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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기행 45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북유럽 +발틱 3국
북유럽 여행이라고 하면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해당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스칸디나비아 여행이라고도 하는데 이럴 때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3국에다 핀란드가 첨가 된다. 핀란드를 예외로 취급하는 것은 핀란드의 종족이나 역사가 앞의 세 나라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이들 4나라 외에 발틱 3국이라 일컬어지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덧붙여져서 7개국 여행이 되었다.
2009년 7월 20일. 오전 10시 30분. 우리 일행은 인천공항에서 헬싱키로 떠나는 핀란드 여객기에 탑승하였다. 관광을 떠나는 여행객의 심정이야 언제나 설레기 마련이지만 이번 경우는 과거의 다른 여행보다 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우선 우리와 멀리 떨어진 지리적 위치도 그러하지만 빙하니, 오로라니, 피오르드니 하는 북유럽만의 특이한 경치에 대한 이국적 그리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지하자원을 비롯하여 임산자원, 해산물에 이르기까지 자원이 풍부한 나라, 사회복지 제도가 가장 잘 된 나라. 이런 선진국에 대한 선망은 초등학교시절부터 익혀 온 것이기도 하다. 6․25의 전쟁과 굶주림을 체험한 우리 세대들은 평화롭고 풍요로움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온 이들 나라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 ‘지상의 낙원’이 있다면 누군들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바로 그런 관심의 대상으로서 우리의 머릿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전 10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한 핀란드 여객기는 핀란드 현지시간 오후 2시 5분에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다. 시차가 6시간이었으니 실제 걸린 시간은 10시간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헬싱키 공항에서 4시간 가까이 대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사실 공항 구내에서 4시간이란 지루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공항 안에는 우리 일행뿐 아니라 많은 승객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주로 한국인과 일본인들이었다. 유럽인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가족과 더불어 레스토랑이나 까페에서 맥주나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는 시간 자체를 즐기는 듯 했다.
의자에서 4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우리 일행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여유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우리도 까페나 레스토랑을 이용하면 되겠지만 근래에 환율의 폭등으로 값이 턱없이 비싸진 것도 문제지만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고 유로화에도 익숙치 못하다보니 돈 쓰는 모험도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오후 5시 45분에 헬싱키 공항을 출발하여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 25분. 그러니 4시간이나 대기하여 코펜하겐으로 날아간 시간은 고작 40여분 정도였다. 우리가 여장을 푼 곳은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호텔. 1급 호텔이라고 했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운전기사가 몰고 있는 리무진 버스에 동승한 우리 일행은 모두 38명이었다. 이 중에서 20여 명은 경상도 지방의 초등학교 교사들로 방학과 더불어 단체관광에 나선 길이라고 했다. 호텔 옆에 큰 호수 공원이 있었는데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바람이 제법 불었지만 숲과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더불어 산책을 나섰다. 일행 중 다른 사람들도 산책길로 나와 사진을 찍으며 즐겼다. 우선 청정한 공기의 느낌부터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녹색도시의 면모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북유럽은 여름이 되면 해가 일찍 뜨고 밤이 늦게 시작된다. 6월의 하지 무렵에는 아예 밤이 없다고 한다. 이른바 백야다. 우리가 도착한 7월 하순도 아침 3시면 동이 트기 시작해서 오후 10시나 되어서야 어두워진다. 반대로 겨울에는 아예 낮이 없는 때도 있다고 한다. 동지 무렵에는 해가 뜨는가 싶다가 바로 진다. 그러니 종일 밤의 연속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아예 집을 비우고 낮이 긴 지중해나 남방으로 여행을 떠나서 몇 달씩 머물러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새벽 5시쯤 되었을까? 오랜 비행시간의 여독 때문에 피곤했던지 아내는 깊이 잠들어 있다. 그래서 혼자 슬그머니 방을 나와 시가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호수를 지나고 강이 나온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니 바로 코펜하겐의 중심시가지다. 잘 다듬어진 도로와 아름답게 디자인된 건물들이 도시 전체를 하나의 미술품처럼 보이게 한다. 시청사 주변의 번화한 거리를 잠시 구경한 후에 아침식사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다. 잠든 사이에 나간 사람이 식사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길을 잃은 모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더란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겪고 호텔 식사를 마친 후에 관광버스에 올라 다시 거리 구경에 나섰다.
이곳 코펜하겐은 북유럽 최대의 상공업도시로서 강과 바다로 이어지는 긴 부두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다. 부두의 총연장이 42㎞에 달한다고 한다. 코펜하겐은 ‘상인의 항구’라는 뜻을 지녔으며 스칸디나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많은 공원과 푸르스름하게 산화된 중세의 구리 지붕. 아름답고 깨끗한 거리. 코펜하겐엔 궁전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다. 코펜하겐의 면적은 122평방. 인구는 140만. 덴마크 전체인구의 1/4이 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코펜하겐은 번화가, 식당가, 호텔가, 학생가, 서점가, 상점가, 주택가 등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각 거리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1852년에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던 성루를 없애고 도로를 만들면서 현재의 도시경관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일체의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는 젊은이들의 거주지 ‘크리스티아니아’가 있고, 1918년 노인 복지를 겨냥한 ‘노인의 거리’를 시내에 마련하였다. 성루의 안쪽에 해당하는 구시가는 크리스찬 4세에 의해서 건축된 ‘원탑(圓塔)’과 ‘증권거래소’ 등의 기념비적 건조물과 옛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우리 일행은 시청이 있는 광장부근에서 버스를 내렸다. 가이드가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쇼핑의 거리로 알려진 보행자 전용 도로인 ‘스트로이에’ 거리로 접어들었다. 아침인데도 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쳤다. 친절한 코펜하겐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길옆에 즐비한 상가에는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매우 붐비었다. 서울의 인사동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광장의 가장 중심부에 시청이 있었다. 시청사(1905년)는 빨간 벽돌 건물로 웅장했다. 시청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시계탑이다. 시간을 알리는 시침과 분침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30분에 두 차례씩 정확히 시간을 알려준다. 시청 앞엔 넓은 광장이 있는데 이는 시민들에게의 집회의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서란다. 시청 옆의 한쪽에 관광객들이 몰려 있다. 안델센의 동상이라고 했다. 관광객들은 어려서부터 즐겨 읽던 안델센의 동화를 생각하며 그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시청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티볼리 공원(Tivoli)’이 있다. 이 공원은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으로 1843년에 문을 열었다. 덴마크에서 가장 큰 놀이동산이다. 디즈니랜드의 전신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이곳에서 음악, 전시회 등 문화행사가 열린다. 공원 안에는 갖가지 문화시설과 놀이기구가 있으며, 매일 댄스, 팬터마임, 콘서트, 특별행사 등이 이어진다고 한다. 밤에는 나무사이로 수천 개의 불빛이 화려하게 불을 밝히며, 매주 수, 금, 토요일 밤에는 불꽃놀이가 펼쳐지기도 한다.
우리는 걷기도 하고 때로는 버스를 타기도 하면서 시내 곳곳을 관광했다. 국립박물관은 크리스티앙 궁전 앞에 있다. 석기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덴마크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다. 덴마크인들의 전통양식과 바이킹족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다양하게 전시해 놓고 있다. 그중에서도 보석으로 장식된 '태양의 사륜마차'가 특별하다.
로젠보그 성은 크리스티앙 6세(1577~1648)가 여름철 별궁으로 지은 것으로, 17세기 동안 왕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크리스티앙 6세의 의복을 비롯해 왕관, 목걸이, 귀걸이, 무기 등 왕실의 귀한 보물들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아말리엔보그 궁전은 덴마크의 여왕 마가렛 2세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헨릭 공주가 거주하는 로코코 양식의 궁전이다. 궁 안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벽돌로 된 광장에서 근위병들의 모습과 그들의 교대식을 구경할 수 있다. 크리스티앙보그 궁전은 1794년까지 스웨덴 왕족들의 집으로 사용된 궁전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방들이 관공서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는데, 여행자들에게는 만찬장만 입장이 허용된다.
토발드센 박물관은 크리스티앙보그 궁전 맞은편에 있다. 덴마크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인 토발드센을 기리기 위해 1839~1848년에 세워졌다. '헤라클레스', '비너스' 등 조각품들과 은수저 등 그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인어공주 조각상은 코펜하겐 북쪽 린게리니 거리를 따라 펼쳐지는 해안의 한 곳에 있다. 슬픈 표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 인어상은 안데르센의 유명한 동화 '인어공주'를 모델로 해서 1913년에 에릭센이 만든 작품이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조각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작고 왜소해서 실망감을 줄 정도였다. 그래도 인어상 주위에는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었다. 우리 부부도 인어상을 배경으로 몇 커트의 사진을 찍었다. 인어상 부근에 아름다운 성터공원이 자라잡고 있는데, 성 알반스 교회옆에 있는 게피온 분수가 유명하다. 분수의 조각상이 덴마크의 오랜 전설을 담고 있다고 해서다. 그리고 처칠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영국인들이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파인아트 왕궁미술관, 루이지아나 현대미술관 등이 알려진 관광지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구경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쯤 달려서 작은 시골도시에 자리하고 있는 프레드릭보그 성으로 갔다. 이곳은 '북유럽의 베르사이유'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왕궁이다. 성 둘레로 호수가 있어서 운치가 그만이다. 이 성은 덴마크 르네상스 양식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앙 4세에 의해 왕실의 거주지로 세워졌다. 앞에 넵튠의 분수가 있고, 내부에 예배당과 기사의 홀이 있다. 관광시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궁전의 전모를 구경하기 위해 사뭇 뛰어다녀야 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의 나무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무가 많은 이 지역에 대한 선입관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덴마크는 어떤 나라?
덴마크는 유럽 북서부에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덴마크왕국’으로 불린다. 면적 4만 평방. 인구 540만. 483개의 섬과 유틀란트반도로 이루어진다. 수도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섬을 비롯하여 핀·롤란드·팔스테르 등의 섬과 유틀란트반도의 동쪽 반은 얼음으로 덮여 있다. 반도의 서부는 대륙빙하가 녹은 물줄기에 의해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연안이 얕아서 해안에서 10㎞ 지점에 있는 여러 섬에는 흙으로 높이 쌓아 만든 도로가 있어 썰물 때에 연락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덴마크가 근대산업국가로 발돋움한 것은 1848년 코펜하겐에 무혈혁명이 일어나 절대왕정이 붕괴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이후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어 영토가 극도로 줄게 되자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되찾자”는 경제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업·공업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이룩하였다. 1866년 시작된 공동조합운동을 비롯하여 1882년 공동낙농협회가 설립되어 농업혁신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신대륙과 러시아에서 값싼 곡물이 대량으로 서유럽에 유입되어 종래의 곡물중심의 농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을 때도 일찍이 낙농업으로 전환한 덴마크는 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덴마크는 농산물가공의 규모 및 생산성이 세계적이며 농기구생산도 가장 발달되어 있다. 현재 공업생산액은 국민생산 중에서 농업의 2배가 넘고, 수출 비율은 전 수출액의 약 2/3에 해당한다. 농산물의 약 70%는 수출된다. 19세기까지 국토의 4%였던 삼림은 식림으로 현재 10%가 되었고 국내 목재수요의 절반을 충당하고 있다. 어업은 연간 어획량이 약 170여만 톤이나 된다. 주요 어종은 대구류·넙치류·연어류·청어류 등이다. 북해에서 유전과 천연가스가 발견된 이후 석유수입 의존율이 감소됨으로써 산업개선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1870년대 이후, 덴마크는 평화주의를 표방해 왔다. 국민 사이에 힘에 의한 권위를 배제하는 전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권력, 친권, 남성의 우월성 등에 부정적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가족관의 육성, 관념적인 성도덕의 부정, 남녀평등, 언론·표현의 자유가 세계에서 가장 잘 실현되고 있는 나라다. 이런 의식이 ‘국민고등학교운동’에 의해 고양되고 있고, 평화주의와 더불어 북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크루즈 여행의 즐거움과 우리의 생활수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선착장으로 이동하여 오슬로로 떠나는 여객선을 탔다. 4,5천여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라고 한다. 우리는 4인실 1조로 되어 있는 방을 배정 받아 짐을 푼 후에 갑판으로 나갔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갑판의 의자에 몸을 붙이고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 멀리 스칸디나비아 산맥이 우뚝하다.
북유럽 끝 지락에 가로누워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와 핀란드, 아이슬랜드까지 포괄하는 이들 나라는 이 지상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하고 사회적으로도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의 혜택이 골고루 미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적 조건이나 기후는 그리 좋은 편이라고 할 수가 없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3개국 국토의 1/3은 북극권(툰드라)에 속하며 주민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대부분이다. 위도 상으로는 알래스카와 같은 위치다. 다만 맥시코만 난류로 추위가 조금 덜할 뿐이다. 5월 말부터 7월 말까지 73일 동안 해가 지지 않고 11월 말부터 1월 말까 51일간 해가 뜨지 않는 백야(白夜)현상의 나라. 만년설 빙하지대도 있고 눈도 엄청 많이 내리는 나라. 농산물을 생산하기에는 기후가 너무 춥고 사람이 살기에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이처럼 불리한 자연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국민들은 일찍부터 진취적이고 근면한 생활 태도로 환경을 적절히 활용하고 개발하여 왔다. 그리고 근대 이후, 중립주의를 내세워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오면서 안정적인 정치·경제·사회 발전을 이룩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 복지 사회가 되었다.
덴마크는 1890년대 초에 이미 건강보험제도와 노인 연금제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오늘날 무료 의료혜택, 무료 교육의 실시, 실업수당과 노인연금, 장애자 보조금, 극빈자 구제, 구타당한 아내 보호, 맞벌이 부모 자녀의 육아문제 해결, 남성에게까지 지급되는 출산수당 등의 개인에 대한 복지정책이 세계 제일이다. 그리고 산간 마을이나, 최북단의 고립된 마을 등 수많은 작은 마을 등에도 공익사업 및 통신시설을 제공하여 지리적인 불평등까지 해소하고 있다.
부자 나라의 여행답게 크루즈 여행은 모든 게 풍성했다. 저녁 식사로 뷔페식당에 초대되었는데 우리 일행은 한 자리에 몰아서 앉게 되었다. 음식 외에 포도주 한 잔씩이 특별 서비스로 제공 되었다. 일행 중의 하나가 술이 모자라는 사람들을 위해서 몇 병의 포도주를 사서 병째로 돌렸다. 그래서 술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대 환영을 받았다. 좋은 음식이 있고 술이 있고 음악이 있는 곳. 배가 크고 넓어서인지 파도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음식을 들며 화제는 끝이 없어서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배에는 레스토랑, 가페는 물론 영화관, 무도장, 쇼핑센터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식사 후에 관광객들은 이리저리 몰리면서 구경도 하고 물품을 쇼핑하기도 했다. 면세점의 경우는 면세품이라 물건값이 다른 곳보다 싸고 품질도 좋다고 한다. 우리의 편의점에 해당하는 수퍼마켓도 있어서 일용잡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그리 낯선 종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새삼 우리의 생활수준이 이들의 생활수준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6․25 전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선진국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한국의 위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지 곳곳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 관광지를 소개하는 한국어 방송. 쇼핑을 즐기는 한국인들의 씀씀이. 모두가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계의 선진국과 어깨를 겨룰만하게 된 경제적 발전의 배경에는 남북전쟁 이후 온 국민들이 근면, 절약, 협동으로 뭉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치자들의 산업개발 의욕에 온 국민이 동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발전도 치열한 세계적 생존경쟁의 각축장에서 낙오하게 되면 순식간에 한 줌의 거품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이렇다할 자원이 없고 오직 재능 있는 근로자들의 힘에 의해 산업이 지탱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무장이야 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들이나 사회의 지도층들이 어려웠던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더 이상 이 나라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한 마음으로 뭉쳐서 나라의 발전에 매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어떻게 이룩한 경제발전인가? 선배들의 헌신과 희생의 값진 대가를 헛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 백의민족의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서. 현재의 사회지도층들은 근신하는 마음으로 민족의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