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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감수성을 높이는 일에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다.
- 도법 (사단법인 숲길 이사장)
人生似鳥同林宿 (인생사조동림숙) 大限來時各者飛 (대한래시각자비)
인생이란 한 숲에 머물고 있는 새들과 같아서
큰 일이 벌어지면 각자 자기 갈 곳으로 날아간다.
(죽을 때가 되면 각자 자기 갈 곳으로 가는 것이다.)
- 昔時賢文 에서
엉뚱하게도 요즘 이 시가 가끔씩 떠오릅니다. 이 시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한반도라는 큰 숲에 머물고 있는 새들과 같죠. 만약 한반도를 뒤흔드는, 또는 세상이 망하는 큰 일이 벌어지면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할까요. 저는 좋은 방향으로 상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평소에 마음 쓰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 존중과 협력과 양보의 마음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제 크고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 사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거예요.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비참해질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사람답게 마음 쓰고 살아가는 실력을 꾸준하게 길러야 하는데, 모두들 편 갈라서 상대를 이기는 데만 마음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위험과 불안의 일상화
인간사, 세상사가 결국은 사건사고의 연속이라고 하죠. 최근 몇 년은 인류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건사고가 줄줄이 터졌습니다. 대표적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였고, 세월호 참사, 지난 겨울의 폭설과 추위, 올해 여름의 폭염, 지진, 태풍과 홍수 등 계속되는 기상이변이나 사건사고가 줄을 이었죠.
요즘의 상황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어떤 대책을 세워도, 사람의 목숨은 항상 위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이후 닥쳐올 재해와 생명위기의 원인 대부분은 인간이 과학과 기술의 힘을 믿고 자연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려고 했던 것의 결과입니다. 실제 내 생명의 절대적 조건이요 근본인 자연의 가치와 위력에 대해 무지했던 것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죠. 최선의 사고예방책은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 자연의 가치와 위력에 대한 존중과 겸손, 생명의 안전을 중심에 놓은 정책 과제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위기가 길어지고 국민적 불안감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긴장과 불안감을 감춘 채 일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경제논리가 앞장을 섭니다. 그리고 정치논리가 그에 합세합니다. 생명의 안전과 평화가 우리 경제, 정치활동의 목표일 텐데 생명이라는 주제는 실종되고 맙니다. 다시 경제논리를 따라가고 정치논리로 아웅다웅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가치가 전도된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성공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과연 성공이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여 확대시키고 재생산하고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삶의 반복이 됩니다. 좀 더 큰 집, 보다 안락한 자가용, 더욱 비싼 휴가 등이 그 희생에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을 성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결론적으로는 돈을 소비하는 삶이 확대되는 것이며 돈에 대한 종속의 심화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는 돈으로 자유를 얻은 양 착각하고 삽니다.
결국 이런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지속되는 한, 삶은 목적을 잃어버리고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현대인의 삶입니다. 생각을 돌이켜보면 성공하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으로 현재를 희생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에서 행복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숲, 길, 그리고 걷기
한편, 사람은 누구나 위기에 봉착하면 먼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곳을 떠올리죠. 주로 고향이나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아마도 자신의 생명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회복의 장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서울을 빠져나가는 도로가 꽉 막혀있는 것을 보면 왜 이렇게 사람들이 기를 쓰고 야외로 몰려가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단지 여가활동을 할 만한 여유가 생겨서만 일까요? 어쩌면 실존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보려고 저렇게 기를 쓰고 자연을 찾아가는 것을 아닐까요?
자연은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요 생명의 거처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숲은 자연의 핵심인 동시에 예로부터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숲과 나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통로로 신성시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숲은 우리들의 터전입니다. 마을숲,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숲길, 지금은 옛길이 되어버린 길들은 나를 낳고 길러온 조상들의 삶입니다. 따라서 그래서 숲길은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공동체를 회복하는 치유의 장입니다.
걷기는 그 자체로 지금 당장 온전히 나를 대면하는 행위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걷는다는 것은 의사 두 사람을 모시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 든든한 두 다리로 걷다보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건강해진다는 것이죠. 걷기는 또한 만남입니다. 걷다보면 사람은 물론이고 세상 모든 존재들을 스승으로 만나게 됩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사람이 어릴 때 두 발로 걷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떠올려봅니다.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하지 않습니까? 기어가다 엎어지고, 몸을 뒤집다가 쓰러지고, 일어나다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몇 걸음 떼다가 넘어지고… 그래도 싫어하지 않고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를 반복합니다. 걷는 것에 엄청난 비밀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무엇을 배우기도 이전에 스스로 알아서 그토록 무한한 노력을 쏟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어떻든 인간은 그런 갖은 노력 끝에 드디어 걷게 됩니다. 직립보행, 비로소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인간이 어렵게 이루어놓은 진보, 직립보행의 능력을 퇴화시키는데 자신의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일어나고 걷기 시작한 인간이, 곧바로 그 능력을 퇴화시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통학버스를 타거나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갑니다. 청소년들은 교실과 도서관의 책상에 붙박이가 되어버립니다. 집에 오면 컴퓨터 앞에서 나머지 시간을 보냅니다. 점차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짜증을 내고, 걷는 법을 잊어버리는 거죠.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더 편리하고(편리함이란 걷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내 몸을 쓰지 않는 것이 핵심인 듯합니다.) 더 감각적인 것들을 쫒아가는 삶입니다.
결국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들이 제약받고 왜곡되고 정상적으로 발현되지 못해서 삶이 끝없이 고통스러워집니다. 인간의 무력함과 고통은 자신이 가진 생명력을 알지 못하고 자기치유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래서 삶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내 생명력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것이 건강하고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원리에 눈 떠야 합니다.
직립보행을 하려고 하자마자 걷기를 박탈당한 현대인들이 자기를 성찰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걷기는 자기와 마주서는 행위이며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이어져있음을 느낄 수 있는 통로인데, 그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걷는다는 것은 처음 인간이 되었던 때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다시 쓰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인생화두라고 합니다. 화두는 바로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그런데 이 화두를 놓치고 살면, 이 화두를 투철하게 다루지 않고 내팽겨 쳐놓고 살든가, 건성으로 살든가, 아예 묻어 놓고 살든가 그러면 인생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모순과 혼란과 고통의 삶이 계속 되풀이 되는 이유가 인생화두를 제대로 붙잡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공, 일등, 부자, 명예와 같은 것들을 이룬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권력이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명예가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부자가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돈 있으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천재지변에 의한 화를 제외하고 인간이 잘못될 수 있는 위험성을 단순화시켜 말하면 성공과 실패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안과 두려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고, 성공해도 오만과 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을 건데 죽음에 직면해도 괜찮을 수 있고, 어차피 늙는 건데 늙음에 직면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이 두 가지 질문을 묻고 또 물어서 이것을 최고로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을 현자(賢者)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잘 알고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을 ‘야, 저 사람 괜찮은 인간이야. 멋있게 산 사람이야.’ 이렇게 평가합니다.
저는 직립보행을 잃어버린 삶은 아무리 노력해도 저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로는 대답을 하더라도 그게 자기 삶에는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숲길의 현재와 미래 심포지엄. 숲길! 다시 처음처럼
오늘 여기에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은 그동안 해온 숲길 사업의 현황을 알아보고 숲길의 미래를 어떻게 가꿀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 첫마음으로 숲길에 대해 모색해보는 자리라는 것이겠지요. 저는 다만 숲길 운동의 출발선에 있었고 지금도 인연을 맺고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제가 그간 보고 느낀 것을 중심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처음 숲길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부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숲길을 제안하던 2004년 전후에 겪었던 사회적 현상들을 보면 사회양극화, 9.11테러,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자연생태계의 재앙 등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점차 피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현대문명이 얼마나 방향을 잘못잡고 헤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었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지리산에서는 지리산공부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뜻있는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현대문명의 병폐를 보다 근원적으로 치유해내고 대안문명, 생명평화의 문명을 가꾸어내는 일을 지리산에서 해보자고 뜻을 모았고 그것을 지리산운동이라 이름 했습니다.
그 지리산공부모임을 하면서 뜻이 하나둘 보태지고 더 다듬어진 것이 생명평화운동입니다. 문명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하게 되었는데, 지리산순례를 하는 과정에서 섬진강4차선계획으로 싸우는 주민들과 만나게 됩니다.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대안은 없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리산에 순례길을 만들면 좋겠다는 데에 뜻이 모아졌습니다.
생명평화탁발순례의 과정에서 생명평화운동의 문제의식으로 구체화된 첫 인연이 지리산숲길운동이었고 사)숲길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숲길의 활동은 지리산에서만이라도 대안문명을 제대로 가꾸어가는 운동을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따라서 2007년부터 시작된 사)숲길의 활동은 단순히 자연보호,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귀한 가치를 지향합니다.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현대문명의 벽을 허물고 모순들을 넘어서서 생명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뭇생명이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가꿉니다. 대안문명을 가꾸고 흐름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학교로서 특히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도 숲길을 잘 가꾸고 걷기와 순례문화를 가꾸겠습니다. 마치 농작물이 자랄 때 전 우주가 관계 맺고, 농부의 작은 손길도 그 안에 하나의 관계로 스며들듯이 사)숲길도 그렇게 생명살림의 작은 손길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오래된 옛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옛길의 흔적을 되살려 우리 땅의 생태와 문화, 역사를 보전하는 활동”이고 첫 활동으로 어머니의 산, 지리산 둘레를 잇는 지리산길을 만들고 관리하는 일을 해왔지만, 그 가치와 방향이 ‘생명평화공동체’를 가꾸는 데에 있음을 항상 새기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담당하시겠지요)
숲길운동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를
먼저 숲길가꾸기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대안운동이라는 관점을 견지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숲길의 존재가치도 지켜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대중들의 관심은 사업의 연속성을 담보해갈 수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편리함과 속도에 물들어 있는 대중의 욕구에 즉자적으로 영합하는 순간 숲길의 존재가치도 함께 사라집니다.
숲길은 생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만남의 길이 되도록 남겨두어야 합니다.
허겁지겁 왔다가 허겁지겁 가버리는 관광지가 아니라 자신을 대면하는 길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사람이 보입니다. 자연이 보입니다. 도시인의 각성도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 건물 짓고 도로 뚫어대던 사업들과의 차별성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개발논리에 치우친 많은 정책들이 생태계, 즉 인간들의 고향을 파괴해왔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한반도 곳곳에 조성하고 있는 길이 또 다른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지 우리 스스로 항상 점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적 효과는 어떤 사업의 연속성을 결정하는데 물론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무형의 경제적 효과가 같이 산출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관광효과 같은 것으로만 접근하면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고 봅니다. 어디 가니까 경치가 좋더라 길이 편리하게 잘 닦였더라 정도로는 안 됩니다. 관광상품을 고안하듯이 숲길사업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단지 산림청의 숲길 조성 및 운영•관리의 문제점을 개선한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화와 풍토를 가꾸어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책임 있는 체계 있는 관리와 내용에 신경 써야 합니다.
또한 지역사회의 각성이 더욱 필요합니다.
지역 주민들은 자연과 마을공동체에 대해 의외로 무지합니다. 달 속에 앉아서는 달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이분들로 하여금 지역의 문화적·생태학적 가치에 눈뜨게 해야 합니다. 농부로서 자기가 선택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게 만드는 길이 바로 이 현장입니다.
지역사회가 먼저 각성해야 합니다. 역사적 가치, 생태적 가치, 문화적 가치에 눈을 뜨도록 하는 일입니다. 지역사회 자체가 주체적으로 상식, 진리에 맞는 삶의 모습을 정립해야 합니다. 생명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소박한 삶이고 상식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삶, 어울림의 삶입니다.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숲길 활동 자체가 운동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운동성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공동체성입니다. 숲길은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문, 공동체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생존을 걸고 해야 하는 운동은 생태적 감수성,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다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국민들의 생태적 감수성, 생명 감수성을 높이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숲가꾸기요, 숲길걷기요, 숲교육입니다.
숲길의 가치를 여러 측면에서 발굴해내고 확장해내서 우리의 실제 삶에 연결시켜내는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육성되고, 그것들이 연결되는 숲길 코디네이터의 시대를 열었으면 합니다.
적어도 21세기 백년계획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긴 세월 진리처럼 굳어져버린 싸움과 죽임의 문명을 넘어 생명살림 평화살림의 대안문명을 모색한다고 하면서 백년정도도 공을 들이지 않고 가능하다고 여겼다면 그것은 세상을 너무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무책임하다고 할 법하지 않습니까. 진정 생명살림, 평화살림의 대안문명을 이루어내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판단한다면 사실 백년이 결코 긴 시간도 아닙니다. 그 정도의 긴 호흡과 모색이 있어야 새로운 문명의 나무를 길러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민간과 학계, 지자체, 중앙정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숲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이 함께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숲이 세상의 허파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이야말로 바로 그 허파를 돌보고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의 안부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의 인연으로 숲길이 우리 사회의 생명평화를 가꾸어내는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첫댓글 하모하모!
평생 담고 살아야 할 내용들 감사합니다.
도법스님과 함께 일이 하고 싶어지네요.
숲길에 생명감수성을
삶에 생명감수성을
마음에 정말 와 닿습니다
오늘 꼭 참석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