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바가지 비빔밥
“윤재야. 이 바가지 비빔밥. 어떠냐? 할아버지가 가끔 즐겨 먹는 점심 겸 저녁이야. 군부 독재 힘든 시절, 바쁠 때 많이도 먹었지.
할머니도 고생 많이 하며 이 음식을 자주 해줬어. 할머니 표 순수한 맛이야. 요리사 솜씨가 아닌.”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대통령 할아버지와 영부인 할머니. 윤재. 그리고 비서실장. 꿈속인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넷이서 소박한 바가지 하나씩을 들고 맛있게들 먹고 있는 풍경. 아주 자연스러운 청와대 식탁이다. 거창한 대궐 수라상이 아니다. 세상에나. 꿈속, 꿈속 맞지?
청와대에 이런 진풍경도 있다니. 윤재도 처음엔 깜짝 놀랐다. 막상 바가지 비빔밥을 한 숟갈씩 떠서 먹다 보니. 어라~ 보리밥 알이 톡톡 씹혔다.
참기름도 구수하고. 시골 쌈 된장 맛도 그대로였다. 훈장 받고 나서 예까지 올 줄이야. 노벨 평화상, 브라질 작가 바다다니까 얘기.
한국 작가 곽경리 토지 이야기하다가. 대통령 할아버지의 특별 지시에 조촐한 밥상이 차려지고.
이건 전생에 시골 고향 집에서 할머니가 해주신 보리밥 비빔밥 딱 그 맛이었다. 내가 지금 전생으로 다시 와서 가난할 때, 그 맛을 즐기고 있다니.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김대운 대통령은 어떤 분이길래. 내가 무엇이길래. 이런 자리도 선뜻.
독재 정권에 항거해 불의를 타도하자고 외치던 그분에게. 이런 따뜻하고 시골스러운 숭늉 맛이 배어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동한다.
뜨거워지는 가슴은 못 숨기겠다. 어디 오래 못 갔다. 눈시울까지 붉어졌으니. 영부인 할머니에게 결국은 들키고 말았다.
“윤재야. 어디 불편한 거라도 있니? 바가지 비빔밥이 좀 입에 안 맞기라도 한지. 할머니가 괜히 걸리네. 다른 거로 바꿔 줄까?”
“아녜요. 할머니. ‘지는 옆도 못 봐유’ 하는 사람들, 그런 분들도 이 바가지 비빔밥 한번 먹어볼 수 있다면. 불쑥 그런 생각을 하니 목이 메서요.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가 직접 해주신 바가지 비빔밥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게 넘 맛이 좋아요.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냐 생각하다, 그만 그분들이 떠오르네요.”
영부인 할머니가 깜짝 놀라며 숟가락을 놓고 윤재에게 물었다.
“ ‘지는 옆도 못 봐유’ 하는 사람들. 혹시 앞 못 보는 소경인가. 아니면 양로원에 계시는 앞 못 보는 노인 분?
그런 사람까지 다 생각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너, 윤재는 대체 어떤 애길래. 이 할머니를 가슴 철렁하게 만드냐?”
윤재가 식탁 냅킨으로 눈가를 닦으며 영부인 할머니를 위로해 드렸다.
“할머니. 죄송해요. 맛있는 식사 자리에 제가 딴짓을 해서요. 얼마 전 칠갑산 근처에 자동차 주행 실험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이었어요.
앞에 가는 티쿠 미니 승용차가 설설 기며 가다 보니, 외통수 길이 계속 막혔어요. 한참 만에 갓길로 비켜서길래.
혹시 차에 고장 났나 싶어 저도 갓길로 차를 대고 확인차 가봤어요. 차 뒷 유리에 ‘죽겠지유?’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저런, 남들 힘들게 해놓고 놀리는 소리를 써 놓고 다녀? 누구 약 올리게?”
윤재 이야기를 듣다가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는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 배 비서실장도 씩씩거리듯 화난 표정이었다.
“ ‘죽겠지유?’ 글자 아래에 뭔 글자가 또 적혀있더라구요. 아, 글쎄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거에요. ‘지도 죽겠시유.’ ”
“하~하~하~”
“호~호~호~”
“흐~흐~흐~”
대통령 할아버지, 영부인 할머니, 배 비서실장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윤재는 함께 웃는 대신, 가파른 길로 접어든 다음 클라이맥스를 향해 악셀 페달을 힘껏 밟았다.
“혹시 운전사가 필요한 것 있나 싶어 제가 운전사 쪽 창 옆으로 가봤어요. 운전자는 운전대를 꼭 쥔 채 앞만 보고 있었어요. 초보 운전사였던 거예요.
창유리에 또 뭔가 쓰인 게 보이더라고요. 전 그 문구를 보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만 까무러치는 줄 알았어요.”
“윤재야. 뭐라 쓰여 있길래?”
영부인 할머니가 궁금하다는 듯이 윤재 입을 바라보며 채근했다.
“ ‘지는 옆도 못 봐유.’ ”
“투~투~ 투~”
가장 먼저 할머니 입안에서 밥알이 식탁 위로 튕겨 나갔다.
“우~하~하~하~“
할아버지도 호인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려 창문을 울렸다.
“크~큭~큭~”
배 비서실장도 배꼽이 빠질세라 배를 잡고 웃었다.
바가지 비빔밥 먹다가 갑자기 식당 안이 폭소, 웃음바다가 되었다.
영부인 할머니가 행주로 튕겨 나간 밥알을 닦아 모으면서도 연신 입이 벌어졌다. 대통령 할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임자. 그렇게 밥알 튕기는 임자 모습 보니. 내 속이 정말 후련하네. 청와대 와서 처음이지. 그렇게 파안대소하기는. 그래서 윤재를 임자에게도 소개해 준거야.
아까는 윤재가 날 보고 할아버지 하는 소리에 좀 거시기 하더니만. 지금은 윤재더러 할머니 하는 걸, 당연시하니 보기 좋네그려.”
윤재가 일어나, 할머니 할아버지께 다소곳이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께서 환하게 웃으시는 걸 보니, 제 가슴에 태양이 들어오는 듯해요. 너무 좋은 기운에 저도 뭉클했어요. 한 가지 제안 있는데요.
바가지 비빔밥, 여기서만 먹기 너무 아깝잖아요. 이 할머니 표 바가지 비빔밥 레시피 잘 개발해서 코리아 항공 기내식으로 하면,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을걸요.”
“우~와! 윤재가 할머니 맘을 어찌 저리도 잘 알까. 그래야겠네. 당신 대통령 마치고 청와대 나가면 나 외식산업 해야겠네. 여보. 괜찮아?”
“임자는. 대통령 부임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소리야? 섭섭하게 스리.”
“당신은. 뭔 말을 못 해요. 웃자고 한 조크를 저렇게 정색하고 다큐로 받아드리니. 원, 차~암~ 내.”
“크~크~크~”
윤재가 할머니의 멘트에 입을 막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할아버지가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했다.
웃고 먹고 즐기는 사이, 청와대 시간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물건을 챙겨 일어나 인사하는 윤재에게 영부인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언제든 할머니 표 바가지 비빔밥 먹고 싶으면 오거라. 윤재야.”
“고마워요. 할머니. 오늘 너무 맛있게 먹고 즐거웠어요. 지는 옆도 못봐유.”
대통령 할아버지도 윤재와 악수하며 등을 토닥여 주셨다.
“오늘 정말 실컷 웃었다. 윤재 네가 있어서. 윤재야. 우리도 바다다니까 한번 만들어 보자.”
청와대 건물 밖까지 배웅 나온 배 비서실장이 청와대 출입증 카드를 윤재 손에 쥐여 주었다.
“비서실장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윤재야. 개인적으로는 삼촌이라 불러. 자, 여기 삼촌 명함이야. 언제든 필요하면 전화해.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귀뜀도 해주고.”
윤재가 미리 대기하던 모범택시에 몸을 싣자,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 청와대를 뒤로하고 집으로 달렸다.
청와대에서 집까지. 윤재는 택시 안에서 주책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냥 흘렸다. 한참을 비우니, 속이 시원했다. 세상이 맑게 보였다.
택시 운전사가 룸미러로 뒤에 앉은 윤재를 보더니, 티슈를 꺼내 손에 전해주었다. 지는 옆도 못 봐유 하는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
운전하며 뒤도 보는 택시 운전사가 고마웠다. 윤재가 새로운 꿈을 하나 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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