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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아발다라보경 제3권
39. 모든 논과 온갖 변설과 부처님 말씀
[모든 논과 온갖 변설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까닭]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모든 논(論)과 온갖 변설(辯說)을 부디 가까이하지 말라.
만약 가까이하면 탐욕을 받아들이고 법(法)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의 언론(言論)과 온갖 구(句)는 인연(因緣)과 비유(譬喩)를 채집하여 장엄한 것으로 어리석은 범부를 끌어들여 속이고 미혹시키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진실에 들어가 스스로 통달할 수 없으며, 모든 법을 깨닫지 못하고 망상으로 전도(顚倒)되어 두 극단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어리석은 범부는 미혹되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여러 세계[趣]에 끊임없이 상속하고, 해탈을 얻지 못하고,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지 못하고, 바깥 경계의 성자성(性自性)을 벗어나지 못하며 망상으로 계착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언론과 온갖 변설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와 미혹된 혹란(惑亂)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혜야,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여러 논을 자세히 알고 스스로 성론(聲論)을 만들었다. 세론자(世論者)에게 한 제자가 있어 용의 형상을 하고 석천궁(釋天宮)에 나아가 논의 종지[宗要]를 세워 천 복(輻)이나 되는 제석의 바퀴를 부수려고 꾀하였다.
‘만일 내가 진다면 모두에게 머리를 조아려 굴복시키려고 했던 점에 대해 사과하리라’고 맹세한 후 곧 법을 풀이함으로써 제석을 굴복시켰으며, 제석이 지게 되자 곧바로 그의 바퀴를 부수고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
이와 같이 대혜야, 세상의 언론[世言論]은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여 축생에까지 이르며, 또한 온갖 글귀로 저 모든 하늘과 아수라를 미혹시켜 생긴다는 견해와 없어진다는 견해에 집착하게 하니, 하물며 인간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혜야, 세상의 언론을 반드시 멀리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이 고통을 생기게 하는 인(因)을 불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니, 행여나 가까이하지 말라.
대혜야, 세론(世論)이란 오직 몸이 느끼는 경계를 말할 뿐이다.
대혜야, 저 세론자가 백천이 있더라도, 이들은 먼 훗날 마지막 50년에 결집(結集)을 깨뜨리기만 할 뿐이다. 악각(惡覺)을 인(因)으로 한 소견이 성한 까닭에 악한 제자가 이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이 대혜야, 세론은 결집을 깨뜨린다. 온갖 구절과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여 외도의 일을 말한 것이며, 스스로 인연에 집착한 것이니 스스로 통달함이 없다.
대혜야, 저 모든 외도는 스스로 통달한 논(論)이 없으므로 나머지 세론에 대해 한량없는 백천 가지 문(門)으로 자세히 설명하지만 스스로 통달함이 없으며, 또한 스스로 세론이 어리석은 것인 줄도 알지 못한다.”
[부처님의 말씀]
이때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외도와 세론이 온갖 글귀와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였지만 스스로 통달한 것은 없고 자사(自事)에 계착한 것이라면,
세존께서도 역시 세론을 말씀하시어 여러 다른 곳으로부터 온 모든 대중과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를 위해 한량없는 온갖 글귀로 자세히 설명하셨으니, 이 또한 스스로 통달하지 못하신 것입니까?
이 역시 모든 외도의 지혜로운 언설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론(世論)을 말하지 않았고 또한 간다거나 온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오직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대혜야, 온다는 것은 모이고 합해서 생기는 것이고, 간다는 것은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것은 곧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니, 내가 말한 것은 망상(妄想)인 세론 중 하나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이 아닌 것에 계착하지 않으면, 자심(自心)의 현량처(現量處)에서 두 극단에 치우친 망상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모습과 경계는 성품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깨달으면, 곧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은 생기지 않는다.
망상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공(空)ㆍ모습 없음[無相]ㆍ지음 없음[無作]의 3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대혜야, 내가 기억하기로 어느 때 어떤 곳에 머물고 있을 때, 세론자(世論者)인 바라문이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청하지도 않고 조용히 있다가 문득 나에게 물은 일이 있다.
‘구담(瞿曇)이시여,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입니까[所作]?’
나는 그때 대답하였다.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이 최초의 세론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까[非所作]?’
나는 다시 대답하였다.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두 번째 세론이다.’
그는 다시 물었다.
‘모든 것은 영원합니까[常], 모든 것은 무상합니까[無常], 모든 것은 생기는 것입니까[生], 모든 것은 생기지 않는 것입니까[不生]?’
나는 그때 대답하였다.
‘그것이 여섯 가지 세론이다.’
대혜야, 그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모든 것은 같습니까[一], 모든 것은 다릅니까[異], 모든 것은 함께합니까[俱], 함께하지 않습니까[不俱], 모든 것은 온갖 것을 인(因)하여 생(生)을 받아 나타나는 것입니까?’
나는 그때 대답하였다.
‘그것이 열한 가지 세론이다.’
대혜야, 그는 다시 나에게 물었다.
‘모든 것은 무기(無記)입니까, 모든 것은 유기(有記)입니까, 내[我]가 있습니까, 내가 없습니까, 이 세상은 있습니까, 이 세상은 없습니까, 다른 세상이 있습니까, 다른 세상이 없습니까, 해탈이 있습니까, 해탈이 없습니까, 모든 것은 찰나(刹那)입니까, 모든 것은 찰나가 아닙니까, 허공입니까, 자주 멸(滅)하는 것이 아닙니까, 열반입니까?
구담(瞿曇)이여, 만드는 것입니까,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중음(中陰)이 있습니까, 중음이 없습니까?’
나는 그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세론(世論)으로서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의 세론이다.
나는 오직, 끝없는 옛날부터 거짓된 망상(妄想)과 습기(習氣)와 온갖 악(惡)이 3유(有)의 인(因)인데, 자심의 현량인 줄 깨닫지 못해 망상을 일으켜 바깥 경계의 성품을 반연한다고 말할 뿐이다.
외도의 법에서는 나[我]와 모든 감관[根]과 뜻[義] 세 가지가 화합하여 지혜가 생긴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나는 인(因)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인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망상으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진 성품으로 시설된 연기(緣起)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그대나, 또는 나[我]는 상속한다는 견해에 떨어진 사람들이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열반(涅槃)과 허공(虛空)과 없어짐[滅]은 실제로 세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숫자로만 세 가지일 뿐이다.
또 대혜야, 그때 세론을 펴던 바라문은 다시 나에게 물었다.
‘어리석음과 애착의 업인(業因) 때문에 3유가 있는 것입니까, 원인이 없는 것입니까?’
나는 그때 대답하였다.
‘그 두 가지도 역시 세론이다.’
그는 다시 물었다.
‘모든 성품이 모두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들어갑니까?’
나는 다시 대답하였다.
‘그것도 세론이다. 바라문이여, 나아가서 뜻[義]으로 외진(外塵)에 계착하는 것은 모두가 세론이다.’
또 대혜야, 이때 세론을 펴던 바라문이 다시 나에게 하였다.
‘혹 세론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저는 모든 외도의 주장을 갖가지 글귀와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대답하였다.
‘바라문이여, 너희에게 없는 것이 있다. 이를 종(宗)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고 말[說]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온갖 말로 설명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인연과 비유로 장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바라문은 물었다.
‘세론이 아니고, 종(宗)이 아닌 것도 아니며, 말[說]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바라문이여, 세론이 아닌 것이 있다. 너희 외도들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바깥 경계의 성품에 진실하지 못한 망상으로 허위로 계착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있고 없는 것이 자심의 현량인 줄 확실히 깨달아 망상이 생기지 않고 외진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망상이 영원히 그치는 것이니, 이를 세론(世論)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설하는 법으로 너희에게는 없는 것이다.
바라문이여, 저 식(識)이라는 것을 간략히 설명하겠다. 오고 감, 죽음과 태어남, 즐거움과 괴로움, 잠김[溺], 견해, 접촉, 갖가지 모습에 대한 계착, 화합하여 상속함, 받아들임, 인(因)에 대한 계착,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등등의 것들은 모두 너희의 세론이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야, 세론을 펴던 바라문이 이와 같이 물어, 내가 이와 같이 대답하였더니, 그는 잠자코 말없이 물러가 자신이 통달한 것을 사유하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문석자(沙門釋子)는 모든 외도의 법을 벗어났다. 그는 생김도 없고 모습도 없고 인(因)도 없으며, 자기망상이 나타난 것인 줄 깨달으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혜야, 이것이 곧 네가 조금 전에
‘무슨 까닭으로 세론의 온갖 변설을 가까이하면 탐욕을 받아들이고 법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라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이다.”
[탐욕을 받아들이는 것과 법을 받아들이는 것의 뜻]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탐욕(貪欲)을 받아들이거나 법(法)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어떤 구의(句義)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네가 마침내 미래의 중생을 위해 깊이 생각해서 이런 구의를 묻는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탐욕이라는 것은 취하거나 버리거나 감촉하거나 맛보거나 하는 것이니, 외진(外塵)에 집착하여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다.
또 고음(苦陰)을 생기게 하는 것이니,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뇌하는 이와 같은 모든 근심은 모두 애착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는 세론과 세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에서 연유하니, 나와 모든 부처는 이것을 탐욕[貪]이라 한다. 이것이 탐욕을 받아들이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대혜야, 무엇이 법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자심의 현량을 잘 깨달아서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모습을 보고, 망상이 생기지 않으며, 높고 낮은 지위를 잘 알아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을 벗어나며, 모든 부처의 관정(灌頂)을 받아 지혜를 다 갖추고, 10무진구(無盡句)를 받아들여 모든 법에 개발(開發)함이 없이 자재한 것이다.
이를 법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모든 견해와 모든 허위와 모든 망상과 모든 성품과 두 극단에 치우친 온갖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혜야, 외도인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두 극단에 치우친 견해를 갖게 되니,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다.
영리하지 못한 사람은 인(因)이 없다는 논(論)을 받아들여 상견을 일으키고, 바깥 경계의 인(因)은 허물어지는 것이므로 인연은 성품이 아니라 하면 단견을 일으킨다.
대혜야, 그러므로 나는 생기고 머물고 없어짐을 보지 않는 것을 법이라고 말한다.
대혜야, 이를 탐욕(貪欲)과 법(法)이라고 하니,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세상의 논(論)은
외도의 허망한 말이다.
망상으로 짓고 지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들에겐 자종(自宗)이 없다.
오직 나만이 유일한 자종이니
짓고 지어지는 것을 벗어나
모든 제자를 위해
모든 세론을 멀리 벗어나라고 설한다.
심량(心量)은 볼 수가 없어
두 가지 마음을 관찰하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은 성품이 아니니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두 가지를 떠나라.
나아가 마음이 유전하면
이것이 곧 세론이 되니
망상이 구르지 않는 자
그 사람은 자기 마음 보리라.
온다는 것은 현상계[事]가 생기는 것이며
간다는 것은 현상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면
망상은 다시 생기지 않으리라.
유상(有常)과 무상(無常)
지어진 것과 지어진 것이 없음
이 세상과 저 세상 등
이것들은 모두 세간의 설통(說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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