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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최우식목사/가시나무를 대신한 잣나무/사 55:6-13
2013. 1. 6. 신년주일에
* 아가사르의 설교를 보충한 것임.
1980년대 초반 ‘시인과 촌장’의 멤버로, 아름다운 가사와 곡으로 사랑을 받았던 하덕규가 만든 <가시나무>는 대중가수 조성모가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입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에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암울했던 1980년대를 보내며, 무의식 깊은 곳까지 상처를 입은 젊은이들의 속마음을 드러낸 가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노래는 복음성가로 불리어져 많은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내 마음이 가시나무와 같아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이 없는 절망과 어둠, 슬픔 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내가, 내 마음이 가시나무 숲이 되어서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이웃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신앙고백과 같은 노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교만과 탐심, 거짓과 미움, 비방과 조롱, 이기심과 시기 질투 등 온갖 죄악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행복과 축복을 가로막는 온갖 죄악들입니다.
기쁨과 행복과 축복을 날려 보내는 가시나무가 내 자신의 마음에는 없는지?
내 가정의 기쁨과 행복을 앗아가는 가시나무는 없는지?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처럼, 교회를 찾아온 성도들에게 가시나무 같아서 형제자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것들은 없는지?
더 나아가 이 나라 백성들의 마음과 생활을 아프게 하는 가시나무 같은 존재들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가시나무의 또 다른 의미를 구약성경 삿 8-9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부터 3,160여 년 전, 수십만의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기드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뽑힌 300명의 용사만으로 이들을 간단히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나와 내 아들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않겠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리라”(8:23)며 단호하게 이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왕이 없이 지냈지만, 백성들은 태평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죽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드온이 생전에 아내를 많이 두어 자식들이 무려 70명이 되었고, 세겜이라는 곳에 첩을 두어 아비멜렉이라는 아들도 두었습니다.
기드온이 죽자, 세겜의 첩에게서 나은 아들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 싶어서 어머니의 고향 세겜으로 달려갑니다. 그 곳 고향을 정치기반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거기서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70인이 다스리는 게 좋으냐?, 아니면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게 좋으냐?”고 물으며,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고 은근히 협박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내세운 같은 고향 사람, 골육지친, 한 형제라는 말에, 아비멜렉에게 정치 자금으로 은 70개를 후원합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정치깡패들을 매수하여, 자기 형제 70인을 모두 한 장소에서 한 칼에 죽여 없애버립니다. 오직 막내아들 요담만 숨어 있다가,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후 ‘세겜 사람에 의해 아비멜렉이 왕으로 세워졌다’는 소문을 듣고,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가 외친 내용이 나무들을 이용한 우화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숲 속의 나무들이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무들이 감람나무에게 절하면서 ‘우리를 다스려 달라.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감람나무는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직분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할 수 없다.’며 겸손하게 거절합니다.
이번에는 나무들이 무화과나무를 찾아가, 왕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무화과나무도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것을 버리고, 내가 나무들 위에 요동할 수 없다.’며 공손히 거절합니다.
그러자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를 찾아가서 요청했습니다만, 포도나무도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할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가서, ‘우리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가시나무는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불을 내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불살라 버리리라.’고 협박하며, 왕이 될 것을 말했습니다.”
요담은 이 우화를 통해,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처럼 백해무익한 존재인데,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동향이라는 이유로 해서 어리석게 지도자로 선택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멸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시나무 같은 자인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는 너희들의 골육지친, 한 형제다.” “나는 너희들과 고향이 같다.”는 아비멜렉의 말 한 마디에, 모든 세겜 사람들이 넘어갔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격이 전혀 없지만, 혈연과 지연에 호소함으로, 협박 공갈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혈연이나 지연 등으로 권력을 수탈하려는 자들은 가시나무 같은 자들입니다.
또한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하여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은 가시나무 같은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에게 이러한 정치자금을 대준 세겜 사람들 역시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가시나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의 말을 보면, ‘아비멜렉이 왜 가시나무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나무들이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는 말에 아비멜렉은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며 거만하게 말합니다.
‘그늘’은 보호를 말합니다.
가시나무에 그늘이 어디 있습니까?
가시나무는 본래 땅에 낮게 번식하기 때문에, 그늘이 생기지 않습니다.
있다고 한들, 쉴만한 그늘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시나무는, 지키지도 못할 공약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다.”는 막말로 협박 공갈을 퍼부었습니다.
사실 가시나무에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거대한 백향목까지 태워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가시나무는 극히 해로운 나무로 저주와 황폐와 고통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잣나무가 대신하여 날 것이라”(사 55:12-13) 선포하십니다.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가시나무 대신 잣나무가 자라게 해서 기쁨과 평안함, 그리고 행복과 축복이 충만하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잣나무가 “기쁨과 평안함, 그리고 행복과 축복의 상징”이 되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노아 때 홍수로 심판 하실 때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방주를 잣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쓰인 일부 재료가 잣나무였습니다.(왕상6:15, 34)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 찬양하는 악기들을 모두 잣나무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삼하6:5) 이처럼 잣나무는 구원의 기쁨과 하나님의 축복과 평안함을 상징하는 나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잣나무는 5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잣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입니다.
둘째, 잣나무는 방주를 만들고, 성전 건축과 악기에 쓰였던 것처럼, 나무질이 단단하고, 견고하며, 내구력이 뛰어납니다.
셋째, 잣나무는 은은한 향기를 내기 때문에 썩는 냄새를 방지해주어 고대 미이라 관을 만드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넷째, 잣나무는 다른 나무와 달리 위로 곧게 자라는 특징이 있어 뒤틀리거나 휘어짐이 없습니다.
다섯째, 잣나무는 귀한 열매를 맺습니다.
잣나무가 상록수인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잣나무의 견고한 내구성의 특징은 어떠한 환난과 핍박, 시련이 와도 변함이 없는 굳건한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잣나무의 은은한 향기는 ‘부패를 방지할 만큼 썩어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잣나무가 위로 곧게 자라는 특성은 정직과 진실함을 의미합니다.
잣나무의 귀한 열매는 삶의 귀한 결실입니다.
그러므로 잣나무의 특성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잣나무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쁨과 평안함, 그리고 행복과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대신 잣나무가 나려면”
첫째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즉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모든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배가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여 높은 파도와 싸우다가, 겨우 어떤 무인도에 도착하였으나, 배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뒤여서, 할 수 없이 승객들은 이 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무인도에서 몇 달 동안 살 수 있는 식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땅은 비옥해서 씨앗을 심기만 하면 몇 달 후에는 풍성한 식량을 추수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땅에 황금 덩어리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다른 곳에도 황금이 있는가?’ 해서 동분서주했습니다.
몇 달 후에 황금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 그들의 식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밭에 나가 땅을 일구어 씨를 뿌렸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파종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을 바라보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 먼저 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황금에 눈이 어두워 굶어죽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호흡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고, 하나님을 부를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146:4) 그러므로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찾을 때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150:6)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코에 호흡이 있는 지금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수 있는 지금 기도하시고, 예배드릴 수 있는 지금 철저하게, 온전하게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성수, 십일조 할 수 있을 때 온전히 주일성수, 십일조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전도하고, 봉사할 수 있는 지금 전도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회개할 수 있는 지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시고, 여러분의 회개를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의 전도와 봉사를 기뻐하십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고, 능력 주셔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만한 때’입니다.
막10:47-52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다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란 말을 하자, 듣고 지체 없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자, 더욱 크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결국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 겉옷을 내버리고 급히 예수께 오니,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않고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자, 소경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니,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기에, 하나님을 부를 때입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므로, 한 순간에 그의 인생이 행복과 축복으로 변화 받은 것처럼, 여러분의 삶에도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기쁨과 축복의 잣나무가 무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잣나무가 나게 하려면”,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보면, 오늘 말씀은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않았거나, 하나님을 믿다가 그 믿음을 버리고 떠났거나,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믿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신, 초대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넓게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떠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는데,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는 드리지만, 이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말하고, 제멋대로 계획하고 살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이 말씀에서 “그 길”이란, 방법을 말합니다.
‘너희가 사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행동하는 방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정직하고 진실 되게 살려 하지 않고, 남을 속여 손쉽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삶의 방식,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으려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취하려는 삶의 방식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분명히 알고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고, 제멋대로 제 방식대로 살아서 성공하고 대박을 터뜨렸다 해도,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7:24-2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잣나무가 나게 하려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사는 방법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일치하는가?’를 먼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고 사는 방식이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에 일치하십니까? 아니면 혹시 여러분이 생각하고 사는 방식이 때로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낫다’고 여기십니까?
죄수 한 명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거물급이라, 그에게 오고가는 모든 편지는 교도관의 검열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내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당신이 없으니, 밭에 감자를 심어야 하는데, 일할 사람이 없어서 너무 힘들어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죄수는 아내에게 ‘우리 집 텃밭에는 많은 금괴와 총기가 묻혀 있소. 그러나 절대로 파면 안 되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며칠 후 아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여보, 큰 일 났어요. 수사관 수십 명이 집에 들이닥쳐 우리 텃밭을 모두 갈아엎었어요.’
죄수는 다시 아내에게 답장을 썼습니다.
‘그럼, 이제 얼른 감자를 심어요.’
교도관의 생각을 뛰어넘는 거물급 죄수다운 발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수하고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이나 세상보다도 우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내 길과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를 향해 절하는 꿈, 하나님께서 주시는 엄청난 성공과 축복을 약속하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창37장)
어린 요셉은 아마 그 꿈으로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앞길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에 전혀 맞지 않게도,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노예 생활 중 ‘언제나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방은커녕 요셉으로 하여금 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하여 감옥에 갇히게 합니다.
요셉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요셉을 감옥에 갇히게 하시므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는 계기를 만들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감옥에서 만난 궁중 관리의 꿈을 해석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왕을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므로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을 고센 땅에 이주시켜 이스라엘 민족을 번성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데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추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내 생각에 하나님의 생각을 맞추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어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7:5-7)고 했습니다.
낮고 천한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각, 성령의 생각으로 사는 신앙생활로 여러분의 삶에 생명과 평안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높고 나은 것임’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10-11절에서 확실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늘에서 비나 눈이 내려 그것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없습니다.
비나 눈이 땅을 적셔 뿌려진 씨가 움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는 종자가 되며, 양식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의 뜻을 이루고, 모든 일에 형통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2013년에는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맡은 바 직분과 사명에 충성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 맡은 바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불행과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잣나무가 나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깨닫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과 사명을 다 하여 충성할 때 형통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금년 2013년 한 해 동안 내 생각, 내 뜻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따라 사는 신앙생활로 성도 여러분의 삶에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 잣나무가 나는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