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학란에 대한 상제님의 만류
개항(開港) 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 경쟁은 갑신정변 후에 더욱 가열되었다.
청국과 일본, 러시아와 영국까지도 조선 문제로 충돌하게 되어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더욱이 개항 이후 잦은 국제적 분쟁으로 배상금 지불과 근대 문물의 수용경비로 지출이 늘게 되어 국가재정은 더욱 궁핍해졌고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수탈과 압제도 더욱 심해졌다.
한편 조선의 농촌경제는 일본의 침투로 더욱 피폐해져 갔다. 일본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일시적으로 청국에 밀려 약세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청국보다 오히려 강세를 유지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처음에는 청국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영국산 면제품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파는 중개무역을 하였으나 점차 자국제품으로 대체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으로 수출하는 조선의 수출품은 쌀이 주 상품이었는데 일본 상인들은 조선 농민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하여 고리대금업이나 싼 값으로 입도선매를 하는 방법으로 폭리를 취하였다.
이리하여 농촌 경제는 갈수록 황폐해지고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적개심도 깊어갔다. 이렇게 조선의 농촌경제가 병이 깊어가자 농민층의 불만이 팽배해지고 사회불안이 점증(漸增)하는 가운데 사회변혁의 요구가 커져갔다.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갔다. 동학의 인간평등사상과 후천개벽과 같은 사회개혁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包接制)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은 조직적인 농민 반란의 양상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구한말의 농민봉기는 백성들의 생목숨만 앗아갔을 뿐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여 청일전쟁을 유발시켰으니 조선강토를 오히려 전란(戰亂)으로 얼룩지게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상제께서는 최제우가 창립한 동학으로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없음을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상제께서는 동학란 역시 실패할 것임을 아시고 무고한 생명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유독 이 동학란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남기셨다.
이 해에 고부인(古阜人) 전봉준(全琫準)이 동학도를 모아 의병을 일으켜 시정(時政)에 반항하니 세상이 흉동되는지라. 이 때에 금구인 김형렬(金亨烈)이 상제의 성예를 듣고 찾아 뵈인 후 당시의 소란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글 읽으시기를 청하므로 글방을 폐지하고 전주군(全州郡) 우림면(雨林面) 동곡(銅谷) 뒷산에 있는 학선암(學仙庵)으로 가셨으나 그곳도 번잡하기에 다른 곳으로 떠나셨던 바 그 곳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도다.
― 전경 행록 1장 21절
전봉준이 학정에 분개하여 동학도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흉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 때에 상제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아시고 여름 어느 날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상제의 말씀을 좇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
― 전경 행록 1장 23절
│한시 풀이│
달은 어두운데 기러기는 높이 날고, 선우(單于)씨는 밤에 숨어서 도망한다.
이들을 잡으려는 장수는 기병을 풀어 쫓아오는데, 큰 눈이 활과 칼에 가득 쌓이는구나.
결국 동학란은 상제께서 예언하신 대로 갑오년을 넘기지 못하고 수없는 무고한 인명만 상하게 한 채 그해 겨울에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서 궤멸(潰滅) 당하고 말았다.
그때의 상황을 전하는 상제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해 시월에 동골에 가사 동학접주(東學接主) 안윤거(安允擧)를 방문(訪問)하시니 마침 태인 닥뱀이 안필성(安弼成)이 한 마을에 사는 동학신도 최두연(崔斗淵)과 함께 와서 윤거에게 도담(道談)을 듣고 있더라. 상제께서 마루에 걸터앉으사 윤거와 더불어 성명(姓名)을 통(通)하신 뒤에 일러 가라사대 고부에서 난리가 일어나서 동학군(東學軍)이 황토마루(黃土峴)에서 승리(勝利)를 얻었으나 필경(畢竟) 패망(敗亡)을 면치 못하겠으므로 동학군의 발원지(發源地)인 이곳에 효유하러 왔노라. 그대가 접주(接主)라 하니 삼가 전란(戰亂)에 참가(參加)하기를 회피(回避)하여 무고(無辜)한 생민(生民)을 전화(戰禍)에 몰아들이지 말라. 섣달이 되면 그들이 전패(全敗)하리라. 하시고 돌아가시는지라. 윤거 이 말씀을 듣고 드디어 접주를 사면(辭免)하고 전란에 참가치 아니하니 최두연은 믿지 않고 윤거의 대(代)로 접주 겸 명사장(明査長)이 되어 윤거의 부하(部下)를 인솔(引率)하고 출전(出戰)하더라.
― 대순전경 초판 제1장 15절
이때에 김형렬(金亨烈)이 필성의 곁에 있다가 상제께서 필성과 수작(酬酌)하시는 말씀을 듣고 인사를 청하거늘 형렬에게도 종군하지 말라고 권하시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상제의 말씀을 믿지 않고 종군하여 가다가 청주 병영 앞 산골에 이르니 좌우에서 복병(伏兵)이 일어나서 포화(砲火)를 퍼부음에 동학군에 죽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지라. 필성과 형렬은 황겁(慌怯)하여 몸을 빼어 송림(松林)속으로 들어가니 상제께서 이곳에 계시다가 불러 가라사대 너희들은 잘 도망(逃亡)하여 왔도다. 이곳은 안전(安全)하니 안심(安心)하라. 하시니 형렬은 비로소 상제의 지감(知鑑)이 비상(非常)하심을 감복(感服)하니라. 두 사람은 종일(終日) 먹지 못하여 주림을 이기지 못하거늘 상제께서 돈을 내어주시며 가라사대 저곳에 가면 떡집이 있으리니 주인이 없을지라도 떡값을 수효(數爻)대로 떡그릇 안에 두고 떡을 가져오라. 필성이 명하신대로 하여 떡을 가져오니 상제께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먹이시니라.
― 대순전경 초판 제1장 19절
상제께서 두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동학군이 미구(未久)에 쫓겨오리니 우리가 먼저 감이 옳으리라 하시고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오실 때 진잠에 이르러 문득 가라사대 동학군이 이곳에서 또 많이 죽으리라 두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불쾌히 생각하거늘 가라사대 저희들을 미워함이 아니요 사태(事態)의 진전(進展)될 기미(機微)를 말함이니 아무리 듣기 싫을 지라도 불쾌(不快)히 생각하지 말라 하시니라. 산중유벽(山中幽僻)한 곳에 쉬시더니 얼마 아니하여 총소리가 어지러히 일어나며 그 곳에서 격전(激戰) 끝에 동학군이 많이 사상(死傷)하니라.
― 대순전경 초판 제1장 20절
심지어 상제께서는 동학란의 앞날을 예견하시고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하셨으며 동학군의 접주를 만나 싸움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기도 하셨으니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큰 물결 앞에 민초(民草)를 하나라도 더 건지고자 함이셨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행함에 있어 전해오는 일화(逸話)가 있으니 그때는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연세(年歲) 23세이시던 상제께서 전주부에 들어가서 접주와 면담한 적이 계셨는데 그 때 동학군의 거병으로 인하여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해 설명하고 전투를 중지할 것을 권고하신 바가 있었다.
“내말을 잘 들으시오. 동학군이 황토현에서는 이겼으나 이것은 한 때일 뿐이요. 이번에 관군뿐 아니라 왜병까지 오게 될 것이오. 자네들은 조선 팔도를 전쟁터로 만들 셈인가? 무고한 생민들을 전쟁터로 끌어내 죽이지 말라.”
“우리의 뜻은 왜놈은 물론 서양 세력도 물리치는 것이요. 우리는 전주를 장악하고 서울로 진군하여 탐관오리를 주살하고 상감을 도와 구국제민하려는 것이요.”
“동학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오. 지금 조정에서는 동학군을 진압할 명분도 힘도 없소. 그러면 어떻게 되겠소. 결국은 외국의 힘을 빌어 자기네들의 연명을 꾀하게 되지. 청나라가 손을 대면 왜가 가만히 안 있어. 일본이 출병하면 청국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요. 동학이 나서게 되면 조정의 입장이 청국과 일본에 꼬투리를 잡히게 됩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동학은 해산하는 것이 좋소. 동학군은 눈이 내릴 시기에 패망할 것이요.”
“무엇이라고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쇼. 오늘은 그냥 보내지만 다음엔 가만 두지 않겠소. 썩 물러가시오.”
“사람 죽이는 일이 그렇게도 바쁘신가? 그렇다면 나는 사람 살리기에 바쁜 사람이요.”
이러한 사정은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동학이 본래 거의(擧義)한 뜻은 나쁘지 않으나 동학군의 봉기로 인하여 당시 조선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봉기로 인하여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를 미리 감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동학은 민중들의 쌓이고 쌓인 불만과 일본의 횡포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으나 결국은 조선 강토를 들쑤셔 전란이 퍼지고 백성들의 생목숨을 잃게 한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