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연산군 12) 이조참판(
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
成希顔)과 중추부지사(
中樞府知事) 박원종(
朴元宗)이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낸 사건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
愼言牌)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
宴樂)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이에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감부정(
軍資監副正) 신윤무(
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長湍) 석벽(
石壁)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 계획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했으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
前水原府使) 장정(
張珽), 군기시첨정(
軍器寺僉正) 박영문(
朴永文), 사복시첨정(
司僕寺僉正) 홍경주(
洪景舟)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였다.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
宮禁勢力)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임사홍(
任士洪) ·
신수근(
愼守勤)과 그 아우 신수영(
愼守英) 및 임사영(
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중종반정의 결과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제도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