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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왕 이성복
정지돈 소설가
● 인터뷰의 달인
이성복은 7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에서 살아있는 전설에 가깝다. 오규원은 죽었고 김지하는 미쳤고 황지우는 떠났고 이승훈은 뭐하는지 모르겠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최승자와 이성복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시인의 영역을 한 없이 축소하고 단순화한 것이지만, 사실 문학계 외부의 사람이라면 지금 나열한 이름도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가 과문한 탓이니 그의 문제다. 나 역시 글을 쓰기 전까지는 이성복에 대해서 몰랐다. 이성복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대학의 문창과에서는 누구나 그의 시집을 끼고 다녔다.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필수코스였고 <남해금산>과 <아, 입이 없는 것들> 같은 이후 시집은 심화코스였다. 어쨌든 거쳐 가야한다.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이성복을 모르고 지나갈 순 없다.
나도 한때 시를 썼고 이성복을 필사했고 따라한 적이 있지만 좋아했나 잘 모르겠다.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성복의 인터뷰를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최근까지도 그의 인터뷰를 자주 인용했다. 패션지에서 했던 인터뷰였는데 그는 시가 위기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시가 사라지려면 사라지라지. 사라질 만하니까 사라지는 것 아닌가.
책이 사라지려면 사라지라지. 사라질 만하니까 사라지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나는 그의 말을 바꾸어 말하길 좋아했다. 사라져서 안 되는 건 없다. 사라지고 나면 사라진 건데 사라지면 안 되고 말고 할 게 뭔가. 사라지지 않은 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했듯 존재하면 아직 죽지 않았고 죽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나는 아직 한국에서 이성복만큼 인터뷰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외국에는 한 명 있다. 베르너 헤어조크). 이성복은 아포리즘과 비유, 동서양의 경구를 자유롭게 오가며 질문에 답한다. 그가 인용하는 경구들은 상투적이지 않고 현학적이지도 않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일본 노의 거장 제아미의 <풍자화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아미는 아름다움을 열 단계로 구분했다. 이성복은 그중 가장 높은 세 가지 단계를 인터뷰에서 들려준다. 3위는 上下의 단계로 銀椀裏盛雪. 하얀 은그릇에 흰 눈이 담겨있는 모습이다. 동일성의 미학이며 완벽한 일치의 풍경이다. 2위는 上中의 단계로 雪覆千山 爲其麽高峯不白. 천산만산에 흰 눈이 덮여 있는데 제일 높은 봉우리만 검은 풍경이다. 동일성을 뛰어넘는 차별성의 미학이다. 완벽한 일치가 숨막히는 죽음을 뜻한다면 차별성은 생명이며 툭 불거져 나온 진실이다. 1위는 上上의 단계로 新羅夜半日頭明. 신라의 한밤중에 해가 빛난다는 말이다. 인간의 분별을 뛰어넘는 불립문자의 세계며 무경계의 미학이다. 다시 말해 말이 되지 않는 상황,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뜻한다.
이성복은 이런 이야기가 적힌 노트를 따로 가지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한번은 아도르노, 피카소, 브레송, 베케트가 적힌 수첩이 있다고 했고(“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실패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패하는 것이다”) 한번은 불가능에 대한 미셸 슈나이더와 발터 벤야민, 모리스 블랑쇼의 구절을 모아놓은 쪽지가 있다고 했고(“밤에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가 남는다”) 한번은 김수영, 카프카, 김현 등 좋아하는 작가들의 구절을 모아놓은 책이 있다고 했다. 책의 이름은 ‘꽃에 이르는 길’. 제아미의 ‘지화도’를 이성복 식으로 풀어 쓴 것이다. 나는 꽃을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성복의 ‘꽃에 이르는 길’은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 비유에서 비유로
2014년 이성복은 열화당에서 산문과 대담, 미발표 시를 엮은 세권의 책을 냈다. 다음과 같은 책들이다.
<끝나지 않는 대화 - 시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 이성복 대담
<고백의 형식들 - 사람은 시없이 살 수 있는가> 이성복 산문
<어둠 속의 시 – 1976-1985> 이성복 시집
그리고 2015년에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세권의 시론집을 냈다. 시론집은 다음과 같다.
<극지의 시> 2014-2015
<무한화서> 2007-2015
<불화하는 말들> 2006-2007
이성복은 이전에도 아포리즘 성격의 산문집을 냈고 사진과 글을 함께 담은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아포리즘 형식을 좋아하는데, 그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뽑아서 모아놓는 것도 일종의 아포리즘 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시론집은 그의 강의를 묶어놓은 것으로 또 다른 아포리즘 모음집이지만 예전 쓴 산문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것 같은 동시에 그가 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시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그 방식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가 시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이 곧 그의 시와 철학이다.
이성복이 시를 말하는 수사적 용법은 두 가지다.
1. 아포리즘
2. 비유
비유는 이번에 이성복의 책을 정리해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원래 비유를 좋아하긴 했지만 말년의 강의에서는 비유 없이는 한발도 전진하지 않는다. 비유를 통해 설명을 시작해 설명 중간에 떠오르는 또 다른 비유로 건너간다. 아포리즘에서 비유로, 비유에서 비유로, 비유에서 아포리즘으로 옮겨간다. 그는 모든 곳에서 시에 대한 비유를 찾아내는데, 특히 구기 종목과 일상생활에서 비유를 찾는 걸 좋아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1. 구기 종목
– 골프공을 홀컵 가까이 붙이는 것을 ‘어프로치’라 해요. 예술 또한 서로 다른 것들을 붙여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에요.
– 골프 처음 배울 때, 양쪽 다리에 벽을 쌓으라 하지요. 벽이 없으면 힘을 모을 수가 없어요. 시 쓰기에서 양쪽 다리라 하면, 진정성과 언어감각일 거예요.
– 배구를 발리볼이라 하지요. 공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쳐야 해요. 시도 의미가 파악되면 바로 죽어버려요.
– 농구감독 이충희가 그랬대요. 연습 끝나고 집에 간다 해놓고, 혼자 돌아와 공을 천 번 더 던지고 갔다고.
2. 일상생활
– 오늘 아침 아파트 10층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손가락에서 담배를 놓쳐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어요. 저의 글쓰기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글을 쓴다는 아무 느낌도 없는 글쓰기.
– 시는 환승하는 거예요. 여기 올 때 지산동에서 버스 타고, 만촌역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강창역에서 내리잖아요. 환승은 아무리 많아도 두세 번이지, 대여섯 번 하는 사람은 없어요. 시도 꼭 그만큼이에요. 너무 자주 갈아타면 목적지가 없는 거예요.
– 고스톱 칠 때, 손에 든 거 한 장 내놓고 바닥의 것 들칠 때의 느낌 아시지요. 그 설렘으로 다음 행을 이어주세요.
– 말을 벗기려면 내가 먼저 벗어야 해요. 연애할 때 서로 옷을 벗잖아요. 말은 에로틱한 거예요.
– 아무 부담이 없을 때 가장 맑은 목소리가 나와요. 지나가다가 가래침 한 번 툭 뱉듯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해요.
이성복의 세계 안에서 이 모든 비유적 아포리즘들은 시와 삶에 대한 은유가 된다. 이성복에게 시 쓰기는 곧 삶의 다른 이름이다. 그에게 시는 온 몸으로 쓰는 것이며 불가능이고 삶은 속절없고 부질없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시 쓰기는 속절없고 부질없는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온 몸으로 부딪히는 불가능한 노력이다.
이성복이 시와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두 가지다.
1. 불가능
2. 속절없음
나는 이 두 태도가 이성복의 글쓰기를 아포리즘과 비유로 몰고 간다고 본다. 아포리즘은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허무주의자의 양식이다. 무의미와 불가능을 전제하고도 긴 글을 쓴다면 그건 미친 사람이다.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정신병자만이 무의미한 언어를 끊임없이 내뱉을 수 있다. 허무주의자의 언어는 반대다. 짧고 의미로 가득하다. 무의미와 불가능을 전제에 둔 작가들은 짧은 경구로 불가능을 노래한다. 동시에 비유는 불가능한 정의를 감당하지 못하는 도망이자 이성복의 표현을 빌리면 뒷통수치기다. 계속 발을 빼면서 한 마디씩 얹는 방법이다. 시가 무엇인가. 인생이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성되는 물거품들로 치장하고 또 치장한다. 그러니까 1. 아포리즘과 2. 비유는 1. 불가능과 2. 속절없음에서 자연히 도래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시를 못 쓴다고 인터뷰에서 투덜대는 것, 그리고 시에 대한 이론적인 이야기를 멈춘 것과 연결된다. 불가능 앞에서 조사나 통계나 분석 등 목적을 전제에 둔 활동이 불가능하다.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오직 가능한 것은 세상에 떠도는 불가능에 대한 말을 가지고 오는 것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스윙을 하는 것 밖에 없다. “한 번의 스윙과 한 번의 시 쓰기. 둘 다 짧잖아.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고. 인생이 안 그러나? 한 번의 스윙하고 한 사람의 인생하고 다를 게 뭔가.”
● 시여, 침을 뱉어라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김수영
시에서의 진실은 몸으로 견디고, 몸으로 버티고, 몸으로 때운 진실이다.
– 이성복
다시 간단한 연결고리를 만들자. 삶에 대한 이성복의 태도인 불가능과 속절없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이성복의 비유와 아포리즘에서 일상이나 구기종목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뭘까. 이성복 사유의 중심에는 몸이 있다. 이성복의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몸은 그에게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뜻하는 것이자 의식의 뒤에 자리한 무의식을 가리킨다. 비유를 통해 이야기 했듯 그에게 글쓰기는 의식하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스윙과 같아야 하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 시는 ‘몸’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 그(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 발터 벤야민
이러한 관점에서 이성복 사유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구기 종목 –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몸을 이룰 수 없음 – 불가능
2. 일상생활 – 몸이 가진 남루함 – 속절없음
– 1의 해
1의 경지는 이성복이 여러 번 인용한 바 있는 공자의 종심소욕의 경지로 성인의 경지이기에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이성복은 이러한 경지를 이룰 수 없음이 곧 시라는 사실을 묘하게 긍정하는 이중의 수를 통해, 시가 근본적인 불가능에 닻을 내리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몸이 시가 되는 자연스러운 경지에 다다라야 하지만, 시가 몸 그 자체가 되어 쓰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시가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 다다를 수도 없고 다다르는 것이 의미도 없다는 인식.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모순된 인식은 불가능에 대한 그의 사유를 더욱 공고히 해준다. 그러나 이렇게 몸에 대한 사유가 뫼비우스의 구조를 그릴 때 더 이상 그가 사랑하는 운동과 시의 비유는 무의미해진다. 운동이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행위를 근육에 기억시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자연스러운 활동이 가능해진다고 했을 때 운동은 제 목적을 이룬 것이 된다. 그에 반해 시는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잘 쓰는 경지에 이를 수 있으나 그 경지에 이른 순간 그 경지가 시를 배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숙명에 처한다. “지금의 시 쓰기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쓰는 일이 너무 쉬워졌어요. 그래서 저 자신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뭘 써도 시가 된다? 그건 칭찬이 아닙니다. 시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는 얘기지요.” 이 지점에서 시는 운동과 갈라설 수밖에 없는데 이는 시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언어, 의식이기 때문이다. 시의 이런 분열증적인 점이 시를 스포츠가 아닌 예술로 만들며 불가능에 대한 인식을 강하게 한다. 그러니까 시에는 마이클 조던이나 김연아가 존재할 필요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이성복이 비유를 든 페더러와 나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시론의 바탕에 이러한 인식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스포츠와 결합시키는 이유는 뭘까. 스포츠의 몸은 시에서와 달리 분열증적이지 않다. 마찬가지로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온몸은 스포츠의 몸과 연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조금 비약을 해보자. 이성복은 시의 분열증적인 측면을 이야기하지만 그가 뿌리 내리고 있는 태도에서 비롯한 두 수사적 용법인 비유와 아포리즘은 사실 분열증이 아닌 스포츠의 지점에 닿아있는 것 아닐까. 그의 사유가 얘기하는 불가능, 시가 가진 분열증은 이미 사라졌고, 그는 불가능을 진리로 상정한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에 다다른 것 아닌가라는 얘기다. 그에게 시는 언어의 스포츠와 같은 것이었고 그는 언어의 스포츠에서 페더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의 비유에서처럼 훌륭한 타자가 되어 자연스러운 스윙-비유를 거듭하는 경지에 오른 것 아닐까. “문학과 관련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그야말로 핵심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렇게 됨으로써 내가 잃어버리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지혜는 삶의 쓰디쓴 열매인데 그건 경험이라는 꽃이 떨어져야 생기는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혜가 생겼다는 건 경험이라는 꽃이 이미 떨어졌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렇다면 이성복에게 있어 분열증은 시의 불가능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가능함에 불가능이라는 관념을 주입하려고 하는 강박에서 비롯되는 걸지도 모른다. 왜 이성복은 불가능하지도 않고 해본적도 없는 것에 불가능을 주입해야한다는 강박을 거듭하게 됐을까. 2의 해는 거기에 대한 답이다.
– 2의 해
이성복은 박준상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한 제게는 앞서 이 길을 갔던 작가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고, 그 앞에서 늘 모자람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제가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 부끄러워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 부끄러운 사람은 부끄럽다는 말도 못 해요. 내심에서 저는 제가 누구인지 압니다. 어느 지점에서 책임을 회피했고 어느 지점에서 변절했는지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특히 글쓰기와 관련해서는 자신에게 너그러울 수가 없습니다. (…) 얼마 전에 히말라야 여덟 개 봉을 등정했다는 사람이, 알고 보니 꼭대기 끝까지 안 가고 그 밑에서 사진만 찍고 왔다더군요. 제 글쓰기도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구두선口頭禪
평론가 강동호는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모더니스트들은 왜 나중에 낭만적으로 전향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시인들을 신비화하는 문화와 한국의 문학이 왜 감정 중심적인가하는 것도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에 대한 답을 근대문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의 관계로 풀어나간다. 최근에 만난 한 그래픽 디자이너는 내게 한국 작가들은 늙으면 왜 [논어]를 보느냐고 물었다. 여기서 [논어]는 [성경]이나 [도덕경], [금강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왜 그들은 초월적이 되는 것일까.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활동했던 한국의 예술가들 중 상당수가 이후 종교적 사유로 귀의하는 경향을 보인다. 나 역시 이게 궁금했고 예술가의 스테이트먼트에 글을 쓰면서도 이러한 의문은 반복되었다. 이우환, 오규원, 이승훈, 이성복 모두 양상은 다르지만 동양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이후 사유와 작업을 멈추고 초월적인 경향, 아포리즘이나 종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이 부딪치는 벽과 모순은 무엇일까. 작업을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종교적인 사유로의 귀환을 만들어내는 걸까. 이성복은 2014년 인터뷰에서 초월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은 구두선에 불과하고 시의 관점에서 보면 초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의 진단은 정확하지만, 그는 곧 이 두 개의 긴장이 예술의 존재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사이에 대한 감각이 예술과 시의 방식이라는 것을 긍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말 초월과 시 사이에 이성복이 말한 상태의 긴장이 존재할까. 시는 왜 종교나 초월의 관계 속에서 긴장을 찾는 것일까. 범위를 더 넓히면 문학은 왜 종교와의 사이에서 긴장을 갖는 것일까. 과학과 예술 사이에서 긴장을 찾을 수는 없나. 정치와의 사이에서는? 또는 예술 내적인 질서에서 계속되는 긴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동양 경전은 왜 끊임없이 소환되는가. 정말 경전 속에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다시 반복하자면, 왜 예술이 초월적인 진리 찾기의 게임이 되어야 하는가. 이성복은 이 지점에서 다시 생사의 문제를 끌어온다. 결국 예술은 생사의 문제를 이야기하느냐 마느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생사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에게 곧 종교/초월적 사유에 관한 문제가 된다. 예술의 언어는 여기에 답할 수 없고 그래서 불가능의 상태로 귀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 찾기는 첫 번째 생은 고통이고, 두 번째 예술은 이에 답할 수 없으며, 세 번째 예술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보여줄 뿐이다 라는 전제와 답을 두고 그 답을 거듭하는 동어반복의 쳇바퀴를 돌릴 뿐이다. 빌렘 플루서는 미래에는 가상이라는 단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진리나 진실은 없으며 만들어낸 가상이 아름다우냐 아니냐에 따라 진리치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가상이라는 단어는 아름답다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예술은 진리보다 더 낫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빌렘 플루서에게 예술은 진리를 찾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제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은 무를 향해 무 속으로 대안적인 세계들을 설계하는 전조등이다.”
[경기문화 2016.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