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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말씀을 사모하시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우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말씀의 감동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충만히 임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 저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귀중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에게 드리려는 것 보다 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받아 들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 혼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는 되지 않지 않습니까?
말씀에 귀를 가지신 분들은 함께 이해를 하고 함께 은혜를 받고 함께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제목은 주는 대로 받는다 라는 제목입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말씀이 사실이라고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아이들의 교육의 중 고등 교육을 삼육학교에 넣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교회에 학생반을 원하여서입니다.
그래서 큰 아이를 가까운 중학교에 넣고요. 두 해가 지나서 작은 아이를 또 가까운 학교에 넣었습니다.
근대 어느날 울상이 되어서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가방에서 시험지를 꺼내어 주는데 0점이었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안식일 날 시험을 쳤는데 시험을 치지 않았다고 이렇게 0점짜리 시험지를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 교육 문제도 그보다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경산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사를 하고 난 다음 성도님들에게 들은 이야기 입니다.
큰 방에 사시는 분들이 아주 대단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곳에 어떻게 사시려는지 염려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당시 시계 도매업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첫 대면 선물을 아주 멋지고 이쁜 손목시계 한 세트를 부부에게 선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인이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려면 향기네가 다니는 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것입니다.
교회 가면 다리를 부질러 버리겠다고 했던 남편의 마음도 감동이 되어서 저희들을 따라서 교회 다니는 것을 허락하셨고 그 해 여름에 그 부인은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가 작은 부분이지만 성취가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교독한 말씀 누가복음 6장 31절의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의 평행절인 마태복음 7장 12절에는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보이는 사진은 트레버라는소년이 노숙자와 관련된 영상을 보다가 자기가 깔고 앉은 담요와 털신을 가지고 노숙자를 찾아 전해주는 사진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런 말씀을 주시고 ”이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울법이요 선지자니라 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과 선지자를 어떻게 배우시고 어떻게들 이해하십니까?
유태인들은 성경을 두 부분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요, 다른 하나는 선지자입니다.
그런 표현이 신약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라 하면 모세의 오경을 의미하는 말씀이고 선지자는 그 외 다른 구약 성경임을 다 이해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과 선지자를 우리가 마태복음에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전 구약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이죠? 그렇게들 이해하십니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오늘 저는 말씀의 제목을 주는 대로 받는다 라는 제목으로 준비하였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주는대로 돌아온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사자성어 가운데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사상에서 유래 된 것 같습니다.
한자는 (因인할인,果과일과, 應응할응, 報갚을보) 이렇게 씁니다.
어떤 의미로 이해를 하십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행한 선 악에 대한 결과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서운 말이죠? 근데 그 말씀이 성경에도 있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부드러운 말씀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남에게 대접을 한 대로 받게 된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말씀을 줍니다.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무엇을 따르라고 합니까?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이유를 사도 바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를 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주를 보지 못한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더 나은 출세를 하는 것입니까? 저에게 물으신다면 주님을 뵙는 것이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영원한 천국의 행복 누리지 못해도 좋습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죄가 없는 곳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고 가고 싶습니다.
이런 소원이 저만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소원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지 않으면 주를 볼 수가 없다고 합니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지 않으면, 저는 그것이 굉장히 쉽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오천만원 떼이신 것 때문에 밤에 잘 때도 오천만원 떠오르고 기도할 때에도 그 오천만원 때문에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뭐 돈 오천만원 때문에 그만한 형편이 되시는 분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까지 그런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번 연수가서도 비록 일을 도와 주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지만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그 한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드렸습니다.
기도 드렸다기 보다는 그런 마음만 가지고 산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 문제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정도로 저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무릎을 꿇고 이러한 이 죄인의 마음을 고쳐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 드려서요.
그러면서 할 수 없는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외쳤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말씀이 조금은 이해될 듯 하였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재림 성도로 주의 날을 준비하면서 하늘만 목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하였던 일이 터지자 변화되지 못한 저의 모습을 보고요 너무나 깊은 절망감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말씀처럼 마음은 원이지만 저의 나타나는 행동의 변화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절망적인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아니면 가능성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추악한 죄인의 손을 잡아 주소서 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주님을 뵙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장유교회 성도님들 한분도 빠짐이 없이 그날 예수님을 뵙게 되길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함께 오늘 주신 말씀처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함께 교독한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눅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 성도님들 우리 어떻게 이렇게 살 수가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 대어 주며, 옷을 빼앗는 자들에게 속옷까지 벗어 주며,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내것을 가지고 가는 자들에게 그것을 돌려달라 하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게 누가복음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 대어 주며,
옷을 빼앗는 자들에게 속옷까지 벗어 주며,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내 것을 가지고 가는 자들에게 그것을 돌려달라 하지 않는 모습,
그게 어디 사람의 모습이랄 수 있습니까?
바보도 뺨을 때리면 왜 때리느냐고 할 것인데 바보의 삶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기를 정말로 원하시는 분들만 오늘 귀를 여시고 듣게 되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 대어 주며,
옷을 빼앗는 자들에게 속옷까지 벗어 주며,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내 것을 가지고 가는 자들에게 그것을 돌려달라 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삶이 가능하다고 하면 좀 건방져 보이죠?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하면 할 수도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오늘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간절히 구하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바른 이해를 가지고 황금률을 이루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생각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을 잘 알고 계시는 한 가지를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그것이 죽어라입니다. 다른 말로는 포기하라입니다.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구절에는 바울의 승리의 경험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죽는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죽는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우리도 날마다 죽어야 한다면 무엇이 죽어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침례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다고 하죠?
그때 무엇이 죽었습니까?
이곳에는 대부분 침례를 받으신 분들인데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이 침례를 받으실 때 무엇이 죽었습니까?
우리 보통 말하기를 우리의 옛 생애를 물속에 장사 지냈다고 이해를 하고 그런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아온 그러한 우리 껍데기의 모습을 물속에 장사 지냈다는 말입니까?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롬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이 말씀 중에 본성이라는 용어를 우리는 봅니다.
어떤 것을 가지고 본성이라고 합니까?
본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마음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에베소에는 조금 다른 번역이 있습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곳에는 본질이라는 말이 쓰여 졌습니다.
두 성경이 다르게 번역이 되었지만 헬라어는 “휘소스” 라는 같은 말입니다.
타고난 성품을 가리키는 의미의 말이기도 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새로 태어난 성질이 본성을 거슬린다고 하고요.
에베소에서는 본질이 진노의 자녀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아담으로 인한 죽은 죄의 성향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거 가지고는 하늘에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곳에서는 죄 있는 성향을 가진 자들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본성이 죽고 본질이 죽어야 된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죽도록 사랑하시어서 죽으신 하나님의 피로 구속받으신 우리 성도님들이시여 여러분들의 본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자기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삶을 드렸다고 생각하였는데, 자기의 본성이 죽었다고 생각하였는데, 바울은 자기의 거듭나지 못한 옛 본성이 죽었다고 생각하였던 옛 본질이 되살아나려고 몸부림치기에 그것을 끊임없이 억제해야 함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을 합니다.
근데 그러한 부르짖음을 한 바울이 잘 되었을까요?
그는 로마서에서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무엇이 나를 사로잡아 간다고요?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에도 이렇게 성령의 법과 마찰되는 다른 법이 있습니까?
내 바음의 법과 싸워서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사로 잡아 간다는 그 다른 법은 무엇일까요?
삼국시대 한 청년이 술과 여자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런 삶을 청산하고 화랑도의 길을 가라고 일러주고 자기에게 와서 수련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날마다 기생집이 아닌 수련장으로 가서 무예를 닦고 학업에 열 중 합니다.
그날도 무예를 닦고 귀가하는 길에 눈을 감고 자기 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데 간드러지는 여자들의 웃음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말 고삐를 그냥 잡고만 있었더니 이 말이 늘 가던 장소인 기녀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 화랑은 그 자리에서 내려서 지금까지 자기를 태워 주었던 그 애마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장군되게 한 이야기입니다.
말이 왜 그곳으로 갔습니까?
늘 그곳을 갔었기 때문에 고삐를 풀어 놓으면 그곳으로 간다는 것을 안 말은 습관적으로 그곳에 갔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에게도 이런 습관이 있죠?
김유신이 그 말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다음에도 그곳으로 말이 갈 수가 있습니까?
습관이 되어 있어서 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죽이던지 늘 깨어서 말 고삐를 잡아 주어야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은 아닌데 내 지체 속에서 다른 습관의 법이 내 마음의 하나님을 향하는 법과 싸워서 나를 자꾸 죄 가운데로 이끌어가는 것을 어떻게 헤어 날 수 있을까요?
절망감 가운데서 사도는 이런 부르짖음을 합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이 절망적이었다면 우리도 절망적입니까?
그런 가운데서도 바울은 소망의 주님을 바라 봅니다.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의 육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누구는 하신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하신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신을 믿지 마시고 우릴 능하게 하실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 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뒤집어 쒸우시고 죄를 정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가 있었다면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길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자신이 죽고 주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삶을 통하여 이김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바울된 비결이 담긴 말씀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른 말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는 것은 내 안에 누가 사시는 것이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것만이 이김의 길이요 승리의 삶입니다.
증언의 말씀에 이런 귀한 말씀이 있어 올립니다.
초기 67 “우리가 고난을 통해 천국을 얻게 된다면 천국은 너무 값이 싸다. 우리는 매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나타내어야 하고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무엇을 하지 말고 무엇에 힘쓰라는 말씀처럼 보이나요? 선한 일을 위하여 노력하지 말고 죽기 위하여 힘쓰라는 말씀처럼 보입니까?
예 죽지 않으면 다시 사는 것도 불가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천국은 고난이나 선행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얻는 곳입니다.
주는대로 받는다는 귀한 진리가 죽음에도 응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는다면 예수께서는 새로운 생명을 주실 것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하신 하늘 백성들이시여 예수안에서 함께 죽고 예수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나게 되길 소망합니다.
증언의 말씀처럼 매사에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신에 대하여 죽으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만 나타나게 되고요.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릴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황금률의 천국 생활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더 많은 영혼들에게 받는 천국이 아니라 주는 천국을 소개하여 더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 오시는 그날 새 생명으로 태어난 더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우릴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황금률의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들 잘못된 습관과 사상 그리고 죄를 좋아하였던 우리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길 소원합니다. 우릴 죽여 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저희들에게 주시어 예수의 생명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눅 6: 27-31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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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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