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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자동판매기
(창 27:1-46)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이 창세기 27장 말씀 '커피 자동판매기'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커피 자동판매기. 아시는 대로 곳에 따라서 가격이 다릅니다마는 200원 집어넣으면 컵이 떨어지고 떨어진 컵 안으로 커피가 내려와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커피와 프림과 설탕을 넣어서 만든 자판기 커피, 옛날에는 다방 커피 심지어는 식모 커피라고 불렸던 그 커피가 요즘 원두커피의 자리를 넘볼 정도로 인기를 회복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고 듣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 들은 프림이 좋지 않다고 하니까 너무나 즐겨 마시지는 마시지요.
오늘 이 장자권 문제. 정말로 46절까지 곰곰이 한절 한절 새겨보면 의문과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그런 본문입니다. 그 중에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만 이 아침에 생각하면서 넘어가기를 원합니다.
제일 먼저, 이 장자권을 속여서 탈취하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뒤에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제 나이 먹어 늙어서 시력도 침침해지고 감각도 둔해진 아버지 이삭을, 남편 이삭을 속이기 위해서 리브가와 야곱이 염소털로 위장을 합니다. 사람털과 염소털이 구분이 안 가겠는가 이해가 안 가지만 그 당시 중동 지역에서 이 사람들이 말하는 염소가 우리가 생각하는 염소와는 좀 다른 것이었다고 말을 하니까 속을 수 있으니까 속았겠지요.
어쨌건 이 전체를 보면 요즘 좋아하시는 인기 좋은 드라마 사극 대조영이다, 연개소문이다, 주몽이다 많은데 그 궁중에서 일어나는 권력 다툼을 위한 치졸하고 비겁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속임수들이 드러나고 거짓이 횡횡하는 그런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게라도 장자권이라는 것을 탈취하게 된다면 그렇게 남편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등쳐먹어서 또 자기의 첫 아들을 완전히 제외시키기 위하여 이런 사기극을 벌여서라도 장자권을 탈취하면 하나님은 장자권을 갖고 있는 자에게 장자에게 받을 복을 주시는 것 이것이 복과 믿음과 영적인 상황에 얽혀 있는 원칙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문점은 창세기 25장에 리브가에게 아기가 들어섰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야곱이 발꿈치를 잡고 늦게 태어나서 동생이 되었지만 그 작은 자가 큰 자보다 더 위에 다시 말해서 장자가 되고 먼저 태어난 에서가 영적이 상태에서 볼 때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태어나기도 전에 영적인 의미에서, 내용적인 의미에서 야곱이 장자가 될 것임을 아셨다면 왜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나게 해서 온 집안에 이렇게 장자권 다툼으로 인해서 집안 꼴이 풍비박산이 되게 만드셨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냥 순조롭게 야곱이 장자로 태어나게 하고 그리고 리브가와 야곱이 마땅한 것으로서 서로 좋아하는데 본래 장자로 태어나서 갖게 된 장자권을 그대로 받고 태어났으면 에서같은 경우 팥죽에 장자권을 팔아먹을 그런 사람의 심정을 볼 때 그 장자권을 탐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자로서 그냥 사냥했으면 될 텐데 이렇게 야곱이 장자적 자리에 앉게 되실 것을 아시면서 왜 온 집안을 곤죽이 되게 만들었을까요?
그러면 장자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장자적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생각도 잘못된 것 아닙니까?
장자권을 탈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탈취를 안 했어도 하나님은 이미 정해놓으신 것 아닙니까?
하여간 아주 복잡해요.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획이 분명히 이렇게 따로 있는데 그걸 거꾸로 태어나게 하셔서 다시 장자권을 팔게하고 탈취하게 하는 것들이 다 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커피 자판기를 생각해봅니다. 자판기 앞에서 200원을 넣으면 컵이 떨어지고 떨어지는 커피를 컵이 다 받아냅니다. 그러면 컵을 꺼내어 맛있게 마십니다. 이렇게 자판기가 커피를 내주는 것은 200원만 집어넣고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그것은 사기꾼이 와서 눌러도 마찬가지고, 성자 도덕군자가 와서 눌러도 마찬가지고, 금방 살인을 하고 그 피묻은 손으로 200원을 넣고 단추를 눌러도 커피를 주는 것은 마찬가지고, 김정일이 눌러도 그렇고, 노무현대통령이 눌러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장자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것입니까?
마치 커피 자판기에다 200원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커피가 자동으로 나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인생에 200원이라고 하는 장자권을 집어넣으면 하나님은 컵이라고 하는 그릇, 즉 내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릇을 주시고 그리고 그 위에 커피라고 하는 복을 내리시는 자판기입니까?
이런 것 우리 생활 속에 무지하게 많아요.
내가 봉사라는 토큰을 집어넣으면, 내가 기도라는 토큰을 집어넣으면, 내가 선행과 구제라고 하는 그런 200원을 집어넣으면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맞습니까?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를 속이고, 남편을 속이고라도 그것을 탈취해서 장자권이라는 것을 쥐게 되고 장자권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를 속여서 복을 받으면 사기꾼을 자처하고라도 축복을 받아낸 그 축복이 유효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커피자판기라서 금방 부당하게 살인을 한 자가 손에 피를 묻히고 200원을 집어넣어도 커피를 내주는 그런 커피자판기인 것처럼, 그런 사기를 쳐서 얻어낸 장자권 위에도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겁니까?
사기꾼과 살인자가 커피를 너무 마시고 싶은 열망 때문에 200원을 넣기 때문에 그 열망이 모든 것을 의롭게 덮어주기 때문에 커피를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싶은 복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으로 야곱과 리브가의 행동은 무마되고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복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내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봉사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충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자유와 절대적으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되는 것이지 내가 충성했기에, 내가 기도했기에, 내가 어떻게 했기에, 내가 조건의 200원을 투입했기에 하나님은 마치 복을 주셔야 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복의 채무자이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저도 그런 설교를 많이 했어요.
봉사하시요!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충성하시요!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판기처럼 우리가 입력을 하면 반드시 출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투로 설교한 게 많아요.
그런데 이게 아주 나쁜 거예요. 그리고 악한 겁니다.
어떨 때 이렇게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도출되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조건을 만들어내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은 무지하게 좋은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아무 것도 없을 때, 인격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이 좋을 때 우리가 발명해내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자판기인 것처럼 복을 끄집어낼 수 밖에 없는 조건들을 생각해낸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들을 생각하고 그 복을 따내기 위해서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복을 주실거야, 저렇게 해서 복을 주실거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우리의 이웃들과 우리 자신이 조금 일이 잘 되면 그 잘 되는 이유를 절대자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에 근거시키지 않고, 그래도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내가 죄인이지만 그래도 요점은 내가 이렇게 했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100%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된 것인 것을 우리는 잊고 살아가느냐 말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의 문제에요.
성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구절들이 있어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시적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하나님의 유례와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키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지키면 주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을 조건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다 보면 말씀이 충만해져서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고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마음 속에는 말씀이 충만한 게 아니라 복에 대한 열망이 충만한 상태에서 말씀을 이용해 말씀을 지키고 복을 따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무지무지한 범죄입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말씀이 충만한 자들은 반드시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복을 줘도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글자로 써 있는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이 문자 속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우리가 받게 됩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소설가의 글자 속에는 소설가의 혼이 들어 있습니다. 시인의 글 속에는 시인의 정신과 혼이 들어 있습니다. 시닝의 감동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들어 계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충만해진다는 것,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 글자 속에 들어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내가 가득히 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스스로 복을 자아내신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느 것 없이 하나님이 주셨던 성경에 나타나는 복들에 대한 결과물들만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믿음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이었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독사의 자식들아!''회칠한 무덤들아!' '외식하는 자들아!' 주님께서 결코 현장에서 잡혀온 간음한 여자에게 조차도 사용하지 않으셨던 어휘들을 가장 거룩하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퍼부으셨던 것입니다.
이게 그렇게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하여 조건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대를 물려가면서 점점 화석화 되어 갑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야곱 그리고 이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브가 이들 모자는 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앞에 팥죽으로 장자권을 살려고 했던 생각을 했었겠지요.
야곱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복이 좋구나. 우리 할아버지에게 약속해주신 하나님의 복이 참 좋은 것이구나. 장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만민의 아버지가 되고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하는 일 할아버지에게 주신 약속이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리브가도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에는 야곱이 더 사랑스러운데. 그리고 하나님이 야곱이 장자로 될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어떻게 따낼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사기극까지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존재 다시 말해서 할아버지와 시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끔찍했던 정말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은 정도의 그 하나님의 매력에 빠진 사랑에 대해선 아랑곳 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해주셨던 복만 크게 크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온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버리고 험악한 인생살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130세가 되어서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그 바로의 모든 세상적인 복을 다 갖고 있는 바로 왕 앞에서 축복기도를 해주는 순간까지 험악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축복기도는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제 야곱이 130세가 되어서야 느낍니다. 바로가 갖고 있는 모든 복을 일평생 쫓아다녔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130살이 되어서야 압니다. 바로가 갖고 있는 모든 축복을 받고서도 그것이 축복이 아닌 것을 하나님을 모르면 어찌 감히 부락민의 주제에 대제국 문명의 발상지 애굽의 왕 바로에게 무슨 자력으로 축복을 해 줄 수가 있겠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이 깨닫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갖고도 하나님이 빠지면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모든 복을 다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에게 하나님이 없음을 발견하고 축복을 해주는 야곱!
그렇게 깨닫게 될 때까지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고 자기가 속인 것처럼 끊임없이 또 속고 또 속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복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의 생애. 험악한 인생살이를 시작하게 되는 야곱의 인생의 첫머리를 우리가 오늘 아침에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이 지상에서 펼쳐지는 나의 어떠한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그러한 조건들, 즉 교회에 봉사를 한다, 교회에 충성을 한다 그것 자체가 복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다. 그러므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할 수 있는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 때문에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고, 내가 교회를 빠지지 않고 나가는 자가 되었고, 내가 봉사할 수 있는 자가 되었고, 내가 충성할 수 있는 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충성했기에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쫓아가지 마세요!
이미 여러분은 복의 자리에 서 있고 복을 받고 오늘 하루를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준에 보시기에 어떻게 보이든지 여러분은 복더미 위에 놓여 있고 그 복더미 위에서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복의 복을 주시려고 시작하고 계시는 것이지 여러분의 행동을 통해 지금은 복이 없는데 앞으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070123)
✝기도
하나님은 복과 연관해 우리가 생각해내는 원칙과 규정에 매여서 우리가 행동을 한 그 결과로 복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안 되는 빚쟁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 주권적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셨습니다. 받은 복 위에서 오늘 하루 출발하는 마음가짐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내가 가장 악할 때부터도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나의 인생을 가늠케 하셨던 것을 기억하며 살 때 오늘 하루종일 감사의 생활을 연이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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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주님.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바리새인같은 종교생활은 이제 그만하게 하옵소서.
받은 복 위에서 오늘 하루를 출발하는 마음가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