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선지 루트 1만km] : ‘고구려의 아들 고선지’ 1 - 15 회 (끝) |
| 1. ‘유민의 길, 생존의 길’ - 인천서 선양까지 |
| ▲ 고구려 때 축조돼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 왔던 백암산성. 그 앞으로 태자하가 흐르고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고사계 일가가 당나라로 끌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영토였다. |
당에 끌려간 고구려인들 치욕의 발자취가 …| 1. ‘유민의 길, 생존의 길’ - 인천서 선양까지 |
중국 옌볜에 살고 있는 조선족 아낙네들은 남편을 가리켜 "나그네"라 부른다. 함경도 사투리에서 비롯된 이 말에는 가부장의 전통적인 책무를 저버린 남정네를 가리키는 뉘앙스가 묻어난다. 집안을 편안하게 꾸려나갈 든든한 남편이 아닌, 운명이 시키는 대로 방랑벽에 자신을 맡겨버린 껄끄러운 사내라는 이미지가 있다. 허파에 바람 든 그 나그네처럼 한 달 동안의 긴 답사여행에서 우리는 단 하루도 같은 처소에서 연거푸 머문 적이 없었다. 사람과 짐승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도 멈추지 않고 줄곧 서역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고구려 사람의 후손 고선지 장군이 섬세하게 그려둔 서역 정벌의 그림자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 첫날 우리는 인천항 제1부두에서 중국 단둥으로 떠나는 동방명주(東方明珠)에 승선하였다.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와 소통했던 우리의 항구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의 당은포 (唐恩浦)가 대표적이다. 신라 진흥왕 14년부터 나당 사이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해왔었다. 그리고 문무왕 8년(668), 고구려 멸망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 유인궤 (劉仁軌)가 이끌었던 수군도 산둥반도를 출항하여 당은포에 도착했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일행이 탄 배가 출항했던 인천항 조금 남쪽에 당은포가 위치하고 있다. 옛 고구려 유민들도 필경 우리와 비슷한 연안항로를 이용해 당나라로 끌려갔을 것이다. 정든 땅을 버리고 낯선 이국으로 정처없이 끌려가는 유민의 신세.
그로부터 1200여 년이 지난 바로 오늘 단둥으로 떠나는 배 안에서도 그때 유민들처럼 침울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200여 명을 헤아리는 승객들의 대부분은 인천과 단둥. 선양을 오가며 생계를 꾸려가는 이른바 보따리 장수들이다. 돈 되는 물건이라면 마약 빼고는 무엇이든 인천항으로 들여온다는 그들의 표정에서 고단한 삶의 무게가 실린 피곤과 침울함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배가 제1 부두를 벗어나 두 시간 정도, 담녹색 바다 위로 잿빛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서 침상을 찾아 봇짐을 내려놓은 승객들이 하나 둘 선미(船尾)쪽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갑판의 벤치에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고, 소주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 정오쯤 그런 사람들을 태운 낡은 여객선 동방명주는 단둥의 동항에 닻을 내렸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수많은 고구려 사람이 바로 이곳 항구를 거쳐 내륙의 당나라로 끌려갔다. 아마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도 그 치욕스러운 대열 속에 섞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 끌려간 고구려 사람들은 대부분 평양성에서 생활하였던 지배층이었고, 수효는 20만 명을 헤아렸다. 단둥 동항에서 배를 내린 우리 일행이 곧장 길을 재촉하였던 선양길 역시 그때 강제로 끌려갔던 유민들의 길과 같았다.
우리는 여장(旅裝)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곧장 압록강으로 나갔다. 오후인데도 짙은 안개가 압록강 하구를 뒤덮고 있었다. 여러 나라의 국경선을 넘나 들었던 경험이 있지만,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바라보는 중국의 단둥과 북한의 신의주만큼 대조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아직 없었다. 보트를 타고 강 하구 쪽으로 가보면 예나 지금이나 강가에 방치한 폐선 가녘에 올라앉아 오르내리는 보트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는 북한 사람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마주 바라보이는 단둥에서는 수많은 고층빌딩이 지금도 하늘 비좁은 줄 모른 채 치솟고 있다.
이튿날 미니버스편으로 선양에 당도하였다. 여장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남쪽으로 120㎞ 떨어진 백암산성(白岩山城)으로 내달았다. 도중에 랴오양(遼陽)이란 곳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곳도 한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었다. 다시 말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그 당시 중국의 패자나 다름없었던 후연(後燕)으로부터 요동왕(遼東王)이란 칭호를 받았었다.
이것은 광개토대왕 재위 때 통치영역이 대방(帶方)은 물론이고, 랴오둥 전 지역을 망라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곳 사람들은 연주산성(燕州山城)으로 부르고 있는 백암산성 역시 고구려 시대에 축조되어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왔던 성이다. 산성 곁으로는 태자하가 흐르고 그 앞쪽을 바라보면 광활한 평원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성의 정상에는 지휘소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성곽을 견고하게 지탱해주기 위하여 사용된 반원주 형태의 건축구조에서 고구려 건축기술의 진수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깝고 또한 견고하기 그지없는 건축기술을 느끼게 한다. 권력자 남생(男生)과 그의 아우들의 권력투쟁만 없었더라도 고구려의 영화가 그처럼 허망하게 마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그 생애를 마감하였다 하더라도 그 백성들이 터놓은 길은 아직까지 천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은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바람과 먼지들까지 용틀임으로 일어나며 끓어오르는 것을 쉴 새 없이 반복해 왔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 일가가 당나라로 끌려갈 때만 해도 당연히 고구려의 영토였던 이 길.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인천과 랴오둥반도의 단둥, 그리고 선양을 이어주는 중국 서북쪽의 이 경로뿐만 아니라 산둥반도까지 거침없이 아우르는 또 다른 길들도 모두 한국 상인들이 개척한 상로가 되었다. 고구려 사람 고선지가 개척하여 중국의 국토 한중간을 가로지르게 구성된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오늘의 한국인들이 한반도까지 연장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명분이 상당하고 뚜렷하다.
선양 서탑거리에 가보면 짧은 기간 안에 그곳에 파고들어 일궈놓은 한국인들의 기적적인 생존기세에 놀라게 된다. 아직은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가게들이 많고 두 달에 한 번꼴로 간판이 바뀌기도 한다지만, 한국인들이 와서 문을 연 가게들이 그 거리에 잘 여문 옥수수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중한우의(中韓友宜)'를 다지자는 대형 전광판이 걸려 있는 이 거리의 중심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바로 중국 신(新)실크로드의 동북쪽 통로에 존재하는 상인들이다.
한국인들이 서탑거리에 자리잡게 된 것은 그곳에 옛날부터 조선족들이 모여 살았던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요즈음의 한국인들이 그 낯설고 물선 곳에서 비교적 큰 갈등을 겪지 않고 자리잡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그곳에 옛날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먼저 자리 잡고 살았기 때문인 것과 상통하는 일이다.
현재 35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선양시에 진출해 있고, 시의 서남부에 있는 경제기술 개발구에는 12개의 제조업체가 진출해 있다. 그중에서 1992년 선양에 진출한 선양동방방직유한공사의 박순경 사장의 성공은 중국 정부 당국으로부터 진작 주목받고 있었다. 초기에는 종사원 3000명 이상의 고용효과를 보았고, 지금도 연 매출 5000만 달러 이상의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한국인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양의와 중의를 결합한 의원과 파파스라는 퓨전 요식업으로 성공한 이기영 박사도 선양에선 소문난 한국인이다.
고선지는 누구 … 실크로드 장악한 고구려 출신 군인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에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고구려 유민이 많다. 당에서 노예가 신분 상승하는 유일한 길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사계(高舍鷄)는 고구려인 20여만 명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 그는 당에서 고선지를 낳았고 군인 생활을 하면서 생존을 위해 어린 아들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고선지는 신장(新疆)의 위톈(于.오늘날 허톈:和田)에서 첫 지역 사령관으로 토번 진압에 공을 세웠다. 그는 고구려 출신 노예라는 조소를 받으면서도 안서도지병마사(安西都知兵馬使).안서도호(安西都護)로 승진을 거듭했다. 특히 1만 명을 이끌고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토번을 정벌한 그의 대원정을 영국의 역사 탐험가 오렐 스타인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한 원정"이라 극찬했다. 이 전쟁의 성공으로 서역 72국이 당에 조공했다.
외국 학자들은 중국에서 영토 확장에 기여한 인물로 고선지와 한(漢)의 반초(班超)를 꼽는다. 고선지는 중국의 서방세계를 압도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한 인물이다.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 패배함으로써 아랍에 포로가 된 제지공에 의해 제지술이 서방세계로 전파된 사실을 외국학자들은 문명사 차원에서 주목하고 있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선지는 반군을 당나라 서울 장안에서 멀지 않은 퉁관(潼關) 앞에서 막았다. 그런 그는 황명을 어겼다는 죄목이 씌워져 환관이 데려 온 칼잡이에 의해 저항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만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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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의 백암산성! 1,500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텨 온 고구려 사람들의 축성 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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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옛 자취를 찾아’ - 선양에서 베이징까지 |
| 중국 사서엔 고구려 발상 지역이 중국 란하~현재 선양 지역으로 나타난다. 초기 고구려 영역 가운데를 대릉하가 흐른다. 대릉하 상류에는 조양이란 지역이 나타난다. 아침을 뜻하는 조(朝)와 햇빛을 뜻하는 양(陽)이다. 이 조양은 우리말로 아사달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아사는 아침을, 달은 벌판을 의미하는데 조양이 아침해가 뜨는 벌판이라는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진은 현재의 조양시와 시를 가로지르는 대릉하다. |
사라진 '고려영' … 도로 안내판만 남아 역사 증언2. 옛 자취를 찾아 - 선양에서 베이징까지
1200여년 전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고선지 장군은 서역을 평정하고 동서문명의 교차로인 실크로드(비단길)를 활짝 넓혔다.
| ▲ 그 길, 고선지 루트를 답사하는 취재팀이 키르기스스탄 고원지대에서 마주친 말들이 차량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건너고 있다. 뒤로 만년설이 쌓인 톈산산맥이 보인다. |
| | ▲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구려인 집단 거주지였던 고려영, 도로 안내판에 그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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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섬에 갇혀 산다는 반성부터 하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단둥을 강 건너 두고도 신의주를 10년 전의 풀죽은 모습으로 남겨 놓은 북한의 지도자들,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달리고 있는 남한의 지도자들, 너무나 안타깝다.
단둥에서 선양으로 향하는 순간 온 대륙을 흔들고 있는 개발의 박동이 전해 왔다. 긴장감이 밀려왔다. 선양 주변에서는 어디라도 삽만 대면 석회가 나올 듯, 도처가 석회석 탄광이다. 그 같은 자원을 바탕으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중국은 개발 열풍에 싸여 있다.
"중국이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북한 체제의 불안정과 관계있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족이 한 말이니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동북공정이나 동북3성 개발이니 하는 정책이 우연히 나왔겠는가. 이런 상황이니, 고구려 유민의 아들 고선지의 자취를 더듬는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선양에서 야간열차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녘인데도 베이징역 앞은 그야말로 사람 천지다. 이처럼 번잡한 오늘날 중국의 수도 베이징도 고선지가 살던 당나라 시대에는 유주(幽州)라는 일개 빈약한 주에 불과했었다.
우리 일행은 베이징역에서 북쪽으로 30여km에 떨어진 '고려영(高麗營)'으로 향했다. 고려영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고구려인을 잡아다가 집단으로 수용하거나 거주시켰던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시장 상인, 길거리의 노인, 학생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고려영이라는 이름의 연유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중국의 일반인들이 보통 그러하듯 그런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찾기란 힘들었다. 고려영이란 이름을 뚜렷이 새긴 도로 안내판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증거다.
우리는 밀운현으로 발길을 돌렸다. 밀운현의 위치는 고려영에서 다시 북쪽으로 40km 지점. 밀운현을 찾은 데는 까닭이 있다. 751년 고선지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石國)의 이슬람연합군을 맞아 탈라스 강변 전투에서 패한 뒤 장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 현종은 고선지를 진압군의 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밀운군공이라는 작위를 내렸기 때문이다.
고선지의 작위에 대해 신장성 사회과학원 쉐쭝정(薛宗正)은 "밀운군의 봉록을 고선지에게 준다는 의미밖에 없다" 고 말했다. 하지만 둔황의 막고굴 강해사 리신(李新)과 우리 일행의 생각은 달랐다. "현종은 고선지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고구려 유민의 집단거주지를 작위로 주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할 작정으로 밀운현을 찾았으나 도대체 옛 모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다만 밀운현 청사 부근에서 명나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옛 성곽 일부를 찾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너무나 아쉬워 우리는 지난날에 번성했던 역사(驛舍)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근처까지 찾아갔는데도 뚜렷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버리거나 허물어 뜨리기를 싫어하는 중국인들도 그 역사만은 사정 두지 않고 깡그리 철거해 버린 듯했다. 낙심천만이 되어 근처 뒷골목을 배회하던 중에, 낡은 러닝셔츠 바람으로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중늙은이에게 길을 재차 묻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심술궂은 작자가 역사를 바로 자신의 등뒤 불과 몇 미터 거리에 두고도 우리들에겐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잡아뗀 것이었다. 이 작자가 왜 그렇게 배타적이고 뒤틀린 심사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중국인들은 곁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자기와 관련이 없으면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다. 이처럼 배타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일궈 놓은 생활기반과 기업환경을 비집고 우리 민족의 유민과 이주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지치는 법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한국식 자장면을 중국에 퍼뜨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는 이기영 사장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박힌 돌 빼면서 상처받을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당나라 장군 고선지와 우리 조선족의 이미지가 겹쳐져 다가왔다. '20원가량'이라는 표현을 '20원 앞뒤로'라거나 '거의 다 왔다'는 표현을 '거진 다 왔다' 라고 쓰는 조선족을 보면 우리보다 더 한국적일 수 있는데, 그들의 정서는 어떨까? 한국에 사업차 들어가 보려고 비자를 신청하면 대사관 관계자들이 마치 범인 다루듯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조선족이 많았다.
어쨌든 이념 따위에 얽매여 스스로를 짓눌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살았던 윗세대와 달리 실용지향이 된 중국 젊은이들의 변화는 진실로 눈부시다. 이들은 이른바 낯선 것에도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한류 열풍을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중국의 젊은이들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베이징 시내의 4층짜리 한 서점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래의 또 다른 웅비를 위해 너도 나도 카트를 끌고 다니며 책을 주워 담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도시를 벗어나기만 하면 중국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길가로는 온통 옥수수 같은 곡물을 심은 들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포장도로를 소. 오리떼가 건너는가 하면 그 뒤를 이어 택시. 오토바이. 달구지. 삼륜차. 트럭. 버스가 일렬로 달린다. 그 와중에 오리 네 마리가 길거리에서 서로 어울려 애무하고, 서로를 방해하며 사랑놀이를 벌여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시간과 공간의 어제와 오늘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 이것도 북한의 변화를 읽는 가늠자로 봐도 괜찮을까. 여러 차례 중국을 찾았지만 중국 내 북한 식당의 변화를 이번처럼 크게 느꼈던 적은 없었다. 선양의 북한 식당은 아예 한국인들을 겨냥하고 있다. 한 식당 종사원이 "찔레꽃 붉게 피는…" 을 부를 때는 한 곡 정도 서비스하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등 남한 노래가 이어졌다. 대구 유니버시아드에 응원단으로 참가했다는 여성도 있었다. "선생님, 주량은 곧 인격과 비례하는 것 아닌가요" 라는 아리따운 여성의 '애교' 에 한 잔 더 들이켜지 않을 남조선 남자가 있겠는가. 남한의 소주도 인기 품목이었다.
종사원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훨씬 쉽고 부드러워졌다는 것이 단둥. 선양. 베이징의 북한 식당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변화였다. 베이징의 한 북한 식당에서는 종사원들의 복장이 한복의 틀을 벗어나 파격적인 개방형으로 바뀐 것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변화였다. 중국에 진출해서 외화벌이를 하고 있는 북한 업체 중에 식당업 이외에 제조업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겠다.
그런데 북한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서 쓰는 말들은 예나 지금이나 북한 방송의 아나운서들이 그러하듯 한결같이 가성을 쓰고 있었다. 가성이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신뢰감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뒀으면 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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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대릉하의 랴오닝성 상류 부분. 강폭이 300~400m가 될 만큼 넓고 깊다. 이 강은 동이족의 나라 은(殷)이 BC 11세기께 중국 한족의 나라 주(周)에 의해 멸망한 뒤 은의 제후였던 기자가 만든 ‘기자의 나라’를 흘렀던 강이다. 고조선 땅이 된 이 대릉하 지역을 BC 3세기 중국 연나라가 침입해 장악하지만 고조선 만왕은 이 땅을 회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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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나라 시대엔 장안으로 불렸던 시안, 당시의 성벽은 사라지고 명나라 때 새롭게 조성된 고성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시안=조용철 기자 |
양귀비 비파소리 아련한 '문명의 교차점'3. 천년 고도, 비단길 출발점 - 시안
베이징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무려 11시간을 새우잠으로 시달리고 난 이튿날 새벽, 비로소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시안(西安)은 겨울에도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문 온화한 기후의 도시다. 하지만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희뿌연 안개가 덮여 있어 이곳 사람들의 표정도 전통적으로 침울한 얼굴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지난밤 내린 비 때문인지 역 광장 앞의 새벽 풍경도 우중충하고 울적했다.
시안은 고선지 장군과 당현종, 그리고 양귀비가 활약했던 당나라 시대엔 장안 (長安)으로 불렸다. 장안이란 지명은 우리도 도성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자주 사용 했기에 낯설지 않다. 장안 혹은 시안은 서한 시대부터 명나라 말까지 약 1600년간 동서 문명의 교통로인 비단길을 따라 들어온 서방 문물이 꽃 피었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고선지가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기까지 우우림 대장군이라는 신분으로 5년간이나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안방과 선양방의 두 저택을 오가며 생활했다. 고선지는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안에서 동쪽으로 150㎞ 떨어진 동관(潼關)에서 억울하게 참살당한 비운의 장군이었다. 까닭은 섬주(陝州)를 지키고 있으라는 황명을 어겼다는 죄목이었다.
숙소에 여장을 푸는 길로 곧장 시가지로 나섰다. 노점상들이 파는 과일 중 흔하게 시선을 끄는 것은 석류였다. 현종의 비였던 양귀비가 좋아해 석류나무 심기를 권장하면서 석류가 이 지방의 특산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석류나무는 비단길을 통해 페르시아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지금 중국 대도시의 번듯한 가게나 노점상에서 팔고 있는 수박.포도.오이.자두.호박.참깨. 마늘. 당근 같은 과일과 채소들은 언뜻 중국 토종으로 알기 쉽지만, 모두 한무제가 개척하고 당현종의 고선지가 확장시킨 비단길을 따라 서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현종의 넋을 빼놓은 빼어난 미모의 양귀비. 관능적 육체미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그녀의 춤과 노래,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탁월한 솜씨였다. 양귀비가 잘 탔다는 '비파' 역시 이란. 시리아. 터키 등지에서 비단길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왔다. 구자무(龜玆舞).소륵무(疏勒舞).고창무(高昌舞).이주무(伊州舞) 등과 같이 중국 전통 가무의 원형을 이루었던 춤들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 결과 수.당 시기에는 서역의 음악과 무용이 중국 내륙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양귀비가 추었다는 '예상우의가(霓裳羽衣歌)'와 그 춤의 반주곡인 '예상우의곡'은 중국과 서역의 음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 중국의 황제들이 온천 휴양지로 이용하던 화청지. 현종의 넋을 빼놓은 양귀비가 방금 목욕을 끝내고 나서는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문화의 교류는 무역을 따라 진행돼 왔다. 받는 것과 주는 것이 교차되는 것은 당연. 당나라 때 장안성에는 동시와 서시가 있었는데 모두가 상업구역이었다. 특히 서시는 서역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들 서역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구동성으로 가져가길 원했던 것은 비단이었다. 그 당시 고대 로마에선 중국 비단이 금과 같은 값으로 거래되었고, 중국을 비단의 나라로 불렀다. 장안에서 비단을 구입한 서역 상인들은 타크라마칸 사막을 낙타와 함께 목숨을 걸고 넘어 로마에 도착했다.
역사의 비단길 시발점 위에서 다시 오늘날 개척되는 문화 교류의 새로운 비단길을 생각해 봤다. 여러 갈래로 펼쳐지고 있는 '서해의 비단길'. 이 길을 통해 페르시아로 부터 들어왔다는 중국의 채소와 과일들이 지금은 물밀듯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한국인 식탁에 오르내리는 미꾸라지.낙지.주꾸미.장어.피조개와 같은 수산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고춧가루.깻잎.무말랭이.김치.고추장.된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즐겨 먹는 식품의 8할이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다. 때로는 중국산 수산물이 북한산으로 둔갑하기도하고 북한산이 중국산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념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그들은 우리와 뚜렷한 구분을 두고 있지만, 입는 것과 먹는 것들은 '서해의 비단길'을 통해 뒤섞여 들어와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이 헷갈려 버린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줄 것은 무엇이고 받을 것은 무엇인가. 얽히고 설키는 주고받음 속에 또 어떤 새로운 문화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싹틀 것인가.
마침 대형 서점 앞을 지나다가 이채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서점 계단 앞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한다'는 팻말을 든 대학생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도입하면서 생겨난 학생들의 인력시장이다. 중국의 큰 도시는 물론 작은 읍내에도 이른 아침에 길거리로 나가면, 이른바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는 날품팔이 인력시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제각기 익숙하게 다루는 연장을 들고 있기 때문에 고용자가 일할 사람을 고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백화점이나 대형 물류센터 앞에는, 발걸음 한번 떼어놓기도 어려울 정도로 근력이 달려 보이는 노인네들이 건물의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 봤다. 그랬더니 그 노인네들이 건물을 나서는 젊은이들이 버리고 가는 빈 페트병을 수거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푼돈이라도 잇속을 챙길 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근면성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치심이나 굴욕감까지도 단숨에 극복하거나 외면해 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오늘날 동남아 여러 국가의 경제권을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탁월한 상혼의 바탕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의 밤 풍경은 다채롭다. 그 중에서 동신가(東新街), 북대가(北大街), 금화남로 (金華南路)에 위치한 일명 '홍등가' 라 불리는 야시장 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오후 5시가 되면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해 새벽까지 이어지는 이곳은 일상에 지친 서민들의 휴식공간이다. 피곤한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찾아와 갖가지 요리를 싼 값에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야시장은, 어느 나라든 빨리 잠들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장소 아닌가. 그렇다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돌출 행동이나 탈선도 응당 눈에 띄게 마련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두 시간 이상 그곳을 배회하면서 관찰했으나 예상했던 광경 중 어느 것 한 가지도 목격할 수 없었다.
시안에는 유학생을 포함해 3400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의 주재원이나 상사 직원들은 없다고 한다. 이곳으로 온 한국인들이 개업한 업종 중엔 공교롭게도 미용업이 많다.
| | ▲ 한달 동안 ‘고선지 루트’ 1만km를 다녀와 시리즈를 공동 집필 중인 김주영 소설가 (오른쪽)와 지배선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 중국 동북지방이나 베이징에는 한국인 기업들이 즐비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시안 쪽으로의 진출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된 셈이다. 아마도 중국의 경제정책이 동쪽에 편중됐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중국은 서쪽으로도 달려가고 있다. 중국 경제의 서진정책은 너무나 그 기백이 활달하고 공격적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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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의 출발 ‘시안’ . 장안성의 성벽과 서안시가지. 14세기(1370~1378)에 벽돌을 쌓아 축성한 서안고성의 성벽은 ‘명대의 성벽’으로 불리는 장안성으로, 현존하는 중국의 성벽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다. 장안성은 총 길이가 14km에 달하며 높이가 12m, 성 윗부분의 폭은 12~14m, 아랫부분 폭은 11~18m 규모로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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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옛 장안의 서쪽 문을 빠져나가면, 거기서부터 실크로드가 시작됨을 알리는 석상들이 서 있다. |
"낙타야 가자" 고대 상인 재촉소리 들리는 듯4. 애환의 비단길 - 시안~란저우
한무제가 흉노를 제압하고 터 놓은 비단길은 톈산(天山)북로, 톈산남로, 서역남로로 나뉘어진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우리 일행이 여정으로 잡은 톈산남로였다. 시안(西安)-란저우(蘭州)-주취안(酒泉)-자위관-둔황(敦煌)-투루판- 우루무치-카스를 거치는 비단길이다.
어떤 길을 택하든 1만㎞가 넘었고, 도중에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겹겹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오가는 상인들을 위협하고 갖가지 까탈을 부려 통행세를 갈취하기 예사 였다. 그뿐만 아니라 대상들은 사막을 만나면 낙타가 필요했고, 추운 지방에선 말이 필요했으며, 고산지대를 만나면 야크(Yak)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운송수단에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어려움이 많았다. '벼랑길이 험하여 나뭇가지로 물고기를 꿰듯이 한 줄로 서서 걸어야 했다. 바람과 안개 속을 헤매다가 일행을 잃어버리고 추위에 얼어죽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은 그들의 시련과 고초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런 애로를 겪으며 중국의 4대 발명품인 화약. 종이. 나침반. 인쇄술이 바다와 육지의 비단길을 통해 서양에 전달됐다.
| 실크로드(비단길)의 출발지인 중국 시안의 개원문 앞에 세워진 거대한 조각상. 서역의 대상들이 낙타에 상품을 싣고 개원문을 나서는 모습이다. |
비단길의 의미를 더 짚어보고 싶어 우리 일행은 시안에서 북쪽으로 10여㎞ 떨어진 곳에 있는 개원문(開遠門)을 찾았다. 여기엔 당나라 때 서역에서 온 대상들이 낙타에 짐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의 거대한 조각 작품을 세워 놓았다. 장안에 온 서역의 상인들이 비단과 향료를 잔뜩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행이 기다리고 있는 비단길을 향해 첫 발걸음을 떼어놓은 장소였다. (사진) 우리 일행이 개원문에 도달했을 때는 마침 석양으로 서녘 하늘에 좀처럼 볼 수 없던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1200여 년 전 상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애환의 끝자락에 우리도 같이 섞여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고구려가 당에 멸망했으나 고구려군의 용맹을 몸소 경험해서 두려움을 가졌던 당 태종은 두번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를 익히 알고 있는 당 현종은 란저우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목에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병사들을 배치하기에 이른다. 지금 란저우에서 40km 떨어진 시구취(西固區)에 당대의 역참이 있었고,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당시 열 살이 채 못되는 고선지와 일가를 거느리고 그곳에서 비참한 병영생활을 이어갔다. 응당한 대접을 받는 생활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이었다. 란저우에서의 고선지 일가와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기 위해 둔황연구원의 리정위(李正宇) 교수를 찾아가 고구려 유민들이 살던 하서군영(河西軍營)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리 교수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을 의식한 듯 "그때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우대정책을 실시했다"고 말해 우리들을 실망시켰다.
란저우에 도착해 맨 처음 마주친 사람은 29세의 미혼인 유숙영씨였다. 그녀는 우리가 란저우에서부터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자위관과 둔황을 거쳐 신장 위구르자치구로 떠날 때까지 6일 동안 동행하며 안내를 담당할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란저우대학 물리학과 출신으로 호주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이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좀처럼 웃지 않고 시종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침이나 저녁을 막론하고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었다(이것은 우리들이 보았던 중국의 대다수 젊은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첫 만남의 긴장감이 희석돼 갈 무렵 우리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그녀의 해명이 있었다.
중국 역사 위에 수많은 이미지와 의미를 생산하며 흘러가는 황허(黃河). 그 강은 연안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성품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황허 이북 사람들은 이남인 저장(浙江)성이나 상하이(上海) 지방 사람들과 그 기질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 황허 이북인들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없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무표정하게 보이며 직설적이라는 평판도 듣는다. 그런가 하면 황허 이남 사람들은 대체로 계산에 밝고 사교적이며 민첩하다. 그래서 저장성과 원저우(溫州)에 살던 이들 가운데 동북부로 와 돈을 번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이것은 그녀의 성품과 표정도 그 지방의 풍토적 특성과 전통에 따라 정착됐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녀의 부모는 고급공무원을 지내고 퇴임해 란저우에 살고 있다. 매우 완고한 분들이어서 외동딸인 자신은 물론이고 손위 올케까지 자기 집으로 시집 온 이후 지금껏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케케묵은 옛것으로 표현되는 부모들의 완고한 충고를 온당하게 생각해 거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중국 현대여성들 혹은 일부 여성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정서적 현주소와 가치관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엿볼 수 있게 한다. 고선지 루트의 비단길 한쪽 끝자락에서 만난 그녀에게서, 부활하는 중국의 전통과 여성들의 진지하면서도 외향적인 특질의 단면을 발견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미모 하나로 황제와 조정을 혼란으로 빠뜨렸던 양귀비와 비교해서는 안 될,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에 허황하지 않은 오늘날 중국 젊은이들의 희망을 또 다른 여성들에게서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유숙영씨와 함께 몇 사람의 젊은 직장여성을 만나보기로 했다. 시내 변두리에 있는 허름한 카페에서, 맥주 몇 병과 해바라기 씨앗이 담긴 안주쟁반이 놓인 식탁에 우리는 둘러앉았다.
"란저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토박이입니까?"
"반 이상이 하방(下枋:문화혁명 당시 지식인들을 농촌에 강제로 보낸 일) 때 란저우로 와서 정착했지요."
"하방이 풀렸다면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을 텐데요?"
"이곳에 고향보다 더 튼튼한 생활기반을 갖게 됐으니까요. 중국인들은 타향살이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지요."
"문화혁명이 중국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한 십 년의 역사는 뒤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말들하고 있지요."
"미혼 여성들은 상대방이 갖춰야 할 결혼조건의 하나가 공산당원이어야 한다지요?"
"옛날 얘기예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데 신경 안 써요. 당원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젊은이들의 생각과 희망은, 극동인 한국에 살거나 중국의 황허 유역에 살거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의 일상에서 고난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고전적인 '길'의 경계와 의미는 이미 허물어지거나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구촌 어디에 살고 있거나 저마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하게 되면서, 다시 말해 너와 내가 모든 길 위에 노출되어 있게 됨으로써 21세기의 세계 시민들은 서로가 같거나 비슷한 생각들을 갖게 된 것 같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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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저우에서 우웨이로 가는 길목의 2800여미터 무소림고원 지대. 산기슭에 펼쳐진 밀밭과 유채꽃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란저우=조용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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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남쪽)으로 기련산맥과 오른쪽으로 마종산맥이 나란히 달리는 하서회랑. 우웨이에서 장예로 가는 길이다. 멀리 울타리처럼 보이는 만리장성 토성 앞으로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조용철 기자. |
"초원길 갖는 자 천하를 갖는다" … 유목민 각축장 |
5. 동서 교통 요충지 - 우웨이 · 장예
중국 서쪽의 간쑤성(甘肅省)을 지도에서 찾아보라. 오른쪽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왼쪽으로 칭하이성(靑海省) 사이를 옹색하게 비집고 들어가 남동-서북쪽으로 길게 뻗으며 신장(新疆)웨이우얼자치구와 맞닿아 있다. 간쑤성을 중국의 영토로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지형이다. 오늘 우리 일행은 간쑤성을 관통한다.
유명한 하서사군(河西四郡) 혹은 하서회랑(河西回廊.황허의 서쪽에 위치하면서 남쪽 기련산맥과 북쪽 마종산맥 사이 약 1200여㎞의 긴 골짜기 길)이 놓여 있는 곳. 하서회랑은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酒泉)을 거쳐 둔황(敦煌)에 이르는 동서 교통의 요충지다. 이곳은 지난날 유목민족 사이의 오랜 각축장이었고, 당나라 장안을 공격하는 거의 유일한 루트이기도 했다. 토번(티베트족)은 우리가 지금 차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쪽의 기련산맥을 무대로 번창했고, 돌궐(몽고족)은 마종산맥을 무대로 끈질기게 당나라를 위협했다. 이런 까닭에 당나라는 하서회랑에 많은 상비군을 배치했고, 그들 상비군은 오랜 전쟁과 척박한 환경도 아랑곳하지 않는 한혈마 (汗血馬.털빛이 붉고 붉은 땀을 흘리는 천리마)로 무장하고 있었다.
| 마답비연(馬踏飛燕), 날아가는 제비를 뒷발로 밟으며 달리는 천리마. 한나라 장군의 분묘에서 발굴된 부장품을 모사해 만든 조각이 그 무덤 앞에 세워져 있다. |
란저우(蘭州)에서 우웨이까지는 약 280㎞의 노정이었다. 란저우 시가지를 벗어나자 왼편으로 곧장 기련산맥이 나타났다. 주변의 산악지역엔 소수민족인 장족이 거주한다. 이들은 산악 구릉지대에 흩어져 살면서 유채를 재배하고 벌을 길러 기름과 꿀을 팔아 생활한다. 장족들은 척박한 산기슭에다 유채밭을 가꾸느라 온갖 고초를 겪고 있겠지만, 그들이 일구어 놓은 피와 땀의 결실은 멀리서 바라보는 여행자들에겐 오직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만 보였다.
| 소수민족 장족이 주로 거주하는 고원지대, 그들이 가꿔놓은 아름다운 유채밭이 밀밭과 함께 고원에 펼쳐진다. |
이 일대에서 고선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나라 때 어린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하서군에서 생활하다가 우웨이로 이주했다. 토번과 돌궐이 수시로 출몰해 괴로움을 당했던 당나라는 서북 변경에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배치해 방패막이로 삼았다. 때문에 아버지 고사계가 무장의 위치까지 올라갔지만 고선지 가족의 생활은 서럽고 비참하기만 했다. 훗날 고선지가 이곳 우웨이의 태수와 하서 절도사 같은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하서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우웨이와 고선지는 관련이 많다.
| | 하서군 치소가 있었다는 마을에 서 있는 토성의 흔적. 언제부터인지 대저택의 벽으로 개조 되었다가 지금은 옥수수 창고로 쓰이고 있다. |
우리 일행은 우웨이에 도착하자마자 당나라 때 하서군의 치소가 있었다는 마을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지금은 옥수수 창고로 쓰이고 있는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둥마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는 등 대부호가 살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데 문화재란 안내판이 버젓하게 서 있는 저택이었음에도 한쪽에서 관리인이란 사람이 식당 영업을 하고 있었다. 사십대의 목소리 걸걸한 관리인은 우리가 무슨 질문이라도 던지면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해 뙤약볕을 무릅쓰고 찾아간 우리 일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당나라 때 "양주(凉州.우웨이의 옛 이름) 7리 10만호/ 호인(胡人)이 여장을 풀고 비파를 타는구나" 하는 노래가 유행했을 만치 번창했던 곳이 바로 우웨이였다. 하지만 오랜 동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우웨가 이제 새로운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시가지 전체를 일직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튿날 우리 일행은 부랴부랴 장예로 차를 몰았다. 당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군마를 기르고 있다는 산단(山丹)으로 향하면서부터 차창밖으로 길게 뻗은 가스관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장성에서 생산되는 가스를 동쪽 지방으로 운반하기 위해 두 개의 관을 나란히 설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국 에선 이것을 서기동수(西氣東輸:서쪽의 기체를 동쪽으로 수송한다는 뜻)라 불렀다. 장예에 당도할 때까지 우리의 시선을 빼앗은 또 다른 것은, 진나라.한나라.명나라를 거치며 쌓았던 장성(長城)과 봉수대였다. 장성은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지금까지 크게 허물어지지 않고 대체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토성들 사이사이로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 하서회랑의 남쪽 기련산맥. 신장성에서 생산되는 가스를 동쪽으로 운반하기 위해 가스관을 매설하고 있다. |
흉노와 토번, 그리고 돌궐과 같은 기마 유목민들이 우리들이 지금 답사하고 있는 하서회랑의 여러 곳을 오랫 동안 유린하며 창궐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이 좋은 군마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비단길을 개척한 한무제는 그들의 말이 부러웠다. 그래서 한무제는 흉노들이 타던 말과 비단을 서로 바꾸는 마견무역(馬絹貿易)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이를 통해 명마를 확보함으로써 결국 흉노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유목민 입장에서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통탄스러운 마견무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 | 하서회랑의 북쪽 마종산맥. 구름 드리운 초원에 양떼들이 점점이 박혀있다. |
어쨌든 역사는 흐르고 그 흐름엔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이 지역에서 말과 함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양떼들의 존재다. 당시 양떼는 스스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최고의 보급품이었다. 언제나 군대를 뒤따라 오면서 고기. 우유와 치즈를 제공했고, 나아가 노숙할 때 피할 수 없는 강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가죽까지 제공했다. 양고기를 소금물에 적셨다가 건져내 말린 다음 육포로 만들어 먹는 건조법은 흉노족들이 개발한 식사법이다. 들개처럼 집도 없고 나라도 없었던 흉노족은 이처럼 음식을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식사법을 개발함으로써 사막에서도 오래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동안 침체돼 있던 도시를 혁명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은 장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번화가에는 20층 넘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 국토의 사막화를 막기 위한 간쑤성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황허에서 끌어들인 물을 스프링클러를 이용해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벌이고 있다. |
간쑤성에서 오늘의 중국 당국은 국토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중턱은 물론 산봉우리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계단식 식목을 하고 있었고, 스프링클러까지 설치해 황허에서 끌어들인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 범위가 하도 넓어 멀리 바라보이는 산등성이까지 희부연 물안개가 끼어 있을 정도였다. 중국의 경제가 이제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현실로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산기슭에 배치한 스프링클러는, 달리는 차창으로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아도 계속 이어져 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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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만리장성 서쪽 끝’ - 장예 ~ 자위관 |
| | 만리장성의 서쪽 끝 자위관. 지난날 서역으로 가려는 상인이나 군대는 모두 이곳을 통해야 했다. 자위관의 성루에 오르면 사막에 끝간 데 없이 펼쳐진 장성을 바라볼 수 있다. 조용철 기자. |
서역 입구까지 뻗은 '장성의 꼬리' |
6. 만리장성 서쪽 끝 - 장예 ~ 자위관
아침 나절부터 줄곧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뜨거운 햇볕이 눈이 부시게 내리 쬐었다. 간혹 마을을 만난다 하더라도 미루나무들만이 쭉 고개를 내밀 뿐이다. 가도 가도 사막만 바라보이는 살풍경. 그나마 저 멀리 보이는 기련산맥의 희디 흰 설산(雪山)들, 그리고 끊어지고 허물어진 장성과 목초지 사이로 느릿느릿 나타나는 양떼와 고성(古城)들의 모습이 시야를 달래주었다.
장예를 떠나 자위관(嘉□關)을 향해 약 10㎞ 정도 달리면 한나라 초기 흉노가 세웠던 흑수국(黑水國) 유적지와 만난다. 흑수하라고 부르는 강옆에 자리 잡은 성이었다. 이곳 역시 당시엔 비단길의 요충지였다. 기련산맥에서 넘어오는 첫 번째 길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흉노들이 비단길을 오가는 상인들로부터 통행료를 갈취했으리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하게 하는 지형이었다.
| 한나라 초기 흉노족이 세운 흑수국이 비단길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너진 성터와 봉수대만 남아 있다. |
도로 사정이 유독 안좋은 이유는 확장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공 땐 장쑤성(江蘇省) 롄윈강(連雲港)에서 신장성(新疆省)의 성도인 우루무치까지 총 연장 3800㎞의 4차선 고속도로가 생긴다고 한다.
공사중인 도로를 우회해 옛길로 접어든 김에 한 두 농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한 집의 식구는 5명이었고, 다른 한 집은 농사일을 돕기 위해 와 있는 딸 식구를 포함해 7명은 돼 보였다. 모두 우리의 옛 시골처럼 일행을 반겨주었다. 이들은 대개 옥수수 농사를 짓는데 1년 수확량이 1000㎏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간신히 가계를 꾸려 나갈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서북 대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곤 있지만 아직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옹색한 가계를 꾸려나가기에 급급한 가난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左) 주취안 인근의 농촌. 옥수수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옹색한 농가들이 대부분으로 서부 대개발은 이들에겐 먼 나라의 이야기다. (右)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 비포장도로와 울퉁불퉁한 2차선 도로를 달리며 간혹 만나는 마을은 옥수수를 재배하는 농가가 대부분이다. |
주취안(酒泉)을 거쳐 강철의 주산지이기도 한 자위관을 향해 달렸다. 자위관은 하서회랑 가운데 기련산맥과 마종산맥의 간격이 불과 25㎞ 정도로 좁아진 협곡지대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바람이 거센 곳이라 4, 5월이면 돌이 날아다닐 정도로 휘몰아쳐 차량통행이 통제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위관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으로 유명하다. 동쪽 산해관에서 시작된 장성이 서쪽으로 만리를 달려 이곳 자위관에서 비로소 그 수명을 다하고 사막의 모래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든다. 명나라 때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란 현판을 세워 서북의 끝임을 표시했다. 지난날 서역으로 가려는 상인이나 군대는 모두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자위관 주변의 장성 축조에 사용한 진흙은 모두 란저우에서 실어온 것이라 한다. 부근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래 뿐 흙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자위관의 성루에 올라 끝간 데 없이 펼쳐져 모래 바람만 희뿌옇게 깔린 황량한 사막을 바라본다. 모래바람 사이로 간혹 꼬리가 길고 긴 화물열차가 지네처럼 구물구물 기어가고 있다. 저 멀리 모래 바람을 뚫고 말을 탄 흉노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달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고선지보다 40여년 늦게 태어난 당나라 시인 노륜이 쓴 '장복야의 새하곡(塞下曲)에 화답함' 이란 시가 있다.
달이 없는 밤, 기러기는 높이 나는데 선우(單于) 멀리 도망간다 재빠른 기병(輕騎) 데리고 추격하려 하니 펑펑 쏟아지는 눈이 활과 칼에 가득하다
칠흑 같은 밤 흉노 병사들이 그들의 수령 선우를 따라 퇴각할 때, 당의 장군이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려하자 눈이 쏟아지는 상황을 묘사한 시다. 시에서 '경기'(輕騎)는 고선지가 적군을 격파할 때 중무장 기병이 아니라 경무장한 기병을 사용한 전략과 같다. 용맹한 고선지가 북방 기마 민족을 추격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노륜은 이 시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선지는 20여세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시(安西)로 왔고, 이곳에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제수됐다. 아버지 덕을 보기도 했지만 고선지 자신의 지휘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격장군부는 독립된 지역사령관의 지위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맡길 자리는 아니었다.
우리 일행은 자위관에서 255㎞ 떨어진 안시로 발길을 재촉했다. 안서도호부의 안서가 아니라 그보다 한참 동쪽에 있는 지명 안시를 말하는데, 이곳의 당나라 때 지명은 과주(瓜州)였다. 자위관에서 병목현상을 보이던 기련산맥과 마종산맥 사이의 폭이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도 사막 지역을 유용한 땅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눈에 띄었다. 모래 바람이 자주 일어나는 철길에는 이중으로 설치한 나무 방책들이 끝간 데 없이 이어져 있다. 상태가 좋은 철길 주변은 지하수를 끌어다 물길을 만들고 양옆으로 나무를 심어 철길이 흙에 묻히지 않도록 했다. 이런 사막의 바람을 놓칠세라 설치한 풍력발전소도 눈에 들어왔다. 그 수가 100여개를 헤아렸다.
| | 자위관에서 안시로 가는 길. 세차게 몰아치는 고비탄(사막)의 바람을 이용하는 풍력발전소가 사막의 한가운데 서있다. |
자위관을 출발해 1시간쯤 지났을까 뙤약볕 아래 가만히 누워있는 교만성(橋灣城)에 도착했다. 들러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이 성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탐관오리를 잔인하게 처단한 사실로 널리 알려졌다. 강우량이 적은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지금도 상당부분 멀쩡하게 보전돼 있었다. 당시 강희제는 정금산(程金山)이란 관리에게 많은 돈을 주어 이곳에 행궁을 짓도록 명했다. 그러나 정금산은 이곳이 황궁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황제의 시선이 미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공사비의 대부분을 착복하고는 아주 초라한 행궁을 지었다. 암행어사를 보내 이 사실을 확인한 황제는 정금산과 두 아들을 참수한 후 정금산의 두개골은 그릇을 만들고, 그의 등을 벗겨 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두개골을 합쳐 작은 북을 만들어 교만성에서 40여㎞ 떨어진 영녕사(永寧寺)라는 절에 걸어 두었다. 사찰 앞을 오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탐관오리를 경계하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 교만성에는 정금산 부자를 처형한 단두대가 남아 있고, 영녕사에 걸려 있었던 두개골 그릇과 북이 교만성의 전시실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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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비단길의 중심인 둔황. 서역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둔황에서 오랜 여정 동안 먹을 양식과 사막을 넘을 채비를 한다. 기련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모래산인 명사산(鳴沙山)은 막고굴과 함께 둔황의 상징이다. 둔황=조용철 기자 |
장군을 따르라 그가 곧 길이다 |
7. 비단길 중심, 사막길 - 둔황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길. 창문만 열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삭막하기만 한 풍광이 이어진다. 차창 멀리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이는 기련산맥의 설산이 인적이라곤 없는 고비사막 위로 아득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신기루의 파노라마같은 정경이 고단하기 그지없는 차안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술렁이게 했다.
우리 일행은 안시(安西)를 뒤로하고 둔황(敦煌)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둔황은 당나라 땐 사주(沙州)라고 불린 곳. 오후 1시쯤 도착해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곧장 둔황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안내인의 말이 "장안에서 로마까지 1만5000km에 달하는 실크로드(비단길)의 실제 중심은 둔황"이라고 했다. 서역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둔황에 일단 집결해 오랜 여정 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사막을 넘을 채비를 하곤 했다.
박물관에서 고선지와 직접 관련된 유물을 찾지는 못했으나 고선지가 활약할 당시 둔황 서쪽에 위치한 옥문관(玉門關)의 통행권인 '출입관권'(出入關券)을 찾은 것은 소득이었다. 둔황에서 서역으로 출입하는 두 개의 관(關)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것이 옥문관이고, 옥문관보다 70km 남쪽에 양관(陽關)이 있다. 고선지 일가도 안서도호부에 배속될 때 두 관 가운데 하나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선지가 어느 길을 통과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둔황박물관에서 마지(麻紙)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를 통해 중국의 제지술이 서방 세계로 전파되었다는 물증이기에 마치 고선지의 영혼을 만난 듯 기뻤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우리 일행은 기련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을 찾았다. 이곳에서 한무제의 명령으로 서역에서 가져다 심은 '목숙'이라는 풀을 발견했다. 흉노나 돌궐 등 유목민족이 타던 한혈마(汗血馬.달릴 때 붉은 땀을 흘리는 천리마)를 입수한 한무제가 그 말들의 먹이로 쓰기 위해 수입한 풀이다.
고선지도 이 한혈마 타고 이 일대를 누볐던 것일까. 그가 탄 말도 한혈마 같은 준마 였음이 역사서에 언급돼 있다. 고선지가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준마를 탔다는 기록이다. 이와 관련 고선지와 동시대 인물인 시성 두보(杜甫)가 쓴 시 '고도호총마행'(高都護馬行)이란 시에서 고선지의 말을 찬미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시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안서도호(安西都護)의 푸른 호마(胡馬) 이름을 날리고 별안간 동으로 왔네 전장에서는 당할 자 없었고 주인과 한마음으로 큰공을 세웠네 공을 이루니 함께 다니는 데마다 대우 극진했네 아득히 먼 곳 타클라마칸사막에서는 나는 듯 왔네 … 오색 꽃무늬 흩어져 온 몸에 감도니 만리라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장안의 장사들이야 감히 타보기나 하랴 번개보다 더 빠른 걸 세상이 아는데 푸른 실로 갈기 딴 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 길을 다시 달릴까!
파미르 고원을 넘나든 고선지 장군의 한혈마를 두보가 예찬한 시다. 시 제목에서의 '고도호'와 첫 구절에 나온 '안서도호'라는 용어를 통해 이 시가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를 지냈던 고선지 장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런데 시를 가만히 보면 시 제목과는 달리 준마만 예찬하는 것이 아니다. "장안의 장사들이야 감히 타보기나 하랴" 는 시구를 보라. 한혈마를 탈 줄 아는 이는 고선지밖에 없음을 시성이 예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두보는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인의 후예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디 출신이냐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두보와 같은 대시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간세계의 부질없는 차별짓기로 보였을 법하다.
이 시의 창작 연대는 대략 740년 경으로 짐작된다. 고선지 장군이 달해부(達奚部. 톈산산맥 서쪽 끝 부근에 있던 투르크족의 한 무리가 세운 소국)를 공략해 대승을 거두고 귀환했을 즈음이다. 고선지가 장군으로 활약한 초기의 일이다. 달해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선지는 기병 2000명만을 거느리고 출정해 달해부의 병사를 모두 죽였을 뿐 아니라 말 등의 가축도 다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통해 적은 병사로 대군을 섬멸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한 인물로 고선지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탔던 한혈마도 우리 일행이 지금 서있는 명사산에서 목숙을 먹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는 고선지의 체취를 직접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의 둔황시는 막고굴을 떼어놓고는 독립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돈황 시내에 거주하는 약 8만명의 인구 중 80%가 막고굴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일부는 교외 지역에 흩어져 면화 재배로 생계를 삼는다. 관공서는 물론 주유소.약국.상가 모든 것이 오직 막고굴 관광객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런데 최근 중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 | ‘벽의 도서관’이란 명성을 갖고 있는 막고굴은 불상을 모신 크고 작은 동굴이 1000개가 넘는다고 해서 천불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막고굴은 천불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기 386년 락승과 법랑이라는 스님이 석굴을 판 것을 계기로 이곳을 지나는 사신과 상인, 병사들이 전문가를 동원해 불단을 세우고 조각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석굴파기는 여러 왕조를 거쳐서도 끓임없이 이어져 당나라 때에 이르면 크고 작은 동굴이 1000개가 넘었다. 서역으로 가는 모든 사자(使者)와 비단을 운반하는 상인들, 그리고 출정하는 장군들은 안전과 강복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살아서 돌아오느냐 죽어서 사라지느냐는 험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훼손을 당했지만 막고굴은 지금까지도 '벽의 도서관'이란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굴 안에는 4~11세기 불교 경전, 경제문서와 문학.과학기술 관련 사료를 비롯해 백화(帛畵).지화(紙畵).직염자수 등 각종 문물 5만여점이 보존돼 있다. 문자는 대부분 한문이지만, 티벳어. 위구르어 .아리아어. 몽골어 불경도 적지 않다. 당시 둔황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동서양과 인종을 망라했던 것이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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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톈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실크로드가 톈산남로와 톈산북로로 나뉘는 지점에 위치한 고대도시 고창성. 20세기 들어 유물을 찾는 도굴꾼들에게 훼손된 유적지는 마차가 실어나르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투루판=조용철 기자 |
신장성 사람들 "고선지는 기적의 정복자" |
8. 서역 가는 관문 - 투루판
비단길의 중심이었던 둔황을 떠나려니까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둔황 막고굴에는 우리 고대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발견됐던 막고굴 아닌가. 무엇보다 막고굴의 벽화에서 조우관(새 깃털장식 모자)을 쓴 고구려 남자의 초상을 보았을 땐 마치 고선지 장군을 만난 듯 기뻤다. 또 다른 벽화에선 한국의 악기인 장구를 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고, 통일신라시대 화랑을 그려 놓은 벽화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을 늦출 순 없었다. 이제 간쑤(甘肅)성의 둔황(敦煌)에서 신장(新疆)성 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吐魯番)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본격적인 서역으로 진입하는 길이다. 오후 9시50분 투루판행 열차에 올랐다. 창 밖은 아직도 훤한 대낮. 중국 전역이 베이징 시간을 중심으로 한 단일 시간대인 때문이다. 달리는 열차의 창 밖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황량한 사막만 보일 뿐이다.
젊은 시절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이 길을 처음 들어섰다. 이후 서역 정벌을 위해 수도 없이 말을 타고 넘나들었을 테다. 기차가 하미(哈密)를 통과한다. 하미 지역을 배경으로 고선지가 활약할 당시 전쟁의 또 다른 면을 묘사한 작자미상의 시 한 수가 전해 오고 있다. 전쟁의 쓸쓸함이 배어 나오는 시다.
들리는 말에 국경 황하수(黃河戍)에서는 여러 해 동안 병사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데 텅 빈 규방을 비추는 애처로운 저 달아 우리 님 계신 막사 위 비춰 외로운 나의 마음을 전해다오
고선지와 동시대를 살았던 서량절도사 개가운에게 바친 노래로 알려져 있다. 황하수는 오늘날 하미에 설치됐던 당나라 병영의 명칭. 당나라 시대 하미 지역은 토번과 돌궐의 침입이 잦은 전방이었다. 전장으로 징집돼 간 남편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가운데 홀로 빈 방을 지키는 여인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고금동서를 막론 하고 좋아서 하는 전쟁이 어디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치렀던 전쟁, 그 전쟁의 승패를 떠나 고선지 루트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없는 영혼의 안녕을 빌고 싶다. 그들이 흘린 피가 제지술을 비롯한 동서 문물 교류의 기폭제가 되었던 사실이 그 영혼들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으리라.
| | 투루판 인근 농촌에서 만난 위구르족 어린이들.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
(左) 고창성 앞에서 기념품을 판매하는 위구르 어린이. (右)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고창성 마부. 그의 손에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
하미부터는 신장성 위구르자치구다. 당나라 때 하미의 지명은 이주(伊州). 시안(西安)에서 시작해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당나라의 비단길은 그 여정의 절반이 신장성자치구를 통과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는 중국.인도.페르시아.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여러 인종이 자연스럽게 뒤섞였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곳에는 그 동안 야금야금 스며든 한족 인구가 전체의 47%나 되고, 토박이 위구르인은 43%로 밀려났다.
위구르족들이 전통적으로 중국 중앙정부와 반목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화해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종교 때문이다. 위구르족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카자흐.키르기스.타타르족 등과 종교적 유대감이 돈독하다.
| | 한여름 40-50도를 오르내리는 투루판 분지. 주민들이 열대야를 피해 집밖에서 잠을 잔다. |
신장성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한 이는 터키인을 닮은 36세의 위구르족 아리무(阿里木)였다. 신장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그로부터 고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 일행은 무척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 시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카슈미르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 기적적인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아리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이다. 그에게 고선지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느냐고 묻자, 대학에서 배웠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신장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지를 재차 물었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고선지를 알고 있을 겁니다." 이 같은 대답을 신장성자치구 위구르인을 통해 듣고 있자니 자랑스럽다기보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작 고구려인의 후예인 우리가 고선지 장군에 대해 더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아리무의 안내를 따라 투루판 시가지에서 약 40㎞ 떨어진 고창(高昌)을 찾았다. 톈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실크로드가 톈산남로와 톈산북로로 나뉘는 지점에 고대 도시 고창성이 남아 있다. 고대 고창 지역은 서역의 4대 불교 성지 중 하나였다. 20세기 들어 이곳을 찾은 영국인 탐험가 오렐 스타인 등이 '옛 유물을 가져오면 돈을 준다'는 식으로 광고를 하여, 당시 현지인들이 유물을 찾느라 성을 마구 훼파시켰던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고선지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당나라의 서역 통치 지휘부)의 군대가 주둔한 쿠차로 갈 때 지금의 투루판인 고창을 경유했을 것이다.
고선지가 간쑤성의 우웨이(武威)에서 투루판까지 갈 땐 말을 타도 한 달 이상 걸렸을 길이다. 고창은 서기 600년 께 당나라에 복속되면서 안서도호부의 치소(治所)를 두었던 곳. 그러다 당나라가 실크로드 경영에 본격 나서며 안서도호부의 치소는 더 서쪽인 쿠차로 옮겼다. 안서도호부의 주요 임무는 서역을 넘나드는 상인들의 안정적인 무역을 보호하며 실크로드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서방으로 통하는 관문인 이 일대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장악해야만 서방세계와의 무역에서 독점적인 이익을 계속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주도권을 다툰 서역 정벌의 역사 한복판에 고선지 장군이 서 있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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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이따금 나타나는 농촌마을은 뜨거운 햇볕 아래 숨을 죽이고 있다.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오후, 곧게 뻗은 백양나무 그늘 아래 아낙네가 돗자리를 손질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
서역 개척 선봉에 선 '고구려 유민 부대' |
9. 사막과 초원 갈림길 - 우루무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의 주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 위구르말로는 우룸치)를 향해 출발했다. 투루판(吐魯番)에서 우루무치까지 가는 200㎞는 바람이 거세기로 소문난 노정이다.
사막 한가운데 일직선으로 뚫려있는 고속도로는 까마득한 먼 곳까지 너무나 곧게 뻗어 있다. 그래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도로의 끝자락이 수직으로 일어서서 하늘과 연결된 것같은 착시를 느낀다.
1999년 완공된 고속도로 왼편에는 광케이블까지 깔려 있다. 차창을 할퀴고 지나는 바람이 차를 떠밀어 사막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칠 것 같았다. 모랫벌 밖으로 드러난 바위와 자갈들은 오랫동안 바람에 씻겨간 나머지 걸레로 닦아 놓은 것처럼 반질거렸다.
건조하고 따분한 풍경을 바라보며 80㎞ 정도 달려갔을 때였다. 짙푸른 초원지대가 느닷없이 우리들 시야로 뛰어들었다. 끝간데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없이 펼쳐졌던 초원지대가 한참 만에 뒤로 물러나는가 하였더니 이번에는 드넓은 소금호수(鹽湖)가 나타났다.
| (左)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길. 건조하고 따분한 풍경을 바라보며 80㎞ 정도 달려갔을 때 느닷없이 수목이 우거진 마을과 초원이 나타났다. (右) 강가를 따라 펼쳐진 초원엔 카자흐족들이 유목 생활을 하며 양떼를 기르고 있다. |
우루무치에 도착하자마자 고선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신장성 박물관을 찾았다. 아쉽게도 내부수리 중이라 유물을 관람할 순 없었다. 다행히 신장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 쉐쭝정(薛宗正)씨를 만나 고선지 장군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돌궐사(突厥史)'등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쉐쭝정에게 당나라 때 고구려 유민들의 이동 경로를 물어보았다. 그는 상세한 설명 대신에 "고선지 일가만 서역에 온 것이 아니라 당시 고구려 유민의 부락과 함께 이동했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고선지의 군대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상당수 포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선지 장군의 토번 정벌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임무는 연운보(連雲堡.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사르하드) 점령이었다. 토번의 최전방 기지이자 파미르 고원의 중앙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연운보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이를 통해 당나라는 서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고선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소발률국(小勃律國. 지금의 북부 파키스탄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747년의 일이다. 이 때 고선지는 빙설로 뒤덮인 힌두쿠시 산맥 앞에서 두려움에 휩싸인 부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도의 심리전을 편다. 자신의 부하 중 일부를 적군으로 위장시켜 투항해 오게 한 일종의 위장전술이다. 위장전술에 투입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갈 군인들 가운데 당연히 고구려 유민도 포함됐을 것이다.
고선지 장군이 두번째 지역사령관으로 있었던 언기진(카라샤르) 시장 앞에 늘어선 택시와 농기구 판매점. |
쉐쭝정은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여덟 명 장군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고사계는 아들 고선지에 앞서 대단한 기량을 갖추었던 장군" 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당나라는 토번과 돌궐의 침공을 막을 길이 없게 되자 싸움을 잘하는 고구려 유민 부족을 장안의 서쪽 변경지역인 안서도호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 말했다.
고구려인은 당시 만주벌판을 누비며 말 잘 타고 활 잘 쏘기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고선지가 원정 때마다 전공을 세웠던 것은 물론 그의 탁월한 역량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선지 휘하에 있던 이름없는 고구려 유민 부대원들의 역할이 컸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얘기를 확장하면 서역을 정벌함으로써 가능했던 당나라의 성세(盛世)는 고구려 유민들에 힘입었다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쉐쭝정은 대화 도중 흑치상지를 고구려인이라고 잘못 말했다. 이에 흑치상지는 백제장군이라고 수정해 알려주자 그는 "흑치상지나 고선지가 같은 민족이라 내가 고려인이라고 한 것"이라고 응대하는 것이었다. 최근 중국 학계 일각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고 강변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허구인가를 중국 학자의 입을 통해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루무치 시내를 돌아보면서 곳곳의 건물에서 PC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유행의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학생들이 PC방에 빠져 성적이 떨어질 정도라는 것이었다. 양떼와 초원, 그리고 사막을 연상했던 과거의 신장성이 아니었다.
(左) 우루무치 시내 중심가 서점 앞에서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하려는 대학생들. (右) 중국 대부분 도시의 중심가나 길가에서 청소 등 일자리를 구하려는 노동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
"도로는 중국의 다른 어떤 성보다 현대화됐습니다." 우리를 안내했던 위구르인 아리무가 고속도로를 달리며 의기양양해서 한 말이다. 비단을 실은 낙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타림분지를 통과해 투르판. 우루무치. 카스를 거쳐 유럽으로 갔던 대상들의 모습은 너무나 먼 옛날 얘기가 되어 버렸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화염산에서 손오공을 만나 인도로 향했던 비단길 역시 고속화 되어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옛 것들은 미련 없이 사라지고, 묻혀지고, 지워진다. 그 위에 새로운 것이 깔리거나 일어서서 언젠가는 자신도 옛것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고속도로에 묻혀 있는 광케이블 역시 언젠가는 그 첨단성이 쇠퇴하여 까마득한 옛것으로 소멸되어버릴 때가 있을 것이었다. 그 재빠른 변화 혹은 변화의 소용돌이를 중국의 서쪽 끝에 있는 변경 도시, 그것도 낙후한 도시로만 여겼던 우루무치에서 발견했다.
신장성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발빠른 투자는 그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신장성의 톈산산맥과 쿤룬산맥 사이에 있는 타림분지에는 중국이 21세기 내내 사용할 수 있는 석유가 매장돼 있다고 한다.
위구르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독립을 주장하고, 한어 쓰기를 혐오할 정도로 한족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아리무의 행동에서도 얼른 발견할 수 있었다. 함께 지낸 5일 동안 그는 한족이 경영하는 식당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멀리 있더라도 위구르인의 식당을 찾았다. 처음에는 무슬림인 그가 돼지고기 요리가 많은 중국식당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인가 하였는데, 돼지고기를 내놓지 않는 식당에서도 위구르인 식당을 반드시 찾아가는 것이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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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험준한 산악, 서역 통로’ - 우루무치 ~ 쿠얼러 |
| 고선지가 통치했던 안서도호부는 한반도의 4배가 넘는 광활한 영역이었다. 그 치소가 있었던 쿠차의 재래시장. 마차와 트럭, 오토바이가 뒤섞인 혼잡한 시장은 대다수 위구르인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쿠차=조용철 기자 |
우루무치에서 쿠얼러(庫爾勒), 그리고 쿠차(龜玆) |
10. 험준한 산악, 서역 통로 : 우루무치~쿠얼러
우루무치에 도착한 이튿날 비가 내렸다. 잠시 짬을 내 중심가에 있는 국제 그랜드 바자르 (이슬람권 특유의 시장)를 찾았다. 이스탄불의 바자르처럼 크고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비가 내리는 데도 활기 찬 모습은 이스탄불 못지 않았다. 가게 주인의 대다수는 위구르인. 바자르를 찾은 세계 각국 여행객들의 시선을 끄는 상품은 단연 '호탄옥'(和田玉)이었다.
비단길이 형성되기 이전 이 일대엔 '옥석의 길'이 있었고, '초원의 길'이 있었고, '산맥의 길'이 있었다. 그 중 옥석의 길은 호탄옥이 있었기에 생겨난 말이다. 호탄옥은 타클라마칸 남쪽에 있는 호탄에서 생산되는 옥이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 있지만, 호탄옥엔 티가 없기로 유명하다.
| 우루무치에 도착한 이튿날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조금 내린 비에 물이 고인 도로를 시민들이 조심스럽게 걷고 있다. |
호탄의 당나라때 이름은 우전(于). 고선지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지역에서 처음으로 독립된 부대를 지휘했던 곳이 바로 우전이다. 당시 고선지의 직함은 진수사(鎭守使. 지방사령관).
호탄 혹은 우전은 거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험난한 지역에 속한다. 한때 강성한 불교국가였던 우전국의 영역이었다. 우전 진수사로 부임한 고선지의 가장 큰 임무는 토번(吐蕃)을 제압하는 것. 훗날 고선지가 당현종으로부터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받게 된 배경엔 우전 진수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업적이 자리잡고 있다. 행영절도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다른 지역을 공격하거나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는 전적인 재량권을 가진 높은 관직이었다.
이제 우루무치에서 470㎞ 떨어진 쿠얼러(庫爾勒)를 향해 가야 한다. 톈산산맥 등성이를 세 번이나 넘어야 하는 험로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일행이 통과하는 코스는 카라샤르(焉耆)~쿠얼러~쿠차(龜玆)~아커쑤(阿克蘇)~카스(喀什)를 거치는 비단길. 카라샤르는 고선지가 우전에 이어 두 번째로 진수사를 지낸 곳이다. 쿠차는 안서도호부의 치소가 있던 곳으로, 고선지의 연운보(連雲堡) 전투와 소발률국(小勃律國) 공격이 시작된 지역이다.
우루무치에서 쿠얼러로 넘어가는 길. 텐산산맥의 세갈래 등성이를 넘어야 한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엔 깃털 같은 구름이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
지난날 고선지가 지켰던 톈산산맥은 도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의 적막강산이다. 두 번째 고개로 접어들면서 시커먼 돌산이 연속해 펼쳐졌고, 날카롭게 각이 진 빗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하염없이 올랐다가 또 내려가야 하는 거리가 에누리 없는 100㎞에 이른다. 하미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놓치지 않고 줄곧 따라오고 있는 톈산산맥의 위용이 우리를 압도했다. 의젓하고 강건한 기백을 자랑하는가 하면, 번개가 내려친다 하여도 끄떡 않는 담대함과 우람함이 또한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방 공룡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원시성도 지니고 있다. 말 그대로 굽이굽이 돌아서 두 번째 등성이를 올랐을 때는 대평원이 우리들 시선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신장성(新疆省) 최대의 바이무르커 초원 일부도 눈에 들어왔다.
카라샤르. 우전. 쿠차. 카스 등 4곳을 일러 흔히 '안서사진'(安西四鎭)이라고 한다. 당나라가 신장성 지역을 통치할 군사 지휘부를 설치한 곳이 바로 안서사진이었다.
쿠얼러 남쪽으로 공작하(孔雀河)가 흐르고 그 아래로 타클라마칸 사막이 동서로 길게 누워 있다. 험준한 산악지대이지만 당나라가 서방으로 통하는 교통로였기 때문에 이곳의 안전은 당나라의 번영과 직결됐다. 이 일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토번은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다. 그리고 안서사진 일대를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던 토번을 정벌함으로써 당나라가 실크로드의 안정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고선지 장군이었다. 고선지가 통치했던 중앙아시아의 안서도호부 일대는 한반도의 4배가 넘는 광활한 영역이었다.
(左) 자원의 보고(寶庫) 신장성. 사막과 경작지 한가운데서 원유를 뽑아내는 시추시설이 자주 눈에 띄었다. (右) 서부대개발, 중국은 공사중이다. 누추한 차림의 노동자들이 삽을 들고 공사 현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
이 길을 통해 중국에서 서방으로 차. 비단 등이 수출되었고, 반대로 서방의 문물과 종교가 중국으로 들어 왔다. 동서교섭이 활발하게 전개됨으로 말미암아 안서도호부 지역에는 번역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선지에 앞서 727년 '왕오천축국전' 으로 유명한 신라 승려 혜초가 이 길을 따라 쿠차를 통과했었다. 수많은 불경을 번역한 현장법사도 이 길을 지났다. 그리고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 이후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제지술이 처음으로 서방에 전해진다.
쿠얼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쿠차로 직행하기 전에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접어 들었다. 쿠얼러 시가지를 벗어나자 도로 좌측으로 포도밭이 보였고, 우측으로 톈산산맥이 다시 험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자 바로 타림분지가 나왔다. 타림분지는 58만㎢의 거대한 분지로, 그 안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들어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크기는 38만㎢. 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크다. 그런데 당현종 때 고선지 장군과 그의 명령을 따르는 척후병들이 일사분란하게 말을 타고 달리며 남방 토번의 활동을 정찰하고 견제하던 전장이었던 이곳도 현대화의 물결을 거스를 순 없었다. '타클라마칸' 이란 이름에는 '보물이 가득하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미란고성.누란고성.미야고성 등 당나라 성들이 있던 곳이지만, 지금은 모래에 파묻혀 사라지고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그 번성했던 고성들이 왜 사막에 파묻히게 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다.
(左) 타클라마칸 사막에 선 '고선지루트 1만km'의 공동 집필가인 김주영 소설가(우)와 지배선 연세대 교수. (右) 이스라엘 기술로 녹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도로 옆으로 심은 나무들이 호스를 따라 자라고 있다. |
그런데 유적지를 묻어버린 모래 속에서 그러나 오늘의 중국인들은 석유를 찾아냈고 지금은 그 원유를 나르기 위한 송유관이 끝간 데 없이 뻗어 있다. 또 이스라엘에서 들여온 기술로 녹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막 중앙에 놓인 도로 양편에 3m 간격으로 호스를 10개씩 설치해, 그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나무를 자라게 하는 프로젝트다. 호스의 행렬은 사막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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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슬람 전통에 따라 얼굴을 가린 여인이 쿠차 시내를 걸어가고 있다. 조용철 기자 |
1만 기병대, 토번 정복하고 아랍을 '호령' |
11. 군사요충지 : 쿠차(庫車) ~ 카스(喀什)
고선지 장군이 군인으로서의 기량을 최대로 발휘했던 지역을 꼽으라면 단연 지금 우리 일행이 향해가는 쿠차(庫車)다. 쿠차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본부가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안서도호부의 책임자로서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의 최대 골칫거리였던 토번을 제압하면서 서방의 아랍세계까지 호령했던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쿠차까지 자동차로 3시간을 달렸다. 쿠차에 당도해선 곧장 쑤바스(蘇巴什) 고성(古城)을 찾았다. 오늘날 쿠차에서 20여km 떨어진 곳에 쑤바스 고성이 있다. 쑤바스는 위구르 말로 '물의 원천'이란 뜻. 톈산(天山)산맥에서 발원한 쿠차허(庫車河)가 쑤바스성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흘러간다. 이 고성에 안서도호부의 본진이 주둔해 있었다. 안서도호 고선지의 지휘본부도 쑤바스 고성이었다.
외성, 내성, 본성의 3중으로 구성된 성은 매우 견고해 보였다. 웅장한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외벽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애석하게도 쿠차성의 산기슭과 강변에 있던 옛날 집 대부분은 문화혁명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쿠차 일대를 답사하며 톈산산맥의 북쪽과 남쪽의 생활이 현저하게 다를 수밖에 없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오아시스 농업으로 개간된 쿠차 지역이 왜 당과 토번과 돌궐의 각축장이었는지 그 이유를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는 지형이었다.
고선지가 활약하던 당나라 때 이 지역은 북강(北疆. 톈산산맥 북쪽의 신장성) 과 남강(南疆)으로 생활상이 뚜렷하게 구분됐다. 북강은 유목민들의 생활터전이었으며, 남강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사가 행해졌다. 신장(新彊)성 남쪽에 위치한 토번이 남강 일대를 침범한 이유는 바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을 장악 하면 신장 지역은 물론 당나라 장안까지 진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였던 것이다. 당나라 입장에서 보아도 쿠차는 타림분지를 장악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새였으며, 안서도호부에 주둔할 많은 군사의 식량을 손쉽게 조달하기 위해선 지휘본부를 이곳에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현종은 고선지에 앞서 차례로 세 명의 절도사를 쿠차 지역에 임명해 토번 정벌을 명한 일이 있다. 절도사 전인완(田仁琬), 개가운(蓋嘉運), 부몽영찰(夫蒙靈察) 등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토번 제압에 실패했다. 잇따른 실패 후에 당현종이 선택한 카드가 바로 고선지 장군이었다. 행영(行營)절도사로 특별 임명된 고선지는 쿠차의 지리적 형세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마침내 토번 진압에 성공한다.
고선지가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쿠차성을 떠난 것은 747년 4월경이다. 행영절도사란 일종의 게릴라 부대장과 같은 고위직. 그가 지나는 지역에서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황제가 위임. 부여한다는 특별 직책이다. 절도사직에 오른 적이 없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로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은 당현종이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를 보여준다. 고선지가 비록 고구려 유민 출신이긴 했지만, 그가 이미 우전과 언기 지역에서 진수사로 근무하며 토번을 물리쳤던 혁혁한 전공을 현종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누볐던 신장성의 비단길은 어느 길을 가든지 끝없이 광대하였고, 마치 바다처럼 광활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심한 추위와 살갗을 벗겨낼 것처럼 숨가쁜 더위, 살을 에는 풍찬노숙에 식량과 물은 언제나 부족했다. 끝간 데 없는 사막 위로 보이는 것은 회오리 바람과 하늘뿐이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없었고, 땅에는 향기 나는 풀 한 포기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지나는 오늘의 여정처럼, 가깝고 먼 곳을 막론하고 오직 모래 언덕일 뿐 방향을 가름할만한 어떤 지형지물도 없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지나며 노천에서 하룻밤 야영을 할 때는 이튿날 가야할 방향에 막대기 혹은 죽은 사람의 해골이나 뼈를 놓아두어야 했다. 어떤 때는 사막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악귀와 같은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이 바람을 만나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左) 쿠차 노성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빵을 굽는 위구르 가족. (右) 톈산남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카스. 당나라 땐 소륵으로 불렸던 카스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의 중심에 있으며 산업과 교통의 요충지로 실크로드(비단길)의 중요한 지점이다. 카스의 외곽 농촌 마을. 추수를 끝낸 농부 가족들의 모습이 여유롭다. |
고선지가 갔던 바로 그 길을 따라 우리 일행은 쿠차를 출발해 아커쑤(阿克蘇)를 거쳐 카스(喀什)로 향했다. 카스의 당나라때 지명은 소륵(疏勒)으로 네개의 주요 군사 지휘부가 있던 안서사진(安西四鎭) 가운데 하나였다. 당나라 때 소륵은 오늘날 카스에서 남쪽으로 10여km 더 간 곳에 위치한다. 현재 그곳엔 중국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당나라 때도 주요 군사 기지였는데, 지금도 병영이 있다 하니 1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은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카스에서 30여km를 더 가면 쿤룬산맥과 톈산산맥이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
고선지는 쿠차에서 카스를 지나 총령(嶺)→파밀천(播密川)→특륵만천(特勒滿川)→ 오식닉국(五識匿國)→연운보(連雲堡)로 진격하며 이 일대의 토번 세력을 격파했으며, 곧이어 다시 소발률국(小勃律國) 정복에 나서 마침내 토번 정벌의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아커쑤에서 카스로 향해 달리는 차창 밖으로 톈산산맥이 끈질기게 우리 일행을 따라붙었다. 사막 속에 문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변경 마을의 삭막한 상가들은 뒷골목 없이 오직 한 줄로만 늘어서 있다. 땡전 한 푼 투자하지 않고 만든 서부활극 세트장 앞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카스가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멀리 쿤룬산맥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카라샤르와 쿠차에서 카스까지 얼추 1300㎞ 이상을 달려왔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 왔다해도 타림분지를 벗어난 적은 없었다. 타림분지는 그처럼 광활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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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동서 갈림길’ - 카스 ~ 키르기스스탄 |
| 동서 교통로의 십자로에 위치해 동서양의 온갖 상품들이 거래되는 카스의 바자르. 표범 등 야생동물의 모피도 거래되고 있다. |
종이, 서역 전파 … '문명의 비단길' 열리다 |
12. 동서 갈림길 : 카스(喀什) ~ 키르기스스탄
| | | 중국에서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자 아름다운 대자연이 펼쳐졌다. 유르탕(유목민 천막)과 말, 소 등 가축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조화를 이룬 초원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조용철 기자. | | 오늘은 국경을 넘는 날이다. 중국 카스(喀什.고선지 시대 지명은 소륵)를 지나 옛 소련이었던 키르기스스탄의 나른(Naryn) 지역으로 간다.
고선지가 장악했던 동서교통로는 카스에서 두 갈래 길로 나뉘었다. 하나는 해발 4700m가 넘는 카라코람산맥 쿤제랍 고개를 통해 인도로 들어가는 코스다. 다른 하나는 톈산산맥을 넘어 서아시아 로 통한다. 우리 일행은 두 길 가운데 톈산산맥의 또르가르드 고개를 택했다. 또르가르드 계곡은 중국의 종이가 서양으로 전해진 루트였기 때문이다.
카스의 400년 전 노성(老城)은 옛 모양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황토로 만든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도 황토집은 주요 생활 공간이다. 카스의 인민 정부 청사 앞은 많은 이들이 오가기는 해도 우루무치처럼 활기차진 않 았다. 중국 최대의 회교사원인 청진사를 찾았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카스가 속한 남강(南疆.신장성내 톈산산맥 남쪽지역) 주민의 97%는 위구르인이다. 그 때문일까. 서북대개발이 한창이지만 아무래도 한족 중심의 개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스에 도착했을 때 한.중.일 3국 방송국이 공동 제작하는 '신실크로드' 를 촬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30년전 히트했던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신실크로드'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비단길의 현재적 의미를 캐묻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고선지 루트와 그들이 취재하는 비단길은 사실상 같은 길이 아니던가. 한나라 무제 때 개척된 비단길을 당나라 현장 때 크게 확장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 바로 고선지 장군이다. 특히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제지술이 최초로 서방에 전해졌다. 그럼에도 고선지의 이름은 세계 역사 속에 아직 그 위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아쉬움을 안고 우리는 가야 할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카스는 동서교통로의 십자로에 위치한 도시답게 지금도 바자르(이슬람 전통 시장)가 유명하다. 파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하는 국제 버스 여객터미널도 있었다. 고선지 시대 카스의 바자르에도 지금처럼 파키스탄.인도.러시아에서 온 외국 상인 들이 붐볐을 터이다. 그들이 가져와 바자르에 펼쳐놓은 상품 중에서 고선지 역시 당현종과 양귀비에게 바칠 귀한 물건을 찾지 않았을까. 울긋불긋한 세로줄 문양의 위구르 전통 옷감이 눈길을 끌었다. 위그르인에게 물으니 한나라 시대부터 사용된 문양이라고 한다. 2000여 년 문화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넘는 일정이 우리 일행을 조금 긴장시켰다. 토번 대원정에 나선 고선지는 카스에서 연운보(連雲堡.지금의 아프카니스탄 아르하드 지역)를 향할 때 이보다 훨씬 더 심한 긴장감에 사로잡혔으리라. 토번 연운보는 파미르고원 한복판에 위치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고선지는 카스에 도착해 부대를 정비했다. 험로를 거쳐오는 동안 질병에 시달렸던 병사들은 남아서 쉬게 했고, 카스에서 새로 병사들을 선발했다. 그리고 탁월한 산악 기동전술을 구사하며 불가능에 가까웠던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까지 당나라는 토번의 일방적 공격에 시달렸었다. 고선지가 토번을 장악함으로써 당나라는 서역과 동서 교섭의 루트를 다시 장악하게 됐다.
연운보를 함락시킨 고선지는 곧바로 소발률국(지금의 파키스탄 북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힌두쿠시 산맥의 탄구령(해발 4600m)을 넘는다. 747년의 일이다. 이번 기회에 토번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의도였다.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 산맥 이 해발 2500m에 불과했다. 이에 비교하면 고선지가 알프스보다 약 2배 더 높은 힌두쿠시산맥을 넘는 일이 어떠했으리라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선지는 군복과 무기와 식량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경기병(輕騎兵) 작전을 구사 했다. 토번은 그와 정반대의 중기병(重騎兵)이었다. 양피 갑옷을 입은 고선지 군대의 공격속도를 소가죽 갑옷으로 중무장한 토번군이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카스의 숙소에서부터 국경선까지 시속 40km로 세 시간 가까이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민간인 통제구역이 120㎞나 됐다. 통제구역은 정차는 물론 사진촬영도 금지였다. 민가가 점차 사라지고 군부대가 보이면서 국경지대의 살벌함이 실감났다. 차는 산길을 완만하게 올라갔다. 키르기스스탄에 도착하기 1시간 전부터 부슬부슬 내린 비는 국경 팻말이 보일 즈음 어느새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해발 3752m의 또르가르드 고개에서 우리 일행을 태워다 줄 차량을 기다렸다. 눈 덮인 산 속에서 1시간을 떨며 기다린 뒤에야 고려인 예니게프 채와 위구르인 운전기사 루스란이 밴을 몰고 나타났다. 험준한 고개를 10여 분 내려온 뒤, 옛 소련의 스산한 막사 같은 키르기스스탄의 국경 검문소에서 입국심사를 마쳤다.
국경을 넘자 확연히 다른 자연환경이 펼쳐졌다. 중국의 남강 일대가 황량한 벌판이 라면 이곳은 푸른 초원지대였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생쥐처럼 생긴 작은 동물이 풀밭에서 우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원시의 자연이 이런 것일까. 초원에서 말 달리는 키르기스인들은 때묻지 않은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이 불편했던 점을 빼면 키르기스스탄 국경의 초원을 감상하는 묘미는 황홀함 그 자체였다. 가는 길 곳곳에 펼쳐진 '유르탕'(유목민 천막)은 이곳이 유목민의 나라임을 알게 했고, 키르기스스탄의 변화가 더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의 1인당 GDP가 연 500달러 정도라고 한다.
키르기스스탄은 고선지와는 악연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750년 아랍제국과 당나라 군대가 격돌한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패한다. 이 일대에서 승승장구하던 고선지가 패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의 휘하에 있던 케르룩 부대의 반란 때문이었다. 케르룩은 본래 돌궐의 한 지파로 지금 우리 일행이 지나는 키르기스스탄 어딘가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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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탈라스 대평원서’ '통한의 눈물' 뿌리다 |
| 위구르족의 신식 결혼식 문화. 신혼부부가 온통 꽃으로 장식한 승용차를 타고 카스 시내를 달리고 있다. |
참패 : 키르기스스탄 ~ 우즈베키스탄 |
13. 탈라스 대평원서 '통한의 눈물' 뿌리다
| | 키르기스스탄의 초원과 마을 입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독특한 이슬람식 공동 묘지.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처럼 보이는 묘지 앞에 죽은 자를 위로하듯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망자의 흉상을 세워 놓은 곳도 많았다. | | 인류의 최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는 종이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술을 발명한 이는 후한(後漢)의 환관이었던 채륜이다. 제지술은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서방 세계에 전파되었다. 서기 751년, 동진하던 이슬람 군대와 당나라에서 파견된 고선지의 군대가 실크로드(비단길)의 패권을 놓고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탈라스 평원에서 맞붙는다. 중앙아시아 일대의 운명을 결정한 탈라스 전투다.
우리 여정의 종착점이 바로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던 카자흐스탄이다. 종착점을 그렇게 잡은 연유는 잊혀진 탈라스 전투를 기억하며, 그를 통해 종이가 서양에 전해진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함이다. 종착점은 새로운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반도와 유라시아를 잇는 신실크로드이자 21세기 고선지 루트가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탈라스 전투에 관해선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도 기록돼 있다. 대식국(大食國.사라센제국)이 아랍의 연합군을 결성해 안서도호부를 공격하려 하자 이 소식을 접한 고선지가 반격에 나섰다. 두 세력은 탈라스성에서 대치해 닷새 동안 전투를 벌였으며, 고선지군 내 케르룩 출신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대식국군과 협공하는 바람에 고선지가 패했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타림분지 서쪽이 이슬람화한 것은 고선지 군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패하지 않았다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고선지 이후 중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에서 오슈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로 쭉 가면 탈라스강이 나온다. 비슈케크에서 남서쪽으로 190여㎞ 떨어진 지점이다. 탈라스강으로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니 고선지 당시의 격전 상황이 12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일행의 눈앞에 다시 펼쳐지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비슈케크에서 오슈로 가는 완만한 내리막 길 양옆에 펼쳐진 유목생활의 모습은 이방인인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초원과 나무와 동물과 인간이 자연이라는 큰 이름 아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말이나 소는 지키는 사람이 있건 없건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끼리 수십, 수백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한 목동이 200~300마리의 양을 몰고 다니기도 했다. 바로 옆에 세운 유르탕(유목민 천막)은 초원의 일부가 돼 있었다. 거기에 톈산산맥의 눈이 녹아 쏟아내는 카랑카랑한 물소리가 더해졌다. 아, 인간이란 무엇이고 문명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는 그저 멍하니 입을 헤 벌리고 선 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탈라스 전투의 여파는 인류 문명이 진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고선지 장군의 부하 중 종이 만드는 기술자가 이슬람군의 포로가 됐다. 그가 아랍권에 전한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전해졌다. 이 같은 사실은 아랍 장군 이븐 살리의 포로였던 두환(杜環)이 당나라로 귀환하면서 알려졌다. 두환이 쓴 '경행기(經行記)'에 의하면, 당나라에 포로가 된 고구려인이 당의 노예가 된 것처럼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 군사도 모두 사라센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비단과 명주 베틀을 만드는 사람, 금. 은을 다루는 사람 등 중국의 장인들이 아랍에 동양의 신기술을 전수했고, 사마르칸트로 보내진 중국 제지공에 의해 제지공장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슬람 압바스 왕조의 중심지 사마르칸트에서 제지술은 다시 바그다드로 전파되고 드디어 유럽 전역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와 영국까지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대략 1300년께다. 제지술 전파는 종이의 대량 생산을 가져왔다. 나아가 지식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게 함으로써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 유럽의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바로 1300년대 후반부터 일어났음을 세계사는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키르기스스탄에서는 공동묘지가 자주 보였다. 그들만의 독특한 장례문화를 보여주었다. 마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것 같이 만들었다. 어떤 공동묘지는 실제 마을보다 더 훌륭하게 꾸몄고, 무덤 속 주인의 흉상까지 만들어 놓기도 했다. 흉상을 놓지 못할 경우엔 생전 모습을 돌에 새겨놓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 하는데, 수백년 아니 수천년 전의 유목민 마을로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가 없었다면 그같은 착각은 더 지속됐을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 검문소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키르기스스탄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경탄의 느낌을 싹 가시게 했다. 터무니없는 '통과세'를 요구한 것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 국경 통과를 시도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국 여권을 보는 순간 부자나라로 생각하여, 마치 고선지 시대 실크로드의 도적들이 통행세를 물리거나 약탈했듯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가. 어이없는 상황을 반복하는 가운데 날이 새고 말았다. 날이 밝아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돈을 요구할 수 없게 되니까 그제서야 겨우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안젤라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당초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고려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최근 민주화 운동을 무력 진압해 사망자가 생길 정도로 치안이 좋지 않다고 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즈베키스탄 검문소에서도 돈을 요구하는 상황이 또 벌어졌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초소가 있는 곳마다, 교통경찰이든 군인이든 통행료를 강제 징수하기 일쑤였다. '21세기에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로 가는 길은 자꾸 지체됐다. 엉뚱한 사태로 인해 고된 하루였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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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1300년 전 벽화에 ’ 앗! 고구려인이 ... |
| | 키르기스스탄 국경에서 어린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다. |
고구려인, 고려인 : 타슈켄트 ~ 사마르칸트 |
14. 1300년 전 벽화에 앗! 고구려인이…
| | |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향하는 길목.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과 초원의 길을 말을 타고 달렸을 고선지 장군의 길이다. 대상들 또한 낙타에 상품을 싣고 수없이 누볐을 비단길의 황홀한 저녁놀 속으로 낙타들이 걸어가고 있다. 조용철 기자. | |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국계 동포를 고려인이라 부른다. 우리 일정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는 현재 20만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타슈켄트시 인구의 3%에 이른다. 원래는 구 소련 연방의 연해주 일대에 살았으나 1930년대 스탈린의 민족 분리정책에 의해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당한 고려인의 후예다.
옛 소련 붕괴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그 전엔 훨씬 더 많은 고려인이 타슈켄트에 살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과연 고려인들뿐일까. 고선지와 함께 중앙아시아 일대를 평정했던 수많은 고구려의 후예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탈라스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 경우도 많지 않았을까. 고선지 루트에 펼쳐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을 만나는 느낌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7세기 말 고구려가 망한 뒤 많은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끌려왔다. 그 가운데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도 포함돼 있었고, 그는 다른 고구려인 포로와 함께 서북변경으로까지 끌려 왔다. 8세기 초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인의 후예들과 20세기 초 소련에 의해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 두 고(구)려인의 삶의 시간적 격차는 많이 벌어져 있지만, 강제이주라는 공간적. 상황적 유사성은 수백년의 간격을 뛰어 넘는 그 어떤 동병상련의 아픔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역사의 아픔인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픔을 아픔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데 우리 역사의 묘미가 있다. 강제 이주된 현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세계 문명의 교류에 이바지 했다. 고사계는 포로의 몸이었지만 출중한 무예 실력을 인정받아 안서도호부 8대 장군의 한명으로 발탁 승진됐다. 그의 아들 고선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안서도호부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까지 장악했다. 8세기 중반 고선지는 중앙아시아의 사실상 총독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국의 종이 만드는 기술이 서방에 전파되었으니 그가 세계 문명교류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8세기 고선지가 그랬던 것처럼, 20세기 초반 이곳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과 그 후예들도 한국인 특유의 근면성과 교육열을 바탕으로 현지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다. 어디를 가든지 만날 수 있는 SAMSUNG이나 LG의 홍보 전광판은 모든 고려인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우즈벡인들은 DAEWOO를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다. 타슈켄트 시내를 돌아다니는 자동차의 절반은 대우 상표를 달고 있다. 대우의 타슈켄트 현지 공장에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1200여년 전 말을 타고 질주했던 고선지의 활약상과 오버랩되는 장면 아닌가. 유라시아의 한 가운데서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이 대를 이어 펼쳐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타슈켄트 지역에 있던 석국(石國)을 고선지가 정벌한 것은 750년의 일이다. 석국은 실크로드의 교차점에 위치해 일찍부터 중개무역이 번성했으며 그만큼 당나라와 아랍 세력 간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정교일치(政敎一致)를 표방하는 이슬람 세력이 서아시아에서 동방으로 급속히 세력을 팽창해 나오면서, 석국을 비롯해 이 일대의 나라들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고 아랍과 연합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석국은 그같은 세력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고선지의 석국 정벌은 이 일대에서 확산되던 이슬람의 영향력을 결정적으로 꺾는 것이었다. 토번 연운보 정벌(747년)-소발률국 정벌(747년)-석국 2정벌로 이어지는 고선지의 승전보는 당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군사적 전성기를 누리게 했다. 이 일대의 크고 작은 72개국이 조공을 바치며 당나라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 중앙아시아 세력 재편의 중심엔 고선지가 있었던 것이다.
타슈켄트의 고려인이 운영하는 텔레비전방송국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현지 가이드인 고려인 예니게프 채로부터 우리 일행의 타슈켄트 방문 목적을 전해 들은 방송국측이 인터뷰 요청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 첫 질문이 '고선지를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치 한국에서는 이제야 고선지를 알게 되었느냐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이 고선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높게 평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최근 한국 드라마가 우즈베크텔레비전에 방송되며 한류붐이 불었다고 알려 주었다.
우리는 일정에 따라 발길을 사마르칸트로 돌렸다. 고구려인을 그린 벽화가 발견된 아프라시압 왕궁터로 향했다. 타슈켄트 왕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그려놓은 벽화 속에서 조우관(鳥羽冠.새의 깃털로 장식한 고구려의 모자)을 쓴 두 명의 고구려인이 우리를 반겼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사마르칸트 바르흐만 왕 재위시(650~670)에 제작됐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바흐르만 왕 이전부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가 만나는 이곳까지 그들의 외교 무대를 펼쳤던 것이다. 동서교섭사의 한 축을 담당하며 국제성을 띤 국가였던 고구려의 위상을 벽화는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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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고구려 후예여, 그를 기억하라’ (끝) |
마지막 흔적 : 카자흐스탄 |
15. "고구려 후예여, 그를 기억하라" (끝)
| |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향하는 길목. 고선지의 전투를 계기로 중국과 서방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만났다. 고선지는 당나라의 영화를 위해 싸웠지만 동시에 고구려인의 긍지를 드높이며 동서문명이 교류하게 했던 세계사적 인물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그의 숨결이 녹아있는 고선지 루트 초원의 길을 말을 탄 두 소년이 손을 흔들며 지나고 있다. 조용철 기자. | | 이제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카자흐스탄 으로 간다. 한 달간의 고된 여정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을 넘어 카자흐스탄으로 들어서자 중국 서북지방에서부터 뻗어온 톈산(天山)산맥이 도로 우측으로 우리 일행과 함께 달렸다. 카자흐스탄은 반사막성기후라 목축과 농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지역이다. 우즈베키스탄에 고려인 20만명이 살고 있듯이, 카자흐스탄에도 고려인 10만명이 살고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한 이들이다. 알마티로 가는 도중에 타라스(Taraz)를 지났다.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어디냐에 대해선 현재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지나는 카자흐스탄의 타라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지나왔던 키르기스스탄의 탈라스강 유역이라는 설이다.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지점을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타라스시와 탈라스강을 포함하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은 지금 모두 이슬람 국가다. 고선지가 활약할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불교와 기독교 세력이 우세했다. 이슬람문화는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됐다. 이후 중국이 이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선지가 이 일대의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당나라는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고선지의 패배 이후에 당나라의 운명도 내리막길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일방의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문명의 교류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조명해 보면 달라진다. 고선지는 중국과 서역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만나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는 문명 교류의 역사적 계기를 만든 주역이었다. 우리는 그 점을 중시한다. 고선지 루트를 중국과 중앙아시아에 국한시키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고선지 루트를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1만㎞로 확장시킨 것이 이번 여정이었다. 고선지 루트는 전투의 길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상인과 종교인이 넘나들던 교류의 길과 일치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들고 이 길을 오갔다. 우리는 한반도와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아메리카대륙으로 뻗어나가며 다시 한반도로 이어지는 지구촌 역사와 문화 교류의 한마당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그같은 교류와 순환의 고리 역할을 한반도가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300년 전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말을 타고 유라시아 일대를 훨훨 휘젓고 다녔듯이.
카자흐스탄 국립동양학연구소에서 만난 아리셰르 아키세프(종교문화학과 박사) 교수는 고선지에 대해 "중국인을 탈라스 주위로 이주시켜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중국을 확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의 외연을 서쪽으로 넓히며 결과적으로 제지술의 서양 전파 등 동서 문명 교류에 이바지한 고선지였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국제 전쟁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내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고선지는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던 중 755년 안록산의 난이 벌어지자 당 현종은 고선지를 다시 불러 반란군 진압 사령관에 임명한다. 진압 작전을 수행하던 고선지 장군은 안록산 군대의 진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로 작전상 퉁관(潼關)까지 후퇴하였다. 이같은 전술이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반란군의 제1차 퉁관 공격을 저지했음에도 당 조정은 고선지가 퉁관으로 후퇴한 것은 황제의 명을 거역한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처형하고 만다. 그가 죽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퉁관과 장안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당나라는 급속히 몰락하게 된다.
고구려인의 후예로 노예의 신분에서 출발한 고선지는 중국의 황족이나 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까지 올랐었다. 그가 당나라의 영화를 위해 온 몸을 바친 것만은 아닐 터이다. 고구려 후예의 긍지를 드높이면서 문명의 발전적 진화에 이바지한 세계사적 인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죽은 지 1250년이 지난 지금, 그의 개척정신은 '21세기 신실크로드'를 열어가야 할 우리의 귀감이다.
<고선지 연보>
출생년 미상. 700년 전후 추정. 베이징 부근서 고구려 유민 고사계의 아들로 태어남 720~744년 안서(오늘날 신장성 일대) 지역에서 유격장군으로 활동 744년 우전(타클라마칸사막 남쪽.오늘날 호탄) 진수사에 임명. 토번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움 745년 언기(오늘날 카라샤르) 진수사에 임명 서역에서 장안으로 가는 비단길 지배권 확보 747년 토번 연운보와 소발률국 잇따라 정벌 12월 안서절도사에 임명 750년 석국(오늘날 타슈켄트) 정벌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 755년 밀운군공 작위 받음. 안록산의 난 발발 12월 퉁관(潼關)에서 안록산 반군 저지 황제의 명령을 어겼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처형 당함
-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km] | 김주영(소설가) |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200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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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선지 루트 1만㎞" 연재
실크로드(비단길)의 출발지인 중국 시안의 개원문 앞. 중앙일보 창간 40주년 기념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 를 공동 집필할 소설가 김주영씨(右)와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지배선 교수가 포즈를 취했다. 뒤로 보이는 거대한 조각상이 비단길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조용철 기자.
소설가 김주영씨, 지배선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중앙일보 사진부 조용철 기자는 7월 1일부터 8월 1일까지 32일간 미니 밴과 기차를 이용해 고선지 장군의 행적을 샅샅이 추적했습니다. 당시 고선지 장군은 시안에서 알마티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말을 타고 누볐습니다. 이번 취재진은 인천항을 출발해 중국 단둥에서 시안을 잇는 길을 추가했습니다.
단둥~선양~베이징~시안~란저우~둔황~우루무치~카스를 거쳐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알마티까지 1만300여㎞에 이르는 대장정입니다. 고선지의 옛 비단길을 한반도와 연결함으로써 21세기 세계화 시대와 우리의 역할을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한반도에서 유럽에 이르는 장대한 "신(新)실크로드" 답사기와 함께 독자 여러분도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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