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융의 개성화 과정에 비추어 본 아빌라 테레사의 영적여정의 이해
유 해 룡 교수
I. 들어가는 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등장과 더불어 인간의 마음이 과학적으로 관찰과 측정이 가능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심리학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이는 영역으로 끌어내어 그 베일을 벗겨주는데 기여하게 되었다.1) 70년대 이래로 사람들은 단순히 전통적 권위를 고수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한 추구에 분석심리학이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 심리학이 인간 존재의 근원과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적합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어느 정도 해석해 주고, 동시에 보다 성숙된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데 심리학은 기여해 오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더욱 분석심리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2)
엔드류 뉴버그(Andrew Newberg)는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가』라는 책은 한 빛 줄기가 태양의 영광을 암시하는 것처럼, 뇌의 활동을 통해서 경험하는 신은 더 높은 영적 실체의 단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3) ‘만약 뇌의 활동으로 인하여 얻은 일체의 상태가 더 높은 실체의 그림자라도 엿보게 해준다면, 종교들이란 단순히 신경학적 통합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절대적 실체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4) 이것은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인 영성과 과학적 영역인 분석심리학이 서로 보완적으로 만날 수 있는 좋은 근거를 제시한다. 종교행위가 심리역동적인 본능적 행위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미 정신 구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준 하나님의 자연적 은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인 종교 행위가 영적발달에 모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 역동과 더불어 성령의 이끄심을 통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영적성장을 이룬다.5)
영성이란 초월적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면, 심리학은 은총에 대한 모든 정신적 반응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영적성장과 관련하여 심리학은 다음과 같은 분야로 접근가능하다. 첫째 영적인 삶이란 단계적 성장과정을 거치며, 각 단계마다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둘째는 영성사 속에서 수많은 영적스승들이 그러한 장애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영적인 성숙의 길을 열어갔는지, 그 모든 현상들을 심리학이라는 과학적 도구로 객관화 하여 그 뒤를 따르고자 하는 영적 순례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6)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신앙적 고백을 바탕으로 철저한 심리학적 자아성찰이 이루어질 때 자아 의식적인 영적성장을 꾀할 수 있다.
심리역동적 현상과 영적성장과의 상호관계성을 비교적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두 사람을 말하자면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칼 융(Carl Jung)을 들 수 있다. 융은 기독교 신앙을 해석해 주는데 가장 적절한 분석심리학자중의 하나이며,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독교 신비가이면서 동시에 당시 교회 개혁에 관여했던 행동가이다. 테레사는 단순히 현실도피적이고 탈역사적인 주관적 신비주의적 현상에 탐닉하는 삶을 뛰어넘어 진지하게 내면의 요청을 용기있게 받아들인 활동가이다. 그 중에서 그녀의 내적성장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저서가 『영혼의 성』이다. 이 책은 하나님과의 영적여정을 상징과 상상력을 사용하여 묘사해 놓은 테레사 자신의 체험적 이야기이다. 테레사는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영적여정에로 초대를 하고 있다. 영적순례자들은 성 중앙에 위치한 수정으로 된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수많은 방들을 거쳐야 한다. 방들은 일곱 개의 동심원으로 배열되어 중앙을 감싸고 있다. 최종의 마지막 제 7 궁방이 그 성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 중앙은 흡인력이 있어 궁방들을 통과하는 여행자들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성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하나님과의 합일에 가까워진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테레사는 생생한 영적 성장과정을 제시한다.
융은 타고난 기질과 독특한 경험을 토대로 영적 여정을 추구했던 분석심리학자이다. 그는 과학자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심리학자로서 인간정신 세계를 탐구했으며, 그의 분석심리학의 목적은 정신이상자들을 위한 심리치료 뿐만 아니라, 인격적 성숙을 추구하고 그 의미를 깊게 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의 방대한 연구와 저작활동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중의 하나는 ‘개성화 작업'이다. 융은 정신의 전체성을 추구하는 인간 정신의 평생과정을 ‘개성화'라고 했다. 융은 무의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무의식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의식세계로의 통합을 개성화의 핵심으로 보았다. 융은 스스로 이 작업을 평생 실천해 갔으며 그 결과로서 분석심리학적 업적이 나왔다. 그는 단순히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실천가였다.
II.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칼 융(Carl Jung)의 인간론
칼 융과 아빌라의 테레사 둘 모두는 인간의 내면을 매우 예민하게 관찰하고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테레사는 심리학적 통찰력을 지닌 신비가7)라면 칼 융은 신비가적인 성격의 심리학자8) 이다. 테레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자기 밖의 어떤 대상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즉 자기내면으로의 하강은 곧 하나님으로의 상승과 역설적인 일치점을 이룬다. 칼 융 역시 자기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 내면을 철저히 이해함으로 그 내면의 여행이 시작된다. 융은 자기 자신으로의 하강을 무의식 세계에로의 여행으로 표현한다. 그의 생애 내내 융은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대상이 무의식이었다. 그래서 융은 “나의 삶은 그 자신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던 무의식의 이야기이다”9) 라고 말한바 있다.
테레사는 『영혼의 성』의 서두에서 우리 영혼을 마치 금강석이나 맑디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궁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궁성에는 마치 하늘에 자리가 많듯이 여러 궁방들이 있다.10) 보다 자세히 영혼의 성의 전체적인 구조를 펼쳐보면 이렇다. 수정으로 된 아름다운 궁성 안에는 일곱 궁성들이 있다. 그 성 전체의 모양은 사방이 방으로 둘러 쌓여있는 구체(球體)이다. 모든 방은 위아래, 좌우, 전후의 방들로 둘러 쌓여져 있다.11) 그 가장 깊은 방은 제 7 궁방의 가장 깊은 궁실인데 그 곳에 영광의 임금이 좌정하여 계신다. 그 밀실이 하늘에 있는 것처럼 영혼 안에도 하나님 혼자 계시는 궁실 즉 또 하나 다른 하늘이 있다고 테레사는 말한다.12) 그 궁실로부터 화려한 영광의 빛이 밖을 향하여 계속해서 비추어진다. 어두움과 갖가지 해로운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궁성 밖에 있는 영혼은 그 빛을 따라서 중심에 이를수록 더 많은 빛을 받게 되고 그 벌레들의 괴롭힘으로부터 해방을 얻게된다.
이렇게 신랑되신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가장 깊은 궁실로 이끌려 들어갈 때 마침내 자아는 신랑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13)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요, 스스로 자유를 고스란히 받쳐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요 자기죽음을 의미한다.14) 여기서 비로소 “영성적인 인간”이 탄생된다.15) 이것은 마치 많은 방해를 받기는 할지라도 일단 내면에로 귀를 기울여, 내면에서 비추어 오는 빛 혹은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는 목자의 음성”16) 을 듣고 따라가노라면 마침내 내면 깊이에로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영적여정의 수동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융이 개성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가장 은밀한 궁방에로의 여행은 융에게 있어서는 무의식과의 통합을 위한 내면 깊이로의 여행과 같다. 개성화란 잘못된 정신의 껍질을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중심을 찾아서 균형잡힌 정신 전체성의 중심이라고 하는 ‘자기(Self)'에 도달하는 것이다.17) 융에게 있어서 이러한 욕구는 정신적인 본능에 해당한다. 이것이 융의 분석심리학의 핵심이다. 전체성으로 몰아가는 이러한 힘은 인간 정신의 대극적인 구조에서 나온다.18) 자아(ego)가 의식의 중심인데 반하여, 자기(Self)는 정신 전체의 중심이다. 융에 따르면 인간정신의 모든 흐름은 이 중심을 향하여 나아간다.19) 이 여행을 하는 동안 극복해야 할 과정들이 있다. 융은 인간의 정신구조 속에서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대극적 요소들을 보았다.
대극적 요소의 가장 큰 구조로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는데,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균열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인격의 분열이 점점 심해진다. 무의식적인 요소들이 우리 의식에 전혀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다.20) 또 다른 대극적인 요소들이란 자아와 그림자, 그리고 외적인격으로 대표되는 페르조나와 내적 인격인 아니마/ 아니무스라는 쌍을 말한다. 자아는 의식의 주체로서 작용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결코 인격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 반대편에 인식을 거부하는 그림자라는 정신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자를 억압하거나 외면할 때 그림자는 포기하지 않고, 인격을 왜곡시키려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시켜 놓았던 것을 거두어 들여 자아에서 통합시킬 때 파괴적인 에너지는 사라지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된다.21) 외적 인격이라고 할 수 있는 페르조나 역시 그 자체로서 실체라고는 할 수 없다. “페르조나는 한 사람의 자아가 주변환경과 만나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하는 복합적인 전체를 가르킨다. 페르조나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에 적응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가면을 가르킨다.”22) 융은 페르조나란 한 개인과 사회의 타협물이라고 주장하면서 “페르조나에는 실질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23) 그러므로 한 개인은 페르조나를 보상하는 정신요소인 아니마/ 아니무스가 의식 안에서 통합될 때에 건강한 인격을 형성할 수 있다.
III. 아빌라의 테레사의 『영혼의 성』에서의 영적성장과 융의 개성화 과정
1) 자아인식의 단계
테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의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7단계로 묘사하고 있다. 그 영적여정에서 가장 먼저 성취해야 할 부분이 ‘자아에 대한 지식'이다. 테레사에게 있어서 자아인식은 특정한 어떤 단계에서 완성되어야 할 단절된 단계만은 아니다. 영적순례 여정 내내 자아인식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동시에 영적 여정을 출발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테레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요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24)라고 말했다.
그녀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앙적 확신과 고백은 심리학적인 성장과 더불어 일어난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신학적 이해를 전제로 하는 하나님 인식에 만족하지 않고, 자아인식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영적여정의 시작부터 마지막 완성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녀는 ‘무릇 자아인식이란 주께서 당신이 계시는 궁실 안으로 끌어 들인 영혼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며, 아무리 높이 오른 영혼일지라도 자아 인식을 잊어버리고 그 일을 멈추는 날에는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만다'고 역설한다.25) 그러나 테레사는 결코 자아인식에 이르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절대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아인식을 익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주장한다.26)
자아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테레사가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내면의 성문들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방법은 기도와 생각이다.27) 여기서 생각이란 기도와 별개의 또 다른 수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하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없고, 구하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는 기도를 경계하면서 깊은 성찰이 있는 기도를 말하고 있다. 그는 기도형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구태여 나는 여기서 구송기도보다 묵상기도를 더 내세우지 않습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라도, 생각이 함께 있어야 하기에 말입니다".28)
그녀는 기도의 발전과정을 묘사하면서 그 상태를 물로 비유하고 있다. 물통 두 개가 각각 다른 방법을 통해서 물이 채워지는데, 하나는 사람의 노력이 동원되는 수도관을 통해서 채워지고, 다른 하나는 생수구멍에 들이대어서 소리도 없이 물이 가득채워진다. 이것은 테레사 자신이 그녀의 영혼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 심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29) 전자의 상태는 하나님이 작용하시지만 불완전한 심리적 상태를, 후자의 상태는 보다 완전한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30)
융은 인간의 삶을 35살을 전후하여 인생의 전반기와 인생의 후반기로 구분하였다.31) 전반기의 삶은 외부세계와 적응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습득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힘쓰는 자아발달 시기이다. 후반기의 삶은 그 동안 무시해왔던 내면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전반기의 삶에서 쌓아왔던 외적인 것들에 대하여 의미와 가치를 물으면서 내적인 성숙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이다.32) 전반기의 삶을 외부지향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후반기의 삶을 내부지향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전 과정을 성장과정으로 볼 때 전반기의 삶과 후반기의 삶은 갈등적인 관계라기보다는 후반기의 삶은 전반기의 삶을 보다 보완하고 원숙하게 통합하는 과정으로 발전시켜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웰취는 개성화 과정에 있어 첫 번째의 단계는 잘 발달된 페르조나를 지닌 강한 자아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3) 일반적으로 융의 이론에 의하면 자아와 페르조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 단단하게 뿌리를 둔 건강한 정체성이 없이는 개성화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갈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한다.34) 자아인식의 단계로서의 『영혼의 성』 제 1 궁방에서 제 3 궁방까지는 융의 개성화의 전반부와 일치한다. 테레사는 이 자아인식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속에 찌들고 공명과 야욕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영혼의 모든 기능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그 뜻대로 사용하지 못한다“35) 고 한다. 융에 의하면 이 사람은 아직도 자신들의 페르조나와 굳게 손을 잡고 있다. 그럼으로서 자아가 의식의 중심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영적여정이 더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내면의 세계는 바깥 세계와의 긴장이 고조된다. 이 때 영혼은 그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힘쓰게 되며 실질적으로 모범적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적인 삶을 이끌어간다. 이러한 영적생활이 진행되어 가는 동안 자아의식은 보다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고, 이러한 모범적인 신앙생활이 자신의 페르조나의 일부가 된다.36) 테레사는 이러한 진행상황을 매우 바람직한 상태라고 한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는 영혼의 메마름을 언급하면서 제 3 궁방의 사람들에게 강화된 페르조나가 그대로 굳어져버릴 것을 염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기도생활에서 흔히 대단한 권태기가 오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 완전한 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더욱 자기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으로 족할 것이지, 지나친 욕심일랑 부리지 말라'고 한다.38)
이 시기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더욱 깊이 안으로 파고드는 여행을 진지하게 해야한다. 또한 자아의식에 확고하게 들러붙어야 할 시기가 아니라 ‘자기'에 대해 더 많이 배워야 할 시기이다.39) 페르조나가 온전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 페르조나는 오히려 더욱 견고해지며, 그것을 자신의 인격의 전부인 양 착각하게 될 수 있다. 테레사는 제 3 궁방에서 궁성 안에 있는 그림자 속으로 들아가는 경험과 다른 사람에게 그 그림자를 투사하는 것에 대한 염려를 드러낸다. “남의 잘못일랑 그만두고 우리 잘못이나 똑똑히 봅시다. ...겉모양이나 사는 법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그런 이들보다 더 나을는지 모릅니다.”40) 테레사의 이러한 입장은 융이 주장하는 개성화 과정에서 투사된 그림자를 거두어들이고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자기자신의 어두운 인격적인 부분을 발견하라는 심리적인 통찰과 같은 맥락이다.
2) 자아의 전환기
『영혼의 성』에서의 진정한 영적진보의 출발은 전반부 자아인식을 끝내고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는 제 4 궁방에서부터이다. 제 4 궁방은 제 1-3 궁방까지의 능동적 영적여정으로부터 제 5-7 궁방까지의 수동적 영적여정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라고 할 수 있는 전환기적 단계이다. 테레사는 여기서부터 초자연적 사실들이 시작된다고 한다.41) 그 동안 자신의 영적여정에 발목을 잡고 적지않게 괴롭히고 장애물이 되어왔던 바깥에 있는 사물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따라 성안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42) 내면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전보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단계이다. 어지신 목자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는 들릴락 말락한 휘파람 소리이지만 우리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집으로 돌아오라”, “이제 더 가엾이 헤매지 말라”,는 목소리로 알아차리게 된다.43) 바깥 피조물 세계에서 찾았던 하나님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더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44)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면서 점점 영적성숙에로 나아간다. 이 단계에서 테레사는 무엇을 많이 생각하려 하지 말고 주께서 자신의 영혼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것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45) 그렇기에 이전에 주로 사용했던 기도와는 달리 이성적인 작용을 덜 사용하는 ‘거둠의 기도'를 권장한다. 아니 이것은 능동적으로 그러한 기도를 해야한다라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기도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둠'이라고 하는 의미는 영혼의 모든 능력들46)을 거두어 들여 자신 안으로 들어가 초자연적인 맛을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제부터 괴롭게 여겨졌던 기도가 자연스러워지며 영혼은 점점 침잠해지며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되지 않았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접촉이 시작된다.47) 초자연적인 체험에서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48) 이 상태를 테레사는 두 가지 물의 비유를 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의 생수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테레사는 두 개의 물통에 물이 채워지는 방법을 통해서 기도의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있다.49) 하나는 “먼데서부터 많기도 한 수도관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의 공력을 통해서 끌어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로 생수 구멍에다 들이대어서 아무 소리도 없이 물이 가득 차지는" 것이다.50) 전자는 이미 앞의 단계에서 언급하였고, 후자는 초자연적 관상적 체험의 초기단계를 의미한다. 여기서부터 영적으로 집중하는 능력이 점진적으로 발달한다. 테레사는 이 때의 심리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혼의 한 팽창 또는 확장임에 틀림없습니다”.51)
테레사는 제 4 궁방에서 가냘프지만 휘파람 소리와 같은 내면의 소리 즉 무의식의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을 시작한다.52) 그녀는 이 방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이 혼재하는 상태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권한다.53) 융의 개성화의 과정에 의하면 의식이 무의식을 통합하기 시작했다는 소리이다. 어렴풋이 자신의 무의식의 내용들을 감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의식으로의 통합을 시도하면서 의식을 확장시켜가는 과정이다.54) 그 무의식의 내용들을 이전에는 자신의 정신 밖의 어떤 대상에게 투사시킴으로서 한시적인 편안함을 갈구했지만, 이 단계에서는 기꺼이 그림자와의 직면을 용납한다. 테레사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여정이 진보되어 가면서 지독한 고행이라도 감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난다고 한다.55) 융의 개성화 과정에 있어서도 투사된 그림자를 직면하면서 이전에 자신을 대표하고 있었던 페르조나를 벗어나는 시도를 한다. 여기서 마치 자아가 죽는 고통을 경험한다. 이러한 심리학적 과정은 종교에서 수행하는 금욕적인 시도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융 심리학자 빙껠은 말한다.56) 테레사가 이 궁방에서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영혼의 수동적인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융도 말하기를 무의식이 의인화되어 음성처럼 들리며, 자아에서의 무의식의 통합은 내면에서 생겨나는 본능적이며 비의지적이다라고 한다.57)
3) 자아의 어두운 밤
존 웰취는 제 4 궁방을 전환기로 하여 제 5 궁방에서부터 융의 개성화의 두 번째의 단계가 시작된다고 한다.58) 테레사는 제 5 궁방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누에-고치-나비'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누에는 처음 제 3 궁방에서 튼튼히 성장한다. 영적순례 여정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충분히 자란 누에는 고치를 틀기 시작한다. 그 캄캄한 내부에서 변화의 과정을 겪기 위함이다. 이 변화를 가속화하기 위해서 테레사는 이렇게 권고한다.
어서 빨리 이 일을 시작합시다. 자아와 자기의지와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고행과 기도와 극기와 순종,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온갖 선행을 하면서, 이 작은 고치를 틉시다.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죽읍시다. 저 누에가 그 생겨난 목적을 위한 일을 마치고 죽듯이, 우리도 죽으면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뵙고, 마치 고치 안에 들어 있는 누에마냥, 우리도 당신의 무한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59)
강화된 자아인식은 여기서부터 자신의 실체를 더 깊이 경험함으로서 자신을 강화하기보다는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이미 충분히 강화된 자아는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진정 우리 자신의 미천함과 비참함을 보려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종이 되기에는 너무나 부당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60) 누에가 되어 죽기를 거듭거듭 촉구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미천한 자아가 죽지 않는 한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비가들의 신비적 일치의 현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일치를 말하는데, 우리 자신이 완전히 비워지지 않는 한, 그 사랑의 일치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동안 키워 온 자아는 죽고 이제 마침내 변모된 나비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나비로의 변모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합일을 경험할 때 일어나는 변화를 상징한다.
융의 개성화에 의하면 자아가 무의식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자기'의 출현을 경험한다. 이 깊은 터널에서 이전의 의식이 죽으면 새로운 의식이 태어난다. 테레사는 이것을 나비라고 표현하며, 그것은 융의 이미지로 볼 때 자아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정신의 치유력이라고 할 수 있다.61) 그러나 나비가 되어 새롭게 변모된 영혼일지라도 하나님의 높디높은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는 없다. 그 나비는 저 높은 은혜의 바다인 창공을 향하여 마음껏 날고자 하는 내적인 열망이 있으나, 그 날개가 매우 미약하기에 열망대로 치솟아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고 누에의 상태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도대체 어디로 올라가야 할지를 몰라하는 자신을 발견한다.62) 제 7 궁방에 이르기 전까지 하나님과의 합일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융에 의하면 이미 버려진 옛자아에 상응하는 새로운 중심이 충분하게 세워지지 않는 상태에서 겪는 정체성의 어려움이 이와같다. 여기서부터 테레사는 새로운 궁방으로의 전진을 예고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받은 영혼”63) 은 고치 시절에 겪었던 혹독한 어두움을 다시 지나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제 5 궁방에서 시작된 고치상태의 어두운 밤이 지속된다. 이것은 불안정한 나비의 상태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정화의 단계이다. 이 상태를 십자가의 성요한의 이론에 의하면 ‘감각의 밤'과 ‘영혼의 밤'이라고 한다. 감각의 밤은 피조물과 밖의 세상에 대해 아무런 즐거움을 맛볼 수 없기에 메마름을 경험하는 시기이다.64) 융의 심리학으로 보면 이 시기는 의식적인 태도가 더 이상 의미를 주지 못하고 무의식이 행동을 개시하여 의식의 밝은 빛을 흐리게 한다.65) 자아는 자기와의 활발한 접촉을 필요로 하지만, 그 보다 먼저 자아는 자기와의 완전한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밤에 해당하는 고통을 치룰 수 밖에 없다. 영혼의 밤은 더 한층 강렬한 칠흑과 같은 밤이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이 밤을 일컬어 “빛이 밝을수록, 올빼미의 눈동자는 더욱 캄캄하게 어두워진다.”라고 한다.66)
실제로 제 4 궁방에서 시작된 ‘밤'은 제 6 궁방에서 절정에 이른다. 감각이나 지성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밤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순례자는 적지않은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다. 테레사는 그러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그 사람을 시험하도록 그리하여 심지어는 그 사람이 당신께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도록 시험하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인간을 내부로부터 들이치는 일들이란 어찌나 사무치고 못 견딜 것인지, 저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과 비슷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폭풍우 속에서는 위로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67)
이러한 고통은 자신의 영혼이 풀무불에 담금질되어 깊은 자아인식에 이르게 한다. 항상 우리의 빈곤과 비참을 보게 되며, 그러한 자아인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중요한 길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68) 여기에 이른 영혼은 하나님이 베푼 지극히 큰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과 진흙 구덩이에 뒹굴고 있는 듯한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진다. 그녀는 이러한 죄성이 너무나 깊게 느껴지기에 죽고 싶을 정도라고 말한다.69)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때때로 스스로의 맛과 즐거움을 내던진 채, 당신의 아프심을 우리의 아픔으로 사는 것을 몹시 기꺼워하시기”70) 때문이다. 테레사는 아무리 깊은 심연의 영적체험에서라도 기독교적인 핵심 이미지인 십자가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는 결코 포기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거듭 역설한다.71)
융은 개성화 과정에서 기독교적인 교리의 틀에 매이지는 않지만 무의식을 만나는 과정에서 성경의 이미지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72) 그리고 무의식을 만날 때 겪는 고통과 괴로움도 테레사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것은 융의 개성화의 절정에서 페르조나에 매달려 있던 옛 자아는 ‘자기'라는 새로운 중심을 향하여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포기되어지고 죽어져야 하는 경험과 일치한다. 융은 이렇게 말한바 있다. “결혼이 위기를 겪지 않고 결코 슬며시 발전할 수 없듯이, 고통없이 결코 의식의 탄생도 없다”.73) 융은 자기의 자서전적 기록에서 무의식과 만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무의식의 흔적을 대하면서 그는 깊은 흑암에 들어가는 듯한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흑암의 심연으로 내던져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공황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나는 거의 완전한 흑암 속에 있었다.”74) 이러한 모험과 고통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무의식과의 만남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은 1913년이었지만, 자기(the Self)라는 새로운 중심에 도달한 것은 1927년이라고 말한다.75) 이렇게 위험하고 기진맥진한 어두움의 영적여정을 끝내고 우리 영혼은 마지막의 투쟁을 벗어나 항구적인 합일을 향하여 가장 은밀한 밀실 제 7 궁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4) 통합된 자아
제 7 궁방에서 테레사는 결혼의 유비를 사용하여 영적여정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신부로 삼으신 영혼을, 당신이 그리워서 못견디고 못 견뎠던 일을 어여삐 여기시어, 영성적 결혼이 끝나기 전에, 그 영혼을 당신의 밀실, 즉 제 7 궁방에로 들게 하십니다. 말하자면 저 하늘에 당신의 궁실을 가지시는 것처럼, 영혼 안에도 하나님 혼자 계시는 궁실, 즉 또 하나 다른 하늘을 가지시는 셈입니다”.76) 주님이 내리신 은혜를 맛보는 듯하지만 늘 답답했고, 날아다니기는 하나 쉴 자리가 없었던 나비의 이미지는 폐기되고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신랑신부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서 떨어질 수 없는 주님의 항구적인 은혜의 맛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영혼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그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과 그토록 결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됨을 말한다.77)
제 6 궁방의 상태를 영적약혼으로 비유하면서 합일을 말하지만 그것은 항구적이 아닌 서로 떨어질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곧잘 그 영혼이 신랑을 의식함이 없이 자주 홀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그 합일의 은혜가 끝나고 난 제 7 궁방에서의 영혼은 항상 그 핵심에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결코 나뉘어질 수 없다. 테레사는 전자를 떨어질 수 있는 두 자루의 촛불에 비유하고, 후자를 나뉘어질 수 없는 하늘에서 강물이나 우물에 떨어지는 빗물로 비유하고 있다.78) 이 궁방이 다른 궁방과 완전히 다른 점은 여기서는 “마음의 메마름이나 시끄러움이 거의 없이, 영혼은 거의 항상 고요 잔잔하다”79)는 것이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첫째 자기 자신을 잊게 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괴로움이라도 더 당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차게 된다.80) 철저히 자신을 잃어 버림으로서 자기를 얻는다는 진리에 이르게 된다. 여기 깨달음이란 지성적 납득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체험적 상태를 말한다. 테레사는 삼위일체의 깨달음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혼은 묘한 인식으로 세 위가 하나의 실체, 하나의 힘, 하나의 앎,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심을 더 참될 수 없이 깨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신앙으로 믿는 바를 여기서는 영혼이 깨쳐서 어쩌면 본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81)
테레사의 영적결혼은 한 인격이 신에게로 흡수되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풍성한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영혼은 자기 안에 분명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화살을 쏘시고, 자기의 생명에 생명을 주시며, 영혼 내부의 모든 능력을 큰 빛으로 밝혀 주는 햇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치는 것”82) 이 곧 영적결혼이다. 이렇게 항구적인 듯한 결혼의 이미지에도 남은 일이 있다. 덕 닦기를 힘쓰지 아니하면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쪼그라들 수도 있다고 테레사는 경고한다. 그래서 관상과 활동의 일치를 강조하는 의미로 복음서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삶을 끌어들임으로서 둘을 하나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83) 테레사는 내적인 해방과 외적인 해방을 결코 모순적인 일로 여기지 않았다.
테레사의 영적결혼의 이미지는 융의 개성화의 이론에 비추어본다면 인격의 통합의 완성을 의미한다. 개성화 과정에서 자아는, 내적 인격으로 알려진 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라는 알려지지 않은 그 사람의 무의식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융의 아니마/아니무스와 자아와의 통합은 테레사의 결혼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이론이다. 실제로 아니마/아니무스는 반대편 쪽에 있는 성(性)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융 자신도 결혼을 인격성장의 중요한 기회로 보았다. 융에게 있어서 결혼은 양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외적인 결혼이다. 한 여성과 관계를 함으로서 보다 깊은 곳에 있는 자기와 관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여성을 통하여 자신의 반대편의 있는 성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84) 뿐만 아니라 외적인 결혼관계가 균형을 이루려면 아니마/아니무스의 내적인격과의 관계를 성숙시켜 가야한다. 숨겨진 내적 인격인 아니마/아니무스는 서로간의 상대적인 성을 향한 투사로서 발견되고 만나진다.85) 그 때 상대방의 소리를 주의깊게 듣고 대화하는 법을 익힌다면 성숙한 결혼에 상응하는 인격적 통합을 이루게 된다.
IV. 나가는 말
본 글은 테레사의 신비적 일치의 과정과 융의 개성화의 과정을 비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두 경험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잠시 살펴봄으로서 미래적 연구를 여운으로 남겨놓고자 한다. 첫째, 테레사의『영혼의 성』이나 ‘융의 개성화'가 지향하는 목표는 인격적 성숙에 있다. 융에 의해서 인격적 성숙이란 내적분열을 통합함으로 정신적인 전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테레사에게 있어서 성숙이란 내면적 분열과 갈등을 겪지만 통합과 자아부정을 거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의미한다. 둘째는 양쪽 모두의 도달점이란 초월적인 실존과의 만남을 통한 자아의 완성이다. 융의 개성화 과정에서 자아가 무의식과의 통합을 시도하면서 끊임없이 만나고 통합하고자 하는 ‘자기'라는 실체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기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God within us)"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기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의미이다.86) 이런 의미에서 융이 말하는대로 자아가 새로운 중심으로서 ‘자기'를 만날 때 ‘누멘적인 힘'87) 을 체험하지만, 인격적 하나님을 만남으로부터 오는 영향은 아니다. 그러나 테레사는 각 단계에서 겪는 여러 체험들은 단연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남으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셋째는 두 과정 모두 완성을 향하여 진행하는 동안 어두운 밤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이 어두움은 자기인식의 결핍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아의 포기, 자아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그래서 융은 정신의 개성화의 과정을 “자아의 수난”88) 이라고 했다. 자아는 자기와의 통합을 위하여 자아를 포기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러나 테레사에게 있어서 어두움이란 자아인식의 결핍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한 자기희생이요, 사랑으로 상처받은 연인이 겪는 고통이기도 하다. 이를 일컬어 테레사는 “감미로운 괴로움”89) 이라고 불렀다. 넷째, 양자 모두 주관적인 체험에 강조점을 두고 있기에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영성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융은 개성화란 내면적이면서 주관적인 통합 뿐만 아니라, 초개인적인 무의식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객관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90) 테레사의 하나님과의 일치의 체험은 단순한 주관주의적인 신비체험을 뛰어넘어 객관적인 자기완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테레사는 주관적인 체험의 완성은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통하여 지속되어 가야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융의 개성화 과정이 아빌라의 테레사가 『영혼의 성』에서 그려주고 있는 영적 순례여정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는데 적지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본 글은 개성화 과정과 기독교적 영적성장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아니었다. 단지 심리학적 도구가 보이지 않는 영적성장 과정을 가시적으로 이해하는데 얼마나 유효한가를 구체적인 한 신비가의 경험을 통해서 실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융 자신이 ‘심리학은 결코 종교적 교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어 교리의 진정한 의미를 볼 수 있게 해주는데 의미가 있다'91)라고 언급한대로 융의 심리학은 지극히 주관적인 신앙체험의 의미를 해석해 주는데 유용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http://blog.naver.com/hwankiyon/130083585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