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 American – 2. 내 미국 이야기
우규환(사대 60)
대학원을 졸업하는 68년에 미국유학을 떠나기 위하여 문리대 대운동장 뒤편에 있는 어학연구소에 가서 영어회화 공부를 1달쯤 하였다. 회화 클래스 강사는 미모의 백인 여자인데 발음연습, intonation이 중요하다면서 “I screamed ice cream.”을 따라 하라 하였다. 조조할인 영화에서 미모의 여배우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가까이서 대화하기는 처음이었다. 서양여자는 다 저렇게 미인인가 꿈속을 헤매다가 출국하는 날 그 꿈이 산산이 깨어졌다. Northwest를 탑승했는데 stewardess는 건장하지만 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69년 7월 4일 오전 조용한 미네소타 화학과 건물안에서 엄청나게 큰 총소리가 들렸다. 미국에 온 지 1년이 채 못 되는 나는 공휴일임에도 특별히 갈 데가 없어서 실험실에 나와 있었다. 겁에 질려서 움츠리고 있었는데 조금 후에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고 곧 사라졌다. 복도에 나와보니 핏자국이 여러 군데 떨어져 있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캠퍼스신문에 실렸는데 영국에서 방문교수로 와 있던 남성과 대학원 학생이던 호주 출신 여성과의 스캔들이었다. Dr. Zhivago에 나오는 17세 소녀 라라가 자신을 유린한 변호사 코마로프스키를 총으로 쏘는 장면의 미국판 실황이었다. 내가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가해자 대학원 여학생의 신분과 피해자 영국교수의 명예 실추가 모두 큰 변화가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전혀 예상이 빗나갔다. 대학원 여학생은 아무런 일 없었듯이 박사학위 연구실험을 계속했고, 영국교수는 붕대로 목덜미를 감은 채 화학과 건물 앞에 유유히 걸어 다니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어디까지나 privacy를 존중하는 미국의 관습 때문일까?
미네소타 화학과 대학원제도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학원 수강능력을 시험하는 proficiency exam이 있는데 학부졸업 수준의 기본 4과목을 다 통과해야만 비로소 대학원 과목을 등록수강 할 수 있다. 나는 첫 학기에 모두 pass 하여 첫 학기부터 대학원 과목을 등록하였다. 1년쯤 지나면preliminary exam을 보는데 내용은 대학원 전공과목의 실력을 종합 테스트하는 과거시험이다. 이 preliminary exam을 거듭 실패하여 박사과정을 쫓겨나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낙제니 어떻게 할고?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학과 사무실 secretary에게 답안지를 볼 수 있느냐 물어보았다. Secretary(Mary Sende)는 나의 청을 들어주어 나의 답안지를 꺼내 주면서 이 일은 비밀이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서 본 후에 돌려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답안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채점을 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 무슨 마크가 있나 찾아보아도 내가 쓴 답안 외에는 아무 표시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불가항력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의 참담한 심정을 도서관 음악실에서 베토벤의 전원교향악(#6 pastorale)을 들으면서 많이도 달래 보았다. 최근에 나는 허리통증으로 달포이상 고생을 했는데 핸델의 메시아 전곡(137분)을 수십 번 들으면서 아픔과 슬픔을 넘어서는 많은 위로를 체험하였다.
나는 76년 9월 이화여대 화학과에 부임하러 귀국하는 비행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박경원이 부른 유행가 가사를 생각하면서 김포공항에 내렸다. “유학을 하고 영어를 하고 박사호 붙어야만 남자인가요; 나라에 충성하고 정의에 살고 친구 간 의리 있고 인정 베풀고; 남에겐 친절하고 겸손을 하는 이러한 남자래야 남성 넘버원! ……”
한국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가족을 따라 미국에 들어와 살면서 나는 미국을 배우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미국의 노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그것이 궁금해서 Yellowstone National Park에가서 3개월 동안 kitchen crew로 일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책방에 들렀는 데 “Nobody teach you this subject”라는 책이 있어서 무언가 하고 들어다 봤더니 “The secret to be a good husband”-- Love your wife more than hundred % but never expect to be understood. “The secret to be a good wife” -- Do not expect 100% love, 70-80% is good enough but try to understand your husband then you will be good wife. Poor guy you are too late! Isn’t it?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세대차이와 성별차이와 지방색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미국의 문화를 어떻게 이방인인 내가 따라 잡겠는가? 횡설수설 나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한 위의 부분들을 다 무시하더라도 다음에 첨부하는 자랑스러운 동문 이태후 목사의 이야기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꼭 전달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민자 보호 교회 멤버들이 필라델피아의 흑인 빈민가라 불리는 North Central 지역을 방문했다. 이 흑인 빈민가는 고립된 섬과 같다. 매우 위험해 차를 타고도 들어가길 꺼려한다. Baltimore 흑인 빈민가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흑인 빈민가는 미주 전 지역에서도 위험 순위가 으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이 그곳에서 펼쳐진다. 그곳에서 19년을 동네 주민으로 산 이태후 목사를 방문했다.
이태후 목사는 서울대 미학과(83학번)를 졸업한 후,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어디로 오실까에 대 한 콜링으로 필라델피아 흑인 빈민가의 주민이 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사는 이웃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쉽게 있는 것들이 그곳에는 없다. 은행도 없고, 슈퍼마켓도 없고, 도서관도 없다. 그곳에서 이태후 목사는 길거리 청소부터 시작했다. 삭막한 집 앞에 화분을 나누어 주며 좋은 동네 주민이 되었다. 여러 달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들어와 사는 이 동양인 목사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기도 부탁을 하게 된다. 겨울마다 외투가 없는 주민들에게 외투를 모아 나눠주고 여름에는 흑인 어린이들에게 썸머캠프를 열어 꿈을 심어주었다. 갈 곳이 없고 급식까지 끊기는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즐거운 방과 후 수업을 만들어 어린이들의 부모가 되어 주었다.
그는 말한다. "누군가 내 이웃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그들이 느낀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또 하나의 꿈을 꾼다. 그들의 피난처인 커뮤니티 센터를 세우는 꿈이다. 동네의 아이들은 아침을 먹지 못하고 등교한다. 방과 후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범죄에 노출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컴퓨터와 프린터가 없어 학교수업을 하지도 못하고 학교 측에서도 기대를 하지 않는다. 어른들도 구직을 알아보고 싶어도 인터넷조차 안 되는 열악한 환경에서 그들은 노숙자와 같은 자리로 밀려난다. 그가 꿈꾸는 커뮤니티 센터는 이런 주민들에게 피난처가 되고, 아침식사를 제공하며 숙제할 환경과 직장을 알아볼 희망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적인 악순환으로 내몰린 주민들에게 더불어 희망을 만들어가는 커뮤니티 센터를 세우는 꿈을 그는 꾼다. 이런 꿈을 함께 나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독지가들이 이태후 목사의 친구가 되길 바란다. 19년을 한결같이 가족처럼 삶을 나누는 이웃들이 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이태후 목사는 펜데믹 시대에 절망하는 우리들을 희망의 길로 안내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평생 사랑하는 동네 주민이 된 이태후 목사의 삶은 이민자 보호 교회가 지향하는 따뜻한 피난처일 뿐 아니라, 보듬어주며 사랑하는 가치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는 삶의 노래를 듣게 해 준다.
작년 가을 우리 교회 청년부 1일 부흥회에 오셔서 필라델피아 흑인촌에서 헌신봉사의 삶을 간증으로 들려주신 이태후 목사(서울대 미학과 동문 83)의 모습이 참으로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자랑스러운 동문 이태후 목사의 특집documentary:맨인블랙을 뉴욕동문회 게시판에 올려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