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멜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용머리해안 입장권을 지불했다.
매번 산방산 바로 아래 입구에서 들어왔는데, 반대쪽으로 진입해보기는 처음이다.

일단, 우리 딸 좋아하는 아늑한 공간에서 귀여운 포즈로 시작~

서쪽에서 비껴 드는 오후의 햇살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용머리 해안을 수차례 왔음에도 불구하고
해안 절벽 전체를 걸은 적은 이날이 처음인가 보다.

유네스코에서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한 용머리해안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지형으로 수성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응회환(?)의 일부라고 한다.

수성화산이라~
용머리해안 설명 중에
"거대한 폭발을 한 산방산 주변의 작은 기생화산이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 급격히 식으면서 이루어진 지형"이란 구절이 있는데,
물과 만나 이루어진 화산이란 뜻인가?

약 80만년 전에 생성된 독특한 해식절벽으로
압도적인 규모 면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곳이라고.
800,000년..
80년을 사는 것도 버겁다고 징징거리는 인간과 달리..
자연은 기나긴 세월 동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풍경을 만들어왔다.

산방산을 뒤로 하고.

저 산 중턱에 있는 산방굴사가 근사했던 거 같은데,
60kg가 넘는 몸으로 대학교 수학여행 때 올라가던 사진 속의 내 모습 기억난다.. >.<

대학교 수학여행...스물 두 살의 나.
그때가 내 인생의 첫번째 무기력증을 앓던 시절이었다.
지지부지한 짝사랑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려놓았더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만사가 무기력해졌다.
그때는 내가 "노력하는 일이 뜻대로 안되면 무기력으로 반응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훌륭한 소울 메이트가 옆에서 도와주면,
그를 닮아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줄 알았는데,
제 아무리 옆에 훌륭한 롤 모델이 있어도,
정작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에는 소홀히 하고,
내 뜻대로 안되는 일에 이전에 했던 잘 안되는 방식으로 계속 매달리면 분노와 좌절감만 남는다는 것을..
이십년이 흘러, 마흔 두 살이 될 때까지도 몰랐다...

천 년, 만 년, 십만 년을 여덟 번이나 반복하면서 만들어냈을 이 진기한 풍경.
그 앞에서 불과 이십년 반복된 내 삶이 답답하로서니,
너무 책망하지 말자.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인 줄 잘 몰랐으니까.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하지만 나의 반복되는 화와 무력감은 너무 지겹다...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다.
안되는 일에 더이상 매달리지 않으면, 끝나는 걸까.
내 정신건강을 위해 매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깨끗이 포기할 수 있을까.
요르단의 페트라처럼 협곡의 막바지에 신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용암이 쓸고간 자리 어느 한 곳 신기하지 않은 곳이 없다.
용머리해안은 화산활동으로 생긴 층리의 연속적인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화산학의 교과서'라 불릴만큼 세계적으로 중요한 지질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내 마음대로 "올레 10코스의 하이라이트 구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지질트레일을 마치고,
산방산 아래에서 택시를 타고 송악산 아래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걸었으니 얼추 저녁 먹을 시간,
모슬포항에 맛있는 갈치국을 하는 식당이 있다길래 찾아갔는데, 빈 자리가 없었다.
유진이가 배 고프다고 성화를 하는 통에 인기식당을 굳이 고집하지는 않고, 바로 옆 식당으로~

얼갈이를 넣은 갈치국.
유진이 메뉴는 라면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설마 부대찌개는 아닐테고;;;
개인접시에 떠 놓은 무와 쑥갓을 보니 매운탕이고만~
전국 팔도 어디를 가도 김치찌개, 제육볶음~~ 바닷가는 매운탕~

저녁을 먹고 나니 해넘이가 근사할 것 같아 해지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유진이에게 석양을 보러 나가자고 재촉했으나,
차 타고 오는 잠깐 핸드폰 하느라 멀미가 났는지 배가 아파서.. 차 안에서 쉬셔야겠단다.
'그 놈의 배는 뭐 하기 싫으면 꼭 아프더라, 정말 코드 안맞아서 같이 못다니겠어~!'
속으로 갑자기 화가 나서 차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이게 바로 "나를 힘들게 하는 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딸의 기질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강요하는 내 모습.
스스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내 생활습관에서부터, 의사소통방식, 추구하는 가치관, 심지어 취향까지.
내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나와 유진이는.. 정말이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열 두살부터 해지는 풍경을 좋아했다.
너도 이걸 보라구, 그럼 엄마처럼 감성의 물결이 저 노을처럼 번져 온다고...!
이 사례는 사소한 취향을 내가 너무 강요한 경우지만
유진이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의 근본적인 갈등은
언제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유진이에게 고집한다는 점이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너는 네 인생을 살고, 나는 내인생을 사는 것이건만...
그 한 발짝 거리를 못둬서, 늘상 설득하다 지치고, 강요하다 화내고, 안바뀌니까 좌절하고..
나는 유진이를 만나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어쩌면 내 삶의 전환점을 만들려는 계기로
유진이에 대한 사랑을 도취적으로 끌어올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력감에 지치기 시작하던 이 무렵, 나는 내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무엇이 내 마음의 실체였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체가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잘했다고, 지금 가는 길이 나에게 맞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이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저 석양빛이 지금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 듯이.

마지막 날 숙소는 좋은 곳에서 묵고 싶다는 남편의 바램대로
부띠크 호텔을 검색하다 알게된 호텔 라림..
공교롭게도 첫 날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이응'이 있던 안덕읍 대평리로 다시 돌아왔다.

호텔이든 어디든 스마트폰 가지고 노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아는 정유진,
곧바로 스탠드 점등하시고, 핸드폰 놀이 시작..
주로 셀카 보정 및 정리(늘 수천장의 셀카와 연예인 캡쳐사진이 저장되어 있다),
카스 멤놀(아빠는 멤놀을 아시는지?), 카스 친구들의 포스팅 댓글 쓰담쓰담 되시겠다.
창밖으로 대평리 바다가 펼쳐져 있지만, 밤이라 깜깜~
유진이에게 스마트폰 중독이 있다면
엄마에겐 알콜 중독이...-.-;;
아빠는 음악 중독......
언제나 아빠는 옳으십니다.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딸은 외따로 떨어진 섬과 같이 있다 잠들고,
남편 취향의 구슬픈 음악과 술 기운에 기분이 잦아드는,
좀... 쓸쓸한 밤이 깊어갔다.
첫댓글 찾아보니 산방산과 그 부근은 수성화산활동(물과 마그마의 혼합으로 발생하는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곳으로 송악산 기저를 이루고 있는 암석은 수성응회암이며, 낮은 산 높이와 완만한 층리로 보아 응회환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응회환이 뭔가 다시 찾아봤더니 응회환은 마그마가 지하수나 지표수(바다, 호수, 하천등)을 만나 급격히 냉각됨과 동시에 수증기의 폭발적 팽창으로 잘게 부수어진 화산재가 화도 주위에 쌓여 고리모양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하네요. 용머리 해안은 대학교 1학년 처음 갔던 제주도 여행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엄한 풍경이었어요.
화산과 응회환에 대해서처럼 정해진 답이 있어 노을과 좌절과 사랑과 관계에 대해서도 간단명료하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만 당신은 지금까지 잘 해왔고, 그리고 지금도 잘하고 있으며 그리고 미래는 더더욱! 잘 해나갈 거라 믿는다는 말 전하고 싶어요. 완벽하거나 혹은 너무 높은 경지와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지금 공유하고 있는 많은 경험과 불화와 화해의 시간들이 결국엔 성장을 일구고 행복의 지평을 넓혀갈 거예요. 고통과 눈물 없이는 삶의 가장 의미 깊은 맛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고마워요.. 세탁기 빨래가 끝나는 소리와 함께 당신 댓글을 보고.. 빨래를 널면서 한참 울었어요. 나 역시 내 삶에 유진이가 없는 삶, 자식을 통해 내 인간성의 바닥을 맞닥뜨리지 않는 삶, 이런 분열이 없는 삶은 어쩌면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반쪽짜리 삶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자식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삶의 깊은 의미를 조금씩 더 경험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믿고 싶은 밤이네요..
근데 당신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장.. 무슨 주례사 같아요,,, 한구절만 빼면 좋겠어요;;;
크, 주례사라니! 역시 눈물과 자성과 따뜻한 위로와 그에 대한 감사..의 끝에도 결국 빠지지 않는 이런 비평과 지적질(으, 순화해야...)이야말로 딸기버스(와 저...;;) 의 특성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댓글이잖아요~
어머, 서랍은 이미 수정된 댓글을 읽었네~주례사 취소~~ (서랍이 웃을 줄 알았지.. 눈물이 울컥 쏟아지는데도 기홍씨 조목조목 만연체 또 나왔네.. 싶더라니~-..-;;) 분위기 안깨게 비밀댓글로 할 걸 그랬나~
나도 간단명료하게 쓰고 싶어요~ (언감생심이지만) 카이사르처럼~!!
경험과 불화와 화해의 시간들....좋아요.
용머리 해안 정말 멋져요.
어떤 곳은 사진이 참 멋지게 나오기도 하는데 그 곳은 사진이 아쉬운 곳이에요. 파노라마도 찍어도 만족스럽지 못한 가로본능"
어쨌거나 그 곳에서의 위로가 따뜻한 울림이 되어 남아있네요. 공감 동감 가득입니다. 죽을때까지 부족한 엄마, 부족한 사람이겠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나를 찾아가면서 조금씩 성장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멋진 풍광들을 가슴에 담고서..
죽을 때까지 부족한 엄마 되기 시로요.. ㅠㅠ 마흔 살이 넘도록 어렸을 때 자기 엄마가 얼마나 별로였는지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 그 엄마도 불쌍하고.. 그 사람도 불쌍하던데..
매우 부족하면서도 별로"는 아니라는 나르시즘이 있었나봐요. 우리집애들이 우리엄마 별로^라고 하면 완전 빈정 상할 것 같아요. (부족함을 아는 것만으로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