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성진출생이며 그때는 북조선의 정권이 수립되기 전이다. 직계 가족들이 거주한서울에서 성장하였다. 학창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대학교 때 '히식스(He.6)'의 멤버로 스카우트되어리듬 기타를 치며 인기를 끌었다.히식스는 〈초원의 사랑〉과 〈초원의 빛〉 등의 곡으로 명성을 얻었다.
1974년최헌은 새로운 멤버 7명으로 '검은나비'를 결성했다. 최헌은 허스키하면서도 구수한 목소리로 김홍탁 작곡의 〈당신은 몰라〉라는 곡을 발표해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1976년에 새로운 그룹 '호랑나비'를 결성하여 〈오동잎〉이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국민적 애창곡 중 하나가 되었다.
1977년에 솔로로 전향하여1978년에 〈앵두〉라는 곡과1979년〈가을비 우산속〉이라는 곡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그 인기를 등에 업고 서울 종로 단성사 극장에서 최초의 리사이틀을 한 가수가 되었다.
그 뒤 활동을 접었다가1984년에 '불나비'를 결성하여미국팝가수인버티 히긴스(Bertie Higgins)의 〈카사블랑카(Casablanca)〉를 번안곡으로 발표해 활동하였으며, 2000년대에는 〈돈아돈아〉라는 곡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밖에도 드라마 OST에 참여하고드라마에텔레비전 연기자로써도 출연하였으며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2011년 5월식도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2012년9월 10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65세.
한
시대를 풍미했던 6070 가수의 안타까운 별세 소식이 안타깝다.최헌 님이 작년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모두 암 때문이다. 최헌 님은 후두암을 극복하기 못하고
결국 우리를 슬프게했다. 그의 나이는 아주 한창 때인 64세의 일이다.
194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헌은 명지대 경영학과
재학 중 미8군 록밴드 차밍 가이스의 멤버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70년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 1등을
차지했던 인기 록밴드 ‘히식스’의 세컨드 기타 김용중이 탈퇴를 해 2기 세컨드 기타겸 리드보컬로 영입되어 ‘물새의 노래’,
‘초원의 빛’을 히트시켰다. 그의 히트곡 ‘당신을 몰라’도 이미 히식스 시절에 발표했던 곡이지만 당시에는 히트가 되지는 않았었다.
HE6의 주 무대는 서울 명동의 오비스 캐빈. 당시 이곳은 2층엔 포크, 3층에선 록을 연주했던 전문 음악 감상실로
젊은이들의 명소로 명성이 자자했다.
3층 입구에는 실물크기의 대형 캐리컬쳐가 6장이
걸려있었다. 바로 오비스 캐빈의 대표 록그룹 HE6멤버들이었다. 최고라는 자존심을 지녔던 록그룹 HE6는 콘서트형식으로만
연주할 뿐, '사운드를 받쳐주지 못하고 음악적 컨셉이 아닌 오락 위주의 TV프로그램엔 출연하지 않겠다.'는 거부선언을 했던
이들이었다.
이런 자존심은 대학생들과 젊은 층의 더욱 절대적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냈다. HE6는 TBC TV의
쇼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긴 했지만 방송 같은 미디어매체보다는 팬들과 직접적인 대면이 가능한
콘서트를 선호해 전국대학가를 돌며
순회공연을 벌였다. 1970년 춘천의 성심여대 공연때는 강의실 책상에 멤버 이름이
도배되어 있을 정도로 HE6는
여대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기성세대들이 장발문화를 주도했던 대부분 록그룹들을
퇴폐의 으로 단속했지만 이들은
짧은 머리 깔끔한 복장으로 오히려 사랑받았던 특이한 그룹이었다.
히식스 이후 그의 짙고 굵은 목소리는 삽시간에 대중음악
팬들을 매혹했다. 1973년 ‘검은 나비’를 결성해 히식스시절에 불렀던 ‘당신은 몰라’를 다시 불러 히트시키며 최고의 남성
보컬리스트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여성보컬리스트 김추자와 검은나비 최헌은 서로 히트곡을 바꿔부르는 진귀한
음반까지 발표되었다.
신문기사들을 보니 1977년부터 솔로가수 생활을 시작했다고 적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1973년에
조동진 곡 '들리지 않네'를 불러 이연실과 스필릿 앨범으로 음반이 나왔었다. 그러니까 히식스 이후 검은나비 시절부터 솔로와
록밴드 활동을 병행했는데 1975년 서라벌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솔로 1집 수록곡 오동잎과 세월이 큰 반응을 얻기 시작했고
대마초 파동으로 록밴드 검은나비가 해체된 후 1976년 록밴드 ‘호랑나비’를 만들어 리듬감이 탁월했던 ‘어쩔수
없어’를 빅히트시켰다.
고인은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와 매력적인 외모 덕분에
70년대 '로맨스 가이'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그의 음악인생에 있어
정점은 1978년 mbc
10대가수상에서 가수왕, TBC(동양방송)
'방송가요대상' 최고가수상에 등극했을
때일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 사상 록밴드 보컬 출신으로는 가수왕에 등극한 것은 최헌이
최초다. 70년대에 록밴드 출신인 조용필, 윤수일, 함중아등이
10대가수에 선정되었고 조용필이 일인독주태세를 갖추며 가수왕을
독식햇던 것은 80년대의 일이다.
그의 노래들은 대부분 록
감성을 기초로 만들어진 진한 발라드 곡이었다. '세월',
'어찌합니까', '순아', ‘구름 나그네’ ‘앵두’ ‘가을비 우산 속’ 등
그는 이후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했다. 1979년 빅히트곡인 ‘가을비
우산속’는 석래명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탄생되기도 했다.
밴드를 향한 열정은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쉬이 꺾이지 않았다. 1983년엔 그룹 ‘불나비’를 결성해 미국 버티 히긴스의
번안곡 ‘카사블랑카’를 발표해 히트했다.
1981년 결혼 후 연예인 생활이 싫어 한때 퇴계로에서
오디오 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3년 만에 그룹 '불나비'를 결성, 번안곡 '카사블랭카'로 컴백했다. 원곡을 부른 미국가수보다
더 근사하게 번안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한동안 카사블랑카는 당대 대중에게 널리 애창되었다. 2000년대에도 '돈아
돈아'(2003), '이별 뒤에 남겨진 나'(2006), 식도암이
발견되기 2년 전인 2009년에도
‘울다 웃는 인생’을 발표하는 등 음악적 열정은 식지 않았었다.
가수왕에 등극했을 정도 인기가수였지만 최헌은 권위적이거나 거만하기
보단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로 기억된다. 보컬리스트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기타 연습을 더 열심히 했을 걸'
후회하던 그의 록 음악에 대한 열정이 생각난다.
우리는 아름다운 가수를 잃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다. 그가
떠난 어제는 하루 종일 아침부터 스케줄이 많아 이제사 겨우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블로그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