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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선일보》(朝鮮日報, 영어: The Chosun Ilbo)는 대한민국의 신문 출판 기업인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영어: Chosun Ilbo Corporation)가 대한민국에서 발행하는 보수성향의 조간 일간지이다.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다. 조선일보사의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 있다. 현재 대표이사는 방상훈 사장과 홍준호 부사장이다.
대한민국 신문 구독률 36.8% 가운데 조선일보는 11.9%를 차지하였으며, 구독점유율은 24% ~ 30% 로 나타나고 있다. 특정 신문 구독 여부에 관계없이 지난 일주일간 어떤 신문의 기사를 봤는지를 알아보는 주간열독률 조사에서 조선일보의 열독률은 16.2%였다. 2009년 한국ABC협회가 실시한 집계에서 발행부수 1,844,783부로 집계되었다. 2011년 기준으로 유료 발행 부수는 1,353,159부였다. 2011년 7월부터 가판 가격이 인상되어 현재 부당 800원이나 월 구독료는 15,000원으로 변함없다.
한국ABC협회가 2013년 발행·유료 부수 현황을 공개한 자료에서 조선일보는 177만부의 공식 발행 부수를 가진 국내 최대 신문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료부수 100만부가 넘는 신문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일보'는 발행 부수 176만9310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중앙일보(129만2498부)·동아일보(106만760부)·매일경제(83만6316부)·한국경제신문(51만7193부) 등의 순이었다. 실제 판매량을 집계하는 유료 부수에서도 '조선일보'가 1위(132만5555부)였다. 2·3위인 '중앙일보', '동아일보'와는 각각 41만, 57만부 격차였다.
평가 지표
2014년 시사저널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전문가 설문조사의 언론 매체 영향력 및 신뢰도·열독률 조사 결과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 순위 조사에서 KBS와 조선일보의 양강 체제가 굳건하였다. KBS 59.6%와 조선일보 51.2%로 네이버 32.1%, MBC 22.0%, 중앙일보 15.9% 등 다른 매체들을 압도했다. ‘가장 열독하는 언론 매체’ 조사에서는 한겨레(22.4%)와 조선일보(21.8%)가 각각 1, 2위를 차지했고, KBS(20.0%)가 그 뒤를 이었다.
한국갤럽이 2013년 9월 30일부터 2주간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집에서 유료로 정기구독하는 신문'을 기준으로 조사한 가구 구독률에서 조선일보는 11.9%로 압도적 1위였다.
부정적 지표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9년 "시사인"이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어느 매체를 가장 불신하느냐는 질문에는 중복응답을 기준으로 할 때 조선일보의 응답률이 20%에서 크게 늘어 34.2%를 차지하여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제치고 1위로 나타났다. 또한 현직 기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로는 한겨레가 15.4%, MBC 14.3%, KBS 11.2%, 경향신문 8.7%, 한국일보 4.0%에 이어서 조선일보는 2.4%를 차지하였다. 한편, 조선일보를 비롯한 중앙일보, 동아일보 지국의 98%가 신문고시를 위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2년과 2003년 ABC협회의 조사에서 발행부수중 5만 6,000여부가 부풀려져 175만 6,193부로 수치를 조작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역사
조선일보 복간을 축하, 김구의 친필휘호
1920년 3월 5일에 창간했다.
창간된 지 1개월만에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 당한 것을 시작으로 8월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하는 논설 '自然(자연)의 化(화)'를 실었다가 1주간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반기에 조선일보의 사주였던 송병준과 경영진들은 친일성향이 강했고, 그 이후 창립 극초반기의 조선일보는 친일 성향이 유지되었다. 결국 창업주 조진태 사장이 강제 퇴진당하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그 후에도 같은 해 9월에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 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4년 이전까지 조선일보는 친일적인 성향이 유지되었는데, 대정친목회의 영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1924년에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반일 민족주의 신문으로 변화하고, 그 이후 3대 사장인 안재홍은 "함께 일어나 지켜야 하고, 싸워야 하고, 고쳐가야 하고, 이를 방해하는 어떤 자들이고 부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라는 논설 등을 써서 일제에 저항했고 4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4대 사장인 이상재가 취임한 후에는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문자보급운동의 일환으로 한글 교재를 무상 배포하는 등 문화보전에 힘썼다.
하지만 1931년에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연루되어 구속되고, 그 후 여운형 사장과 조만식 사장을 거쳐 방응모 사장이 취임한 후 한일 학생의 교육차별을 비판하는 논설 '교육필화'로 인해 기사가 압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었지만 주로 친일 관련 찬양 논조로 변경되었다. 다만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부사장이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민족개량주의 성향을 띄었지만 1936년부터는 다시 친일 성향을 띄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사설과 신문내용을 여러차례 보냈고, 일왕을 찬양하는 사설도 실었으며, 그 외에도 일제 황군 응원, 일장기 침략 전쟁 미화 광고도 여러차례 보냈다. 그 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에 의해 발간을 중단하였었고, 그 이후 사주였던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창간하여 친일 행위를 계속했다. 조광에서도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의 지원하에 속간되었다.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 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사주인 방응모의 한국독립당 입당과 반탁운동 가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는 김구와 한국독립당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47년 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후 1948년 당시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에서 국군과 경찰을 옹호했다.
이후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이승만 정권의 출범을 지지했지만 1948년부터 1950년, 즉 극초반기에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강력처벌과 처단을 주장했고,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을 때 그 법의 남용소지가 상당히 크다고 비판을 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에게 조선일보가 넘어가면서 한때 조선일보는 인민군 기관지로 전락했지만 그 이후 한국전쟁 이슈들을 상당히 많이 다뤘고 1951년 이후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게 된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다루지 않았으며 발췌개헌과 사사오입을 거치면서 조선일보는 1952년부터 1954년까지의 기간을 거치면서 보수색이 더더욱 강해져서 이승만 정부를 계속 지지하게 된다.
그 이후 조선일보는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이승만 정권의 친위 언론이 되어서 부산정치파동 등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 않았고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행위를 다루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을 계속 지지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진보당 사건, 진공관 구입 밀수출 사건,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금정산 공비 사건,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공안정국에는 반공주의 기준과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는 수준으로 기사를 썼다. 또 이 당시 금성사 설립 기사와 삼성 관련 기사를 상당히 많이 썼다. 또 능의선 기공식도 상당히 많이 기사로 내보냈다. 그리고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완간을 보도했고 가짜 이강석 사건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1960년에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그 이후 다시 이승만 정권을 맹공격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제2공화국 시기, 장면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교원노조 운동을 지지하는 성향을 보였으나 1960년 당시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원노조 운동 탄압과 노동운동 탄압에 조선일보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1961년 당시, 이 때 반통일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나서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을 지지함과 동시에 1961년부터 1962년까지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신문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그 당시 공안사건들이던 민족일보 사건, 사대당 사건, 교원노조 사건, 유족회 사건 등에 대해 반공주의적 기준과 박정희 군정을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또 이 당시 삼성물산 설립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문화방송, 한국방송 설립 기사도 여러차례 내보냈다. 그리고 군사원호청 발족 기사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립 기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발족 기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발족 기사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다시 반정부적인 성향으로 돌아섰는데 이후 최석채 주필이 재직하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조선일보는 상당히 박정희 정부, 즉 제3공화국에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와 노동운동 세력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한.일 협정의 강행과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미법도 주민 간첩단 사건, 제1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 사건, 분지 필화사건, 언론계 침투 무전 간첩단 사건, 경향신문 간첩사건,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의 사법처리 과정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도 삼척군 해안가 간첩 사건, 군내 반정부 음모사건, 진장언 하사 간첩사건, 송추 간첩사건 같은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반공주의적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서도 삼성을 상당히 비판하는 논조로 보도를 했다. 그리고 한국전력, 중소기업은행 설립을 호의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부터는 조금씩 다시 박정희 정부에 우호적인 기준으로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박정희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하고 이 시기 제2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영호남·서해안 무전 고정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 서울사범대학 독서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언론으로 다시 조금씩 돌아가게 되고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 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같은 공안정국이 일어나면서 조선일보는 또다시 보수언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969년,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 이후로 조선일보는 다시 보수성향으로 완전히 돌아서는데 당시 유럽 간첩단 사건과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3선 개헌을 지지하는 보도 또한 여러 차례 내보냈다. 또 그 당시 대한항공 민영화 기사, 삼성전자 설립 기사, 현대자동차 설립 기사, MBC 개국, 일간스포츠 창간, 진주 남강댐 준공도 여러차례 보도했다.
1970년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지지하는 기사, 사설들을 여러차례 내보냈으며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의 준공 기사와 정부중앙청사 준공 기사, 병무청 발족 기사, 남산1호터널 개통, MBC 뉴스데스크 첫 방송, 100원 주화 사용 기사 또한 여러차례 내보냈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지지하는 사설과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한 당시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간첩단 사건, KAL기 납북미수 사건, 남파간첩 백귀남 사건 등 공안정국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실미도 사건과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주 대단지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일보는 이를 정부의 입장에서 보도했다. 또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2년에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들어서자 조선일보는 박정희 대통령을 적극 찬양하고 지지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유신 체제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에서는 포항제철 설립,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남해고속도로 개통, 호남고속도로 개통, 삼성중공업 설립, 강남-여의도 개발, 각종 고층건물 건설, 대우중공업 설립 등을 상당히 보도했고 정치 면에서는 민주공화당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고 10월 유신을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 번 썼다. 또한 1973년 당시 발생한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때도 중앙정보부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사를 썼으며 당시 북제주도 우도 무장 침투 간첩단 사건, 일본 거점 귀화 간첩 사건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후 전남대 불온 삐라 살포사건,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 고려대 NH회 사건, 서울대 공대 조교수 간첩사건, 나쓰야 간첩사건, 김장현 간첩사건, 김철우 조총련계 간첩사건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서울 어린이대공원 개장과 현대중공업 설립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유신체제 당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연이어 발생한 여간첩 채수정 사건, 대전·전주 고정간첩단 사건, 문인간첩단 사건,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1,2호 위반 사건, 김영작 간첩사건, 김승효 간첩사건, 부산·경남 거점 고정간첩단 사건, 재일동포 진두현 간첩단 사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재일동포 김달남 간첩사건, 재일동포 유정식 간첩사건, 학원침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귀화 일본인 간첩단 사건, 박복순 남파 간첩단 사건, 겨울공화국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유신체제 당시의 공안정국 확성기 노릇을 했다. 그리고 1975년 당시에는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준공 기사와 학도 호국단 창설 기사를 여러차례 내보냈다. 또 민방위대 창설과 부처님 오신 날, 어린이날 공휴일 제정, 영동고속도로 준공 등을 기사로 내보냈다. 그 뒤 1976년에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한민통 간첩사건 또한 집중적으로 보도해서 공안정국의 확성기 노릇을 계속했다. 그리고 연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여러차례 보냈다. 그리고 이 당시 조선일보는 경제 면과 문화 면에서 신용보증기금 설립 기사와 용인자연농원 개장, 반월 신도시 건설, KBS 여의도 사옥 설립, 태권V 개봉, 아이미 개발 등에 대한 기사도 여러차례 보냈다.
1972년 3월 5일 52주년 기념호를 통해 독자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공식 선언하고, 1974년에는 미국 ASI의 조사 결과 정기구독자 비율에서 1위를 차지했다.
조선일보사는 1968년에 《주간조선》을, 1980년에 《월간조선》을 각각 발간하였고 1991년 《소년조선일보》를 창간하였다. 1999년 3월 2일에는 전면 가로쓰기 체제를 도입했다. 1995년 (주)디지틀조선일보를 설립해 인터넷 서비스를 강화하여 2008년 3월 5일부터는 조선일보 지면을 PC상에서 볼 수 있는 소프트웨어 ‘아이리더’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창립 역사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비난하는 "골수에 맺힌 조선인의 한" 1920년 6월 조선일보 논설
한국어는, 한글로 표기되고 있다.
1927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신간회 창립 모습.
조선일보는 1920년에 창립하였으며 일본의 소위 문화정치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대정친목회를 모체로 조진태사장으로 시작하였으나, 자금력부족으로 송병준에게 넘어갔다. 송병준은 자신이 신문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원로 언론인 남궁훈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1924년 남궁훈은 민족주의자였던 신석우가 인수해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 받던 이상재를 추대할 때까지 사장으로 재임한다 1924년 이 때는 일제와 타협적이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좌파와 우파가 연합한 최대 독립운동조직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홍명희와 박헌영,김단야 등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후 계속적인 경영 악화로 조만식을 거쳐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 후 보수적인 언론인들이 조선일보사를 주도하면서, 보수주의 관점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인물
일제시대 초기 조선일보에는 다양한 경력과 능력의 소유자들이 집결했다.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를 비롯해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들과 활동가들이 어울려 민족의 '정신적 정부'를 자임했다.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남궁훈,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조만식 등은 민족지도자들이었다.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서 일제를 규탄하고 총독 암살을 계획했던 독립운동가 방한민(方漢旻), 일제의 조선인 학살 현장에 달려가 목숨걸고 취재한 이석, 한홍정 등은 펜으로 일제의 총칼에 직접 맞선 행동파였다. 독일 유학 후 혁명의 모스크바로 파견된 김준연,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에서 화려한 학력을 쌓은 이관용, 미국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훈구, 그리고 중국 내전 현장을 누빈 이상철, 홍양명, 홍종인 등은 세계 정세와 선진 문물을 알리는 전령사들이었다.
자매 언론기관
조선일보사는 일간지 외에도 주간지 '주간조선', 스포츠지인 '스포츠조선', 관광 숙박시설에 대한 잡지 '월간 산', 취미 문화에 관한 잡지 '월간낚시' 등의 시사지와 잡지를 발행한다. 자회사로는 '디지틀조선', '월간조선', '조선에듀케이션', '헬스조선' 등이 있으며 이 중 '디지틀조선'은 코스닥에 상장하였고, 2004년부터 연간 80억 정도의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 1931년부터 '소년조선일보'를 발행하고 있으며, 일반단행본과 백과사전들을 편집하는 출판사업도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출판한 단행본으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따뜻한 이야기》(1998년)나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장애인 배형진씨의 이야기를 담은 《달려라 형진아》등이 있다.
또한 온라인버전 조선닷컴이외에 영어판, 일본어판, 중국어판 온라인신문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자회사 '조선일보 일본어판'(구 조선일보JNS)에서 운영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007년에 비즈니스앤을 개국하고, 2008년 11월에는 방송기자와 피디를 모집, 2008년 2월에는 대구방송, KNN과 함께 "아워 아시아"를 제작, 배급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일보는 종합편성방송 심사에서 2위로 통과한 'TV조선'을 소유하고 있으며, TV조선과 조선일보는 보수적 논조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2010년 조선일보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그 관계사를 아우르는 미디어그룹인 조선미디어를 출범시켰다. 이외에도 '주간조선' '월간조선' 등을 제작하는 조선뉴스프레스라는 자회사가 있다.
기타
한국신문상 수상
한국신문협회는 조선일보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 아들' 보도를 2014년 한국신문상 뉴스취재보도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인 용기를 잘 보여주었다"고 하며 언론의 역할에 충실한 조선일보를 높이 평가했다.
특이사항
요덕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 강철환 북한전문기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