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8일 회항 (지부티 출항 ~ 오만 살랄라)
오전 9시 정시 출항이다. 출항전의 점검을 마치니 15분 남았다. 해외안전지킴이센터, 청해부대 등에 출항을 보고한다. 항안을 돌며 세일러 들에게 나팔을 불어 인사한다. 그들도 나팔로 화답한다. 왈칵 눈물이 솟는다. 젠장, 김선장 너 나이 들었구만. 지부티 항을 벗어나 오만으로 항로를 잡으니 맞바람 13노트다. 파도는 1 미터 내외, 속도는 5.1노트지만, 펀칭 할 때마다 4.3노트로 떨어진다. 나비오닉스의 ETA 는 6~7일을 오르내린다. 늦어도 8일이네. 하지만 3/5 쯤 가면 바람이 바뀌니 7일이면 가능할 듯 싶다.
매번 항해 시작 때, 나는 신경쇠약증 환자가 된다. 엔진 음이나 선체에서 나는 소리를 확인하고 다닌다. 문제점의 전조가 나타나나 확인하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오링을 바꾼 기어박스를 본다. 약간이 오일이 배어 있는 것 같다. 오링과 뚜껑 부분은 만져도 오일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럼 다른데다. 기어박스를 엔진에 고정한 볼트들을 확인한다. 꿈쩍도 안한다. 그럼 어딘가 개스킷이 문제인가? 약간 배어나는 정도고 이 정도는 지난번 항해 때도 별 문제 없었다. 그러나 하루에 몇 번씩 확인하자. 오일이 부족하면 보충해 가며 가면 된다. 아내와 리나가 없으니 근심의 절반이 줄었다. 특히 리나가 바다에 떨어질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어제 전 선주 까를로가 우리 아내와 리나가 왜 돌아갔는지 물었다. 한국 해수부에서 한국 세일 보트의 아덴만 접근을 여전히 막고 있고, 어린이 동반 항해를 아동학대라고 한다니, they are crazy !!!!! 라고 답을 보낸다. 늘상 아이들과 항해하는 그들의 입장에선 they are crazy !!!!! 가 적확한 표현이다. 나는 더 답을 하지 못했다. 해수부의 공무원이 세일 요트와 항해의 기본 상식이 없는데, 도무지 설득할 길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엔 내 영어가 짧다.
지부티에서 제법 먼 거리인데도 인터넷이 된다. 리나와 아내가 인천공항에 잘 도착했다. 다행이다. 편안히 쉬고 든든히 먹기를 바란다. 리나 사진을 보고, 항해 중인 사진을 찍어 보내니 인터넷이 끊어진다.
오전 11시, 정면에서 세일 요트가 다가온다. 아덴만을 지나온 배다. 순풍에 돛 달고 오는 배다. 이제 1시간 30분이면 지부티 앵커리지에 들어가 달콤한 휴식을 취하겠지. 나는 771해리 남았다. 7일, 8일 왔다 갔다 한다. 속도는 4.4노트로 줄었다. 레이더를 켜고 잠시 눈을 좀 붙여야겠다. 이따 야간 항해를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오후 1시 10분. 펀칭 소리에 잠이 깼다. Rpm 1,600. 맞바람 14노트, 파도 1.2 미터, 선속 4.3노트다. ‘이건 아니지.’ 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세일 요트는 이렇게 항해 하는 게 아니다. 이런 바람과 파도를 클로스 홀드나, 빔 리치로 받고 가야 한다. 하지만 이번 코스를 그렇게 가자면, 4월 말까지 바람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럼 인도양에서 싸이클론이 기다릴 거다. 할 수 없이 기주로 바람을 거꾸로 밀고 가지만 정말로 이건 아니지! 다. 그나마 4.3 노트가 나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다운 받은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있다. 육상에서 생활할 때는 여간해서 손대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렇게 아덴만을 지나며 읽고 있다. 앞으로 6~7일 동안 내 삶은 진공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소설은 이미 과거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그가 소설을 쓴 시간이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설속의 죄악들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부활을 읽으며 나의 30대를 돌아본다. 생활 속의 죄악 중, 오버랩 되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지금 그 죄악에서 벗어나 바다에 있다. 신이 은총이다.
['카추샤는 나의 희생을 바라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려 든다. 그녀도 이겼고 나도 이긴 것이다. 그녀에게 내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믿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그녀는 부활하고 있다.' - 톨스토이 부활 중에서]
오후 2시 30분, 맞바람 17노트, 역파도 1.5미터, 펀칭으로 속도가 4.0~3.2노트를 오르내린다. 슬슬 메인 세일을 1/3 가량 펴고 태킹을 할까 고민해 본다. 진행 속도는 별 차이 없거나 손해 보겠지만, 펀칭에 의한 배 손상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4.3노트다. 만약 3.3노트 이하로 속도가 낮아지면 그때 태킹으로 지그재그 항해를 하기로 결정하고 잠시 지켜본다. 앞 선실 쪽의 해치를 닫아야 하겠다.
오후 3시 속도가 3.0 까지 내려갔다. 맞바람 17노트. 메인세일을 40% 펴고 태킹으로 지그재그 운항을 시작한다. 파도가 더 높아졌다. 2미터 가까이 된다. 선속 4.6노트, 펀칭이 있기는 하지만 정면 보다는 훨씬 낫다. 이대로 3 시간 씩 크로스 홀드 운항하기로 한다. 오후 6시에 태킹한다. 레이더 가드존에 파도가 잡혀 알람이 울린다. 안쪽의 가드 존을 끄고 6마일 밖의 가드 존만 켠다. 마르코가 핑거크로스를 여러 번 보낸 것은, 이런 맞바람 항해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세계일주 선장들은 절대 하지 않는 항해다. 그들은 기다린다. 나는 시간이 없다. 아내와 리나가 같이 오지 않은 것은 잘 한 결정이다.
오늘은 점심을 제대로 먹기는 글렀다. 호두 땅콩과 우유로 때우자. 아마 2~3일은 더 이렇게 대충 먹어야한다. 그러나 충분히 영양이 보충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스스로 제어불능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집세일도 작게 펴서 가운데로 고정해 오토 태킹처럼 해볼까 생각한다. 이런 강한 맞바람에선 실제로 생각만큼 효과 없을 때가 많지만, 펀칭을 비스듬하기 비켜 가기위해 여러 가지 고안을 해야 한다.
집세일을 30~40% 가량 편다. 속도가 6.0 노트로 확 올라간다. 배 안에서 제대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발자국 옮길 때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부상의 위험이 크다. 스턴으로 이동한 태양이 구름 속에 숨자, 더위가 숨은 쉴 수 있을 정도로 누그러진다. 스프레이 후드 위로 파도가 들이 친다. 선실해치와 스프레이 후드 창을 미리 닫은 것도 잘했다. 이 상태로 2시간 더 가자. 우현 콕핏으로 파도가 들이친다.
오후 5시. 출항 8시간이 지났다. 총 783해리에서 751해리다. 32해리 왔다. 평균 선속 4노트다. 얼마나 비효율적인 항해인가? 세계일주 선장들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항해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일주일을 가야 하다니... 갑자기 큰 파도가 콕핏을 덮쳤다. 나도 파도를 뒤집어썼다. 디젤통들을 확인한다. 무사하다. 근데 선실에 물이 흐른다. 들어가 보니, 챠트 테이블 쪽 해치를 닫았는데, 4개의 자물쇠 중 한 개가 안 잠겼다. 그 틈으로 파도가 들어왔다. 대단하다. 나머지 한 개의 자물쇠를 잠그고, 챠트 테이블과 바닥이 물을 닦아낸다. 그만하길 다행이다.
집세일까지 편, 크로스 홀드 주행 실험은 실패다. 너무 크게 지그재그를 그려야 한다. 거리 손해가 너무 크다. 윤태근 선장님 조언이 맞았다. 어차피 엔진도 쓸 건데. 메인세일만 축범해서 펴면, 각도를 너무 크게 잡지 않아도 된다. 웨이포인트 라인에서 25~30도만 지그재그 하면 된다. 거리를 크게 손해 보지 않으면서, 속도도 5노트 언저리가 나온다. 베테랑 경험자 말에 틀린 건 없다. 그래도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이젠 이렇게만 가자.
잠깐, 여기서 메인세일을 조금 더 펴면 어떨까? 메인세일을 60%까지 편다. 속도가 0.5노트 올라간다. 그러나 강풍에 세일이 터질 수도 있으니 이렇게만 실험해 보자. 애초에 강한 역풍이라 여유 있게 잡은 항해다. 무리하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윤태근 선장님 충고 감사합니다. 파도 때문에 선실 바닥의 생수병들이 굴러다닌다.
오후 11시 10분. 역풍 16노트, Rpm 1,600 역 파도 1.5미터. 선속 3.8 노트. 계속 지그재그로 가자니 기가 찰 정도로 느리다. 이러다 일주일 내내 갔는데도 중간까지 밖에 못가면 어쩌나? 항해 중 기름도 다 떨어지면 어쩌나? 범주로 회항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왼쪽은 예맨, 오른 쪽은 소말리아. 중간 기항지도 없다. 혹시 비상시에 두 나라 중 한 나라로 피항하면 어떻게 될까? 납치하고 총살일까? 막연한 공포가 엄습한다. 상상이 안 간다. 두 나라는 어쩌다 전 세계를 상대로 노략질을 하게 된 걸까? 납득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세상이다. 남은 거리 730해리. 53마일 왔다. 평균 3.9 노트로 진행 중이다. 제네시스는 거북이처럼 꾸준히 가고 있다.
오전 5시 20분. 판단을 해야 한다. 남은 거리 721해리. 하루 동안 62해리 왔다. 계산대로 라면 6일이지만. 실제로는 13일 이상을 더 가야 한다. 오늘, 토, 일도 강풍이지만 월, 화, 수는 더 바람이 세다. 이 상태로 갈 수 있을까? 세일을 접고 엔진으로 가면 2노트가 채 안 나오는 상황이고, 계속 지그재그 운항이지만, 거의 제자리걸음으로 답이 없는 상황. 바람은 계속 더 강해진다. 지부티로 피항해서 바람 방향이 바뀔 때를 기다려야 하나? 어둠 속에서 두려움이 나를 응시한다. 이탈리아에서부터 홍해 항해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두려움이다.
5시 37분. 회항을 결정한다. 지금 상황이라면 살랄라까지 못가서, 연료도 떨어지고 세일로 항해 할 상황이 오는데, 결국 아덴만 한가운데서 2주나 왔다갔다 하다가 표류할 것이 예상된다. 일단 지부티로 돌아가자, 갔다가 바람 바뀌는 것을 보고 출항하자. 결정하니 마음 홀가분하다.
회항하니, 속도 6.3노트 뒷바람 12노트다. 바다는 갑자기 순한 양이 되었다. 방금까지 포효하던 그 바다가 맞나? 낯설다. 회항직전. 난파라도 시킬 듯 거칠던 바다가 이렇게 바뀌다니. 바다는 내게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던가? 내가 바다에 순응하니 모든 것이 평온하다. 4월 중에 인도양을 건너리라던 내 계획도 수정이다. 사이클론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건가? 마음이 착잡하다. 앵커리지나 폰툰에서 몇 주일이고 때를 기다리던, 세계일주 항해 인들의 상황이 너무나 이해된다. 나도 지부티에서 그랬어야만 했다. 이렇게 직접 겪고 또 하나 배운다.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다.
아내가 리나와 함께 돌아간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낮이면 파리가 들끓고, 밤이면 모기떼가 달려든다. 모기 기피제를 바르면 모기가 확실히 덜 덤벼든다. 하지만 아내는 모기 기피제를 싫어한다. 그래서 밤마다 모기와 전쟁을 치렀다. 지부티 시내로 가도 흙먼지 자욱한 아프리카다. 중간 크기의 쇼핑 몰 하나가 쉴 곳의 전부다. 거긴 SIM 카드 인터넷이 잘 안 터진다. 결국 배안에서 일주일, 열흘을 바람 바뀌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민한 여자 몸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젠 아무데고 막 기어 올라가는 리나를 하루 종일 살펴야 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잠깐 한 눈 팔면 콕핏이고 갑판이고 막 올라간다. 물론 세이프티 라인에 그물도 쳐 있지만, 위험천만 할 수 있다.
지부티로 회항하는 길은 67.7 해리. 오후 4시 8분 도착이다. 21시간 온 길을 10시간이면 돌아간다. 기가 찰 노릇이다. 돌아가면 입항신고 다시 하고, 비자도 다시 내야 하나? 이번엔 에이전트 쓰지 말고 내가 직접 하자. 한번 해봤으니 알겠다. 에이전트가 일해 주는 것에 비해 비용이 터무니없다. 지금 순풍에 돛 달고 지부티로 회항중이다. 제길!
4월 9일 오전 7시 30분. 도대체 배가 고프지 않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마구 흔들리는 선실로 들어가 간신히 계란 프라이를 하고, 찬밥에 고추장, 참기름 몇 방울 넣어 비빈다. 밥을 먹으려다 갑판을 보니 기름통 두 개가 쓰러져 있다. 어제 밤 파도에 뒤집어 진 모양이다. 얼른 가서 기름통을 세우고 줄을 고쳐 묶는다. 한통은 반이 샜다. 이상하게 유럽과 지중해의 공산품들은 거의 다 이 모양이다. 싸구려다. 안에 마개가 있는데도 샜다. 이번 역풍 항해는 여러모로 교훈이 된다. 계산과 준비로 확신에 찼던 나 자신의 오만에 대한 죽비.
대충 정리를 마치고 밥한 수저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무슨 맛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종이 씹는 것 같은 맛이다. 날치들이 어지럽게 나른다. 그때 배를 번쩍 들어 올리며 커다란 파도가 지나간다. 거대한 파도의 뒷모습을 보니 정신이 확! 든다.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저 파도를 뚫고 펀칭을 계속하며 21시간을 항해 했다고? 급격히 우울해 진다. 그제 떠난 것은 정말 다행이지만, 아내와 리나를 보낸 곳, 파리와 모기, 더위가 기다리는 아프라키 지부티로 돌아가 언제까지 바람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우리 딸 리나가 보고 싶다. 곁에 있을 땐, 걱정만 되더니, 이렇게 그리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볼 언저리가 뜨듯해 진다. 나는 세계일주 항해를 원했고, 고독이 그 댓가다. 이러다간 폭풍이 아니라, 우울이 먼저 나를 죽이겠다. 힘을 내자. 클라라 주미 강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만경창파 관람 중.
오전 11시, 벌써 절반 가까이 지부티로 왔다. 살랄라로 갈 떄와 비교하면 너무나 수월한 길이다. 홍해에서 이런 순풍을 받아 지부티로 온 바람에 지중해에서 반나절 동안 고생했던 역풍의 기억을 잠시 잊었나 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이번 회항은 나 스스로 참 심했다. 어리석었다. 반성한다.
오후 12시 40분. 뒷바람 11노트 Rpm 1,300. 선속은 줄곧 6.6 노트를 유지한다. 정말 평화로운 항해다. 거꾸로 돌아가는 것만 아니라면. 와중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완독했다. 톨스토이와 비슷한 종교적 체험을 한 것은 신기하다. 지부티로 돌아가면 더 많은 고전을 읽어봐야겠다. 적어도 일주일은 지부티에 있어야 할테니.
4시 45분 지부티 엥커리지 도착, 투묘. 아산을 다시 부르기 뭐해서 내가 직접 포트 오피스 가서 재입국 서류 처리 하려니 아산이 무료로 도와준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