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강연 연사가 조갑제씨’
좌경독서회 사건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 ‘변호인’을 보고,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관계와 다르다. 이 영화를 보고 그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주장, 현 정부를 비판하는 데 이용하는 것은 정치적 선동이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문재인 의원은 “재미있게 그리고 감동깊게 봤다”면서 “부당한 시대에 지식인이 또 시민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들은 그렇게 하는가를 물어보는 것 같다. 33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재심이 진행 중인 부림사건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리라고 확신하고, 부림사건이 조작됐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밝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한국일보).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영화를 보고 나와 쓴 트위터 글에서,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고 했다.
좌경독서회 사건에 불과한 부림사건은 그들을 만나고 강연도 한 나에겐 사상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나 노무현을 의식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사 노무현이 부림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니 鬪士(투사)로 바뀌는 계기에 필자의 이름이 나온다. 1985년 2·12 총선으로 민주화 흐림이 大勢(대세)가 된 직후 부산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하여 문재인 씨는 2011년에 나온 《운명》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창립대회를 하는 날이었다. 행사는 1부 강연회, 2부 창립대회로 예정돼 있었다. 1부 강연 연사가 조갑제씨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국제신문’ 해직기자로,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경찰이 행사장인 강당을 원천봉쇄해 1부 강연회부터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모두 경찰의 원천봉쇄의 불법성을 규탄했다. 그래도 경찰이 꼼짝 않자 노 변호사는 大路(대로)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혼자서 구호를 외치며.>
노무현은 ‘그 일로 단번에 과격한 변호사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는, 부산시경국장(지금의 부산경찰청장)과 관할 경찰서장을 형사 고소했지만 흐지부지 넘어갔다는 것이다. 필자는 강연 차 부산역에 도착하였을 때 기다리던 정보 형사들로부터 ‘강연장이 봉쇄되었으니 돌아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무현의 머리에 들어간 ‘민중’과 ‘계급’
노무현은 좌익운동권 출신은 아니지만 계급투쟁론적 의식화를 수용할 만한 감수성의 기반은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이 국민학교 시절 내내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고 적었다(《여보, 나 좀 도와줘》). 일명 ‘가방사건’은 富者(부자)에 대한 노무현의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당시 초등학교 학생들은 보자기에 책을 싸 가지고 학교를 다녔다. 형편이 어려웠던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5학년 체육 시간 때 노무현은, 한 친구와 함께 부잣집 아이의 고급 가방을 면도칼로 찢었다고 한다(171페이지 내용 재구성).
여성에 대한 굴절된 인식도 드러냈다. 그는 “나는 다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마누라만은 손아귀에 넣고 살겠다”고 했다(上同).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했다”고 고백했다(같은 책 125페이지). 친구들이 ‘형수를 꽉 잡고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달라고 하면 밥상 엎어 버리고, 이불을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라는 말도 했다(上同).
사법고시 합격 후 노무현은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도 일종의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노무현은 “처음 얼마간은 연수원에서 외톨이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88페이지). 그는 “다들 패거리를 지어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데 나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서성거려야 했다”고도 했다(上同). 노무현은 고향에선 나름 촉망받는 젊은이였지만, 전국의 秀才(수재)들만 모인 사법연수원에서는 소외감을 느낀 모양이다.
노무현을 따라다닌 또 다른 그림자는, 장인 권오석의 인민군 부역 前歷이었다. 대검찰청 공안부가 1973년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제10권)에 따르면, 권오석은 1949년 남로당에 가입, 6·25남침전쟁 당시 경남 창원군 진전면에서 면장 등 11명의 양민을 학살한 데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경남 창원군 진전면 치안대 활동사건’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비상사태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제3조 1항·4조 5항, 국가보안법 제1조·제3조 위반 및 살인죄, 살인예비죄 등으로 기소되었다.
권오석에 대한 정확한 구형량과 선고형량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좌익사건실록》은 권오석의 구형량과 선고형량에 대해 ‘기록의 일부 유실로 기재 불능’이라고 적고 있다. <월간조선>(2002년 6월호)에 따르면, 권오석은 수감 도중 폐결핵·兩眼(양안) 실명 등의 이유로 1956년에 刑(형)집행 정지로 출소했다. 그는 1961년 3월27일 殘刑(잔형)집행을 위해 再수감되었고, 1971년 마산교도소에서 獄中(옥중) 사망했다.
계급투쟁론자를 ‘뜨거운 인간애에 불타는 사람’
노무현은 初選(초선) 국회의원이던 1988년 7월8일, 임시국회 對정부 질문에 나섰다. 그의 발언 요지는 노동자 옹호와 기업과 정부에 대한 비난이 主였다. 특히 盧 의원은 세 번 ‘계급’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① <이 나라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비참한 삶을 더 늘어놓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외쳐대는 한 민족 한 동포라는 말이 과연 진실이라면 이들도 우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의 고통이 돈과 힘을 한손에 모아 쥔 소수 특권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기인된 것이라면 그들은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분배구조를 개선해서 貧富(빈부)격차를 해소하겠다고 수없이 약속하여 왔습니다. 빈부격차의 해소방안을 구체적으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노무현 사료관’)
② <국무총리는 지난 6월22일 이 자리에서 체제전복적 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한 대책을 강구할 것이라 공언하셨습니다. 당시 총리께서 말씀하는 체제라는 말은 우리 헌법이 보장한 민주적 기본질서를 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온갖 부정을 자행한 권력자와 그 공범들 그리고 그들과 결탁하여 온갖 특혜와 독점적 이익을 누리고 있는 소수 특권계급의 이익을 뜻하는 것입니까? 분명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上同)
③ <작년 7~8월 이래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횟수도 엄청났거니와 그 세력 또한 그것이 일정한 이념적 목표 아래 조직된 힘으로 일시에 들고 일어날 경우 정부의 존립을 뒤엎어놓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명백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관측이 과연 타당한 것이라면 이들 노동자들에게 계급혁명의 이념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강요하고 노조활동마저 파괴해서 제몫을 일부나마 찾으려는 노력마저 봉쇄함으로써 이들의 가슴에 분노와 증오가 응어리지게 하는 사람들 또한 명백히 민주체제의 파괴를 재촉하는 집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兩者 모두가 체제를 파괴하려는 세력이라 할지라도 前者는 뜨거운 인간애와 도덕적 이념에 불타고 있음에 반해서 後者는 이기적 탐욕에 눈이 멀고 있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前者가 외부에서 침투한 것이 아니라 後者집단이 만든 착취의 구조 속에서 자생한 세력이라는 점에서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은 後者의 집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출처: 上同)
노무현은, 당시 상황을 계급투쟁적 대결구도로 보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에게 계급혁명의 이념을 심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즉 좌익을 ‘뜨거운 인간애와 도덕적 이념에 불타’는 이들이라고 미화하였다.
‘상당한 재산가’란 표현에 민감 반응
노무현 의원의 국회의원 회관내 사무실엔 ‘사람 사는 세상’이란 제목의 액자가 있었고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통일민주당 소속이던 노 의원은 1989년 초 국회의장에게 의원직 사퇴서를 우편으로 보낸 뒤 잠적한 적이 있었다. 우종창 〈주간조선〉 기자가 입수한 사퇴서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민중들과 함께 독재정권에 맞서 길거리에서 맨몸으로 싸워왔습니다. 그러다가 6·29 후 민주주의를 한다기에 박해받는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해보겠다고 국회에 들어왔습니다.>
1990년 노무현은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과 손잡고 민자당을 만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서 이탈한 의원들과 함께 소위 ‘꼬마 민주당’을 만들었다. 노 의원이 통합 야당의 대변인이 되자 언론에선 그의 프로필을 쓰면서 <한때 부산요트클럽 회장으로 개인 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로 알려졌다>는 취지의 보도를 했다. 노 의원은 신문사와 방송사 정치부에 해명서를 보냈다.
그는 <요트 동호인 20여 명이 모인 동호인 클럽 회장을 한 적은 있으나 부산요트협회장을 지내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요트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서 <변호사로서 가난뱅이는 아니며, 그러나 부자 소리를 들을 만한 수준도 아니며, 사회적인 평으로서 재력가는 더욱 아닙니다>라고 했다. <주간조선> 禹鍾昌(우종창) 기자는 1991년 10월6일자에서 <통합야당 대변인 노무현 의원-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목의 추적 기사를 실었다. 노 의원은 명예훼손이라며 禹 기자를 상대로 형사고소, 조선일보사와 기자에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민사 1심에서 부분 승소(3억 원의 손해 배상 청구액 중 2000만 원 인정)한 노무현 의원은 提訴(제소)와 고소를 취하했다. 노 의원은 자전적 에세이에서 <조선일보와 기자의 사과를 받아들여 아무런 조건 없이 취하였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禹 기자는 항소심에서 다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화해를 종용, 盧 의원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사과를 하였다고 한다. 헤어질 때 禹 기자는 “노 의원에 대한 기사는 계속해서 쓸 것입니다”고 말했는데 그는 처음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한다(《권력의 역설-우종창 파워취재기》).
“당신이 쓴 기사는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다. 만약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 쓰지 말고 잘못된 것 10개를 모은 뒤 하나만 써주었으면 좋겠다.”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 놔도’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의 피고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좌경의식화’이고 그 이후 좌파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엔 그런 가치관에 기초한 정책을 펴 한국을 좌경화시켰다는 나의 假說(가설)을 입증하려면 대통령으로서 남긴 言動(언동)을 계급투쟁론이란 잣대로 분석해야 한다. 그도 대통령 시절 좌파를 자처하였는데, 좌파의 핵심 논리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이다.
盧武鉉(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2004년 5월말 연세대 강의를 통해서 진보와 보수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진보, 보수가 뭐냐. 보수는 힘이 센 사람이 좀 마음대로 하자,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거의 모든 보상을 주자, 適者(적자)생존을 철저히 적용하자, 弱肉强食(약육강식)이 우주의 섭리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쪽에 가깝다. 진보는 더불어 살자, 인간은 어차피 사회를 이루어 살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냐, 더불어 살자다. 자본주의에 사는 한 보수는 약육강식, 되도록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아주 오른쪽에 있는 나라는 더더욱 바꾸지 말자는 기득권 향수가 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해하면 간명하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
노무현의 보수에 대한 反感(반감)과 진보, 즉 좌파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좌편향된 가치관, 즉 계급투쟁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1961년에 아프가니스탄, 짐바브웨, 캄보디아보다도 못한 국민소득을 가졌던 나라(103개국 중 87등)를 50여 년 만에 세계 7위의 수출대국, 삶의 질 세계 12위의 복지국가로 바꿔놓은 主力은 보수층으로 불리는 세력이다. 이들에게 '별놈의 보수를 갖다 놓아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다'고 극언을 한 사람이, 변화를 거부하고 무자비한 독재로 인류역사상 最惡의 인간도살을 자행한 守舊(수구)좌익의 본산 북한정권에 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비교하면 그의 머리에 들어가 있었던 사상의 뼈대를 읽을 수 있다.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
2007년 10월2일, 訪北(방북) 중 평양 만수대 의사당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북한주민들의 행복이,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잡아 이른바 인민主權(주권)을 행사하는 독재의 전당에서 나온다는 말은 계급투쟁론적인 사고방식의 완벽한 표현이다.
헌법과 국군에 대한 공격
한국에서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헌법이다. 이 헌법에 대하여 그는 “그놈의 헌법이 토론을 못하게 돼 있으니까 (대통령이 직접 토론하는 것은) 단념해야지요”(2007년 6월2일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라고 했다. 사회주의 독재 장치는 ‘전당’이고 자유민주주의의 심장은 ‘그놈’이다.
계급투쟁론 신봉자였다는 증거이다.
헌법의 명령에 따라 국가의 안전보장을 수호하는 기구는 국군이다. 계급투쟁론 신봉자들은 헌법과 국군을 지배계급의 도구로 규정,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도 대상으로 본다. 노무현은 국군통수권자로 있으면서도 국군을 이렇게 매도하였다.
“젊은이들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 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낳을 것 아니냐. (전작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몰려가서 성명 내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 있겠나.”(2006년 12월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
계급투쟁론이 머리에 박히면 세상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편을 가른다. 반대 세력을 기득권 세력, ‘계급의 원수’ 등으로 몰고 증오심을 부추긴다. 자기편은 무조건 감싼다. 노무현의 경우엔 계급적 특권이나 박해를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런 계급적 관점을 유지, 정책에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한국의 보수언론을 이렇게 비방하였는데, 대통령이 좌익운동권 수준의 언어를 구사한다.
“지난날 독재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민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해왔던 守舊(수구)언론들은 그들 스스로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세력을 흔들고 守舊(수구)의 가치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2007년 6월10일, 6월 대시위 20주년 기념사)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야’
한총련은 북한정권의 전위대 역할을 하던 좌익학생운동 조직이었다. 노무현은 이들을 아주 따뜻하게 바라본다. 이 또한 계급투쟁론적 감정일 것이다.
“〈한겨레21〉에 올라와 있는 한총련 회장 편지를 읽어봤다. 일부 보도나 사회 일각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단순히 어떤 사상에 경도돼 우리 사회에 철없는 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편지 속에서 확인했다.” (2003년 5월1일 MBC ‘100분 토론’)
계급투쟁론에 빠지면 법을 지배계급의 압제 도구로 보므로, 노무현은 한총련이나 공산주의자 같은 국가 반역자를 다스리는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특히 냉소적으로 말한다.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은 폐기하고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에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2004년 9월 5일 MBC ‘특별대담’)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2003년 6월10일 일본 방문 중 발언)고 했다. 공산당과 대치, 死活(사활)을 건 무장·이념대결을 벌이는 나라에서 敵(적)에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미의 주장을 한 대통령이 있었다! 그래도 나라가 유지된 것은 또 하나의 기적이다.
계급투쟁론 신봉자는 그 계급투쟁론을 敎理(교리)로 하여 세워진 북한정권을 절대로 반대할 수 없다. 성경을 믿는 이가 교회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노무현은 북한의 核개발을 막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核개발을 사실상 비호하였다.
“미국의 對北(대북) 군사행동에 반대한다. UN안보리를 통한 제재에도 반대한다. 북한에 경제지원을 보다 더 해주고, 체제안전을 약속해야 한다.”(2006년 8월18일)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은 선제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며 남한의 지원 與否(여부)에 따라 핵 개발을 계속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2006년 5월29일 향군지도부 초청 환담 中)
“(북한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하려고 합니다. 제도적·물질적 지원, 이런 것은 조건 없이 하려고 합니다.”(2006년 5월9일 몽골 방문 중)
“1987년 이후 북한은 테러를 자행하거나 테러를 지원한 일이 없다. 지금도 테러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2004년 11월 12일 국제문제협의회 LA지부 간담회)
1997년 김정일의 본처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 씨를 찾아내 암살한 이는 김정일이 보낸 공작원이었다.
“북한의 붕괴를 막는 것이 한국 정부의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2006년 12월9일, 뉴질랜드 교포 간담회)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서 北核(북핵)을 말하라는 건 가급적 가서 싸움을 하라는 것이다.”(2007년 9월11일,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
遷都도 舊세력 거세가 목적
노무현의 계급투쟁론적 인식이 한국 현대사에 적용되면 善惡(선악)과 彼我(피아)개념이 뒤집어진다.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판하고 중국을 편든다.
“참여정부의 출범으로 아픔의 근현대사는 막을 내리게 됐다. 지난날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좌절과 굴절을 겪어야 했다.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2003년 3월1일 3·1절 기념식)
“몇 년 지나면 용산 기지는 우리 국민들의 손에 들어온다. 간섭과 침략과 의존의 상징인 그 용산 기지가 우리 국민들의 손에 들어온다.”(2004년 3월1일 3·1절 기념식)
그는 2003년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학생들 앞에서 가장 존경하는 중국인으로 등소평과 함께 毛澤東(모택동)을 꼽았다. 한국 대통령이, 북진통일 직전에 중공군을 보내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막은 자를 존경한다고 한 것은 이스라엘 대통령이 히틀러를 존경한다고 한 것과 같다.
그의 통일관도, 자유민주 체제를 채택한 국가의 정당성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계급투쟁론의 영향을 받은 듯 헌법 위반이다. 북한지역을 대한민국 영토로 규정(헌법 제3조), 평화적 자유통일을 하라(헌법 제4조)는 헌법의 명령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연합체제에서 각기 지방정부를 갖게 될 것이며 통일수도는 개성 일대에 대단히 상징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2004년 2월24일 방송기자클럽 회견)
북한정권을 대한민국과 同格의 국가로 인정하는 反헌법적 논리이고, 북한의 연방제 공산화 통일 방안을 수용한 것이다. 노무현은 신행정수도로 위장한 수도 이전의 진짜 의도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舊세력의 뿌리를 떠나서 새 세력이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터를 잡기 위해서는 遷都(천도)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한 시대, 지배세력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 큰 변화를 국민이 선택한 것이다.”(2004년 1월29일)
‘세력’을 ‘계급’으로 바꾸면 계급혁명의 한 방도로 遷都(천도)를 추진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계급투쟁론이 도시계획에까지 全方位的(전방위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어린이들 모아 놓고 계급적 발언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2004년 3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기자회견에 나와서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을 거명, 이렇게 말했고 수 시간 뒤 남 사장은 漢江(한강)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판에 제 형 노건평 씨까지 끼어들어서 참 미안하기 짝이 없다. 대우건설은 워크아웃 기업인데 대우건설 사장의 유임을 청탁한다는 뜻으로 3000만 원을 받았다. 어떻든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돈은 이미 돌려주었다고 한다. (중략). 형님의 실수가 있더라도 제가 잘 관리할 터이니 그렇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중략)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
그는 남 사장을 기득권자로 몰기 위하여 자신의 형을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애써 格下(격하)하였다. 利權(이권)개입을 자주 한 현직 대통령의 친형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2006년 10월8일 조선일보 金大中(김대중) 칼럼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계급투쟁적 발언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그는 청와대 정문 앞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에서 그것도 초등학교 학생들을 앞에 놓고 대통령으로서의 격(格)과 품(品), 지도층으로서의 덕(德)과 성(性)을 의심케 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어린이 손님을 상대로 얘기하겠다”고 전제하고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고 (그래서) 따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게 오래가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잘 살겠지만 일반 국민은 살기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초등학생이고 일반 사람이고를 구분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그에게는 옛 궁궐의 어느 문 하나를 열고 안 열고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소통을 상징하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에게는 대통령은 권력이 있고 어린 학생을 포함해 일반 국민은 권력이 없는 층이라는 수준의 의식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에게는 그런 지배와 피지배, 권력자와 국민이라는 구도를 굳이 양극화해서 초등학생들에게 강의해야 할 만큼 어떤 절박한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온 세상을 이분법(二分法)적으로 보는 그로서는 크게 어긋나는 언급이 아닐 것이다. 편 가르기의 달인(達人)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사물을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서울대 나온 자와 아닌 자, 강남 사는 사람과 아닌 사람, 과거 권위주의 시대 가해자와 피해자, 강대국과 약소국 등으로 파악하는 그에게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언급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설교(?)를 들은 초등학생들은 대통령의 말을 얼마나 어떻게 이해했을까? 혹시나 이 세상에는 지배하는 사람이 있고 지배받는 사람 따로 있다는 계급적 사고의 실마리를 처음 제공 받은 것은 아닐까?>
金大中 주필은 ‘모든 것이 드러난 한 작은 사건이었다’고 했다. 드러난 ‘모든 것’이란 그의 뇌리에 박힌 계급투쟁적 가치관이다. 노무현과 그 세력을 좌파라고 할 때 그 판단 기준은 그들이 이 세상을 마르크스 식의 계급투쟁론으로 본다는 점이다.
同年 10월10일字 조선일보 社說(사설)은 대통령의 한글날 경축사를 비판했다.
<대통령은 정치 행사도 아니고 한글날이 국경일로 格上(격상)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한글 창제의 의의를 ‘계급투쟁에서 지배층의 반대를 이겨낸 승리의 산물’로 설명한 것이다. (중략). 세상만사를 지배와 被(피)지배의 단순 二分法(이분법)으로 나누고 이 선동적 이분법을 혁명의 선동수단으로 활용해 온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다. 공산주의 지배계층은 세상을 지배와 피지배로 나눠 혁명을 부채질하고선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한 다음에는 주변에 가시철망을 쳐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해 왔다. 그 위선적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20년이 지난 후 그들의 지배·피지배 논리가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왼쪽 정렬 세력’의 비밀
1982년 노무현 변호사가 釜林사건 변호인이 되어 좌익운동권을 변호하다가 접하게 된 계급투쟁적 가치관은 그 20년 뒤 대통령이 된 후 국가 정책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그의 입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이념과 사상은 낡은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이념은 ‘공동체의 利害(이해)관계에 대한 自覺(자각)’이고 ‘자기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이론화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증오의 과학인 계급투쟁론 신봉 세력을 상대로 이기려면 종교적 신념이나 삶을 건 신념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이념 갈등 사건에서 자동적으로 한 편에 서는 세력이 있다. 광우병 난동-천안함 爆沈(폭침)-연평도 포격-철도노조 불법 파업-한국사 교과서 파동 등으로 편이 갈릴 때 왼쪽으로 정렬하는 세력은 북한정권, 민주당, 통진당(舊민노당), 정의당, 민노총, 전교조, 한겨레신문, 좌경 종교단체 등이다. 이런 세력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조작하든지 왜곡하여 북한정권이나 불법세력 편을 든다. 평소 북한정권을 비판하던 이들까지도 대한민국과 북한정권, 법치와 불법의 대결구도가 되면 북한정권과 불법 편을 든다. 좌파라고 통칭되는 세력은 거의가 反대한민국, 反법치 성향이다. 스스로 從北(종북)이 아니라고 하는 좌파도 이념문제에선 대한민국 편을 들지 않는다. 한국엔 ‘反北(반북)좌파’가 없다고 보면 된다.
이런 자동적 줄서기의 비밀을 알면 한반도 상황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 이 비밀을 알면 많은 의문이 풀린다. 예컨대, 휴전선 남쪽에선 용감하던 소위 민주투사들이 왜 反민주의 元兇(원흉)인 북한 독재자 앞에 서면 비굴해지는가? 인권을 신념으로 여긴다는 세력이 왜 북한인권법 통과에 대해서는 敵對的(적대적)인가? 구체적으로 金大中(김대중), 盧武鉉(노무현)은 왜 김정일 앞에서 작아졌던가? 부림사건 변호인은 왜 악마적인 김정일의 변호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가?
한반도의 가장 큰 수수께끼의 정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계급투쟁론’이다. 계급투쟁론이란 세계관에 물들면 그렇게 행동한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발전시킨 계급투쟁론은 간단하다.
<역사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투쟁을 動力으로 하여 발전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은 자본가이고, 피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이다. 세계 노동자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단결, 폭력으로 자본가 계급을 말살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잡는 건 독재이지만 다수에 의한 독재이므로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자본가 계급을 말살한 뒤엔 계급 없는 사회, 즉 공산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은 처음도 끝도 계급투쟁론이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로 시작되는 序論(서론)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는 本論(본론)으로 이어진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업 조합의 匠人(장인)과 職人(직인), 요컨대 서로 영원한 敵對(적대)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공산당 선언은 결론에서 계급투쟁의 방법으로서 폭력을 다시 강조한다.
<본래 정치권력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려고 사용하는 조직된 폭력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반드시 계급으로 한데 뭉쳐 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배 계급이 되고 또 지배 계급으로서 낡은 생산 관계를 폭력적으로 폐지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 관계와 아울러 계급적 대립의 존재 조건과 모든 계급 또한 폐지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계급적 지배까지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 대립으로 얼룩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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