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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마가복음 16:1-16:20
제 목 :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0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0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0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0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0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0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0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0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0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1. 사람의 한계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위대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서 저의 숨을 거두어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며 사역의 완성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상에서 평안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위대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사람,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죄인의 길을 택했던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되는 위대한 역사가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죽음만 맞이하셨을 뿐이고, 아직 부활도 이루어지기 전인데 어떻게 부활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실 수 있는지 조금 궁금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완성의 시점은 죽음의 시점이 아니라 부활의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완성을 선포하셔야 하는 시점은 죽으실 때가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을 때여야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간밤에 기가 막힌 돼지꿈을 꾸고 로또복권을 샀습니다. 꿈 내용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1등이 될 수밖에 없는 아주 좋은 꿈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당첨 금액을 손에 쥔 것처럼 마냥 기뻐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기세등등하게 이런 저런 약속을 해댑니다. 집을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가게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기부도 많이 하고,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윽고 토요일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슴을 졸이며, 손에 땀을 쥐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복권 추첨 방송을 시청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는 꽝입니다. 일등은 고사하고 복권 값 본전마저 날려버리는 낭패를 보고 말았습니다. 혹시나 했던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그 사람은 완전히 실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딱 그런 형국입니다. 아직 부활도 안 하셨는데 이미 ‘다 이루었다’라고 완성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성격이 급하셨던 분이실까요? 예수님은 조금 전 복권의 주인공처럼 경솔한 분이실까요? 만약에 완성을 선포했다가 혹시라도 부활하지 않으시면 어쩌자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혹시라도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어쩌자고 이렇게 덜컥 완성부터 선포하시는 것일까요? 조금 궁금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서둘러 완성을 선포하셨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관점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만 합니다. 즉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누가 세웠고, 누가 그 계획을 실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계획 누가 세웠습니까? 사람이 세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죄와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 너무 고달프니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구원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죄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이 그저 불쌍해서 하나님 스스로 세우셨습니다. 예. 계획을 세우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계획을 성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모든 문제가 죄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모릅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추구하며, 시기와 분쟁, 갈등 속에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결코 모든 사람이 하나 되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각자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하나님 스스로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럼 이 계획은 이루어질까요,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진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계획이 세워질 때부터 완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계획입니다. 예. 사람의 계획은 끝까지 가보아야 결과를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마음을 먹은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럼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실까요, 안 하실까요? 당연히 부활하십니다. 말씀대로 죽으셨고, 말씀대로 부활할 것입니다. 예. 죽으실 때 이미 부활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반드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의 부활을 지켜보아라. 나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어라. 왜? 바로 나의 부활 때에 너희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예수님의 심정과 마음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 전에 어둠이 임하고, 죽음과 동시에 성소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보고, 그저 기이한 현상에 놀라기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 선하고 의로우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한 술 더 뜹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꽁꽁 동여맨 후 그 시신을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고, 그 무덤 문을 무거운 돌로 막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럴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제 완전히 죽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장사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네. 정말 예수님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은 있었나 봐. 그럼 살아난다는 말씀도 정말 이루어지는 것 아니야. 에이. 아닐 거야.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말씀만큼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었던 나사로도 살리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셨던 바로 그 예수님께서 수도 없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결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남은 살릴 수 있지만 스스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 그것이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도 모르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신지도 모른 채, 그저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인식, 자신들의 경험, 즉 자신들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2. 믿지 아니하니라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6:1-4],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디로 갑니까? 무덤으로 갑니다. 왜 무덤으로 갑니까? 예수님이 그곳에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갑니까? 향품을 가지고 갑니다. 왜 향품을 가지고 갑니까? 썩어가는 시신에서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면서 무슨 걱정을 합니까? 누가 무덤 문에서 돌을 치워줄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살아나리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 사람들은 전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막상 무덤에 도착해보니 이미 돌이 굴려져 있습니다. 아주 이른 아침 해 돋을 때에 서둘러 왔기에 누가 먼저 왔을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이쯤 되면 어떤 생각이 들어야 할까요? ‘혹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나? 정말 그의 말대로 살아나셨나? 그래서 예수님이 손수 돌을 치워놓으셨나?’ 이런 생각, 한번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예수님 살아나셨어요?’라고 외치며 무덤 안으로 반갑게 뛰어 들어갈 만도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6:5-8],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사람들은 그저 놀라고, 그저 무서워 떨고, 그저 도망만 할 뿐입니다.
왜 놀라고, 왜 무서워 떨고, 왜 도망할까요? 당연히 죽어 있을 예수님은 없고, 어떤 청년 하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 저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지금까지 행하셨던 예수님의 행동은 분명히 남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의 행동을 가까이서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살아나시리라는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모습을 직접 보이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도 믿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6:9-11],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예. 믿지 않습니다.
또 [마가복음 16:12-13],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다른 모습으로 보여 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삼년 넘게 동고동락 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마치 짠 것처럼 하나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모두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기준이 되어, 자기의 소견으로만 모든 상황을 분별하려는 죄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실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즉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마가복음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제자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보시고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몰라본다고,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제자들을 꾸짖고, 책망하고, 나무라고 있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십니까? 솔직히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마음먹는다고, 결심한다고, 결단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어져야 믿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해서 억지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강요된 믿음, 억지 믿음은 순수한 의미의 믿음, 온전한 의미의 믿음이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즉 믿지 않으면, 믿지 못하도록 만든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믿지 않는 상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책임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지 않는 제자들을 꾸짖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실까요? 예수님, 열 받으셨나요? 다시 살아나서 보니까 자신의 몸이 세마포로 꽁꽁 동여매져 있습니다. 한참을 걸려 세마포를 풀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열 받으셨나요? 또 무덤 문을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무거운 돌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간신히 그 돌을 굴려서 빠져 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열 받으셨나요? 그렇게 힘들게 빠져 나왔는데 막상 제자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전혀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마치 귀신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 받으셨나요?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겠다고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께서 그깟 세마포 때문에, 그깟 돌 문 때문에 화내실 분이 아닙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자신을 믿지 않았다고 진노하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들이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아시고 계셨고, 그런 죄인들이기에 자신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 죄인의 속성을 이미 다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럼 왜 성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꾸중, 꾸짖음의 목적이 무엇이지요? 꾸중, 꾸짖음 그 자체가 목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자녀를 꾸짖을 일이 있습니다. 왜 꾸짖지요? 자녀의 무지, 자녀의 실수, 자녀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내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녀로 알게 하는 교육이 병행되는 것입니다. 즉 꾸중은, 꾸중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것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똑같습니다. 성경은 꾸짖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책망이 아니라, 비난이 아니라, 나무람이 아니라 바로 교육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바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로 알게 합니까?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는지를 바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그 부활의 실체가 바로 제자들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고,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3. 복음을 전파하라
그렇게 가르치고, 설명하고, 설득을 하셨기에 그 다음 말씀 [마가복음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말씀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조금 전 살펴본 [마가복음 16:14] 말씀에서 꾸짖음이 설명, 설득이 아니라 진짜로 책망, 비난, 나무람이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마가복음 16:14]에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실컷 나무란 뒤에, 그 믿음 없는 제자들에게 [마가복음 16:15]에서 다짜고짜로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러면 온전하게 복음이 전파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제 막 군대에 입대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 머리 깎고 오늘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군대가 낯설기만 합니다. 자신이 군인이라는 것도 어색하기만 합니다. 군대에서 쓰는 용어도 익숙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 군인에게, 아직 총 한번 쏴보지도 않은 군인에게, 자신의 생명조차도 온전히 지켜 낼 수 없는 그 무능력한 군인에게 소총과, 총알과, 수류탄을 주면서 사흘 안에 적진지를 격퇴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이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그 군인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유능한 지휘관은 어떻게 합니까? 막 군대에 입대한 그 사람을 먼저 진짜 군인으로 만들어 냅니다. 군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히 가르쳐주고, 군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알려줍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훈련을 시켜서 진짜 군인이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에야 작전에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알아서 하라고 명령만 하는 게 아니라, 지휘관이 먼저 앞장서서 나가는 것입니다. 지휘관이 선두에 서서 직접 작전을 수행하며, 군인들로 자신을 따라오게끔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예수님께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아무렇게나 막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할 무렵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은 누구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진행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이미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이치로 [마가복음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명령, 예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4]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설득하면서, 너희가 온 천하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나 예수가 너희들을 그런 존재로 변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즉, 나 예수가 앞장서서 나아갈 터이니 너희는 나를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에 유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대위임 명령’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으로 우리에게 남긴 유언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지켜 행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숙제를 남기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미루시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포인트는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다. 그 모든 권세를 가진 자가 나 예수 그리스도다. 그래서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 [마태복음 28:18-20]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고, 우리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에게 맡겨진 과업이 아닙니다. 도리어 ‘너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너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내가 책임진다. 나에게는 그런 권세와 능력이 있다. 그런 권세와 능력을 가진 내가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하겠다.’는 예수님의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4. 복음의 내용
그럼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전하실 복음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온 천하 만민에게 전해질 복음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내용이 [마가복음 16:16-18],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대.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인이 되었대.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대. 그래서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죽으셨대. 그 사실을 믿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이래. 즉 의인이 되어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래.’ 흐름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 기쁨이 있습니까? 기쁨이 마음속에서 샘솟아 오릅니까? 복음입니다.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들으면, 들어보면 기쁨과 감격과 감동이 막 밀려와야 하는데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 이런 이야기조차 요즘 교회에서 들어보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훨씬 더 심오하고, 훨씬 더 멋있고, 아름다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현도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자신의 결심, 자신의 결단, 자신의 의지로 믿게 되어서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인 중에 먼저 구원을 찾아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조차 모르는 사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가장 간단하게 압축하면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고, 그 내용의 전개는 ‘찾아오신 하나님 - 떠나가는 사람 -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아주셔서 그 사람이 믿도록 만들어 주시고, 그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수단과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원한 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 내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 변화되어 있고,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로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변화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죄인에서 하나님의 성도로 변화된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귀신 쫓아 낼 수 있는 분, 계십니까? 방언 하시는 분, 계십니까? 뱀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분, 계십니까? 독을 드셔도 아무 탈나지 않는 분, 계십니까? 혹시 병든 사람에게 안수하면 그 사람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 계십니까? 거의 없으시네요. 그렇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도 여기에 해당되는 사항, 한 가지도 없습니다.
저, 귀신 쫓는 능력도 없고, 방언의 능력도 없습니다. 뱀은 먹어본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만져본 적은 없습니다. 독을 먹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고, 저로 인해 병 고침 받은 사람, 아직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저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가요? 저는 분명히 믿음이 있고, 분명히 침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표적은 저에게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는 가짜 성도인가요? 제가 받은 구원은 가짜 구원인가요?
표적이 따른다고 하고, 그 표적의 예로 이런 내용이 나오니까 우리는 이런 표적을 무슨 능력 같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기독교를 믿으면 무슨 신비한 능력 같은 것이 생기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예 대놓고 그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 능력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일까요?
기독교는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가 능력을 행하는 종교였다면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돌들로 떡덩이를 만드셨을 것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을 것입니다. 더 능력 있는 자가 되기 위해 천하만국과 그 영광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탄의 시험에 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절대로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는 종교,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표적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원리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성도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청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 즉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즉 성도와 죄인과의 관계로 확대하여 적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즉 믿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표적은 믿는 자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이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들어보시면 쉽게 납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타나는 표적 중의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이 말은 나 스스로가 어떤 외부적 요인에 의해 결코 귀신들릴 일이 없고, 또 나로 인해 누군가가 귀신 들릴 일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즉 나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시험에 들 일이 없고, 타인에게 시험 들게끔 하지도 않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새 방언을 말하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어라고 하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쓰는 방언, 그것을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내 자랑이었습니다. 남편 자랑, 아내 자랑, 자식 자랑, 돈 자랑, 지식 자랑. 예. 지금까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나의 의를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또 지금까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가시 돋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 나의 언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나의 말 속에 사랑이 넘쳐납니다. 당연히 나의 말 속에 상대방을 향한 존경이 넘쳐납니다. 예. 이것이 하나님의 언어, 새 방언입니다.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뱀을 집어 올리며,’ 담대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치사하게 살고 있는 자신, 옹졸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유익과 이익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유익과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지키려다 보니까 사람이 치사해지고, 옹졸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변화됩니다. 나의 유익과 이익에 앞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존재에게 치사함 있을 수 없습니다. 옹졸함 있을 수 없습니다. 담대함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예.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여러분, 그동안 상처 많이 받으셨지요? 그동안 섭섭한 일 참으로 많으셨지요? 그 동안 타인으로 인한 고난, 고통, 슬픔 정말로 많으셨지요? 이제 그런 상처, 그런 서운한 감정이 모두 사라집니다. 타인으로 인해 어떤 해도 당하지 않습니다. 왜? 그 사람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질, 사람의 속성, 사람의 한계를 다 인정해 주고, 다 수용해 주는 존재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내 자신의 변화가 타인을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나로 인해 속상해 하는 사람, 없습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 없습니다. 나로 인해 병 걸리는 사람, 없습니다. 정반대로 나로 인해 누군가가 기쁘게 살고 있고, 누군가가 즐겁게 살고 있고, 누군가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누군가에게 자유와 평안과 안식을 주고 있는 것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성도에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그게 뭐야?’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표적이야?’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별 것 아니네. 그것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거잖아!’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 마음먹고 한번 해보십시오. 사흘을 넘기나. 별 것 아닌 게 아닙니다.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이 내 마음에 들어와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도로 존재 자체가 변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표적입니다. 바로 이때 나 스스로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5.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럼 구원이란 게 그렇게 좋은 것인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요?’ ‘오늘 본문 [마가복음 16:16]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그것은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진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내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도 걱정 되잖아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 받는다고 되어있는데 걱정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만약 우리 아빠, 벌 받으면 어떻게 해요? 우리 엄마, 징계 받으면 어떻게 해요? 우리 가족, 심판 받으면 어떻게 해요?’ 여러분 오늘 성경을 잘 보십시오. 믿는 자의 표적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의 표적은 별도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별도의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믿는 자에게 일어나는 표적, 그 표적이 일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3:16]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대한민국 거의 모든 성도가 다 외우고 있을 정도로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결과가 임하는지를 선언한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씀보다 더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말씀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요한복음 3:17-18]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 성경은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것으로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추가적인 징계, 없습니다. 추가적인 심판,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으로 믿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만약 믿지 않는다고 추가적인 징계, 추가적인 심판이 내려진다면 그 징계, 그 심판 누가 먼저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걱정되시지요?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드려도 걱정되시지요? 아직 믿지 않는 가족, 아직 믿지 않는 친지, 아직 믿지 않는 친구가 있는데 여전히 그분들이 걱정되시지요? 그런 분들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께 권면하시는 게 꼭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뭐냐? 아까 말씀드렸던 표적대로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임한 표적대로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시험에 들지 말고, 타인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공동체의 유익과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해주고, 타인에게 자유와 평안과 안식을 주는 삶을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원리를 보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임한 표적이 똑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힘듭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마가복음 16:19-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여러분의 삶을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사 여러분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여러분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사 여러분께서 천국의 삶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시고, 도우시고, 또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나타난 표적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일어나도록 역사하실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소망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깨달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시는 다누림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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