 인하여 알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뜻[義] 다음에 법(法)이 있는 것이다.
【문】 뜻65)과 이름66)은 합해진 것인가, 아니면 분리[離]된 것인가?
만일 이름과 합해진 것이라면 불을 말할 때에는 마땅히 입이 탈 것이고,
만일 분리된 것이라면 불을 말할 때에는 마땅히 물을 얻어야 할 것이다.
【답】 합해지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다.
옛 사람들이 임시로 이름을 세워 모든 법에다 이름을 붙인 것이며 뒷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인하여 이 일을 알게 되나니, 이와 같이 저마다 이름이 있는 것이 바로 법(法)이다.
이 이름과 뜻을 어떻게 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는가?
마땅히 말[言辭]로써 분별하고 장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고 통달하게 하되 막힘이 없도록 해야 하니, 이것을 사(辭)무애지67)라 한다.
또 그것을 설명하여 도리에 맞게 펴고 연설함이 끝이 없고 또한 모든 선정 중에서 자유자재하여 막힘이 없는 것을, 바로 요설(樂說)무애지68)라 한다.
첫째와 넷째의 무애지는 9지(地) 속에 있고,
둘째와 셋째의 무애지는 욕계(欲界) 및 범천(梵天) 위에 있다.
둘째와 셋째의 무애지는 세지(世智)69)이고,
첫째는 10지(智)70)이며,
넷째는 9지(智)이다.
이 무애지에는 상ㆍ중ㆍ하 세 가지가 있으니,
상은 모든 부처님이요, 중은 큰 보살이며, 하는 큰 아라한이다.
【문】 힘과 무소외와 무애는 모두 지혜이니, 안으로 힘이 있으면서 밖으로 두려워함이 없으면 곧 완전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무애를 말하는 것인가?
【답】 힘과 무외에 대해서는 이미 분별했다.
어떤 사람은 비록 두려워함이 없더라도 대중 가운데서 설법할 때 막히는 일이 있나니, 이 때문에 4무애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무애지를 얻어서 4무소외를 장엄하고, 4무소외로는 10력을 장엄하게 된다.
또 무소외를 말하면서 어떤 이는 의심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한 사람이 대중들 가운데서 두려워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앞에 10력이 있고 뒤에 4무애지가 있으므로 이 때문에 대중 속에 계시면서 설법하여도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등으로 4무애지를 분별한다.
[보살의 4무애지]
【문】 마하연에서 보살에게는 4무애지가 있는가?
【답】 있다.
곧 의(義)무애지의 의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일컬으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뜻[義]과 이름[名字]과 말[言語]은 다르지 않으니, 앞과 뒤와 중간도 역시 그와 같다.
이것을 뜻이라 하면 이름과 말을 여의고서 따로 뜻이 있지 않아야 되나니, 세 가지 일이 평등하기 때문에 뜻이라 한다.
또 온갖 법들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이것을 의무애지라 한다.
법(法)무애지라 했는데,
법이란 온갖 뜻을 말한다. 이름은 뜻을 알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이 법무애지 속에 들어가서 항상 법만 믿고 사람은 믿지 않으며,
항상 법에 의지하고 법이 아닌 것[非法]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법에 의지한다 함은 법이 아닌 일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온갖 이름과 말이 스스로 서로가 떨어져 있음[離]을 알기 때문이다.
또 이 법무애지로써 3승(乘)을 분별하나니,
비록 3승을 분별한다 하더라도 법의 성품[法性]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의 성품은 한 모양이어서 모양이 없기[無相] 때문이다.
이 보살은 이 언어로써 법을 설하되 언어는 공하여 마치 메아리와 같은 줄을 알고,
말할 법을 중생에게 보이면서 다 같은 법성임을 믿고 알게 하며,
말한 이름과 언어를 통달하여 막힘이 없으니, 이것을 법무애지라 한다.
사(辭)무애지라 함은,
언어로써 이름과 뜻을 말하되 갖가지로 언어를 장엄하여 저들이 바라는 것에 따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하늘의 말[天語]과 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마후라가 등의 사람 아닌 것들의 말[非人語]과,
제석ㆍ범왕ㆍ사천왕 등의 세상지기[世主]의 말과, 사람의 말[人語]과,
한마디의 말, 두 마디의 말, 많은 말, 간략한 말, 자세한 말, 여자의 말, 남자의 말과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말 등,
이러한 말로써 저마다 이해할 수 있게 하며 자기의 말이나 남의 말에 대하여 헐뜯거나 칭찬함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온갖 법은 언어(言語) 속에 있지 않으니, 언어는 실제의 이치[實義]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언어가 곧 실지의 이치라면 착한 말로써 착하지 않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며,
단지 열반에 들게 하기 위하여 한 말이라고 이해해도 그 언어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 이 언어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법의 뜻에 따라 행하게 하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언어는 모두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무애지라 한다.
요설(樂說)무애지라 함은,
보살은 한 글자 중에서 온갖 글자를 잘 말하고 한 언어 중에서 온갖 언어를 말하며,
하나의 법 가운데서 온갖 법을 말한다.
이 안에서 말한 것은 이것이 다 법이고, 이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진실이며, 다 제도될 수 있는 이의 근기에 따라 이로움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수투로(修妬路)71)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수투로를 말해 주고,
기야(祇夜)72)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기야를 말해 주며,
폐가란타(弊迦蘭陀)73)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폐가란타를 말해 주고,
가타(伽陀)74)ㆍ우타나(優陀那)75)ㆍ니타나(尼陀那)76)ㆍ아파타나(阿波陀那)77)ㆍ일축다(一筑多)78)ㆍ사타(闍陀)79)ㆍ위두리(爲頭離)80)ㆍ알부타달마(頞浮陀達摩)81)ㆍ우바제사(優波提捨)82)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모두 그들을 위하여 그 경을 말해주는 것이니,
온갖 중생의 근기와 좋아하는 것에 따라 말해 준다.
만일 믿음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신근(信根)을 말해주고,
정진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정진근(精進根)을 말해주며,
부지런히 염하기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염근(念根)을 말해주고,
마음 가다듬기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정근(定根)을 말해주며,
지혜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그를 위하여 혜근(慧根)을 말해 주나니,
마치 5근 등에서와 같이 온갖 선근에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또 2만 1천의 음욕(婬欲)이 있는 사람에 대한 근(根)이 있다.
이 근을 위하여 부처님은 8만 4천 가지 다스리는 법[治法]의 근을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근을 따라 다스리는 법의 차례를 즐겨 말해 주는 것이 보살의 요설(樂說)이다.
또 2만 1천의 성내는[瞋恚] 사람에 대한 근이 있다.
이 근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8만 4천의 다스리는 법의 근을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근을 따라 다스리는 법의 차례를 즐겨 말해 주는 것이 보살의 요설이다.
또 2만 1천의 어리석은[愚癡] 사람에 대한 근이 있다.
이 근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8만 4천의 다스리는 법의 근을 말씀하셨는데,
이 좋아하는 모든 근을 따라 다스리는 법의 차례를 즐겨 말해 주는 것이 보살의 요설이다.
또 2만 1천의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는 사람[等分人]에 대한 근이 있다.
이 근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8만 4천의 다스리는 법의 근을 말씀하셨는데,
이 좋아하는 모든 근을 따라 다스리는 법의 차례를 말해 주는 것이 보살의 요설이니, 이것을 요설무애지라 한다.
또 보살은 이 무애지를 써서 1겁(劫)이나 반 겁 동안에 각각 설법을 장엄하면서도 역시 모든 법의 성품[性]과 모양[相]을 파괴하지 않는다.
또 이 보살은 혹 몸을 숨기어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중생을 위하여 온갖 털구멍으로 법을 설하되 그들의 근기에 맞추어 따르며 근본의 행[本行]을 잃지 않는다.
이 보살은 지혜가 한량없어 온갖 논의사(論議師)들도 다 없어지게 할 수도 없고 또한 파괴할 수도 없다.
이 보살은 이 무애지를 얻은지라 몸을 바꾸어 생(生)을 받을 때에는 온갖 5통(通) 선인들이 지니는 경서(經書)와 주술(呪術)과 지혜와 기능을 저절로 모두 알게 된다.
이른바 4위타(韋陀)83)ㆍ6앙가(鴦伽)84)ㆍ주술85)과 그리고 일월(日月)ㆍ5성경(星經)ㆍ원몽경(原夢經)ㆍ지동(地動)ㆍ귀신의 말[鬼語]86)ㆍ새의 말ㆍ짐승의 말ㆍ사람에 붙는 네발 달린 수귀(獸鬼)의 말 등을 안다.
또 국왕의 상점(相占)ㆍ풍년과 흉년ㆍ해와 달과 5성(星)의 다투는 조짐ㆍ의약초(醫藥草)ㆍ산수(算數)ㆍ복술[卜]ㆍ노래와 춤[歌舞]ㆍ기악(伎樂) 등 이러한 교묘한 기술과 모든 경서를 모두 다 알고 분명하게 통달하여,
온갖 사람과 모든 외도들보다 뛰어나면서도 역시 뽐내지도 않고 다른 이들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이 세속의 일을 아는 것으로 열반을 삼지도 않는다.
이 보살은 4무애지를 성취한 까닭에 빛깔과 힘과 광명이 모든 범천보다 뛰어나며 모든 범천의 공경과 좋아함과 존중을 받으면서도 마음에 집착함도 없다.
이와 같은 등의 온갖 모든 하늘들의 존중과 공경을 받으면서도 역시 집착함이 없으며,
다만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다는 마음만을 낼 뿐이며,
또한 신통으로써 모든 하늘들을 분발시켜 마음으로 간절히 우러르게 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되 다함이 없고 파괴됨도 없으며,
의혹을 끊어 없애 주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마하연(摩訶衍) 중에서 보살이 4무애지의 힘으로 능히 중생들을 제도한다 하며,
이것을 4무애지의 뜻[義]이라 한다.
1)
범어로는 sampyaksaṁbuddha.
2)
범어로는 ārṣa-sthāna. 선인(仙人)의 처소이다.
3)
범어로는 āntarāyikadharma.
4)
범어로는 pañca-tapas. 머리 위와 사방, 다섯 방향으로 열을 가하는 고행을 말한다. 곧 태양의 뜨거운 열기 아래에 선 채 다시 사방으로 불을 피워 자신의 몸에 열을 가하는 고행을 말한다.
5)
범어로는 Sundarīsūtra. 손다리(孫陀利, Sundarī)는 사위성에 살던 외도로서 부처님과 관계가 있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6)
범어로는 praśna. ‘질문’을 말한다.
7)
범어로는 sarvākārajñatā. ‘일체법이 드러나는 모양[行狀]을 아는 것’을 말한다.
8)
범어로는 pratisaṁvid.
9)
범어로는 pratibhānapratisaṁvid.
10)
범어로는 Satya Nirgranthīputra.
11)
범어로는 Pilotika.
12)
범어로는 Kauṇḍinya.
13)
범어로는 Uruvilvā Kāśyapa.
14)
범어로는 Prasenajit.
15)
범어로는 Caṇḍa Pradyota.
16)
범어로는 Udayana.
17)
범어로는 Pukkusāti.
18)
범어로는 Brahmadatta.
19)
범어로는 Brahmāyus.
20)
범어로는 Puṣkarasārin.
21)
범어로는 Kūṭadanta.
22)
범어로는 āṭavaka.
23)
범어로는 Apalāla.
24)
범어로는 Elapatra.
25)
범어로는 Vemacitrin.
26)
범어로는 Śākra devānāmiṁdra.
27)
범어로는 nīcakulajanman.
28)
범어로는 nīcajātisthāna.
29)
범어로는 śūdra.
30)
범어로는 Māndhātṛ, or Mūrdhāta.
31)
범어로는 Sudarśana.
32)
범어로는 Sāgara.
33)
범어로는 Makhādeva.
34)
범어로는 Andra.
35)
범어로는 Śavara.
36)
범어로는 Tukhāra.
37)
범어로는 Sūli.
38)
범어로는 Arsak.
39)
범어로는 Kanakagiri.
40)
범어로는 dharmarati.
41)
범어로는 ekarasa.
42)
범어 Samyaksaṁbuddha의 음역어.
43)
범어로는 sūtra.
44)
범어 vyākaraṇa의 음역어.
45)
범어 saṁkhyā의 음역어.
46)
범어 veda의 음역어.
47)
범어 ārṣa의 음역어.
48)
범어로는 Sarvāsravasūtra.
49)
범어로는 Cāturmahārājika.
50)
범어로는 Trāyastriṁśa deva.
51)
범어로는 Māra.
52)
범어로는 Brahmā.
53)
범어로는 vaṁśa. 종성(種姓)을 말한다.
54)
범어로는 dīrghāyuṣa deva.
55)
범어로는 durgati.
56)
범어로는 Dīpaṇkara.
57)
범어로는 Ratnapuṣpa.
58)
범어로는 ārṣeryāpatha.
59)
세간의 왕이 지배의 바퀴를 돌림은 곧 번뇌를 일으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60)
범어로는 vyādhikṣaya.
61)
범어로는 Prajñāpāramitā sūtra.
62)
범어로는 Madhyamakaśāstra.
63)
범어로는 bhūtalakṣaṇa.
64)
범어로는 pratibhāna. 요설이란 보살이 가르침을 듣고 즐거워하고 다시 남을 위해 설해 주는 일을 말한다.
65)
범어로는 artha.
66)
범어로는 nāman.
67)
범어로는 Niruktipratisaṁvid.
68)
범어로는 Pratibhānapratisaṁvid.
69)
범어로는 saṁvṛti-jñāna.
70)
범어로는 daśajñāna.
71)
범어 sūtra의 음역어. 경(經)을 말한다.
72)
범어 geya의 음역어. 응송(應頌)을 말한다.
73)
범어 vyākaraṇa의 음역어. 기별(記莂)을 말한다.
74)
범어 gāthā의 음역어. 풍송(諷頌) 또는 게송(偈頌)을 말한다.
75)
범어 udāna의 음역어. 자설(自說)을 말한다.
76)
범어 nidāna의 음역어. 인연(因緣)을 말한다.
77)
범어 avadāna의 음역어. 비유(譬喩)를 말한다.
78)
범어 ityukta의 음역어. 본사(本事)를 말한다.
79)
범어 jātaka의 음역어. 본생(本生)을 말한다.
80)
범어 vaipulya의 음역어. 방광(方廣)을 말한다.
81)
범어 adbhutadharma의 음역어. 미증유법(未曾有法)을 말한다.
82)
범어 upadeśa의 음역어. 논의(論議)를 말한다.
83)
위타(韋陀)는 범어 Veda의 음역어.
84)
앙가(鴦伽)는 범어 aṅga의 음역어.
85)
범어로는 Atharva.
86)
귀신이란 야차(夜叉, Yakṣa)를 말한다.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