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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외선교 개척과 내외기반 강화
1) 최초의 일본선교사 파송
참아버님께서는 7ㆍ4사건 직후 1956년 충남 계룡산 갑사 휴양 기도 중, 일본이 아시아에서 다시 문제될 때가 온다는 것을 예감하셨다. 소련과 중공이 북한을 후원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 난국을 타개할 하나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일본을 뚫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셨다. 만일 일본이 용공권에 서면 반드시 한국이 위협받게 된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한국정부가 무고(誣告)하게 참아버님을 투옥했던 희생을 조건 삼아 밀항(密航)선교(宣敎)를 계획하시고 일본과 교섭 준비를 했다.(499)
과거 사탄 편 해와로서 원수나라였던 일본을 영국 대신 하늘 편 해와로 택정(擇定)하시고 원수의 땅을 누구보다도 사랑함으로써 아시아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 수 있는 상대국가로 세우려 하셨다. 뜻이 세계적인 것이라면 일본이나 세계 국가에도 책임이 있었다. 그렇기에 수난 길을 거치며 어려운 여건에 있더라도 선교사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1950년대 참아버님의 일본선교 개척섭리는 몇 차례 시도됐으나, 최초 일본에 정착기반을 마련한 선교사는 최봉춘(崔奉春) 씨였다. 본래 호적상 이름은 최상익(崔翔翊)이다. 27, 28세경 선친이 봉춘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줬는데 쓰지 않았다가, 원리를 듣고 난 후 그 이름이 뜻이 있음을 깨닫고 개명했다고 한다. 일본 선교차 도일(渡日)해 지은 이름은 니시가와 마사루(西川 勝)였다.(499)
최 선교사는 1925년 음력 4월 7일에 부산시 동래군 사하면 구신평동에서 부친 최봉윤 씨와 모친 홍남이 씨 사이 3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양친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나니와(難波)에서 살았으며, 해방 직전에 귀국했다.(500)
그 후 국방부 문관통역장교(文官通譯將校)로도 근무했고, 한국동란 당시 미군 2시단 통역관으로 복무하던 중 부상을 당해 제대(除隊)했다. 그래서 1952년경 다시 일본에 밀항(密航)해 도쿄 성결교신학교에 입학했으나 발각(發覺)된 후 강제(强制) 송환(送還)됐다. 귀국 후엔 임마누엘 수도원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 무렵 미국문화원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러 왕래하다가 거기 함께 근무하는 송도빈 장로의 권유(勸諭)에 의해 입교했다.(500)
입교일자는 1957년 4월 10일이었다. 5월에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원리강의를 들었다. 첫 번 강현실 전도사의 강의와 뒤이어 유효원 협회장의 강의에 감명을 받았고 의문점이 술술 풀려 뜻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헌신했다. 그 무렵 어느 날 지방순회에서 귀환하신 참아버님께서는 33, 34세 해당자는 손들어보라고 하셨다. 그때 마침 손을 든 최 선교사를 보시고 예수님의 재출발연령이니 장차 세계선교 사명을 해야 한다고 하시며 공부와 훈련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셨다.(501)
최봉춘 선교사 자신도 원리를 듣고 나서 일본전도 필요성을 절감하고 선교를 희망했었는데 그동안 때가 이르지 못했었다. 그랬다가 참아버님께 간곡히 상신하여 마침내 허락을 얻게 됐다. 1958년 5월 참아버님 부산순회에 동반해 부산교회 2층에서 두세 차례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출발을 위한 4일 금식을 결행했다. 26일에 참아버님께서 유 협회장 전에 써주신 서한(書翰)을 들고 함께 모시고 기차 편으로 대구까지 왔다. 거기에서 29일에 대전교회에서 뵙기로 기약하고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501)
청파동 전본부교회 2층에서 유 협회장에게 참아버님의 서한을 전달하고 선교사로서의 신앙요건과 자질을 점검받았다. 유 협회장은 최 선교사의 확고한 신앙기준을 확인한 후 참아버님을 뵙도록 하라면서 보고서신을 써줬다.(501)
최봉춘 선교사는 내심으로는 많은 식구들의 환송 가운데 출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심한 보안가 주의가 요구되는 사안이었기에 유 협회장과만 은밀히 논의했다. 송도빈, 정경선 씨와 삼위기대 결연을 약속하고, 정석천, 송기주 씨 등 소수식구의 격려 아래 5월 29일 아침 서울역을 떠나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때 최용석 씨가 자원해서 동행했다. 그날 예정보다 늦게 대전에 도착했는데, 참아버님께서는 이미 갑사에 가 계셨다. 그래서 최용석 씨와 함께 갑사로 떠나 밤늦게 도착했고, 유 협회장의 보고서한을 올려드렸다.(502)
다음날 30일 새벽 기상 즉시 갑사 뒤뜰 소나무 숲에서 참아버님을 독대(獨對)하고 두 시간 가까이 말씀을 나눴다. 그때 참아버님께서는 고생이 많이 될 거라며 몇 번이나 염려의 반문(反問)을 하셨다. 그러나 문제없다고 확신있는 대답을 해 올렸다. 그러자 참아버님께서는 최종 결정을 해주시면서, “법치국가에서 위법인 줄 알지만 국운과 천운은 인간의 법을 초월해 찾아온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아는 사람이 그 길을 열어줘야 한다. 정의의 신념과 행동은 역사가 보증할 것이다.”며 공식적 하명(下命)을 하셨다. 이때 최 선교사에게 내린 두 가지 밀지(密旨)는 일본선교 개척과 당시 일본밀항 후 고난의 길을 걷고 있던 희진님 모자의 보위(保衛)에 있었다.(502)
최 선교사는 축도를 요청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간 실패한 전임자(前任者)들을 염두에 두시고 사명을 못하면 조건에 걸리므로 그냥 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최 선교사는 간청을 거듭해 결국 축도를 받을 수 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일본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밤새워 정성들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했는데, 참아버님께서는 당시 식사자리에는 늘 계시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 후에 참아버님께 요청을 올려 최용석 씨 촬영으로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기엔 일찍이 최 씨 집안으로 인해 좌절된 섭리역사를 재탕감하기 위해 다시금 최씨 인물들을 내세우신 배후의 깊은 참사랑의 뜻이 개재돼 있었다.(503)
참아버님께서는 그토록 궁핍한 형편에 선교자금을 빚내어 보내셨다. 누구보다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로지 일본을 구하시기 위해서였다. 최 선교사는 아침나절 푸르른 갑사 숲길의 싱그러운 정취와 따사롭고 화창한 일기에 설레고 벅찬 감회(感懷)를 안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부름받은 몸」이라는 성가를 부르며 굳은 결의와 희망의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503)
2) 일본 선교개척과 정착
최봉춘 선교사는 6월과 7월, 두 달간 승선을 위해 여러모로 모색하면서 고생을 했다. 그러나 밀약한 선장 등의 약속파기(約束破棄)와 발각(發覺) 등으로 두 번이나 실패했다. 출발이 지연되자 중단하라는 전갈(傳喝)이 있었다. 참으로 죽고만 싶은 절망의 심경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연장(延長)을 간청(懇請)드리고 “헤엄을 쳐서라도 가야 한다.”는 각오로 재도전했다. 그리하여 1958년 7월 15일 밤, 드디어 밀항선에 올랐다. 16일에 다른 승객들의 승선을 위해 정박한 후, 17일 밤 1시에 부산항을 출항했다.(504)
최 선교사는 출발 당시 경위로부터 일본선교 개척의 역사를 그 일기에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5월 부산순회 중 일자기록 착오(錯誤)와 승선(乘船)에 성공한 7월의 행적을 6월로 한 달 앞당겨 적은 착오는 있었다. 최 선교사는 오늘에 이르러, 그 부분은 나중 일본 도착 후 수용소 복역(服役) 때 한꺼번에 썼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504)
아무튼 그때는 아직 한일수교(韓日修交)가 되지 않아 일본 왕래의 정식통로가 열리지 않은 때였다. 따라서 최 선교사는 오직 사명감과 열정만을 품고 밀항해서 일본에 정착하기까지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을 감내(堪耐)해야 했다.
7월 17일 오후 9시,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北九州市) 고쿠라(小倉)항에 입항했다. 그러나 상륙허가를 얻지 못해 18일 오후 야마구치현 이와쿠니(岩國)를 향해 떠났다. 21일에 히로시마에 기착했으나 역시 허가를 얻지 못해 구례(吳)로 항행하던 중 그날 3시 반쯤에 구례 해상보안부 경비정에 발견돼 연행(連行)됐다.
22, 23일 취조(取調)를 받다가 저녁때 결국 밀입국(密入國) 혐의로 정식 유치(留置)됐다. 24일에 끌려나와 창고 방에서 매를 맞고 머리를 잡혀 땅에다 내리찧기는 곤혹을 치렀다. 25일 아침 검찰청에 송치되고 정식 입건돼 저녁에 요시우리(吉浦) 구치소로 이송됐다. 2방 2사 수인번호 60번, 권순남이라는 가명을 썼다. 29일에 지문조회로 본명이 밝혀졌다. 구류(拘留) 만기(滿期)로 석방(釋放)을 기대했으나, 선장 등 주요선원 수명과 함께 기소처분(起訴處分)을 받았다. 10월 14일까지 여기서 지냈다.(504)
원리책 등 소지품도 다 빼앗겨 단벌이었고 돈도 없었다. 성서와 영어를 공부하면서 하루 세 차례 기도하고 주일엔 홀로 예배시간을 새겼다. 영(零)의 자리에서 재출발한다고 다짐하고, 변치 않고 굴복하지 않을 것을 기도했다. 본국에 편지를 보낸 뒤 삼위기대 식구 전경선, 김성일, 송도빈 씨 등으로부터 보내오는 편지와 소포(小包)를 통해 큰 힘을 얻었다. 특히 송도빈 씨는 아들 대학을 휴학(休學)시키고 등록금을 송금하기도 했다. 최 선교사는 금식기도와 원리전도 등으로 애써 극복해 나갔다.(505)
9월 4일 첫 공판, 18일 제2회 공판에서 징역 6개월이 구형됐다. 세 차례 연기된 끝에 맞은 10월 9일 선고공판에서 예상했던 무죄석방을 뒤엎고 선장, 사무장과 함께 징역 6개월 실형(實刑) 언도(言渡)를 받았다. 12일 수형 확정으로 2층 33방 84번으로 들어갔다. 10월 14일에 구레(吳) 형무소에서 요시지마(吉島) 형무소로 이송됐다. 11월 14일에 다시 야마구치 형무소로 옮겨 일일천추(一日千秋)의 한 서린 백일 기간을 지냈다.(505)
본국의 소식을 통해 1959년 2월 13일 참아버님 탄신일의 금식정성에도 어렵사리 동참하며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르는 희망 가운데 하루하루를 보냈다. 2월 17일, 130일간의 형기(刑期)만료(滿了)로 다음날인 18일 다시 수용소(收容所)에 억류(抑留)됐다. 송환(送還)길에서 의도한 열차(列車)탈주(脫走)도 여의치 않았다.(506)
어떻게 하든 일본에 남아 당초 목적을 이루고 말겠다는 일념에서 방법을 강구(講究)했다. 수용소 억류 중 3월 5일엔 최후수단으로 금식을 결행(決行)해 열병(熱病)을 앓게 됐다. 7일에 양쪽 심장과 폐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이 나와 6개월 요양을 지시받고 일본인 목사들의 보증(保證) 하에 후생병원과 키노시타 병원에 입원했다. 16일에 우선 3개월 요양기한으로 광풍원 요양소로 옮겨졌다.
요양소 정양 중에는 『원리해설』을 번역하며 쉬지 않고 전도를 했다. 그러면서 도쿄행 탈출을 위해 본국에 요청해 때마침 3만원 가까운 돈이 보내져 왔다. 그리하여 그 무렵 친분을 맺은 일본인 우에노 씨의 도움을 받아 4월 중순 어느 날 끝내 탈출에 성공했다. 시모노세키 다음역인 아사(厚狹)역에서 도쿄행 급행열차(急行列車)를 탔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506)
열차는 밤 내내 달려 이튿날 아침 도쿄에 가까운 아다미(熱海)에 도착했다. 정차시간에 건너편에 있는 신주쿠(新宿)행 열차에 환승해 도쿄에 이르렀다. 일찍이 도쿄를 떠난 지 7년 만의 재입성(再入城), 그것도 천적인 밀명(密命)을 띠고 들어오는 발걸음이었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불안으로 착잡(錯雜)한 감회(感懷)를 안고 역(驛)을 빠져 나왔다. 이런 역경의 과정을 헤쳐 나오는 중에 이미 희진님 모자(母子)는 귀국했던 것이기에 서로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506)
최 선교사는 도쿄 도착 후 지인(知人)들을 찾아 뜻을 전하고 일도 하면서 수개월 유랑(流浪) 전도 행로(行路)의 고초(苦楚)를 겪어냈다. 그러던 중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동경교회’ 이름으로 전단지를 돌리며 전도하면서 하나 둘 새 식구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9년 10월 2일 금요일 오후 7시 15분 신주쿠구 도쓰카초 나초메 85번지, 오늘의 니시와세다(西早稻田) 니초메(二丁目) 18-23에 위치한 유케이사(雄鷄舍) 시계포 2층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최 선교사, 시미즈 요시오, 스다 도쿠, 다무라 요시코 씨 등 4명이 모인 이 예배로써 일본 협회가 발족됐던 것이다. 그곳은 공교롭게도 참아버님께서 일본 유학시절에 하숙하신 미쓰하시 씨 집에서 도보로 5분 거리였다.(507)
12월에는 마스다 마사루 씨가 입교했다. 그리고 이듬해 1960년 4월경에 집회소를 중앙선 오구보(大久保)역 근처인 신주쿠구 햐쿠닌초(百人町) 산초메(三井目)로 옮겼다. 최 선교사는 통화사(統和社-출판사) 사무실을 빌려 인쇄업을 경영하면서 전도했다. 그달에 한국인 부인 조정도(曺正道), 일본명 마쓰모토 미치꼬 여사가 전도돼 확고한 최초 결실을 얻었다. 이로써 일본선교 기초가 확립됐고 활동기반이 잡혀지게 됐던 것이다.(507)
3) 명산대찰(名山大刹) 순례와 지방교회 부흥회
이 무렵 참아버님께서는 1958년 7월 7일 최초 전용지프 ‘서울 자 747’을 구입하셨다. 이날부터 31일까지 재종제(再從弟-6촌) 문성균 씨 운전으로 송도욱 장로, 유효민 씨 등을 대동해 시승(試乘) 순례(巡禮)를 하셨다. 김인철 씨도 부산까지 일주일간 수행하다가 직장관계로 돌아왔다고 한다.
먼저 종제인 문용선 씨 3형제가 운영하는 아산 인주의 토기공장(土器工場)을 들러 며칠 유(留)하신 다음 공주 갑사에 들러 며칠을 머무셨다. 이때 밀항에 난관을 겪고 있는 최봉춘 선교사에게 다시 밀지(密旨)를 내리시고 다짐을 하셨던 것이다.
그 후 해인사-경주-설굴암-해운대를 거쳐 배편으로 제주도로 건너가셨다. 차량 한 대를 세내어 제주도를 일주하신 다음 한라산을 등반하셨다. 갑사를 떠난 후론 제주도에 와서야 처음 밥 구경을 했다 할 만큼 힘겨운 강행군 여정이었다. 제주를 떠나 다시 목포-부산-대구-전주-무주-대전 등지를 거쳐 귀환하셨다.(508)
특히 충무(통영)에 오셨을 때는 미륵불이 환생하는 곳이라는 전설이 담긴 미륵산 미륵사에서 며칠 머무르시다가 진주로 가셨다고도 한다.
당시 참아버님의 전국 답사 행적이 모두 그랬듯이 이번 순례노정 역시 단순한 유람 관광길이 아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이 산천을 찾아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찾아주는 사람은 역사를 대표해 내가 처음 될 것이다.”고 하시면서 눈물어린 축복의 기도를 많이 하셨다. 이렇듯 역사 이래 처음 오신 참된 심정의 주인으로서 한국강산 명산대찰(名山大刹)을 사랑의 눈물로 축복하시는 정성의 발자취였던 것이다. 그런 한반도의 정기와 운세를 몰아 안고 섬나라 일본 상징의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 한라산에 오르신 것이다.(509)
한편 1957년 초 최봉춘 씨의 중개로 인천의 제빙공장 인화실업과 부평의 인광중학교를 협회에서 위탁경영(委託經營)하게 됐었다. 인화실업은 최봉춘 씨의 친척되는 서(徐) 모 사장이 기업주였고 최 씨도 상무로 일했는데 당시 경영실패로 휴업상태였다. 이것을 봄부터 인수받아 정석천(사장), 유효민(전무), 유효영(공장장) 씨를 위시해 홍순원(경리), 나임렬, 백구섭, 김동원, 이덕윤, 최상갑, 이원오, 윤삼성, 김정순 씨(이상 공장작업, 기타잡무) 등이 동역했다. 그리하여 천신만고(千辛萬苦) 피나는 노력으로 연말에 공장이 부활되고 다소의 제품 생산이 시작돼 희망의 빛이 보였다.(509~10)
이렇듯 외관상 크게 수지가 맞는 것으로 보이자 7월 하순 원기업주 쪽에서 계약사항도 무시한 채 폭력조직을 동원해 강제 철거압력을 행사해 온 것이다. 이후 교회 측에서도 맞서 충돌해 부상자가 생기고 경찰이 개입하는 등 수개월간 밀고 당기는 분규가 계속됐다. 그런 가운데 상호 만신창이가 되도록 타격을 입자 결국 교회 측에서는 양도(讓渡) 철수(撤收)하고 말았다.(510)
그리고 서 사장이 재단이사장으로 시작된 인광중학교 역시 재단의 허약(虛弱)으로 인해 명맥유지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에 교회 측의 전담운영체제가 시작되고 5월에는 교명을 부평중학교로 바꾸고 교장도 이대위 씨로 교체 발령해 열성 육성을 다한 나머지 가까스로 운영이 궤도에 올랐다. 그런데 그 모체인 인화실업 분규로 인해 그 해를 못 넘겨 손을 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510)
이때 인화실업에서 봉사하던 청년식구들은 인천시 도화동 75번지 소재 안료(顔料) 공장과 대지를 매입해 양송이버섯 재배와 양계(養鷄)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인천 주안공장을 세워 공기총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511)
11월 11일에 참아버님께서는 이달부터 금후 21~22개월(1960년 7,8월까지)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1월 14일부터 12월 11일까지 지방부흥회 독려(督勵) 차 지방교회를 순회하셨다. 이때 통일교회사상(敎會史上) 첫 대규모 심령부흥회가 부산, 대구, 대전, 군산, 서울 등 9곳에서 실시됐다. 내외적으로 나타난 부흥회의 규모와 내용은 그 의의에 상응하다 할 만큼 가히 도시와 도시를 뒤흔들었고 잠자는 심령들을 깨우쳐 주기에 충분했다. 매번 거의 라디오방송, 가두 마이크 선전, 현수막 부착, 포스터 첨부, 전도지 배포, 신문 광고 등으로 이를 홍보했고, 4백 개의 기성교회에 일일이 안내장을 발송했다.(512)
11월 21일부터 27일까지 1주간은 부산 영도의 부산교회에서 강경렬, 김희옥 씨 보조와 최용석, 이진태 씨 강의로 열렸다. 11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8일간은 대구교회에서 김종신, 강경렬 씨 보조와 최용석 씨 강의로 열렸다. 12월 8일부터 14일까지 1주간은 대전교회에서 김우안, 김경순 씨 보조와 안창성, 최용석 씨 강의로 열렸다. 11월 11일부터 17일까지 1주간은 군산 월명동의 군산교회에서 강경렬, 김희옥, 최윤화 씨 보조와 김순겸, 이상헌 씨 강의로 열렸다.(512)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은 서울 화신백화점 뒤의 시천교당(侍天敎堂)을 따로 얻어 유효원, 최용석 씨 열강으로 대대적인 대부흥회를 개최했다. 정계, 학계, 종교계 주요지도자를 위시해 연인원 1천 245명의 신참자가 참석했다. 반대자들에 의해 강의가 중단되는 시련도 있었지만 더욱 은혜로운 집회가 이뤄졌다. 그 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평택교회(강사 이요한), 원주교회(강사 최용석), 전주교회(강사 안창성), 무주교회(강사 홍종복)에서도 각각 심령대부흥회를 개최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513)
12월에 김상철 씨가 성가 「성화용사의 노래」를 지었다. 특히 한국과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연결성이 강조돼 있는 힘찬 노래이다. 1958년 연말 현재 전국교회 수는 59개, 교회인도자 수는 54명에 달해 있었다. 도별 교회 수는 중앙의 서울교회를 위시해, 경기도 20개, 강원도 4개, 충청북도 6개, 충청남도 6개, 전라북도 8개, 전라남도 6개, 경상북도 3개, 경상남도 5개 등이었다. 1950년대 후반기 입교한 주요인물은 1955년 5월경 수난기에 인연 맺기 시작한 최용석 씨, 7ㆍ4사건 보도를 통해 자원 입교한 정석천ㆍ정수원 씨 부자가 있고, 청파동 전본부교회으로 이전한 후 1955년 말 유종영 씨, 1956년도에는 한인수, 이정옥, 이재석, 최봉춘, 이상헌, 장영창, 장덕희 씨 등이 들어왔다. 이어 1957년에는 문승룡, 홍성표, 박보희, 한상국 씨, 1958년도에는 문성균, 한상길, 곽정환 씨 등이 들어왔다.(514)
4) 미국 개척선교사 파송
1960년은 하나님과 섭리역사가 고대하고 그 앞장에 서신 참아버님께서 몹시도 기다려 오신 대출발의 해였고, 그 전년도인 1959년은 일대 전환기가 다가오기 직전 해이다. 내적으로 원리전도의 가능성을 실감하고 외적으로 각 분야의 활동이 일제히 전개된 활기찬 해이다.(515)
1월 3일 예수님 성탄일 새벽 3시 반부터 참아버님의 눈물겨운 설교가 있은 후 떡을 나눴다. 오후 3시 반경 모두 여의도 비행장으로 나가 최초의 미국선교사로 파송되는 김영운 (1915~1989)씨를 환송했다. 1954년 말 입교한 후 이듬해 3월 이단 신앙을 이유로 퇴직을 당하고 있다가 마침내 새로운 섭리적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515)
그 후 9월 18일엔 김상철(1915~) 씨를 뒤이어 미국에 파송하셨다. 김 선교사는 1954년 협회 창립에 참여했고, 8월에 유엔 연구생으로 영국 웨일스대학교 등에서 1년 이상씩 연구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신령집단을 찾거나 국제사도교회 연차대회 등을 방문하는 등 말씀을 전하고 교단 간의 정보교환을 하기도 했다. 이런 예비적 선교경험을 터로 해 이날 오후 10시 여의도비행장에서 참아버님을 위시한 식구들의 환송 가운데 본격적 선교활동을 목표로 미국으로 출발했던 것이다.(516)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섭리적으로 실책한 미국을 하늘 편 아벨 나라로 재택정하시고, 누구도 협조하지 않는 여건에서 미래섭리를 준비하셨다. 가장 심한 핍박 가운데서도 참아버님의 기도와 관심은 한국을 위한 것보다, 일본과 미국에서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당시 환경으로서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시도였지만, 미국에 원리의 씨를 뿌리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시고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거대한 미국을 빨리 수습해 세워 배수진(背水陣)을 치지 않으면 한국의 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당 시절에 참아버님을 투옥(投獄)한 사실을 조건삼아 반대하던 장관들을 내세워 여권을 발급받아 선교사를 파송하셨다.(516)
김영운 선교사 역시 선교비를 받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또 아직 선교활동만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표면적 형편과 실제적 과업은 학업에 있었다. 1월 4일 미국에 착륙한 김 선교사는 오리건(西北部 지역) 주 유진시에 있는 오리건대학교에 연구생으로 취학했다. 하늘의 밀사와 같은 처지였다. 연령으로나 과거 경력으로나 새삼스레 학생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지닌 섭리적인 대업을 수행하기 위해 우선은 당면과업(當面課業)에 열중해야 했던 것이다.(517)
학비나 체류비가 마련된 것이 아니었기에 정확하게는 고학생 선교사였다. 학업과 동시에 선교기초자료 구성을 위해 틈틈이 미국과 미국에 분포된 각 종교의 실태를 조사 연구해야 했다. 7년 전 캐나다 유학시절 입던 양복들을 챙겨 입고 약한 몸을 이끌고 남의 가정부(家政婦) 일을 맡아 했다. 매일같이 그릇을 닦고 빨래를 하고 다리미질을 하고 탁아 일까지 했다. 그래서 침식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전도는 토요일, 일요일에 할 수 있었다. 뜻이 아니라면 일류대학 교수 자리를 내놓고 어찌 자진(自進)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초창기의 선교는 모두 이렇게 숭고한 헌신의 기록으로 점철(點綴)됐던 것이다.(517)
5월에 70개 기독교잡지에 원리소개 글을 투고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새진리와 영적 체험을 갈구하는 개인들을 통해 소집회를 찾아 원리를 전했다. 소클럽, 소교회들과도 접촉돼 원리강의를 했다. 이렇게 얻어진 식구들을 데리고 정기집회를 하면서 개인지도와 원리 무장을 서서히 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처음 입교한 식구들이 도리스 월더, 폴린 필립, 아일린 웰치 부부, 패티와 게일린 펌프리, 조지 노튼 등이었다.(517)
김상철 선교사 역시 침례교신학교 신학생 자격으로 도미했다. 이후 1972년까지 미국 서부 7개주를 담당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던 중 1962년 신학교 졸업을 2주간 앞두고 통일교회 선교사 신분이 노출돼 퇴학처분을 당할 뻔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민국(移民局)으로 강제송환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결국 자진퇴학(自進退學)이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미국에 계속 남아 선교에 종사하게 됐다.(718)
1961년 2월 25일엔 박보희(1930~) 씨가 세 번째 미국선교사로 도미(渡美)했다. 형식상은 주미대사관(駐美大使館) 무관보좌관(武官輔佐官)이라는 공무(公務)로 갔지만, 심정적 기준은 선교에 더 큰 뜻을 지니고 간 것이 사실이었다. 김영운 선교사와 박보희 선교사는 동부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이리하여 1960년 전후로 3인의 개척선교사가 아벨국가 미국 현지에 착륙해 섭리적 활동을 개시했다. 이로써 1970년대 참부모님의 본격적 미국섭리 정착기반(定着基盤)을 개척(開拓)했던 것이다.(518)
5) 전국전도사 수련 개시
1959년 들어 시행된 협회 주관의 전국전도사수련회(全國傳道師修鍊會)는 40일 기준으로 정예 활동요원을 양성하는 대표적 교육과정이었다. 이 수련은 1964년도까지 매해 실시됐는데, 그 첫해인 1959년도는 3차의 수련으로써 1960년대 출발기대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발된 수련생 72명과 청강생을 포함해 총 207명이 참가했고, 유효원 협회장과 안창성 성화청년회장이 강의를 맡았다. 참아버님께서는 전심(全心)을 기울여 시종 직접 주관하시고 매일같이 말씀해 주셨다. 이는 이후 모든 교육과 수련회의 모델이 됐다.(519)
40일 중 10일에 한 번씩 원리시험을 실시하고 차수별로 10씩 가산해 총점 100점 만점에 70점을 합격선으로 했다. 1,2차는 성구암기문제가 많았고, 뒤로 오면서 원리해설 문제를 많게 해 암기(暗記)가 어려운 장년층에서도 합격할 수 있도록 유도하셨다. 72명 중 41명이 합격했는데, 그간 협회 원리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경우는 합격자 자격을 부여받았다. 수련생들은 수료 후 지방 각지에 임지(任地)를 배정받아 떠나기도 했다.(520)
또 수련회 노래로서 「원리용사가」를 친히 지어주셨다. 20일 수료식 때 가사를 구호로 제창했다. 5회 수련회까지 계속 제창하다가 1961년도에 곡을 붙여 6회 수련회 수료식 때부터 합창을 했다.(520)
7월 20일부터 8월 31일까지는 제2회 전국전도사수련회가 농ㆍ산ㆍ어촌 갱신운동의 목적을 갖고 그 여건이 적합한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에서 개최했다. 전ㆍ후편 지구시험 및 협회시험 합격자 21명과 14명의 청강생이 참석했다. 훈련부장은 한인수 씨, 원리강의는 안창성 씨가 맡았다. 또 원리강의 실습, 시험 외에 도로작업, 우물근처 정리 등 다방면의 훈련시간이 있었다. 특히 참아버님 지도로 바닷가에서 개막이(일명 건간망(建干網)이라 불리며, 조석 차이가 큰 곳에서 조류를 이용하는 어업법(漁業法))를 하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는 스파르타식 교육이 진행됐다.
새벽 5시에 기상해 수영복 차림으로 갯벌에 나가 고기잡이를 시작하면 날이 어두워야 돌아왔다. 맨발로 20~30리 되는 곳까지 걸어가서 물빠진 갯벌에 그물을 치면 온 몸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잡은 고기는 가마니에 넣거나 큰 그릇에 담아 수영복차림, 혹은 잠옷차림으로 머리에 이고 왔다. 오로지 참아버님의 사랑에 취한 생활이었다.(520~1)
또 15년간 누구도 들어가지 않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메기, 가물치, 뱀장어들이 많이 잡혔다. 가시 돋친 개연(가시연꽃)이 무성(茂盛)해서 모두 주저하면 참아버님께서 무섭게 몰아쳐 뛰어 들어가게 하셨다. 헤엄(水泳)치지 못하는 수련생들이 떠내려가서 건져 올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잡은 많은 생선들을 드럼통에 넣어 소금으로 절이고 한편으로는 서울 본부교회로 실어 날랐다. 개막이그물로 일곱 가마니를 잡은 날도 있었다. 나라와 뜻을 생각할 때마다 잊을 수 없는 생애의 한 추억을 남긴 기간이었다.(522)
수련기간 내내 야목교회 식구 조옥순, 윤복례, 윤금례, 김정열, 이복례 씨 등이 식사준비 및 참아버님 수발을 정성껏 맡아 했다. 특히 수련 중에 이용희 양이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을 체휼하면서 많은 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가 「복귀의 심정」을 지었다.(522)
6) 내외기반 강화와 1960년대 맞이
1959년 2월 13일은 참아버님 탄신 39주년 경축일이었다. 전날 12일에 참아버님 하사 은컵쟁탈 제1회 전국지구대항 웅변대회(청년부 1등: 서울 박보희, 학생부 1등: 경상 김부용)가 개최됐다. 이날 밤 성화청년회 문화부 주최 문화의 밤이 열렸다.(523)
13일 새벽 1시 462명이 참가한 탄신행사 때, 몸소 떡을 베푸시며 역사적인 성만찬 예식을 완결지으셨다. 이날 1958년도 연간 우표수집 성적우수자(교회 1등: 부산교회, 개인 1등: 유정희) 표창 등 각종 시상식이 있었다. 탄신일을 금식으로 시작한 식구들은 시상식 후 저녁 6시에 주일학생들에 의한 연예순서를 밤새워 감상했다.(524)
3월 7일 1955년부터 양윤영 교수가 조직 지도해온 영성합창대(대장 양윤영)가 정식 발족됐다. 3월 20일 참아버님께서 아산 인주의 토기공장을 방문하시고 고기잡이도 하셨다. 이 무렵 토기공장 사업에 기대를 가지시고 그 오지(奧地)를 연달아 다녀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3월 22일 협회본부에 첫 전화 8-1574번이 가설됐다.(524)
6월 11일 참아버님께서 단양부흥회에 가셨다. 21일 제7차 협회원리시험이 있었으며, 한강 백사장에서 주일 밤 예배를 가졌다. 28일 제1회 영어원리강의대회(1등 한상길)가 개최됐다.(525)
1950~60년대는 참아버님의 의도에 따라 가장 극난한 야전(野戰)이라고 할 수 있는 공원 전도를 통해 크게 성과를 거뒀다. 한국에서의 총동원 전도운동과 때를 같이해 가장 열기 있고 폭발성이 높은 여자 식구들에 의해 실시됐으며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주동(主動) 인물들은 모두 원래부터 복음 전파를 위한 열정이 무서운 불덩어리였거나 천성적으로 확고한 목적 앞에서는 두려움을 모르는 분들이었기 때문이다.(526)
원래 1957년 총동원 때 김주화 씨 등이 장충단공원에서 작은 흑판을 걸고 성가를 부르면 노방전도 활동을 했었다. 1958년경에는 강경렬 씨와 고등학생 딸 문수자 씨 모녀가 역시 장충단공원에서 칠판을 들고 나가 전도를 했다. 어머니가 그 유명한 열혈달변(熱血達辯)으로 먼저 정지작업을 해 놓으면 딸이 원리강의를 하는 콤비 플레이였다. 그 부근에 살던 안예경 할머니와 이성복 씨 등 여러분이 협조했다.(526)
그러다가 1959년 7월 10일부터 강현실, 김희옥, 정석온, 장덕희 씨 주도의 탑골공원 전도가 시작됐다. 지난해에도 시작했다가 기성교회 측과 불량 청년들의 방해와 핍박으로 일단 좌절을 경험했던 탑골공원에서 다시 횃불을 치켜든 것이다. 신옥순, 안예경, 박봉식 씨 등 수많은 열성식구들이 알게 모르게 도왔고, 1966년까지 이어졌다.(526)
8월 13일부터는 차만순 씨 주도의 효창공원 전도가 개시됐다. 차만춘 씨가 주강사로 활약했고 지승도 할머니와 정찬복 씨가 협조했다. 주로 공원에 나온 노인 등 비교적 한유(閒遊)한 계층을 전도해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원리강의 장소인 본부교회로 인도하곤 했다. 비교적 공원 분위기도 차분해서 가장 반대가 적었던 공원전도이기도 했다.(526~7)
강현실 전도사는 공원전도를 하던 어느 날 목이 쉬어 3일만 쉬게 해달라고 참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목이 쉬어 말을 못하겠으면 공원 가운데 서서 손짓 발짓 몸짓이라도 하라.”고 오히려 독려하셨다고 한다. 전도자의 심령이 간절하다면 그걸 보고서도 식구 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 그때 말씀이 항상 귓전을 울렸다고 한다.(527)
7월 15일 명동 중앙문화회관을 해약했다. 참아버님께서는 7,8월 중 야목 전도사수련회에 수차례 다녀오셨다.
9월 1일부터 삼각산 특별기도원에서 세계기독교친선운동 대한협신회 주최 제1회 전국기독교친선운동 추기(秋期)신앙대회가 열렸다. ‘교파 사이에 막힌 담을 헐자’라는 주제로 4백여 명이 모였다. 참아버님께서 2일부터 5일까지 다녀오셨고, 4일에 유효원 협회장이 강연을 했다.(528)
9월 17일 참아버님께서는 우천중에도 식구들과 삼청공원 정상에 다녀오셨다. 18일에는 여의도비행장에서 선교 차 도미(渡美)하는 김상철 선교사를 전송하셨다. 10월 4일 이남출감 4주년 기념일을 맞아 참아버님을 모시고 40세 이하 190여 명이 효자동을 거쳐 삼각산(북한산) 백운대에 다녀왔다. 14일 지방 식구들도 많이 참석한 가운데 삼청공원 뒷산에서 이북출감 기념예배를 밤 10시경까지 가졌다.(528)
12월 4일, 수개월 수속 끝에 참아버님 여권이 발급됐다. 7일부터 6일간은 대한협신회 주최 전국기독교친선운동 동기(冬期)신앙대회가 서울 상명여자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됐다. 9일 밤에는 박보희 씨가 울분을 토하듯 원리강연을 해 감명을 줬다. 시종(始終) 초조한 모습으로 마음 쓰시는 참아버님과 식구들의 정성으로 반대역사 없이 성공리에 마쳤다.(528)
12월 24일부터 28일까지는 참아버님께서 송도욱, 유효민, 한상길, 박보희 씨 등을 대동하시고 제주도에서 수렵해 꿩 25마리를 잡아오셨다. 이 무렵 참아버님께서는 사냥과 고기잡이를 통해 초창기 창업역군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시고 용기와 인내와 개척정신을 연마(鍊磨)시키셨다. 사냥과 낚시의 매력을 느낄 줄 알아야 진리 탐구의 가치 있는 매력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멧돼지 사냥 등을 통해 장차 공산당과 싸워 이길 인적자원 훈련 구상을 하시기도 했다.(529)
12월 말엔 인천시 도화동 75-1에 예화산탄공기총제작소를 설립하고 30일자로 내무부장관 총포업허가를 취득했다. 당시 공기총 제조허가를 얻기란 힘든 일이었지만 대한통운 지점장의 신분을 가진 김인철 씨의 섭외력(涉外力)으로 성사됐다. 사실상 김인철 씨는 이 일을 시작으로 이듬해 10월 협회 초대 섭외부장에 발탁된 후 평생 섭외 분야 외길을 걷게 됐다. 이때 허가된 총포사는 후일 통일산업 창업의 초석(礎石)이 됐다. 당시 소인우표사업도 호조였다. 그리고 연말 전국교회 수가 70개에 달한 가운데 대망의 1960년대를 맞이했다.(529)
7) 참부모님 성혼 직전 3년
통일교회도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 예수님 때처럼 전교단과 민족이 반대하는 가운데서 비참한 노정을 걸으면서 맨 말단에서부터 출발해 올라오는 운동을 해 나왔다.
1945년 한국해방 후 1960년 참부모님 성혼까지 14년 기간은 야곱노정에 있어 14년 기간에 해당한다. 이 기간에 참아버님께서는 치열한 반대 속에 천적인 계획을 결정지으셔야 했다. 한국기독교 신령역사를 중심하고 마련됐던 해방 직전 14년의 섭리기대를 재탕감하는 기간이었다. 그 중 1차 7년은 구약시대, 2차 7년은 신약시대 입장이었다.(530)
2차 7년노정에서는 예수님이 잃어버린 영적 육적 기준을 연결시켜 종족적 기반을 탕감해야 했다. 협회 창립 후로는 강력한 반대역사 가운데서도 국가에 영향을 미쳐, 아무리 반대하고 말살시키려 해도 할 수 없는 환경으로 넘어가야 했다. 예수님 때 유대 나라와 유대교를 하나 만들어 로마 중심한 세계시대로 가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족적 판도를 중심하고 민족으로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530)
특히 1957년 7월부터 1960년 4월까지 3년간은 나라가 반대해 쇠고랑을 차고 죽음 길을 간다 해도 단연코 생명을 내걸고 투쟁해야 할 기간이었다. 섭리와 세계를 대표한 개인으로서 예수님의 영육 아우른 가정출발을 위한 종족적 기반을 탕감하는 십자가 고개를 국가적으로 넘었다. 그리하여 섭리적 장성기 완성급 시점을 다시 찾으셨다.(530)
그중 성혼 직전 7개월은 수난의 최고 절정기였다. 중퇴(中退)한 식구들이 결속돼 불신한 예수님의 12제자 입장에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참아버님께서는 반대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히려 위로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탄이 침해하려 할 때 승리의 역사를 일으키곤 하셨던 것이다.(530)
1960년까지 예수님의 해원(解寃)을 위해 통곡의 심정으로 모진 투쟁을 하셨다. 말씀도 예수님에 관한 내용으로 일관하셨다. 신령한 사람들이 “도대체 문 선생이 어떤 분이냐?”고 기도하면 하늘은 심히 통곡시키면서 “그렇게 통곡해도 그분을 알 수 없다.”고 응답하셨다 한다.(531)
당시 참아버님께서는 사석(私席)에서는 그지없이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이셨다. 그러나 강단(講壇)에선 호리호리하고 야윈 외모에 역사적인 통분을 일갈로서 포효(咆哮)하시는 날카롭고 무서운 용모이셨다. 기도는 늘 흐느낌이셨다. 설교나 찬송 때는 조용히 한자리에 서서 하시는 법이 없으셨다.(531)
충현동 원리강의소 시절부터 가산(家産)을 희사(喜捨)하며 헌신한 양윤영 교수는 급기야 천막을 치고 피아노 교습으로 연명(延命)하던 중 4남매를 식구집에 나눠 맡겼다. 그러던 중 은행 융자(融資)를 간신히 얻어 삼선교 산중턱 동네에 조그마한 한옥을 사서 모여 살았다. 하늘이 요구하는 책임은 막중한데 자녀들의 학비와 경제적 부담은 날로 커져 담판기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59년 12월 양 교수는 어린 자녀들을 동두천 고아원에 맡기고 뜻길을 위해 더욱 적극적 헌신의 길로 나섰다. 험난한 고난의 시대에 이렇듯 제물적 헌신으로써 이름 없이 빛없이 뜻길의 개척 일선에 나선 식구는 비단 양 교수만은 아니었다.(531)
일찍이 해방 직후부터 여성계 중심에서 활동해 온 김순화(1912~74) 씨는 1955년 1월 입교 무렵부터 정부의 사회부 부녀국장과 대한부인회 총본부 조직부장 등의 공직에 있었다. 그러나 입교 이후 교회 부인회 활동 등 교회 일에 힘을 쏟게 되자 이기붕 씨 내외의 모략으로 퇴직을 강요당했다. 결국 의원사직(依願辭職)을 하고 교회 일에 주력하게 되면서 남편과 대립이 격화됐고 부득이 이혼을 하고 나와 뜻길을 따르게 됐다.(531)
1960년 초에 들어 기성교회는 자유당을 배경으로 통일교회를 법적 조치로써 도태시키려 했다. 그래서 문교부 내에 소위 종교단체심사위원회를 두고 이대, 연대를 위시한 교계, 언론계, 정계, 법조(法曹)계 등 각계 인사들을 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때 민주당 부녀부장으로서 정계 영향력을 가진 여장부 박봉애(1903~93) 씨가 있었다. 박 씨는 당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부터 탄압의 강화와 동시에 투옥 대상자로 지명받고 있었다. 그간 쌓아올린 정치적 명예와 하늘의 뜻길, 그 기로에서 서서 하늘과 담판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물질적인 너를 버리고 영적인 너를 찾아 세워야 한다.”는 응답이 있었다. 하늘이 필요할 때 제물로 바쳐지는 영광의 새출발을 하자고 결심했다.(532)
교회가 꾸며진 각본(刻本)에 의해 철퇴를 맞고 쓰러지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었다. 싸움을 결심하고 민주당 탈당성명서를 냈다. 정치적 변절자(變節者)라는 숱한 원성과 비난을 변명 없이 감내(堪耐)하면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것은 정치적 자살행위였으나 존망(存亡)의 기로(岐路)에 선 섭리와 교회 기반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용단(最後勇斷)이었다. 오직 하늘만이 아시는 제물적 신념의 희생길이었다. 그 후 박 씨는 고위층의 온갖 회유와 위협에 맞서 싸워 결국 종교단체심사위의 음모를 무산시켰던 것이다.(532)
3개월 후 4ㆍ19의거가 일어났을 때, 박 씨는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와 섭리의 존폐와 맞바꾼 용단에 대해 오로지 하늘 앞에 감사할 뿐이었다. 시대를 넘어 영원을 두고 싸우는 대열에 서 있었기에 훗날 후손들이마나 알아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길을 접고 뜻길을 위한 역군으로서의 새출발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훗날 참아버님께서는 교회가 세계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박봉애씨 덕이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532)
참아버님께서는 이렇듯 수많은 식구들의 심정적 탕감길을 기반 삼고 통일교회를 중심으로 1960년도까지 역사적인 종의 종-종-양자-자녀-부모 시대 사명을 재탕감복귀하셨다. 국가 일선의 첨단(尖端)에서 당한 수욕(受辱)의 과정은 비참하고 눈물어린 노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반대가 없었다면 세계적 탕감노정에서 계대(繼代)를 잇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최고 핍박(逼迫)의 격동기(激動期)에 모두가 반대했다. 그렇지만 내적으로는 특별히 참아버님에게 절대복종하고 협조함으로써 복귀된 가인 입장에 서신 고향의 문용수 대형님과의 심정기반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 근원적인 조건 하에 세례 요한과 같은 기정을 내세워서 해와를 다시 택정(擇定)할 수 있는 기반만 닦는다면 복귀기준 수립이 가능했다. 내적 외적 사탄이 합동 공세를 취하는 제일 복잡한 와중에서 철석같은 신념으로 모든 반대환경을 짓밟고 1960년 4월 11일, 음력 3월 16일에 역사적인 참부모님 성혼식을 거행함으로써 승리의 한 고개를 넘으셨던 것이다.(533)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1권』(역사편찬위원회,2009) 인용 끝.
첫댓글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역편-추연구 저)1권까지 모두 훈독식 강의를 마쳤습니다. 1권은 1959년까지 살아있는 재림섭리역사가 기록된 것으로 초창기 아버님의 삶이 진정 종의 종 노정임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당신의 탄신일에 금식한 것은 물론이고요.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당신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불평도 한 마디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으려는 아버님이야말로 인류역사에 유일무이한 참효자이심을 당신의 언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