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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빌립보서 제 3 강 메시지_아산UBF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말씀 : 빌립보서 2:1-11
요절 :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편지에는 ‘기쁨’이 열여섯 번 반복됩니다. 이 기쁨의 편지 안에 바울의 간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하나됨의 문제가 실제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장에서 한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리도록 합니다. 6절부터 11절까지, 초대교회가 예배 중에 함께 불렀던 것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 찬가가 펼쳐집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한마음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새겨지기를 기도합니다.
I. 한마음을 품으라 (1-4절)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바울은 권면을 시작하면서 먼저 빌립보 성도들이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것들을 확인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성령의 임재를 실제로 경험했으며, 서로를 향한 사랑이 흐르는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라며 권면으로 넘어갑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있으므로 은혜 받은 사람들로써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 공동체의 하나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함께 나누게 하는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온 세상으로 모든 이웃들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묶으셨습니다. 수직으로 받은 은혜는 수평의 관계에서 확인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됨을 네 가지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 네 가지표현은 사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뜻의 말을 네 번 반복한 것은 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한마음을 품는 것이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한마음을 품는 것은 모든 성도가 똑같은 생각, 똑같은 의견을 가지라는 획일화 요구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개성이 있고 모두 다양한 캐릭터가 있더라도 지향하는 바를 하나로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각자의 고유한 은사가 있고 성격이 있고 의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 복음을 지향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요 거룩한 예수님 공동체의 성도입니다. 사도의 기쁨을 채우는 것은 석방 소식이나 재판의 승리보다, 예수님의 교회를 이룬 빌립보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가는 소식이었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여기에 있습니다.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은혜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갈등에 대하여 바울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지목합니다. ‘다툼’과 ‘허영’입니다.
다툼은 내가 얻으려는 마음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selfish ambition, 곧 이기적 야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다툼’의 원래의 의미는 대가를 바라고 일하는 태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기적 욕구를 가진 사람에게 공동체는 섬김의 장소가 아니라 경쟁, 의심, 비교의 마당이 됩니다.
허영은 내가 높아지려는 마음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vain conceit, 텅 빈 자랑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실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자기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과 인정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빈 것을 채운 척 하며 자기를 높이는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인정받으면 시기하고 자기가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공동체는 서로 세워 주기보다 서로 비교하고 감사 대신 불평, 기쁨 대신 긴장이 자리잡습니다.
다툼과 허영 두 마음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같은 뿌리에서 자랍니다. 그 뿌리는 자기중심성입니다. 내가 중심에 서면 세상의 배치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분이 되고, 다른 지체는 나를 돕는 사람이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되며, 교회는 내가 인정받는 무대가 됩니다.
3절 하반절-4절을 보십시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이 문제의 해결책 바울이 제시하는 처방은 겸손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 문화권에서 본래 노예에게 어울리는 비굴함, 열등함을 가리키는 경멸의 단어였습니다. 명예를 최고 가치로 여기던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자기를 낮춘다는 개념은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공동체 에서는 이 단어를 최고의 미덕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겸손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정의합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긴다"는 말은 신중하게 판단하여 결론을 내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감정적 겸양이 아니라 의지적 판단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비하하거나 열등감을 품으라는 뜻과 거리가 멉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자기 가치를 부정하는 데 있기보다 자기에게 향하던 관심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데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낮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자기를 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이 태도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지체가 나와 다른 의견을 낼 때, 그 안에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어떤 일을 맡길 때, 그 사람이 나보다 잘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상대방의 자리에 서서 상황을 다시 봅니다.
이어 바울은 자기 일과 남의 일의 균형을 말합니다. 자기 일을 돌보는 것을 인정합니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책임, 일터의 책임, 학업의 책임, 교회에서 맡은 자리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 위에 한 걸음 더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돌본다는 말은 망루에서 지형을 살피듯 주의 깊게 지켜본다는 뜻입니다. 다른 영혼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의 행로를 알고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균형이 무너지는 경우는 둘입니다. 먼저는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삶입니다. 자기 신앙, 자기 가정, 자기 성취에만 집중하면서 형제의 형편에 무관심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개인들의 집합에 머물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못합니다. 다른 한쪽은 자기 책임은 다하지 못하고 자기 할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삶입니다. 자기는 불성실과 방치에 둔 채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시간을 씁니다. 성숙한 신앙은 둘을 함께 붙듭니다. 자기 자리, 자기 의무를 지키면서 동시에 옆 사람의 형편을 살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들었습니다. 다툼과 허영을 버리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은 의지의 노력만으로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에 5절로 답합니다.
II.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5-8절)
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은 겸손의 뿌리를 예수님의 마음에 둡니다. 우리가 자기를 낮출 수 있는 힘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데서 나옵니다. 마음을 품는 것은 감정보다 사고의 방향, 삶의 지향점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가에 관한 근본 태도입니다. 그리고 품을 수 있으면 품으라는 권유가 아니라 품으라는 명령입니다.
성도가 서로 하나 되는 길은 서로를 바라보고 맞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데 있습니다. 모두가 표준 시각에 맞추면 각자의 시계는 저절로 같은 시간을 가리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서로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며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6절부터 11절까지의 본문은 뚜렷한 V자 구조를 이룹니다.
내려가시는 길 (6-8절)
올리시는 길 (9-11절)
낮아짐은 자원하는 것이고 높아짐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십니다. "근본"이란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셨다가 지금은 아니라는 뜻과 거리가 멉니다. 영원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본체로 존재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도 그분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증언합니다.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시고 갈릴리 길을 걸으신 그분이 곧 우주를 지으시고 붙드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었습니다. 천사들의 끊임없는 찬송이 그분께 돌려졌습니다. 아버지와의 완전한 사랑의 교제 안에 영원히 계셨습니다. 우주의 왕좌가 그분의 자리였습니다.
6절 하반절은 그의 놀라운 선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그 영광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자기 권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세상은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지위를 얻으면 지키려 하고, 얻은 것을 놓지 않으려 애씁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의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손을 뻗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쥐려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었습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반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을 움켜쥐지 않고 스스로 내려놓으셨습니다.
인류의 타락은 움켜쥠에서 시작되었고, 인류의 구원은 놓으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붙잡지 않으신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후에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죄를 사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9절은 그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그대로 지니신 채,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누리실 영광의 행사와 권리를 스스로 접어 두셨습니다. 그것이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비우셨다는 다음에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말이 이어집니다. 비움과 취함이 한 동작입니다. 영광을 비우신 자리에 종의 형체를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누리를 영광, 권리는 스스로 접어 두셨고 종의 형체를 가지는 일은 적극적으로 취하셨습니다. 종은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는 권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셨지만 적극적으로 종의 본질을 취하여 가지셨습니다. 종처럼 보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종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버림받았으며,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종의 노래를 자기 삶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최후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종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 씻김은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의 일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다음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입니다. 이는 성육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에서 자라셨습니다. 갓난아기로 태어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자라며 나무를 다듬고 톱질을 배우셨습니다. 배고픔을 아셨고, 목마름을 아셨고, 피곤함을 아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 성육신의 열매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형편을 밖에서 관찰하신 분이 아니라 직접 겪으신 분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8절은 낮아짐의 계단을 한 칸 더 내려갑니다.
예수님의 내려가심을 다시 정리하면 첫째 계단, 하나님의 본체에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둘째 계단, 사람 중에서도 종이 되셨습니다. 셋째 계단, 자기를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이르셨습니다. 넷째 계단, 그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하는 사람들이 많고 십자가는 교회건물의 상징이지만, 로마시대 십자가는 가장 비참한 죽음과 저주를 나타냈습니다. 로마의 십자가형은 반역자와 도망친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형벌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에게는 이 형벌을 내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십자가를 두고 로마 시민의 몸에서 멀리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에서도 멀리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형의 목적은 죽이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오래, 최대한 고통스럽게, 최대한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는 데 있었습니다. 사형수는 벌거벗겨진 채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매달렸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모든 고통을 다 겪으며 괴롭게 천천히 죽어갔습니다. 또한, 신명기 21장 23절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육체적 고통의 극한이며, 사회적 수치의 바닥이며,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 십자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이 순종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옮겨 달라고 세 번 간구하셨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넘어, 죄를 지신 채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예수님께 가장 큰 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끝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결국 십자가에 못박하신 예수님은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그분이 대신 치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음을 뜻합니다. 죄와 사망의 종이었던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종이 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III.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9-11절)
9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9절은 "이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낮아지심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6절부터 8절까지의 낮아짐의 주어는 예수님이셨습니다. 9절부터 높여주심의 주어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변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조롱에도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를 세우는 일을 온전히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높이셨다는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라고 합니다. 더 높을 수 없는 곳까지 높이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를 땅끝까지 낮추신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었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본질과 권위를 담습니다. 여기서 주어진 이름은 퀴리오스, "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범위는 세 영역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천사들과 천상의 존재들이고, 땅에 있는 자들은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이며,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과 어둠의 권세들을 포함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세계가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역의 모든 존재로부터 예수님을 높여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 위의 모든 피조물이 함께 소리 높여 노래암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세세토록 있으라고 외칩니다. 그 어린 양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 찬가의 절정은 아들의 영광에서 멈추지 않고 아버지의 영광으로 흘러갑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고, 아버지는 아들을 높이시며, 성령은 아들을 증거하십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는 서로를 높이는 사랑이 영원히 흐릅니다.
이 빌립보서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일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높이고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에 나를 어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나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임을 밝히는 것이 됩니다. 아니면 나는 내가 믿는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길을 간다는 입증이 됩니다. 오늘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웠다면, 예수님의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길을 가는 성도들을 어떻게 해주시는지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우리는 이제,
내 자리를 지키려고 사람과 다투지 않아도 됩니다. 나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나를 밀어낸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정하신 자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인정은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분입니다.
내 옳음을 증명하려고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자기 변호를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오해받는 자리에서 침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낮추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주이시므로 내가 주가 되려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서로 형제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좋은 자리는 양보하는 삶을 살면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심이 드러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항상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되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무릎이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서 낮아질 줄 알고 형제를 높일 줄 아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낮아짐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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