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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서가 신앙의 승리(2274.2024.11.3)
엡4:31-32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보기만 해도 분노가 치미는 사람이 없습니까? 속된 말로 밥맛 떨어지는 사람은 없습니까? 만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기 싫은 사람은 없습니까? 누구에게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과 전화를 하는데 자신과 함께 신앙 생활하다 교회를 떠난 사람 중 몇 명은 죽는 날까지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그 교인들로부터 심각한 상처를 받았으면 목사님에게 그런 쓴 마음이 생겼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명예에, 나의 감정에, 나의 물질에, 나의 건강에, 나의 사업에, 나의 인생에 심각한 피해를 주어 절대 용서해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쓴 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탕감’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던져버렸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38:17절‘주께서 나의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43:25절‘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던져 버렸다는 말이나, 도말했다는 말은 완전한 용서를 의미 합니다. 한마디로 기억지도 아니하고 잊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감정을 누르고 억제하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이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증오’가 됩니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피하고, 만나지 않고 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올바른 용서의 정신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함께 살면서 피한다고, 만나지 않는다고 만나지지 않습니까? 어느 날 길가다가 만나게 되면 또 고통스러운 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기는 해야겠는데 먼저 내게 찾아와서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용서의 정신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상대방이 잘못을 빌든지, 안 빌든지 그런 것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못박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지금 잘못을 행한 줄도 모르지만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힘들게 여기고 제일 못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헌물을 드리고 봉사를 하는 일은 아무리 힘이 들어도 자기 성취감이 있어서 잘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고 자신이 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선뜻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런데 용서는 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 방식대로 하면 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방식으로는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왜 용서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고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내 자신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먼저 살기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 평강은 절대로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씩씩거리면 본인만 더 열받고 더 화병이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마디로 매일 매일이 지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용서가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용서는 상대방에게도 큰 선물이 되겠지만 실상은 내가 더 큰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더라도 용서하지 못한 마음에는 행복이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심령에 분노의 불씨가 떨어지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고 맙니다. 불 속에서 견뎌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과거에 발목이 붙잡혀서 아름다운 미래로 한발짝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용서란 때린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맞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하소연만 하지 말고 용서하면 모든 상처들이 다 치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쁜 것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용서야말로 우리 주님을 닮아가는 용기있는 선한 행위입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실수 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용서란 단순히 허물을 덮어주고 복수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람을 얻는 지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고 주변에 사람들과 벽을 쌓고 살아가야 하므로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용서 받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지내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란 때 도망치던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하던 시므이를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용서하였습니다. 그결과 시므이는 다윗의 충직한 신하가 되었습니다. 용서는 인간관계를 넓혀가고 더욱 더 돈독하게 만들어 줍니다. 실상은 용서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살려면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구제가 육체의 자선이라면 용서는 우리 영혼의 자선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용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사항입니다. 상대방을 바라보고 자신이 받은 상처에 집중하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선한 뜻일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면서 용서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모두 다 용서하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에는 절대로 행복이 찾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처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곪아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원수마저도 용서하고, 일흔번의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용서는 두들겨 맞은 사람이 때린 사람의 지은 죄나 잘못을 벌하거나 꾸짖지 않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용서의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동네방네 돌아 다니며 떠벌리는 바람에 오히려 자신이 더 큰 가해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복수할 때 인간은 상대방과 같은 수준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용서할 때 상대방 보다 더 우월해 집니다. 그래서 용서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복수는 없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용서를 하면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자들만이 먼저 용서를 할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장 지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비리 리스트를 모아 놓고 묵상하는 사람은 과거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과감하게 용서하고 나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용서를 실천하여 사람을 얻고, 교회가 되살아 나고, 믿음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리교를 창시했던 요한 웨슬레의 전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웨슬레가 인도하던 집회에서 어떤 장군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 장군이 정말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웨슬레는 그 회심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장군님은 하나님께서 장군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물론이지요’,‘그러면 장군님은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들을 정말 다 용서하셨나요’장군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만 빼고 다 용서했습니다. 군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는데, 나는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그 사람만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때 웨슬레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장군님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앞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기도문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장군님은 앞으로 절대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앞에 용서를 구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용서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생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의 문제입니다. 만약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2절‘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그 사람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용서입니다. 시103:12절‘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동쪽에서부터 서쪽이 먼 것 같이 멀리 두고 완전히 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려 주는 용서입니다. 이것이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용서해주어야 할 내용입니다.
마18:35절‘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완전히 잊고 용서를 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생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이 진정한 용서를 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지도자인 프로이드 맥글랑은 말하기를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그 사람을 용서하라. 당신은 그 사람을 이미 용서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로 결정했노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고 당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을 완전하게 용서했다고 느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욥42:10절‘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테레사 수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가족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고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용서의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다만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롬12:19절‘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내가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합니다.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도 용서가 되는 역사가 있습니다.
본문 엡4:32절‘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친절하게’입니다. 이것은 정말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을 돌보려는 의지로 다가가는 친절한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며’라는 말은 상대방의 연약성을 깊이 이해하는 태도를 가리키라는 말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저 사람도 별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실수를 했겠지’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정말 불쌍히 여기는 태도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의 의미를 정의한다면 ‘용서는 그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를 용납하며 그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더 나은 관계로 회복하는 과정이다’한마디로 말하면 용서는 사랑의 실제입니다.
우리가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성을 지녔음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용납하며 그의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와의 관계를 더 나은 관계로 회복시켜 나가기 위한 과정이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서의 중요한 동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 때문에 용서하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동기가 그리스도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용서를 받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용서 그 자체는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분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에 그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용서 자체는 값없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용서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가 값 비싼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받은 용서는 아주 값비싼 용서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가 주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값비싼 용서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주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18:21-35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즉 용서의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빚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무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에 처자식까지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인은 그종이 불쌍해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잠시 후에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그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를 만나 당장 빚을 갖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두 사람이 빚진 액수를 비교해 봅시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아십니까?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일만 달란트면 그 당시로는 가히 기하학적인 액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기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생명을 바쳐 얻어 낸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사람들이 왜 이웃의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엄청난지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죄를 탕감 받았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제의 조금마한 잘못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그 죄를 다시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용서의 감격으로 용서하며 사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인지도 모릅니다.
눅15:11-31절에는 하나님의 용서사건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탕자이야기입니다. 탕자는 예수님 당시 유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버젓히 살아계신데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한 것도 황당한 일인데, 그나마 분배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다 탕진하고 돼지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치욕이지만 아버지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정말 이런 아들은 없는게 백 번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용서속에 네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조건없이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조건없이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려준 유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를 치다 돌아온 아들을 비웃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품안에 안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죄로 더럽혀져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십니다. 그분의 용서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용서의 조건을 달기 쉽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조건없이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롬5:8절‘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했습니다.
2. 용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입으로 알리고 행동으로도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을 용서했을 때 그 용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어떤 모습으로 보여 주었습니까? 아버지는 집을 향해 오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아들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종으로라도 써 주시면 좋으련만’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면서 때로는 한숨을 쉬면서 터벅거리며 걸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달려갔습니다.
스펄젼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이 한 걸음을 뗄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려왔다’ 이 달려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들은 무엇을 확인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정말 자신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모습에서 알아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돼지를 치면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던 아들이니 그에게서 얼마나 악취가 났겠습니까? 얼마나 초라한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런 것이 상관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용서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이유도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3. 이전의 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동안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고 역정 내지 않았습니다. 분배받은 재산을 어디에 다 썼느냐고 고함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아버지는 눅15:24절‘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들의 과거를 문제삼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로 했으면 지나간 일은 문제 삼지 않아야 합니다. 이럴 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이 단순히 잊어버린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기억을 안하신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잊어버린다는 것과 기억을 안한다는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잊어버린다는 것보다는 기억을 안한다는 것이 더 적극적인 용서의 의지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사43:25절‘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이런 말씀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이 말의 의미는 어떤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어떤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을 문제삼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한 일, 상처 준 일 따위를 기억해 두었다가 상대에게 복수하거나 제삼자에게 그를 비판하는 일은 그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특별히 지난 일을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용서를 베풀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부부들입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 보면 옛날 옛적 일까지 들추어내면서 서로를 깎아내립니다. 이는 함께 살면서 서로 용서하지 않은 채 지낸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지난 일을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 것입니다.
4. 죄인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온전한 부자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새 신발을 신기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는 것은 모두 아들로서의 당당한 권위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전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새로운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온전한 삶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회복의 자리에까지 서게 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아마 탕자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체험하고 난 뒤에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실하게 살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용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이어지는 5:1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아시고 보시면서도 그리스도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것도 일흔번씩 일곱 번이상으로 용서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라. 용서는 명령이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정죄하고 미워할 만한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실제가 바로 용서입니다. 너만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서로 용서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친 이웃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습니까? 그들을 회복의 자리에 서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잘 들으십시오. ‘서로 용서하라’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안에 미움이 있으면 내가 고통스럽고 내가 매이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놀라운 은혜가 입합니다. 치유의 은혜가 임합니다. 정서적 고통을 완화해 주고,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켜주며, 개인의 자존 감을 회복시켜줍니다. 용서는 분노의 폭발을 막아주며, 분노와 죄의식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 주며, 해를 입힌 사람을 향한 증오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는 신체적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촉진시켜주고, 혈압을 낮추어 줍니다. 용서는 건강을 가져올 뿐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용서는 창조성과 활력을 강화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용서하면 영적 축복도 임합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고 진정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용서는 행동이며 선택입니다. 용서는 능동적인 행동이며 에너지가 많이 소요됩니다. 과거는 한 조각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상처라는 것이 어차피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의 큰 죄를 용서하셨음을 기억하고 나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큰 용서를 체험하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어 무서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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