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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5일 어린이날의 산행이다.
아침은 선선하지만 낮에는 더운날씨이다.
산행 후반부에서 구름이 있어서 그나마 수월하게 산행한 듯 싶다.
빼재 의 들입구 사진이다.
들입구는 빼재 고개 최상부까지 올라가지 않고 100m정도 남쪽으로 내려온 지점에서 출발한다.
빼재(920m) :
빼재에 세워져 있는 ‘백두대간 안내비’에 적힌 내용이 빼재의 유래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빼째는 삼국시대부터 각 국의 접경지역이었기에 전략적 요충지로서 수많은 민관군이 이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고, 임진왜란 시 이곳의 토착민들은 산짐승들을 잡아 먹어가며 싸움에 임했다.
그 산짐승들의 뼈가 이곳저곳에 널리게 됐다고 해서 뼈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며, 뼈재가 경상도 방언으로 빼재가 됐다고 한다.’
뼈재는 추풍령을 본뜬 ‘신풍령’이라는 휴게소가 고개 아래쪽에 들어서면서 ‘신풍령’이라고도 불린다.
일제 강점기에는 고개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빼’를 ‘빼어나다’로 해석하는 바람에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 ‘수령(秀嶺)’, 즉 빼어난 고개라는 뜻의 표지석이 세워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말로 신풍령(新風嶺), 수령(秀嶺)이라고도 한다. 인근 주민들은 여전히 빼재로 부른다. 아래 개통된 터널도 빼재터널이란 이름이다.
출발전 같이 구호한번 외치고 출발.
빼재의 대간능선에 올라오다.
과거 좌측으로 빼재고개로 가는 길이 있었을 텐데, 사라졌다.
네이버지도에서는 길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다음 지도(카카오지도)에서는 길이 사라져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코스로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약 800m 진행하면 수령봉에 도달한다.
정상석도 없고 시그날도 확실치 않다.
약 500m 정도 걸으면 봉우리에 시그널 보인다.
그곳이 수정봉일 수도 있지만 좀 더 진행해야 한다. (능선길이라 정상부를 지정하기 힘들다)
약 700m 진행한 지점에 이정표가 있다. 이 이정표의 위치가 수정봉으로 판단하면 될 듯하다.
이정표에서는 빼재에서 400m 정도 진행했다고 표시되어 있다.(거리가 잘못 표기된 것이다.)
수정봉에서 약 200m 정도 진행하면
낮은 안부가 나온다. 여기 또 이정표가 있다.
수정봉에서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 빼재에서 1.0km 걸었다는 구라치는 이정표이다.
수정봉과 수령봉 사이의 가장 낮은 고개이기는 하지만 된새미기재는 아니다.
그냥 진행한다.
된새미기재로 올라가기 전에
산림자연보호구역 삼거리 이정표가 있다.
드뎌 된새미기재 이다.
소위 봉산 삼거리이다
된새미기재(봉산갈림길, 1,050m?)
: 구병산 등 여러 지역에 새미기, 새목이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뜻은 지대가 높아서 새만 넘어 다녔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i.e. 조령 : 새가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사이의 목'을 뜻하는 [새목이] 에서 지역마다 '새미기', '새매기'로 변형되었다는 말도 있다. 새미기앞의 [된]은 힘들다/되다는 뜻의 접두어로 [힘든 봉우리 사이 고개]로 해석할 수 있겠다.
빼재가 높은 고개이긴 하지만 빼재-수정봉을 지나 된새미재로 가는 길은 비교적 편안한 능선길이다. 하지만 대간능선길 주위로 경사도가 높다.
된새미재가 있는 곳은 빼재-수정봉과 수령봉(1,090m)의 사이의 가장 낮은 지역이 아니라, 가장 낮은 지역에서 300m 정도 좀 더 북진하여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면 있다.
즉 이 고개는 동쪽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 마을에서 서쪽마을인 무주군방향으로 가려면 빼재보다도 높은 이 고개를 올라와서 빼재로 내려가야 했으니 새가 넘기 힘든 높은 고개이면서 빼재보다도 더 힘든 된새미재라는 용어를 붙였으리라 해석해본다.
아래는 된새미기재에 있는 이정표이다.
해발 648m로 구라치고 있다. 해발 고도 1,050m 정도의 높이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앞에 수령봉이 보인다.(최정상부는 아니다.)
얼마 안걸었는데 된새미기재이정표 다음에 나타나는 이정표.
땀도 많이 안흘렸는데 해발 1,076m라는 표시가 있다.
백두대간 뛰는 사람을 위해 장난삼아 만든 것인가 싶기도 하고... ^.^
진행방향중에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바위이다.
아래 사진은 바위에서 올라가서 본 삼봉산.
맨 우측 제일 높은 곳이 제1봉(삼봉산 정상석이 있는 곳)이다.
맨 좌측의 봉우리는 2봉과 3봉이다.
우측에서 2번째 작은 봉우리는 가까워서 높게 보일뿐 이름없는 작은 봉우리일뿐이다.
진행방향에 보이는 봉우리는 수령봉이다. 해발 1,090m 정도 된다.
아래 붉은색 화살표는 백두대간 진행방향이고
정상은 진행방향의 좌측편에 위치한다.
수령봉 근처능선까지 도착했다.
아무 이정표도 없지만 대간길은 붉은색 화살표로 직진이다.
푸른색 방향은 수령봉 정상으로 가는 길인데,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어 길이 보이지는 않는다.
길이라는 느낌만 있을 뿐이다. 200m정도만 가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데
괜한 체력 낭비가 아쉽기도 하고, 길도 뚜렷하지도 않고, 혼자가기 불안해서 그냥 직진하기로 한다.
수령봉 능선을 지나 300m 정도 내려오면 낮은 고개에 도달한다.
호절골재이다.
이정표도 없고 그냥 지나쳐가기 쉽게 되어 있다.
공터가 있다고 하는데, 주위 수풀이 많이 자라서 이젠 공터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듯 하다.
호절골재에서 올라가다 보면
나타나는 이정표이다.
이정표는 진행방향의 좌측에 위치하지만 우측방향의 길이 있다는 표식를 떼어낸듯하다.
금봉암으로 가는 첫번째 삼거리이다.
샛길인데 산죽으로 길이 거의 보이지않고 시그널만 달려있는 것으로 삼거리임을 알 수 있다.
멀리 나무아래 붉은색 시그널이 갈림길입구임을 알려주고 있다.
금봉암 두번째 갈림길에 도착하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다.
갈림길에서 남쪽 방향으로 멀리 뾰족한 봉우리가 보인다. 우두산이다.
갈림길을 지나 능선에 도착한다.
정상은 아니지만 작은 돌로 탑을 귀엽게 세워져 있다.
능선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바라본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좌측에서 순서대로
1) 수도산1430m, 2) 가야산 1317m(가장멀리 보이는 뾰쪽한 봉우리), 3) 시코봉 1237m,
4) 단지봉 1327m 5) 흰대미산 1018 m 이다.
드뎌 삼봉산에 도착한다. 제1봉이다.
정상석이 두 개나 있다.
작은 정상석에는 덕유삼봉산이라고 이름이 적혀있다.
삼봉산(三峰山, 1,254m) :
삼봉산(三峰山)은 고제면 봉계리에 정상을 둔 거창의 진산(鎭山)으로 덕유삼봉산이라고도 한다.
삼봉산은 세 개의 산봉우리가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덕유산이 시작되는 북쪽의 첫 봉우리이기에 덕유원봉(元峰)이라고도 한다.
어쨌던 삼봉산이니 봉우리는 3개일 것이고 이젠 남은 봉우리 2개를 찾아야 한다.
덕유삼봉산에서 보이는 제2봉,(좌측은 이름없는 작은 능선봉우리이고, 우측의 암벽이 제2봉이다.)
제2봉근처의 암릉이다.
이제 남쪽으로 데크 설치가 되어 있어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지만
데크전에는 이 암봉으로 올라갔을 것이라 보인다.
사람지나간 흔적은 뚜렷하지만, 겨울철에 백두대간 남진할 경우 여기 눈이 있었으면 매우 위험했으리라 보인다. 길 바로 우측 아래는 절벽이다.
제2봉에서 도착해서 지나온 길 방향의 덕유산을 바라본 풍경이다.
빼재는 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대신 표시된 지역은 좌측으로부터
1) 갈미봉 2) 대봉 3) 북덕유산(제일 멀리 보이는 제일 높은 산)
4) 홍덕산 5) 지봉=투구봉 (못봉의 지봉이 아닌 또 다른 덕유산의 지봉이다.)
제 2봉 정상인증샷(데크로만 지나가면 놓친다는...)
아래는 제2봉 정상부
제2봉에서 바라본 제3봉 방향
삼봉산 제2봉과 제3봉 사이에 묘한 바위를 넘거나 우회해야 한다.
[챙이바위]이다.
참조로 [챙이]란 곡식 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골라내는 도구)’의 강원, 경상, 전남, 충북지역에서 사용하는 방언이다.
드뎌 삼봉산 제3봉 도착한다.
삼봉산 제3봉에서 바라본 대덕산(투구봉)과 삼도봉(초점산)
대덕산 산행하는 중에는 대덕산이 투구느낌이 없지만
여기서 바라본 대덕산의 정상부는 투구의 모양과 닮아있다.
삼봉산 제3봉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풍경
표시한 봉우리는 좌측으로
1) 민주지산 2) 석기봉 3) 삼도봉 4) 황악산(제일 멀리 보이는 산)이다.
하산입구 이정표
하산길이 경사도가 높아서 위험하다.
내리막길에 보인 묘한 바위 및 바위 위치
이 바위의 아직은 공식 명칭이 없는 듯 하다.
소사고개가까이 오면 고냉지밭으로 나온다.
이 지점 어딘가에서 좌측으로 가야하는데 우측의 좋은 임도길로 진행했다.
소위 알바했다는
아래 지도에서 붉은색 실선은 내가 진행한 길이고
아마도 푸른색 길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뒤돌아 본 삼봉산 제 1 2 3 봉
알바 덕에 농장문을 월담하고
동쪽으로 소사고개를 지나 소사마을의 매점에 도착한다.
여기서 점심을 해결한다.
슈퍼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무상)
J3클럽에서 국공(지리산-덕유산-수도산-가야산; 200km 2박3일 무지원 종주)을 하는 중이다.
이런 코스를 완주한다는 것이 사람같이 보이지않지만,
그래도 같이 사진 찍어보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ㅎㅎ
힘들게 초점산을 올라가다보면
초점산 정상가까이에 이르러 삼거리 이정표가 나온다.
좌측은 초점산(삼도봉) 우측은 국사봉 방향의 표시이다.
여기가 우측으로 수도지맥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삼도봉(초점산)이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북도 접경지역이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삼도의 접경지역이다..
이 곳에서 잠시 실례한 소변은
경상북도 김천시, 경상남도 무주군, 전라북도 무주군 어느쪽으로 갔는지는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ㅋㅋㅋ
초점산(삼도봉) 에 도착했다.
초점산(草岾山, 1,249m, 삼도봉, 대덕삼도봉)
: 전라북도(무주군), 경상북도(김천시) 경상남도(거창군)의 3개도가 접한 봉우리라서 삼도봉(三道峰) 또는 대덕삼도봉(大德三道峰)이라고 한다.
이 초점산(삼도봉)에서 남동쪽으로 수도산·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수도지맥이 시작된다. 사실 삼도의 경계가 접하는 부분은 엄밀하게는 삼도봉/초점산 정상이 아닌 삼도봉에서 300m정도 남쪽으로 내려온 수도지맥이 시작되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초점산에서 바라본 대덕산(맨 우측 봉우리) 풍경
대덕산 정상 인증사진
대덕산 정상은 기우제를 지낼만큼 큰 공터 및 헬기장으로 만들어져 있다.
대덕산(大德山, 1,290.7m) :
삼도봉에서 1.5㎞정도 북쪽으로 진행하면 나온다.
옛 이름은 다락산(多樂山), 다악산(多惡山), 투구봉이라고 불리어졌다고 한다. 다락은 높다는 의미이며, 투구는 산의 생김새가 장수들이 전장에서 쓰는 투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시 전라병사 이광악이 왜적을 물리쳤고,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亂) 때에 이 고장의 의병들이 반란군을 물리쳐 국난이 있을 때마다 고장을 지켜주었던 명산이라고 한다.
명종대 예언가 예언가 ‘남사고’가 무주군 무풍(茂豊)면을 병화(兵火)와 흉년이 없는 무릉도원 십승지라고 했는데 예로부터 복지의 땅으로 선망을 하고 축북을 내린 땅이라고 하여 국난이나 천재지변이 생길때마다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서쪽 계속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금강의 최상류 발원지가 된다.
해발 980m의 동쪽 방아골 암벽에서 떨어지는 얼음폭포의 물은 낙동강의 발원지가 된다. <디지털 김천문화대전>에는 대덕산 명칭 유래가 적혀 있다. ‘한 도인이 옛날 이 산에서 100일 기도 후 공덕을 쌓아 도가 통했다고 하여 대덕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현지에서는 산기슭의 마을에서 큰 인물과 부자가 나와, 산으로부터 ‘큰(大) 덕(德)’을 입은 결과라 하여 대덕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산정에는 기우단이 있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대덕산에서 하산 중에 본
앞으로 지나가야할 능선.
바위가
기차를 닮았다고 할지???
발까락을 닮았다고 할지??
아래는 얼음골 약수터 위치 및 사진
낙동강의 발원지 중 하나이다.
아래사진은 얼음골폭포 위치 및 사진
덕산재에 도착했다.
덕산재(德山峙, 644m)
: 30번 국도로서 경북 김천 대덕면과 전북 무주 무풍면을 이어준다.
덕산재 이름은 김천 대덕면의 덕산리(德山里)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덕산재는 주치령(走峙嶺) 또는 주티령이라고도 한다.
과거 고래를 넘어갈 때 산적이 자주 출몰하던 곳으로 만약 고개에서 산적이 나타나면 고래 아랫마을로 빨리 달려와야 살수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한다.
그래서 주치령 아래 있는 김천방향쪽에 있는 마을이 주치(走峙)마을이다. 주치마을은 옴배미마을이라고도 한다.
마을이 대덕산·주치령에 둘러싸여 포근한 곳이어서 '따뜻할 溫'과 일정한 면적의 땅을 뜻하는 사투리인 '배미'를 합하여 [온배미]라 한 것이 변한 이름이라고 하는데,
높은 곳에 둘러싸이면 분지형태로 더 추울 것이고, 대덕산·주치령 등의 소백산맥능선이 북풍을 막아주기 때문이 따뜻한 것이 아닌가 싶다.
덕산재에서 잠깐의 휴식후 다시 부항령으로 출발한다.
아래 사진은 들입구
선황당재까지는 2개의 봉우리가 있다.
첫 번째 봉우리 정상 위치 및 사진
그 정상부를 지나 20m정도 지나가면 쉼터가 나온다.
쉼터에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2개의 봉우리 중간 지점쯤에 위치한 전망대
방치되어 있다. 나무에 가려서 경치도 없다.
아마도 과거에는 무언가 풍경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사람들도 많이 지나갔으리라 보이지만
지금은 발자국 흔적도 드문 낙엽이 쌓인 허전한 전망대로 변해있다.
2번째 봉우리 근접해서 좌측에서 넓은 산길이 합류된다.
진행방향은 우측이다.
두번째 정상부
첫번째, 두번째 봉우리 모두 약 830m 정도의 해발고도를 가지고 있다.
선황당재에 도착했다.
블로거에는 이정표가 있다고 했는데 안보인다.
선황당재 :
아마 선황당은 성황당(城隍堂)이 잘못 명치되어서 선황당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단 지명이 고유명사로 굳어졌으니 굳이 바꿀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선황당이란 오기(誤記)보다는 서낭당 또는 성황당(城隍堂)으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참조로 성황당(城隍堂)·서낭당 이란
: 한국의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신 신당(神堂)을 말한다.
서낭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선왕당(仙王堂)·천왕당·국수당·국시당 등으로 불리며 한자로 표기하여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있다.
서낭이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농후하다.
서낭당은 중국의 성황묘(城隍廟)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중국에는 성을 수호한다는 성지(城池) 신앙이 있었는데 이것이 남북조 시대 이래로 '성황'으로 변하여 일반화되었고 송나라 때에 크게 유행하였다.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성황신앙이 유입되었는데,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고려 문종(文宗) 때에 선덕진(宣德鎭)에 쌓은 새로운 성 안에 성황사를 지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낭당은 주로 국가에서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나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설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호족 집안의 시조 및 그 땅에 연고가 있는 위인들이 서낭신(城隍神)으로 모셔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것을 보면 곡성성황신 신숭겸(申崇謙), 순천부성황신 김총(金摠), 의성부성황신 김홍술(金洪術) 등이 있다. 또한 유금필(庾黔弼)을 가림성황신으로 모신 사례도 있다.
이성계(李成桂)는 즉위 후 여러 산천의 서낭을 제사하였으며, 태종은 백악(白岳)서낭과 송악(松岳)서낭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이러한 서낭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뿐만 아니라,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하려 하였다.
조선 시대에서 산천이니 성황이니, 풍운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던 단들을 하나의 성황당으로 통합하여 재배치하고, 군현마다 사직단과 여단(?檀)을 일괄적으로 설치하여 봄과 가을로 국가가 주도하여 정기적으로 수령이 제사를 지내게 하는 한편, 국난이나 가뭄이 닥쳤을 때 임시로 서낭제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서낭은 국행(國行)서낭과 민간에서의 서낭으로 나누어진다. 국행서낭은 호국(護國)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낭당의 성격은 크게 변화하였는데 이는 지방 유력자들, 특히 성리학만을 정도로 받들며 그 외의 가르침을 사도(邪道)로 몰았던 사림(士林) 세력이 장악하게 되면서 서낭당에 대해서도 음사(淫祀)로 보았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서낭당에서의 관 차원에서의 제사를 금지하게 되면서 서낭제의 성격도 관헌적인 것에서 민간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선황당재에서 다시 오르막이다. 약 200m정도 올라가는 듯 싶다.
약 853m 정도의 고지로 올라간다.
아래 사진은 첫번째 봉우리 직전 이정표 및 쉼터이다.
제3봉, 첫 번째 봉우리이다.
제1봉이 아닌 제 3봉이라고 한 이유는 맨 마지막 봉우리에서 이정표가 있는데 제1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즉 백두대간 남진의 순서로 이름을 붙여야 할 듯 하다.
이정표도 없고 평지라서 봉우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단지 주위에 더 높은 곳이 없어서, 그리고 GPS를 참조하여 봉우리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여기는 2번째 봉우리, 올라오는 길을 찍은 사진이다.
나무계단이 있다.
제2봉에서 바라본 제1봉 방향(북쪽) 및 현 위치
853봉 제1봉 및 이정표, 그리고 준희 목판.
이 산은 봉우리가 3개이긴 하지만 거의 높이가 비슷한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봉우리 1개라 하기도 애매하고 3개 또는 4개 등으로 충분히 혼동될수 있는 지형이다.
뚜렷한 봉우리라면 제2봉과 제1봉인데,
제1봉은 제2봉과 제3봉보다는 높이가 낮다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이정표는 제1봉만 확실히 표시하였고
제2봉,제3봉등의 이정표 설치 및 시그널 표시는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항령 가까이 도달할때쯤 있는
작은 봉우리의 돌탑 및 그 위치
아래 사진은 부항령 날입구
부항령(釜項嶺, 680m)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가목마을과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 쑥벙이마을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부항령은 김천의 가목마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부항령의 동쪽에 김천의 가목(가매목)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 같다고 하여 [가매실]로 불렸다고 한다.
가목마을의 가목은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한 것이라 한다.
부항령은 김천의 가목(가매목)마을에 있는 고개여서 마을 이름을 따서 가목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한자(漢字)로 釜(발없는 큰솥 釜 또는 가마 釜)자를 사용한 부항령(釜項領)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매]는 국밥을 짓거나 국을 끓이는 그릇인 솥의 함경도 사투리이고
[가매목]은 가마솥이 아닌 가마솥이 있는 부엌, 즉 부뚜막의 함경도 사투리이다.
즉 가마솥을 닮았으면 가매마을이라 불러야지, 부엌마을을 뜻하는 가매목 또는 가목마을이라고 불렸다는 것이 약간은 이상하다.
가마솥의 지세가 있는 마을이라 가매목마을(부엌마을,부뚜막마을)이라 부르지 않았었나 라는 약간은 다른 개인적 해석을 해본다.
아래는 부항령 도로
아래 사진은 부항령에 있는
부항령터널이 아닌 삼도봉터널
부항령(釜項嶺) 아래로 삼도봉터널(1089 지방도)이 지나고 있는데 터널 명칭을 과거에는 부항령터널로 불렸다.
그런데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걸쳐 있는 터널이라서 경상도 쪽의 지명인 '부항령터널'이라고 부르게 되면, 전라도 사람들이 소외를 느낀다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이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삼도봉 이름을 빌려 삼도봉터널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높고 험한 재를 '99구비재' 라 부른다. 했었는데, 구비(굽)의 개수로는 보통의 재들은 99개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런데 이 부항령은 99구비하고도 3구비가 더 많다고 한다(갯수를 어떻게 헤아렸는지 대단하다).
직선거리는 불과 3km인데 표고차는 5백m에 가깝다.
부항령은 그만큼 경사도가 심한 것이다. 비포장이던 시절에 버스의 한쪽 바퀴가 항상 겉도는 재라 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첫댓글 오~우
챙이바위 열공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지나갈 때는 바위가 특이하다는 느낌에 사진을 찍고 갔는데, 후기작성하는 중 지도에 챙이바위라는 표시가 있어 늦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찍는 습관이 없었으면 그냥 놓치고 갈 뻔 했습니다. ^.^
@다음 넘넘 감사드려요~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ㅎ
아이고 이번코스 엄청 힘들게 겨우 완주했는데 이렇게 또 자세한 설명과 함께 다시보니 좋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백두대간은 힘들게 잡은 스케줄이라서 평소와는 달리 산행기를 적게 됩니다. ^.^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고갯길 - 된새미재 - 8번째 대간길이 딱!!!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 된 새 미 재 @ 바위는 발가락 닮았다에 한표입니다ᆢ 경사도 심한 하산길이 넘 많아서 발가락 열개가 다 아팠는데 딱 제 발가락을 닮았네요 ᆢ 8월에 이코스 산행했다면 클 날뻔. 다음님 건의로 5월에 다녀오길 천만다행 *.~ 다음님 현명함에 감동 . 회원의 건의를 열린맘으로 바로 수용하시는 회장님의 포용력에도 감탄. 낙동 백두대간16기 짱 멋집니다 *.*
저도 발가락에 한표이기는 합니다만 와룡산 기차바위와도 모양이 비슷해서요...
참조로 5월5일 산행은 7월 첫째주 산행이 앞당겨진 것이고 8월 산행은 7월3째주로 1개월 당겨진 상태입니다. ^.^
이젠 산행 후 습관적으로 다음님의 글 기다리게됩니다.
하루하루 기다리는 제 모습 보며 죄송한 맘마져 듭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상세한 부연 설명 곁들인 후기 대간 끝나는 날 책으로 내봄이 좋을듯 하네요.
다음님의 수고에 감사드리며 염치불구하고 계속 부탁드립니다.
글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초는 바빠서 올리기 힘들었습니다. 지리산 종주는 산행길이 길어서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