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8왕자분봉설>의 출처
함양박씨 임원,이사회

<영명재의 속함대군>의 파일 첨부 합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壬寅譜 國譯文
박승건(朴承健) 1662년발행
신라팔대군 형제분봉(新羅八大君兄弟分封)
밀성군 밀양(密城君 密陽) 사벌군 상주(沙伐君 尙州)
완산군 전주(完山君 全州) 죽성군 죽산(竹城君 竹山)
속함군 함양(速咸君 咸陽) 강남군 순천(江南君 順天)
고양군 고령(高陽君 高靈) 월성군 경주(月城君 慶州)
신라시조혁거세의 성은 박(朴)씨이니 한선제(漢宣帝) 오봉원년(B.C 56년) 갑자 하(夏) 4월 병진에 계림에서 즉위하여 무진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이하여 자손들이 점차 번창하여 옛날에도 보기 드물 만큼 수가 많아졌으며 동방의 박씨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에 전(傳)하기를 8대군(大君)을 분봉(分封)하였다는 설(說)이 있으나 고증(考證)할만한 문헌(文獻)이나 증거(證據)가 없어서 어느 시대에 분봉(分封)하였는지 어느 왕(王)의 아들인지 알 수가 없다.
동사를 살펴보면 석탈해(昔脫解)를 남해왕의 사위로 올바른 유명(遺命)을 받을지 아니하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종척(宗戚)인 박씨들을 내보내서 주(州)와 군(郡)을 다스리게 하니 대개 경원(敬遠)하는 뜻이다.
그 시대의 사람이 주군(州郡) 군주(郡主)의 말이 있었으니 대군(大君)을 분봉(分封)했다는 것도 이때 일인지 알 수 없다. 8대군의 후손이 비록 성쇠(盛衰)함은 같지 않으나 지금 모두 세족으로 칭하고 그 외의 박씨도 모두 신라를 근본하여 대대로 관면(冠冕)이 이어진 집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석(昔)씨만은 나타남이 없으니 천도(天道)가 어긋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리고 분봉한 차례는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여 위와 같이 기록한다.
(出處: 密陽氏族譜 1662년 壬寅譜)
新羅八大君兄弟分封
密城君 密陽 沙伐君 尙州 完山君 全州 竹城君 竹山
速咸君 咸陽 江南君 順天 高陽君 高靈 月城君 慶州
新羅始祖赫居世姓朴氏漢宣帝五鳳元年甲子夏四月丙辰卽位于鷄林戊辰納閼英爲妃爪瓞之綿古所罕有東方朴此其始也 世傳有八大君分封之說而文獻無徵未知分封在於何代而大君是何王之子也
按東史昔脫解以南解王女婿因亂命而立出遣宗戚朴氏分里州郡盖遠之也時人有州主郡主之語八大君分封或在於是時歟八家之後雖有盛衰之不同皆以世族稱之其他姓朴氏皆本於新羅奕世官冕之家指不少屈而昔氏無聞焉天道之不爽有如是夫分封次序謹依世所傳者列錄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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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의 8공자분봉 사실인정이 않되고 있는데 1662년 밀양박씨임인보에 8대군조작이 되었고 1760년에 박세욱이 이를 추가미화하고 박치화가 협력발표한것이 확인되었는데 경명왕의 8대군분봉사실은 밀양박씨들의 조작극으로 확인이 되었는데 공식적으로 인정할수 없는 투쟁을 합동으로 전개 할것을 제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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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년(현종 3) 박승건(朴承健)이 간행한 밀양박씨의 족보. 분량은 1책이며, 호남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표제는
“밀양박씨족보”, 판심제는 “밀양세보(密陽世譜)”이다. 크기는 반곽 가로 19.5cm, 세로 24cm이며,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박승건의 발문에 따르면, 밀양박씨는 구보가 있었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전해지지 않자 박승건의 아버지 박안성(朴安性)이 동종의 합의와 충청감사 박계현(朴啓賢)의 도움을 바탕으로 1621년(광해군 13) 에 족보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신유보(辛酉譜)이다.
그러나 이 신유보는 상당수의 후손들이 누락되는 등 미비점이 많아 박안성은 보유작업에 착수하여 원고를 정리하였으나 간행하지는 못했다.
이에 그 아들인 박승건이 전라도 판관으로 부임하여 밀양박씨 외손이던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전적인 협조를 받아 간행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족보는 사실상 신유보의 개간본이며, 편찬자는 박안성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신라팔대군형제분봉연혁(新羅八大君分封沿革), 보도(譜圖) 상·중·하, 발문(跋文)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지의 우측에는 묵서(墨書)로 “강희 원년 임인에 간행했다(康熙元年壬寅刊)”라는 간기가 표기되어 있다.
신라팔대군 형제분봉연혁은 신라 경명왕의 8대군의 분봉 사실과 이를 바탕으로 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을 약기한 것이다.
장자 밀성군(密城君)은 밀양박씨의 시조, 2자 사벌군(沙伐君)은 상주박씨의 시조, 3자 완산군(完山君)은 전주박씨의 시조, 4자 죽성군(竹城君)은 죽산박씨의 시조, 5자 속함군(速咸君)은 함양박씨의 시조, 6자 강남군(江南君)은 순천박씨의 시조, 7자 고양군(高陽君)은 고령박씨의 시조, 8자 월성군(月城君)은 경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견해인 바 박씨의 분파연혁이라 할 수 있다.
보도는 6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字標)가 매겨져 있다. 총 수록 대수는 16대로서 上에는
1대 박현(朴鉉: 司憲糾正)에서 6대까지, 中에는 6대에서 11대까지, 下에는 11대에서 16대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족보는 1대 박현의 후손들을 최대한 수렴하고 있지만 박현의 현손 박강생(朴剛生)의 3자 의문(疑問)·절문(切問)·심문(審問)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중에서도 절문→중손(仲孫:默齋)계열, 심문→원충(원충:判官) 계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시기 다른 족보류와 마찬가지로 본손은 물론 외손·서자녀들까지도 수록되어 있다. 외손은 수록 대수에 있어 본손과 동일한 비중을 보이고 있으나 서자녀는 대체로 당대 또는 자녀대에 한정되고 있다.
다만 자녀의 등록 순서는 출생순이 아닌 철저히 선남후녀(先南後女)의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이 시기 다른 족보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개인에 따라 상략(詳略)이 심한 편이다. 12대 이전 대수에는 크게 현달한 인물이면 자(字), 호(號), 생년(生年), 과거(科擧), 관직(官職), 졸년(卒年), 시호(諡號), 묘소 위치, 배위(配位)의 성관(姓貫)과 처부의 이름 등이 기재되었다.
그러나 그 이하 대수로는 비록 문과를 거쳐 고관을 지냈더라도 과거와 관직만 간단하게 기록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박계현(朴啓賢)·박안세(朴安世)·박승종(朴承宗)·박자흥(朴自興) 등 극소수 인물에 한하여 졸년, 향년(享年), 묘소위치, 배위관계 등이 부기되어 있는 정도이다. 사위와 외손은 거의 대부분 본관(本貫)조차 표기하지 않았다.
이 족보는 신유보의 미비점을 수정·보완한 개간본이라는 점에서 일차적인 의의를 발견할 수 있고, 자녀 등록에 있어 선남후녀의 형태가 비교적 빨리 나타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유보와의 상호 대비를 통해 차이점을 검토해 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의 하나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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