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9주의 비밀 계림과 금관』 머리말(초안) 소개
들어가는 글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러한 이치를 알아 때가 되어 일어나면, 영원히 전하여 줄 것을 후세에 나타날 은혜로운 학자들에게 간곡히 바란다(亦有望於後來之惠學者云).”
윗글은 『삼국유사』발문(跋文)에 나타나는 글입니다. 조선의 사관(史官)들이 어쩔 수 없이 본사(本史)와 유사(遺史)를 뜯어고치면서도, 동방(東方)의 역사가 잊혀질까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후세에 나타날 학자에게 한 오라기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윗글에서 번쩍이며 눈에 띄는 글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혜학자(惠學者)’였습니다. ‘혜(惠)’는 지혜(知慧)가 아니라 은혜(恩惠)를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까?
학자를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생각(生覺)하는 사유세계(思惟世界)가 놀랍기도 하지만, ‘혜학자(惠學者)’의 반열(班列)에 들 수 있는 분들이 다룰 수 있는 과제를 우주(宇宙)의 티끌 같은 본 연구원이 감히 주무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이 오싹하였습니다.
그간 몰입(沒入)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날이 밝았는지 밤이 깊었는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밥을 먹었는지 걸렀는지 전혀 관심이 가지 않을 정도로 본 연구원의 모든 역량(力量)이 집중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삼국사기』에 실린 기록들의 특징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명과 지명간의 거리에 관한 기록이 없다.
둘째, 일부 지명은 여러 개의 지명으로 표기하였다.
셋째, 일부 지명의 방향이 바뀌어져 있다.
넷째, 일부 사건의 발생연도가 바뀌어져 있다.
다섯째, 건국연도가 약 200년 늦추어져 있다.
여섯째, 일부 중요한 사건들이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곱째, 섬 ‘도(島)’는 강줄기로 구획 지어진 내륙이다.
여덟째, 일부 지명은 1512년 당시 조선의 지명이다.
아마도 누구든지 다시 『삼국사기』를 읽을 기회가 생길 때, 위와 같은 『삼국사기』서술(敍述)의 특징들을 고려하면서 읽는다면, 김부식 할아버지께서 1145년에 쓰시고 『삼국사기』원본(原本)에 실려 있었을 동방(東方)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生覺)합니다.
본 연구원이 이 책을 비롯하여 총 5권으로 구성된 『삼국사기 비밀코드』를 세트로 완성하게 된 동기는, 박사학위를 졸업하면서 공부한 것도 차츰 잊혀져 가기 마련이니, 위사(僞史)와 진사(眞史)를 분별하면서 고대(古代) 지명들의 위치를 찾게 된 근거와 논리들을 연구노트로서 남겨놓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마치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처럼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라고 격려해준 아내 전애리 회장님 덕택에 아무런 근심 없이 동방(東方)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환희(歡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수원 광교산 기슭에서
국선(國宣) 김진경
<고려 태조 남북통일 세력확장 추정경로>
<궁예와 견훤 반란 및 세력 확장 추정경로>
<신라 9주 추정지역>
<5가야 추정 삼각지대>
<고대 주요 지명의 본래 위치와 변이 추정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