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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6) - 2023. 5. 11(목) |
5월 11일. 봄이 무르익어가는 성모성월, 어린이날이랑 어버이날 등 가족과 함께 한 기쁨 끝에 찾아온 성지순례 날이라 마음도 가볍다.
오늘의 일정은 부산교구 성지 중 부산광역시 안에 있는 오륜대 순교성지, 수영장대 순교성지, 조씨 형제 순교자 묘 세 곳이다. 늘 그렇듯 4명이 한 차에 동승하고 오늘은 애릭 형제가 차량 제공 및 운전 봉사를 한다. 아침 06시 30분에 손경호(바오로) 형제의 모친 안나 자매님의 장례미사를 지낸 후 08시 30분 성당 출발. 순례성지들이 경주와 가까운 거리라 느긋하게 도중에 휴게소에서 쉬어가다 보니 10시 반이 되어서 오륜대 성지에 도착.
오륜대 순교성지 - 자랑스런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
오륜대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오륜대 저수지 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이 지역 5개 동에 걸친 경승지 일대를 의미한다.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오륜대란 오륜을 갖춘 어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설이 있고, 옛날 오륜을 갖춘 다섯 명의 노인이 풍경를 둘러 본 곳이라는 설도 있다. 또 동래군지(東萊郡誌)에는 “둥근 달〔月輪〕이 시내[川]에 잠겨 있는 곳이 무려 다섯 군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오륜대 순교성지는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는 194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복음 선포와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러한 설립 목적에 따라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순교 신앙을 후세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순교자 관련 유물과 교회사 자료 등을 수집하거나 기증받아 이를 전시할 기념관 설립을 계획하였다. 때마침 1967년 서울대교구에서 병인박해(1866년)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절두산 순교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을 건립하자 한국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 한국 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장소로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 지역을 택했는데 그곳이 바로 현 오륜대였다.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먼저 1968년, 부산 수영장대에서 죽음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 8위의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오륜대에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분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어서 순교자 기념관 및 순교자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1977년 7월 20일, 제대 뒷벽에 순교자 유해 26위를 안치한 순교자 성당 축복식에 이어 1981 10월 5일에 한국 순교자 기념관(뒷날 한국순교자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으며 척화비 복제, 라파엘호 모형 제작,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길, 성모동굴 조성 등을 마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2년 9월 25일 현 오륜대 한국순교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오륜대 한국 순교자박물관에는 수녀회 창설 초창기부터 관여한 윤병현, 홍은순 등 많은 수녀들이 전국에서 수집 · 연구하고 간직해 온 순교자들의 유물과 서책(書冊) 및 형구(刑具) 등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어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매우 우수한 박물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모두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1층에는 순교자들과 관련된 유물과 유품, 각종 자료와 형구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한국교회사 관련 자료, 궁중 유물, 성모성년 관련 자료들이 설치되어 있다. 3층에는 김인순 루갈다 기증품(민속품)과 도예작품 전시관과 특별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고, 특별 전시실에서는 수시로 가톨릭 관련 전시 및 성화전 등을 기획하여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품으로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대들보 사형틀, 항쇄돌, 죄인을 참수할 때 사용한 칼인 행형도자(行刑刀子), 태형이나 장형을 행할 때 쓴 도구 등 다양한 형구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관에 넣고 그 위를 덮었던 횡대(橫帶)와 친필 서간, 다산 정약용(세례자 요한), 성 베르뇌(Berneux) 주교와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이 사용했던 십자가도 있다. 그리고 한 면에는 소학(小學), 다른 면에는 교리를 적어 둔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의 위장 교리서, 이밖에 순종비 순명효황후와 의친왕비 김수덕 마리아가 기증한 궁중 · 왕실 유물과 김인순 루갈다가 기증한 조선시대 민속품 등 매우 풍부하다.
2009년 3월 2일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은 부산광역시에 1종 전문 박물관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어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교육 ·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2013년 10월 4일부로 반세기 동안 성지를 지켜온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에서 부산교구로 성지의 관리 권한이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교구는 이곳을 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명명하고 전담 사제를 파견하여 미사와 각종 강의 등을 시행하여 순교자 정신의 계승에 힘쓰며, 노후화된 건물 개보수 등 본격적인 성지 정비 작업에 힘을 썼다. 2014년 9월에는 124위 시복을 기념해 입구에 이정식(요한)과 양재현(마르티노) 복자의 흉상을 제작해 설치했고, 8위의 부산지역 순교자 묘소를 정비 보수하고 비석도 새로 세웠다.
어느 곳이나 박물관이나 전시관은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만큼 기대도 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큰 도로변에 있는 성지 입구에 도착해 보니 성지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닫힌 문 꼭대기에는 증축공사 안내가 큰 글씨로 걸려있다. 되돌아가는 수 밖에 없나보다고 생각하고 일단 작은 문으로 경내에 들어가서 수녀님 한 분을 만나 물어보았더니 임시 성당과 순교자 묘는 순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공사 기간은 원래는 내년 말로 예정되었으나 기간이 더 길어질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미리 알아보지 못한 것이 또 후회로 남았다. 왜 이렇게 시행착오를 되풀이 할까? 적어도 전시관이나 박물관이 있는 성지는 반드시 사전에 알아 봐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친 계기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컨테이너로 된 임시 성전과 통제받지 않는 순교자 묘역만 참배하기로 했다. 임시 성전 안에 들어가니, 중앙 제대 뒤에는 103위 성인화가 예수상심상 이나 십자가 대신 걸개그림으로 작은 십자가에 걸렸다.
임시성전
그리고 제대 좌우로 성 요셉상과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미사 시간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무슨 신심 행사가 있어서인지 몇 분의 신자들이 입실하여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었다.
성지순례 스탬프가 비치된 곳에는 오륜대 순교자 성지 마스터 플랜이 사진으로 붙어 있고 오른쪽에는 “이 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라는 문구가, 왼쪽에는 부산교구의 두 순교복자 이정식(요한)과 양재현(마르티노)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스터 플랜은 너무 어지러워 보아도 뭐가 뭔지도 모를 정도였다. 좀더 정돈된 조감도 형식을 제시하면 더 좋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교자묘소
순교자 묘소로 가는 편백나무 숲길은 매우 운치가 있었다. 초입에 예수님을 안은 성 요셉 부자상이 안내역을 하듯 서 계신다.
묘소에 다다르니 먼저 순교자 묘소 조성 내력을 밝힌 안내판이 하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66년 병인박해에 이어 1868년 무진년 동래지역에서 일어난 박해로 8월4일(양력 9월20일) 수영장대에서 이정식 요한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이정식의 대자였던 양재현 마르티노를 비롯하여 함께 옥에 갇혔던 여덟 분의 신자들이 군문효수라는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후 동래구 명장동 산 96번지에 묻혀있던 복자 이정식 요한 회장의 가족 네 분의 무덤(복자 이정식 요한, 아들 이원주 프란치스코, 며느리 박조이 마리아, 조카 이관복 베드로)만이 확인되어 1977년 9월 19일 이곳 오륜대로 이장하여 ‘부산순교자묘소’로 꾸몄다.
현재에는 네 분 무덤 외에 다른 네 분의 무덤(옥소사 발바라, 서울 생원 이삼근 아고보, 차창득 프란치스코,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이 가묘로 단장되어 있으며, 특히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윤지충과 하느님의 종 124위’에 포함되어 2014년 8월에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복자품에 오르게 되었다.
이 내용의 근거는 1868년 8월4일 작성된 왕실일기인 일성록(日省錄)이 원자료로, 1895년의 뮈텔 주교가 편찬한 치명일기(致命日記)가 부자료라고 되어 있다.
경사진 순교자 묘소는 4단으로 되었는데 맨 윗단에는 중앙에 대형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오른쪽에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계시며 그 아래 셋째 단에 순교자 3분의 묘비와 복자 양재현 가묘가 있다.
그 아래로 첫째와 둘째 단에는 복자 이정식 가족묘가 두 기씩 배치. 이중 예수님과 성모님 바로 아래의 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의 묘에는 비석 머리가 얹힌 비교적 큰 비석의 형태를 하고 다른 묘는 나지막한 표지석만으로 되어 있다.
묘소의 맨 아래 축대 벽면에는 좌,우로 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의 사진이 배치되어 있고 축대 앞에는 순교자들이 심문을 받았을 때의 대화, “너 그 도를 바리지 못할까?” “ 죽어도 버리지 못하겠다.”라는 대화가 나타나 있다.
한국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이렇게 순교자 묘소만이라도 참배하고 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는 어수선 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래도 형구를 중심으로 일부의 유물을 볼 수 있었음 역시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돌 형구 중 구멍 뚫린 형구는 일명 항쇄돌이라고 하는데 돌 구멍을 통해 순교자의 목을 맨 줄을 반대편에서 잡아당겨 목 졸라 죽이는 형구이다. 그리고 대들보 사형틀은 사형수를 잔인하게 내리쳐 죽이는 형구다. 모아놓은 유물 중에는 척화비도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할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면 매국하는 것이 된다)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아기 예수님을 안고 배웅해주시는 성모님께 감사의 인사들 드리고 오륜대 순교성지의 조속한 완공을 기도하며 떠났다. 평화의 비둘기가 승리의 월계수를 물고 올 날을 기다리며......
수영 장대 순교성지 - "가세 가세 천당 가세" |
수영(水營)이란 현재 부산광역시에 나오는 지명인데 이는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인 경상좌수영에서 따온 말이다. 육군의 경우는 병영이고 수군의 경우는 수영이다. 그리고 장대(將臺)란 군영 연병장에서 군사를 지휘할 때 사용하는 높은 단이다. 그런데 장대가 있는 군영이나 수영에서는 군사의 열병과 훈련만 한 것이 아니라 중죄인의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곳은 천주교 박해 시 수많은 신자들이 처참하게 피를 뿌린 순교의 현장이었다. 그런 장대로는 이곳 수영 장대뿐이 아니라 울산의 병영 장대와 동래의 수영 장대도 있었다.
이곳 수영 장대벌에서 순교한 사람은 병인박해 시 동래의 전교회장이던 이정식 요한(李廷植, 1795-1868년)을 비롯한 8명의 순교자였다. 이중 4명은 이정식 요한과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아내 박조이 마리아 그리고 조카 이삼근 베드로로 일가족 이었다. 여기에다 이관복 야고보, 차장득 프란치스코, 옥소사 바르바라, 이정식의 대자인 양재현 마르티노(梁在鉉, 1827-1868년)를 더해 8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박조이(召史)와 옥소사(召史)에서 조이와 소사의 한자 召史는 같은 뜻으로 미망인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출전에 따라 달리 표현된 것뿐이다.
이정식 요한(李廷植)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교련관(敎鍊官) 등 여러 소임을 두루 거쳤다. 그러다가 59세의 늦은 나이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무관직을 사임하고 첩을 내보내며 가족과 이웃들을 권면하여 입교시키는 등 누구보다 수계와 전교에 열성을 다했다.
이런 도중에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났다. 점차 박해가 자신을 옥죄어 오자 그는 교우들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는 가족들과 함께 울산 기장과 경주 등지로 몸을 피했다가 1868년 봄, 울산 수박골로 다시 옮겼다. 그러나 박해가 점점 심해져 동래뿐 아니라 인근 울산 · 언양 · 기장 등지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갑자기 그가 없어진 것에 의심을 품고 동래 포졸들은 그의 종적을 추적하여, 끝내 울산에서 색출하여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하여 동래로 압송했다. 동래 감옥에서 이정식 요한은 앞서 동래에서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동래 부사는 그들을 47일간이나 옥에 가두어 두고 여러 번 심문하며 형벌을 가하였으나 전혀 흔들림이 없고, 다른 교우들이나 그들이 사는 곳을 발설하지 않자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구주원(具冑元)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좌수영(左水營)으로 옮겨진 이튿날 구주원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혹형을 가한 다음 배교하기를 강요했는데 그들 중 세 사람은 혹형에 못 이겨 배교하여 방면되었다. 그러나 이정식 요한과 그의 아들 부부 등 8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하여 1868년 9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조용히 순교하였다.
통상 처형된 교인들의 목은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두었는데 이를 효수(梟首)라고 한다. 이는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많은 천주교인들의 처형 장면을 지켜 본 사람들은 그들의 굳은 지조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처형을 시행하는 수영 장교들과 군졸들은 삼엄한 분위기 속에 위엄을 갖추었지만 사형수들은 오히려 “가세 가세 천당 가세” 하면서 마치 잔칫집에 나가듯 기쁜 표정으로 순교를 했다고 한다.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이들에 대한 순교 사실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인 일성록(日省錄)과 1951년 8월 20일 현장 목격자인 두 증인의 증언 그리고 1977년 7월 17일 당시 광안 본당 주임신부에 의해 이곳에서 발굴된 장대석 8개, 기와 조각, 동전 등으로 이 같은 증언이 뒷받침되었다.
이들이 순교한 후 이정식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96)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 순교복자 기념관(현 오륜대 한국순교자 박물관) 뒷동산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이때 이정식 요한의 가족 이외 나머지 4명의 순교자들은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비만 건립하였다.
광안 성당은 1987년 6월 신자들의 헌금으로 이곳의 땅 160평을 확보하고 이듬해 7월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성역화에 착수하여 공사를 완공하고 그 해 9월 순교 기념비 제막식 및 현양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광안 성당은 2004년 7월, 성지에 대형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 14처, 이정식 등 8위의 위패를 설치한 후 축복식을 가졌다. 이들 중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오륜대에서 한국 순교자기념관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면서 11시 40분경 수영 장대 성지에 도착했다. 도심지역 아파트와 건물의 밀림지대에 싸인 곳이었다. 도심지의 섬과 같았다. 아치식 문을 통하여 들어오자 아담한 정원처럼 꾸며져 있다.
성지 내부는 먼저 잔디 마당 건너편에 야외 제대와 대형십가고상이 가운데 위치하고 그 왼쪽에 순교자 기념탑 조형물과 순교자 묘비가 있고 오른쪽에 장대 표지석과 코너에 성모상이 있다.
우리 이외의 순례객이나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벤치 위에서 지켜보고 계셨다. 할머니는 인근 아파트에 사는 천주교 신자인데 남편이 한때 성당 총회장으로 활동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혼자인데 틈만 나면 여기 와서 쉬고 기도한다고 한다. 할머니로 보아서는 이곳이 육신은 물론 정신의 휴식처가 된 것이다. 만약 이 성지가 없다면 할머니의 생활이 얼마다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 곱게 흘린다면 (수영 장대벌에서)
금련산 밑 장대벌 언덕에서
나는 피빛 밝은 적막에 들어
먼 꿈의 종소리 듣습니다
문득 가슴 서늘히 우거져
무덤들에 그늘 드리우는 아카시아나무
나는 가지 하나 붙잡고
먼지 한 점의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 이제라도 사랑에다 머리를 받아
피 곱게 흘린다면
나의 어둠도 한 점 향기일 수 있을까요?
맨살의 햇살들 맨살의 바람들 사는
여기 눈물 어리는 언덕에서
푸르게 번지는 미소의 하늘 봅니다.
끝없이 투명한 숨결 봅니다. (김영수)
수영 장대 성지는 순례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약 30-40분 지체 후 12시 좀 넘어 출발. 목적지는 이제 점심식사 할 곳이다. 인근이 광안리 해안이라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이며 찾은 곳은 수정궁 횟집. 코스로 1인당 40,000-50,000원. 우리로 봐서는 비싼 집이다. 하지만 이미 아는 분의 소개를 받고 온 집이라 나가기도 그렇고, 이곳이 광안리 해수욕장이라는 천금 같은 땅이고 보면 경치를 보는 것으로 비싼 식사대를 충당할 수밖에 없다.
조씨 형제 순교자 묘 - “형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네” |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이다.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인들을 징계하기 위해 떠나보낸 귀양길이 오히려 유배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
1801년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김해에 유배형을 받은 이학규(李學逵)에 의해 김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밀양 박씨 문중의 순교자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 가정의 선대(先代)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박대식의 부친 박만혁(?-1810년)이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詩禮里)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 · 대흥 · 대식 3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막내인 박대식이 1868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의 입교 이후 진례, 녹산, 노루목 등에 신자촌이 형성됐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밀양 단장(丹場)의 가물리와 법흥리 등에도 신자촌들이 더욱 번성했다.
조씨 형제 순교자 묘는 부산시 강서구 생곡길 26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분성(盆城) 배씨 문중의 선산이다. 배씨 선산에 왜 조씨의 묘가 있는가?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조석빈(曺錫賓, 1825-1872년?)과 조석증(曺錫曾, 1834-1872년?) 형제는 원래 뼈대 있는 유교 집안에서 자랐다. 둘은 창녕(昌寧) 조씨 김해파의 30대 손으로, 부친 조대연의 5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태어나서 천주교로 개종한 뒤 열심히 선교 활동을 했다.
조씨 형제는 체격이나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다 같이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문 서적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섰다. 그들은 생곡 고을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儒學)과 서학(西學)의 비교 연구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김해읍 왜장대에서 순교했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지만 결국 조씨 형제는 참수형을 선고 받았다. 관헌은 먼저 형 석빈의 목을 베고 나서 다시 동생 석증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참수되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참수된 형제의 시체는 버려졌다. 갈대에 싸인 형의 거구와 이엉에 덮인 동생의 왜소한 몸은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 하여 조씨 문중에서조차 받아들이기를 반대하여 선산에 묻히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고(故) 배문한(裵文漢) 신부의 3대조(祖)인 배정문(裵禎紋)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순교자 조씨 형제의 묘를 보호 · 관리해 왔다.
이것이 형제 순교자의 유해가 자기 문중의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배씨 문중 선산에 묻혀 있는 이유이다. 형 석빈은 자손이 없었고 동생 석증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그나마 아들 대(代)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한다. 그 후 이들 형제의 순교 사실은 배씨 집안을 통해 대대로 전해오다가 1989년 6월 19일과 20일 양일 간 부산교구에 의해 묘지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1995년 5월 29일 교구장 이갑수 주교의 집전으로 순교자 형제 묘소 단장 미사를 봉헌하였다. 형제 순교자 묘소 앞에는 묘비를 겸한 돌 제대를 세웠고, 1997년 11월 12일에는 부산교구 교회사연구소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 배문한 사제 사랑 기념사업회에 의해 묘소 주변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묘소 뒤 바위 위에 대형 돌 십자가를 세웠다. 또한 1998년 8월에 형제 순교자 묘 바로 아래에 있는 고 배문한 신부의 생가(生家)를 개수하여 순례자들이 쉬었다 갈 수 있게 강당과 방과 전시실도 마련하였다.
성지 마을에 도착하니 3시가 다 되었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입구까지는 좁은 골목 길이라 거기다 첫길이고 보니 오면서도 과연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되었다. 주차장에 가서야 안심이 되었는데 주차장도 그냥 차를 돌려나올 정도의 좁은 원형 공간이었다. 성지 입구표지판을 지나 그윽한 숲길을 완만한 오르막길을 한 참 걸어야 성지 안내판이 나왔다.
성지 안내판 내용은 대체로 앞에서 말할 바와 같다. 두 기의 묘지로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맨 뒤쪽 언덕 위의 큰 십자가 아래에 순교자 형제의 묘가 있고 앞에는 묘비를 겸한 제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제대 뒷면에는 배씨 후손인 듯한 분의 시가 한 수 새겨져 있다.
노을에 꽂힌 나무 십자가
상석도 없는 순교자가 묻힌
우리 생가의 대밭
나무 십자가 하나
노을 속에 꽂혀 있다.
입술 푸른
김해평야의 푸른 들
참신의 바람 곧추세우고
꼬리치며 달아나는
강물 위에 발톱 내미는
보잉 747기
잔등 빛내며 앉고 있다.
시, 배달순
십자가의 길은 앞서 말했듯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봉헌하고 사하구 하단 성당(下端聖堂) 반석회에서 건립했으며 조각은 최종자 레지나 수녀가 맡아서 세웠다. 손으로 쓴 배문한 신부 생가 안내문이 있다.
배문환 신부님 생가
내려오는 길에 육필 안내문에 의거, 배문한 신부님 생가에 들렀다. 순교자 묘지에서 조금 내려오면 바로 첫 집이다. 대문간에는 천주교우의 집 십자가 표지판이 붙어 있고 그 밑에 특이하게도 농학박사 배대한, 신학박사 배문한, 보건학 박사 배길한이라는 3명의 이름이 나온다.
그 밑에 봄비 배문한 신부 생가라는 문패가 있다. 봄비는 배문한 신부의 아호로 보인다. 세 분의 관계가 형제라는 사실은 집안 정원의 표지석으로 당장 알 수가 있다. 거기는 삼형제 박사 생가라고 써 있다. 그리고 생가의 당호가 慕園莊(모원장)인데, 모원(慕園)은 맏형 배대한의 아호이다.
삼형제박사 표지석 옆에 1996년 순교 2주기를 맞아 배문한 신부님의 두 형제분이 세운 순교비가 서 있다. 살신성인한 사랑의 성자 배문한 신부 순교비라는 표지석과 함께 순교비는 아래 커다란 비좌와 위의 몸돌 두 덩어리로 되었다. 오석 몸돌에는 “순교자의 피가 흘러흘러 나를 신자 되게 하고, 순교의 한이 맺혀맺혀 나를 사제 되게 하였도다”라는 신부님 육필의 비문이 있고, 그 아래 비좌에는 신부님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돌과 글씨가 구별되지 않아 읽기가 힘들었다.
비문에 의하면 배문한 신부님은 1934년 8월 경남 김해군 녹산면 생곡리(현 부산 강서구 생곡동)에서 출생했다. 1960년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61년 가톨릭 신학대학에 입학, 1964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으로 유학, 1970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1973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 후 여주 본당 주임, 광주 가톨릭대 교수, 서정동 본당 주임, 수원 가톨릭대학장 및 초대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1994년 8월 5일 강원도 삼척시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 3사람을 구하고 선종했다.
배문한 사제가 대학에 가서 교수님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 했다고 하니, 배씨 문중의 천주교 역사는 배문한 사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배문한 신부는 늦게 천주교에 입교했지만 입교 후에는 하루도 평일미사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월급을 타면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제의 꿈도 키우고 있었는데 때마침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님의 권유로 1961년 27세에 늦깎기로 가톨릭 대학에 입학했던 것이다. 이때까지 독실한 유교집안이었던 배씨 집안에서는 한 바탕 난리가 났지만 배 신부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검소하여 로마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 양복을 줄여서 입고 갔는데, 유학후 10년 만에 돌아 왔을 때의 옷이 바로 그 양복이었다고 한다. 직장에 다닐 때에도 월급을 타면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곤 해서 신부님이 되기 전부터 배문한 신부의 따뜻한 성품은 많은 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전날은 배문한 신부는 환갑일이었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는 신자분들이 환갑을 축하한다며 강원도 삼척으로 신부님을 초대했다. 초대에 응하여 바닷가에서 바다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중 물놀이하던 신자 3명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보고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어 그들을 구하고 배신부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하느님 품으로 떠난 것이다. 이야말로 살신성인이 아니겠는가?
이 밖에 근처에 또 하나의 기념비가 서 있고 연못, 장독대 등이 정겨운 시골집을 닮은 집안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 기념비도 순교비와 같은 양식이다. 위의 까만 오석몸돌에는 이해인 시인과 후손인 듯한 배달순이라는 분의 시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비좌에는 순교비의 아랫부분과 같은 약력이다. 끝에는 1996년 배문한 신부의 형인 모원(慕園) 배대한이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이 집은 배 신부의 형인 배대한이 관리하다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그분의 아들, 곧 배문한 신부의 조카가 돌보고 있다. 그분은 배 신부님이 살았을 적에는 사제 활동을 하시느라 자주 뵙지 못했는데 돌아가시자 관리할 사람이 없어서 당분간 이 집을 지키며 순례자들을 안내하고 집안을 정리한다고 한다.
배씨의 선대 조상은 순교자의 버려진 시신을 장례지내 주었고, 후손은 물에 빠진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참으로 덕을 쌓은 집안이 아닐 수 없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 했던가? 그래서 삼형제 박사가 났나 보다. 송나라 유학자 사마광은 후손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돈을 모아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자손이 능이 그 재산을 지키지 못할 것이요,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자손이 그 책을 다 읽지 못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남모르게 덕행을 쌓아 자손을 위한 계책을 삼음만 못하다.
순교자 묘소에서 배문한 신부 생가에 오는 도중에 우리처럼 전국 성지 순례를 다닌다는 분을 만났다. 지난 연말부터 지금까지 6개월 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풍찬노숙을 해가며 순례를 하여 거의 마쳐간다고 한다. 아무튼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완답을 목표로 한꺼번에 급속하게 마치고 보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몇 끼 먹어야 할 많은 음식을 한꺼번에 먹어서 소화가 될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을 것이다. 대화 중에 죽림굴이라는 이름도 벌써 기억을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벌써 오후 3시 30분. 원래 오늘의 목표는 지금까지 다닌 세 성지이지만 실제 오륜대 성지는 가서 본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 약간 둘러가더라도 밀양의 김범우 순교자 성지를 들르자고 의견의 모아졌다.
들길을 달려 거의 한 시간을 소요하여 4시 반이 되어서야 최초의 천주교 증언자 김범우 묘소가 있는 김범우 순교자 성지에 도착했다.
김범우 순교자 성지 - 한국천주교 최초의 희생자 |
김범우, 그는 누구인가?
김범우(金範禹, 1751~1787)는 1751년 서울 역관(譯官) 김의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때 천녕 한씨를 아내로 맞아 장남 인고(仁考)를 낳았다. 1773년 역과(譯科) 증광시에 합격하여 관직이 종6품 한학우어별주부(漢學偶語別主簿)에 이르렀다. 중인 신분임에도 학문을 좋아하여 우리나라 천주교 창설의 주역 이벽(李檗)과 친하게 지냈고, 그런 인연에서 그의 권고로 수표교(水標橋)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784년이었다. 이 해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한국인으로 첫 세례를 받은 해였다. 입교 후 천주교신앙의 열렬한 전파자가 되어 두 동생, 즉 이우(履禹)와 현우(顯禹)를 비롯하여 양반은 물론 같은 역관 집안에서 여러 사람을 입교시켰다.
천주교 교리 공부와 예배 장소를 구하기 어려웠을 때 그는 당시 명례방(明禮坊) 장례원(掌禮院) 앞에 있는 그의 집을 흔쾌히 제공하여 집회를 자주 가졌다. 1785년 그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 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정약용(丁若鏞) 삼형제 및 권일신(權日身)·권철신(權哲身) 형제 등 양반과 중인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강설을 듣고 있을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리가 도박으로 의심하고 수색한 끝에 예수 성상(聖像)과 천주교 서적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치게 되었다.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양반 자제들은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김범우와 최인길(崔仁吉)만을 가두었다. 이것이 1785년 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었다. 이에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李潤夏)·이총억(李寵億)·정섭(鄭涉) 등 5인을 거느리고 형조로 들어가 김범우와 같은 교인이라고 하며 성상(聖像)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형조판서는 그들이 사대부의 자제이므로 그들을 타일러 돌려보내는 데 그쳤고, 김범우만은 천주교 신봉 여부를 다짐하는 판서의 심문에 “서학(西學)에는 좋은 것은 많고 그른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여 끝내 유배되었다. 그가 소장했던 책자는 모두 형조의 뜰에서 불살라지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는데, 이것은 천주교를 공공연하게 공격하고 금한 최초의 공문서가 되었다.
이러한 사유로 명례방 공동체가 이루어졌던 김범우의 집 부근에 명동성당이 세워지게 되어 역사적으로 영광스러운 자취로 남게 된다.
김범우 토마스의 유배지는 단양인가? 밀양인가?
한국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1751-1786/1787년)의 묘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김범우의 유배지는 달레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근거하여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준비 과정에서 추적되기 시작하여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중 1989년 후손이 나타나면서, 가족에게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양(端陽)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송기인 신부와 김범우의 후손들, 그리고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 씨 등은 몇 년에 걸쳐 밀양과 삼랑진 지역을 답사하고 수소문한 끝에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손임덕, 당시 78세, 집안 대대로 묘지를 관리를 해왔음)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에 본격적인 묘 발굴을 시작하여 파묘한 결과 관 자리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돌 3개와 치아가 발견되었다. 이 돌은 순교자 황사영의 묘소 발굴 때와 같은 경우로 성물이 귀했던 박해시대에는 성물 대신 십자가, 나무묵주, 돌 등을 관 속에 넣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토된 유물과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 현양위원회에서는 이곳을 김범우의 묘로 단정했고, 김범우의 신앙과 생애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 논란은 끝나지 않고 있다. 서울대 정민 교수는 여러 가지 가족 문서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근거로 김범우가 죽은 곳은 밀양이 아니라 충청도 단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루 속히 의견의 일치를 보아야 할 것이다.
유배 이후 그의 삶은?
김범우의 묘가 있는 밀양시는 중부 경남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넓고 기름진 평야와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사명대사 등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특히 영남알프스 재약산(1,189m)의 표충사와 만어산(670m)의 만어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고찰(古刹)이기도 하다.
처연한 신세가 되어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만어산의 금장굴 부근에서 약 2년간 귀양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형조에서 받은 혹독한 장형(杖刑)의 여독으로 2년 정도 고생하다가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세상을 떠났다. 천주교 전래 이후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김범우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읍 굴암리(掘岩里, 현 용전리), 단장면 등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다. 결국 이 지역에 대한 천주교의 전래는 바로 김범우의 귀양살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최초의 순교자인가? 증언자인가?
한국교회 최초 순교자는 1791년 당시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전라도 진산 고을에서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이라는 것이 교회사학계의 통설이다. 2003년 9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펴낸 자료집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도 윤지충과 권상연이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김범우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분류되었다. 그 이유는 김범우의 직접적 사망 원인이 관청의 형벌 때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음에 있었다. 만약 유배를 떠나기 전 당시 관례적으로 당하던 장(杖) 60대의 형벌로 인해 그 장독이 악화되어 도착 즉시 죽었다고 본다면 장하치명(杖下治命)이라 하여 분명 순교라고 할 수 있지만, 도착한 후에도 2년 정도를 더 살았기 때문에 장형(杖刑)이 그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범우에 대한 학계와 교계의 평가는 순교자와 증거자 사이를 수시로 반복되어 왔으며, 아직까지도 논란의 문제로 취급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형벌을 받고 그 후유증이 직간접적 원인이 되어 사망한 김범우는 한국 최초 순교자로 공경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수십 년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 교황청에서 김범우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여부를 품의한 부산교구 측의 질문에 대해 순교자의 절차로 추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이는 교황청이 김범우의 직접적 사인(死因)이 장형(杖刑)의 여독(杖毒)이라고 인정한 셈이 된다. 이 경우 김범우는 교회의 최고 공식기관에서 인정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이다.
성지 조성과정
1989년 김범우의 묘를 발굴한 이후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순교자 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하였다. 묘역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제대와 1천여 평의 잔디밭을 조성하고, 도로변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산길에는 대형 원석에 그림을 새긴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다. 그리고 묘역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길목에는 20개의 돌에 한국 천주교회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록하였다.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묘역을 말끔히 단장한 후 2005년 9월 14일 부산교구 정명조 주교의 주례로 묘역 준공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2010년 11월 순례객들을 위한 김범우 순교자 기념 성모동굴성당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착수하여 2011년 9월 20일 부산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김범우 순교자 성지 주차장 부지 한편에 세워진 성모동굴성당과 사제관의 완공으로 순례객들은 날씨와 상관없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9월 14일 김범우 토마스 순교자 순교 230주년을 맞아 김범우 순교자 성지 내에 교육관 및 피정의 집을 건립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어서 성령의 길을 완공하며 순례자들에 대한 순교 정신 교육과 체험의 장이 되고 있다.
시복시성 운동의 전개
한편 김범우 토마스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추진하여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4위’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 추진 대상자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었다.
부산교구에서는 30여명의 순교자가 있었지만,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두 사람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고, 김범우 토마스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시복 청원을 하였다. 순교자 현양 위원회는 시복 청원 분위기가 고조되자 본격적인 묘지 작업을 진행, 2005년 9월 14일 김범우 묘역 준공 미사를 거행했다. 그 후 교회사 연구를 통해 유배지에서 신앙을 증거하다 죽은 이들도 순교자로 시성된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부산교구에서는 김범우를 증거자가 아닌 순교자로 시복 청원을 준비하고 있으며, 매년 김범우의 기일인 9월 14일에 김범우 묘역에서 기일 미사를 지내고 있다.
김범우의 묘는 현재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205-1(삼랑진읍 사기점길 50-100)에 해발 670m 만어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진입로 초입에 성지 표지석이 있는데 곧장 승용차로 오르면 금방 오를 수 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초입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며 오르면 지루하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곳의 십자가의 길 14터의 특징 은 각처가 엄청나게 큰 자연석 바위이다. 어떻게 이것을 요소요소에 운반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순교 그림이 신석기 시대 암각화와 같이 굴고 깊은 선으로 조각됐는데 마치 원시인들이 그린 추상화 같은 성격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포장길을 따라 묵상하며 묘소로 오르라고 안내되어 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는 서편 흙길로 묵주기도 20단을 바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오르기가 너무 죄스럽다. 흡연, 음주, 취사, 쓰레기와 관련된 주의사항도 있는데 순례자로서 이런 내용을 읽기가 공중화장실에서 주의사항을 읽는 것과 같이 마음이 불편하다. 평소 성지 순례를 하는 우리의 자세가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12, 13처에 이르자 성지의 건물 지붕이 보인다. 그리고 다 오르니 14처는 동굴 성당의 축대 옆에 호석과 같이 위풍당당하게 지키고 서 있다. 바로 보이는 것은 레지오 회합실 건물이다.
동굴사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동굴사원을 만들려면 인공동굴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위가 단단한 화강암이라서 석질이 연한 중국이나 인도처럼 석굴을 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인공적으로 돌을 쌓아 굴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석굴암이다.
이곳 동굴성당의 인공 돔의 형태와 목조 전실 건물이 너무나도 석굴암과 유사하다. 전적으로 석굴암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하지만 석굴암은 일본 사람들이 보수한다면서 시멘트로 발라버려서 지금도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어 기계를 작동하여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있다. 그런데 동굴성지는 어떤지 궁금하다.
안내판을 보면 이 동굴성당을 짓기 위해 1976년부터 부산 바다의 별 레지아 단장 김해걸(에로니모)의 주관으로 모은 7억 8,700만원을 공사비로 하고, 거기다 부산교구에서 봉헌한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 280만회, 그리고 레지오 마리애 단원의 이름으로 봉헌한 묵주기도 약 1억 2,000만단을 바쳤다고 적혀 있다. 이렇듯 성전 건립은 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동굴성전 아래 특별히 레지오 회합실 건물이 있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레지오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레지아는 레지오 마리애의 단위의 하나이다. 참고로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 체계는 꼰칠리움(Concilium),세나뚜스(Senatus),레지아(Regia),꼬미시움(Comitium),꾸리아(Curia), 쁘레시디움(Praesidium)이다.(위에서 아래로 순)
전실에는 궁서체 한글 액자가 걸렸는데 그 내용은 순교자 김범우의 묘를 발굴할 당시 순교자의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돌 십자가와 관련된 것이다. 액자 위에는 돌 십자가가 붙어 있다.
액자의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김범우 토마스의 선종 당시에는 성물도 귀했지만 세상에 드러내 놓고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거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신을 안치시킬 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 세 개를 모아 만든 십자가를 순교자의 머리맡에 두어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 평안한 안식을 기도 드렸던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신앙 중심의 장례 관습이었다는 것이다.
성당 안은 동굴이기에 창문도 없고 천장과 벽면에 아무런 장식도 시설도 없다. 희미한 불빛이 안온한 기분을 자아낸다. 휘황한 불빛이나 장식은 동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제대 벽에는 돌 십자가가 모셔져 있고 오른쪽에 성모님이 서 계신다. 교우석도 등받이가 없고 자리 수대로 방석이 놓여 있다.
밖으로 나와 동굴 성당 위 가장 높은 곳에는 교육관 및 피정의 집이 있어 올라갔더니 동굴성당 위에 십자가 잔디밭이 있고 정원이 꾸며져 있다. 높은 곳이라서 전망이 너무 좋다.
피정의 집 옆길로는 성령칠은 길이 있다. 이 길로 성령칠은을 묵상하면서 숲길을 가면 바로 이범우 토마스 순교자 묘로 이어진다. 어차피 순교자 묘소로 가야 할 바에는 이 길로 가서 나올 때는 아래의 큰길을 이용하면 좋겠다. 다음 이곳에 오는 순례객들에겐 꼭 이렇게 권하고 싶다.
성령칠은 길에는 말 그대로 성령이 주시는 일곱 가지 은사인데 조형물 7가지가 설치되어 있다. 지혜(sapientia), 통달(intellectus), 의견(prudentia), 지식(scientia), 용기(fortitudo), 효경(respectus) 공경(timor) -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이와 같은 은사를 내리지만 사람마다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을 더 많이 내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의견을, 또는 용기를 더 내린다. 그래서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라는 것이다. 저마다 장단점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이것이 더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성령으로 받은 능력은 자신의 것만은 아니다. 이는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다. 밝은 통찰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거나 굳건한 용기를 자신을 지키는데만 써서 안 될 것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많은 재물을 준 것은 혼자 누리지 말고 가난한 많은 사람과 함께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다.
다시 내려와서 넓은 길로 김범우 묘소로 향했다. 길옆에는 김범우 토마스 순교자를 영문으로 설명한 돌이 앉아 있다. 길 아래로는 못 가에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묘소로 오르는 길가에는 1784년 한국천주교가 시작된 이후 1886년 한·불통상수교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와 부산교구 역사 중 기념비적 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돌에 새겨놓았다. 무려 20개나 된다.
자연석 샘물 수조도 있다.
맏물이란 땅에서 수확한 것으로서는 첫소출이요, 가축으로서는 맏배, 곧 그 가축이 처음 낳은 새끼요, 사람으로서는 맏아들이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맏물이 가장 훌륭한 수확물로 간주하여 하느님께 바쳤다. 오늘날 봉헌금으로 바뀐 후는 그 의미가 사라졌지만 가장 훌륭하고 값진 것을 바친다는 정신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폐를 사용할 때는 새 돈을 바치고 여러 수입금이 있다면 중 땀 흘려 번 돈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높이의 산에 이런 넓은 광장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자 않을 정도로 정말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신 좋은 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넓은 터의 맨 위에 순교자 김범우의 묘가 위치하고 맨 아래에 맏물봉헌 제대가 이는 것이다.
묘 앞의 커다란 자연석 상석에는 正之 토마스 金範禹라고 새겨져 있는데 正之는 김범우의 자(字)이다. 호가 없어서 자를 대신 한 것 같다.
또 하나의 십사처 같은 조각화가 그려진 바위가 놓여 있고 피정의 집으로 통하는 성령칠은 길 입구가 있다.
차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로자리오 길 안내표지석 있는데 다 가지는 못했다.
그럭저럭 5시가 지났다. 돌아갈 시간이라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쉽다는 이유는 조용히 묵상할 길이 여러 개가 있었으나 시간에 쫒겨 하나도 제대로 걷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예정도 없이 찾아온 김범우 순교자 성지였는데 와보고는 꼭 다시 찾고 싶은 성지라는 생각이 든다. 모쪼록 시복 시성 운동이 성공하여 하루빨리 김범우 순교자가 복자품, 나아가 성인품에 오르기를 기도하며 발걸음을 돌림과 동시에 오늘의 순례도 막을 내린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