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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동학공부방에서 11월 1일 강의 할 내용입니다. 자매방의 허락을 얻어 여기에 전재합니다.
유학과 성리학은 다르다 – 대구 동학방 강의 2
성리학은 유학인가. 왜 성리학이라 하는가. 이런 의문은 동북아학을 공부하는 과정에 쉽게 의문을 갖습니다. 정연하 선비님이 가진 의문에 아 성리학은 유학과 달라서 신유가라고 합니다. 그 말이 서구에서 나온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이를 규명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습니다.
먼저, 유학, 유가란 무엇인가. 유학이란 동북아에서 2000여 년 이상 유지되어온 윤리관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윤리학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지배해온 지배적인 규범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Ideoly라고 합니다. 윤리학이건 Ideoly이건 간에,
무엇보다 공자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학은 공자와 관련이 있는 사고체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묵자, 노자, 맹자,장자, 순자, 한비자 등의 제자백가들 중에서 어떤 것은 유가라 하고 어떤 것은 어떤 것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맹자와 순자는 유가라 하지만, 묵자는 묵가, 노자와 장자는 도가 또는 노장이라고 합니다. 한비자는 법가라고 합니다.
노사광의 중국철학사는 송명유학총설(宋明儒學總說)을 알기 어려운 말들을 지루하게 설파한다. 心卽理, 心卽天, 理學, 心學 등이다. 나는(愚案) 이런 말들에 흥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노사광의 말에서 쓸 만한 내용을 인용합니다.
송유가 최초로 학설을 세울 때 한편으로 漢代儒學의 전통을 배제하고, 다른 한편 외래의 불교를 굳세게 반대하였다. 明代 陽明學이 일어나기까지 줄곧 이 기본 방향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 선진유학(이른 바 孔孟之學)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이미 기본 방향이 있는 곳이라면 … 공맹의 학과의 거리가 멀고 가까움이 이 커다란 운동 중의 처해 있는 지위나 단계를 나타낼 수 있다(노사광勞思光 『中國哲學史 •宋明篇』 鄭仁在 譯, 탐구당, 1993, pp.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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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China 철학사를 거의 읽지 않았다. 사서오경, 통감, 제자 등을 빠짐없이 읽고 강독했던 까닭으로 나 자신의 머리 속에 나름의 철학사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남들이 비웃을지 모르겠으나 나의 철학사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대구 동학 투어에서 '유학과 성리학'이라는 강의를 하자니 무언가 조금 캥기었다. 대학 교수로 퇴임한 분이 앉아 계시기도 하고 이참에 좀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먼저 노사광(勞思光1927-2012)의 철학사를 훑어 나갔다. 그는 주희의 철학을 漢儒와 단절한 것으로 보았는데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주희 철학을 서술해 나가는 부분에서는 학문의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나와 달랐다. 漢儒와 宋儒는 자신들의 국가가 처한 상황이 달랐다. 이를 고려치 않고 心, 理, 性을 논했으니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馮友蘭(1895-1990)의 중국철학사를 인터넷으로 구입하여 여기저기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周易은 殷代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듯하여 뜨악하였다. 없었다면 易이라 하지 周易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전국시대에 周易이 확충 또는 확정된 것으로 보는 시각은 나와 같았다.性理學 역시 노사광처럼 理, 氣, 太極의 개념을 규명해 나갔다. 노사광과 같은 학문적 방법론이었다. 역시 나와 달랐다.
나는 주희의 학문에서 왜 그 이전과 다른가를 四書에 두었다. 가미가제 특공대를 양성해야 하는 宋儒들의 조바심을 전혀 고려치 않았으니 공허하였다.
내가 차이나 철학사를 읽지 못하게 된 이유는 진고응(陳鼓應1935~) 때문이었다. 형편없는 머리를 가진 자를 나의 초학 시절에 만났으며 크게 실망하였다. 대만 또는 대륙에 거주하는 현대 차이나 지식인들을 얕잡아 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노사광이나 풍우란이 道, 命 등을 기술해 나간 것은 참고할 만한 내용도 있었으나 번뜩이는 혜안이 없는 지루한 글들이기도 했다.
이번에 집필을 마친 <공자의 시작에 서다>에서 풍우란이나 노사광과 비교하여 철학사적 해석에서 엉뚱한 풀이로 비웃음을 살 바가 별로 없었다. 나는 이들이 <춘추좌전>을 신뢰하고 거의 의심을 하지 않음을 내가 비웃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삼성의 갤럭시7이 폭발하여 문제가 된다. 이는 삼성 그룹 기술진 또는 경영진 전체의 제품 생산의 방법론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정도의 기술적 하자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로호라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본다. 자연과학에서는 부분의 전문성과 전체적 유기성이 빈틈없이 어우러져 있어야 한다. 이는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학계, 정계 등의 총체적 난국을 반영한다. 노사광과 풍우란은 자기 철학사의 서술에 내재적 하자를 검토할 줄 모르고 끝 간 데 없이 갔다. 인문학에서는 부분의 엄정성보다는 전체의 유기성을 볼 필요가 있다.
아무튼 나는 나의 철학을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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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사후 맨 먼저 나타난 사상가는 묵자(墨子BCE479?-BCE381?)라고 봅니다. <맹자>에는 묵가가 당시에 성행하였다고 합니다(MZ06090209聖王不作, 諸侯放恣, 處士橫議, 楊朱 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不歸楊, 則歸墨). 하지만 China 철학사에서는 전국 시대를 지나면서 잊힌 존재였나 봅니다. 거의 언급되지 않다가 청말(淸末)에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사고전서에서 전국시대의 제자로서 주석가가 없는 유일한 책이 묵자가 아닌가 합니다.
기껏해야 唐 韓愈의 ‘묵자를 읽고 나서(讀墨子)’라는 짧은 글이 발견될 뿐입니다. 한유는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범애친인 박시제중은 성이다는 겸애라고 합니다(孔子泛愛親仁以博施濟衆爲聖不兼愛哉). 그렇다면 공자와 묵자의 사상은 근원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논어에서 공자는 均(不患寡而患不均…蓋均無貧, LY1601)을 강조하였다. 묵자의 겸애도 평등에 기초하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공자의 염유, 번지, 유약은 외부의 침략에서 노나라를 군사적으로 구한다. 묵자도 군사 전문가였다. 공자의 예치를 계급적 질서의 고착화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묵자의 상동(尙同)은 계급적인 차등을 유지하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뜻을 따른다는 것이다. 공자와 달리 일사불란한 다스림을 강조하였다. 공자와 묵자는 절용(節用)에서 같다.
풍우란은 노자의 문체는 문답체가 아니므로 논어 맹자 이후라야 하고, 논자의 문체는 간명한 경전체(經)인지라 전국시대 작품이다. 풍우란은 사마천의 사기에 사마담의 말을 빌어 유가, 묵가, 명가, 법가, 음양가의 장점을 갖고 있다. 이상은 도가가 나중에 생겨나서 각 학파의 장점을 채택한 것이다. 노자학은 양주 학설이 진일보 한 것이며, 장자학은 그것이 진이보한 것이다. 논어에 기록된 은자의 부류는 논자와 비슷한 점이 많다. - 이상 풍우란의 卓見
논어의 무위, 질박은 노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이다. 특히 소국과민으로 전쟁을 반대한 바는 공자의 정신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노자는 극단에 흘러 노자가 성인이 다스리면 만병통치의 약이라고 말하는 점이다(無爲則無不治 - 도덕경 3장). 그러나 공자는 나라를 쉽게 다스릴 수 있는 방법론은 없다면서 이론의 한계를 자각한다(LY1315 定公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曰, “一言而喪邦, 有諸?”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우리는 도덕경 첫 구를 기억합니다.
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다. 이를 많은 이들이 멋지게 풀이하지만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지금까지 도라고 말하였던 도는 도가 아니다. 지금까지 말해왔었던 기존의 도를 싸그리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유가와 묵가가 포함됩니다만 공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도덕경 3장에서 노자는 공자를 현인(賢人)이라 부르며 숭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성인이라고 부르면 자신이 다스리는 세계는 지상낙원이라고 단언합니다(不尙賢使民不爭…聖人之治虛其心實其腹… 無爲則無不治 - 도덕경 3장).
맹자는 공자의 주석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다. 공자는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나(중궁LY0601, 안연LY1510), 맹자는 귀척(貴戚)만이 임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MZ100902 曰, “不同, 有貴戚之卿, 有異姓之卿.” 王曰, “請問貴戚之卿.” MZ100903曰,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 공자는 배우라 하였으나 맹자는 가르치라 하였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는 허황된 말을 하였으나 공자는 樂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은 나를 남(物; 他人)과 같게 함으로써(齊) 소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남을 스승으로 여겼으니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장자의 인식론은 크게 보면 논어와 다르지 않으나 훨씬 다층적으로 인식코자 하였다.
순자(苟子BCE313-BCE238)는 學보다 敎를 중시하였다. 공자는 인민들을 가르침의 주체로 여겼으나 순자는 객체로 보았다. 이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순자는 공자를 존숭한다지만 스스로의 생각이 공자와 다른 점을 몰랐다. 공자는 인민을 스승으로 여기고 인민이 도의 주체였음을 알았다면, 순자는 인민은 가르침을 전해야 할 객체였다. 그르므로 공자와 달리 學이 아니라 敎를 중시했다. 순자 첫구는 인간을 가르침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S010101 君子曰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 而靑於藍. 氷水爲之, 而寒於水. S010102 木直中繩,輮以爲輪,其曲中規,雖有槁暴,不復挺者,輮使之然也 - 순자 第一 勸學篇).
그래서 그는 인간의 본성은 착하지 않아야 교육의 효과가 크지 않겠는가. 묵자, 노자, 맹자, 순자 등이 지나고 난 후에 차이나가 일통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은 도로써 통일시키기는 쉬워도 더불의 이치(故, 까닭)를 논할 수는 없다(S220801 夫民易一爾而不可與共故,故明君臨之以勢, 道之爾, 申之以命, S220802 章之以論, 禁之以刑. 故其民之化道也如神, 辨埶惡用矣哉 - 순자 第二十二. 正名).
第一 勸學篇
S010101 君子曰 學不可以已.靑取之於藍,而靑於藍.氷水爲之,而寒於水.
S010102 木直中繩,輮以爲輪,其曲中規,雖有槁暴,不復挺者,輮使之然也.
S010103 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知明而行無過矣.
S010201 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
S010202 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
유가를 무엇이라고 볼 것이가. 공자의 사상과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의 사상을 훑어보면 모두가 공자와 관련이 있다. 공자의 생각과 비슷하기로는 맹자와 묵자를 들 수 있다. 묵자가 공자를 반대하였으며, Text로서 『묵자』 속에는 공자를 비인간적 인물로 비난한기도 한다. 그러나 묵가는 유가라고 말할 수 있다. 장자는 아예 공자를 비난하자고 작정한 책이다. 그의 인식론은 타인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며, 세계를 인식하고 소통의 문제를 가장 큰 화두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자와 같다. 그러나 장자를 유가라 할 수는 없다. 장자는 유가처럼 세상과 더불어 하지 않는 방관자의 세계이다. 묵자보다는 양주에 가깝다. 장자는 천하를 몰라야 편하다고 말한다.
노자는 공자와 다른 세계를 말하려 한다. 그의 전쟁반대론은 공자와 같으나 철저히 공자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유가라 할 수 없다. 노자의 무위는 논어에 나오지만 무위가 논어의 주된 사상은 아니다. 공자는 사상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도가 세상이나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창조하지 못한다고 본다.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알면서도 세상을 안타까워하면서 떠돈다. 미흡하거나 불완전하거나 이루지 못할지라도 애쓰는 곳에 공자가 있다.
그러나 노자의 無不治는 사상의 힘을 극대화한다. 이점에서 노자는 유가가 아니다.
흔히 전국시대까지의 유가로서 맹자와 순자를 꼽는다. 그러나 순자는 유가가 될 수 없다. 순자는 교육의 힘으로 사람과 세상을 온통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순자의 믿음을 만약 공자가 본다면 유치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순자는 유가라기보다는 노자에 가깝다.
한대(漢代) 유학과 송대(宋代) 유학은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한 대에는 四書, 대학과 중용을 중시하지 않았다. 한(漢)에 완성된 禮記는49편이며, 대학과 중용은 1/49에 불과하다. 대학과 중용을 합치면 2/49이며, 이는 5%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마저 예기는 한대(漢代)에 나온 수없이 많은 책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과 중용은 책에도 속하지 못하는 책 중의 한 편에 불과하였다. 이런 책이 공자의 가르침인 논어와 맹자의 가르침인 맹자를 밀어내었으니 주희의 사상은 유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주희가 사상계를 휘어잡았는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송유 마피아의 두목 주희의 껍데기를 벗긴다.
1. 공자를 제대로 모르기는 송의 주희(朱熹1130-1200)라고 다르지 않다. 주희는 주희 이전까지의 전통적 유가서와 달리 주희 마피아들의 견해만 인용한다. 주희 마피아란 주희가 『논맹정의』에 주석으로 활용한 북송(960-1127) 말의 송유(宋儒) 12家(정호, 정이, 장재, 범조우 등)를 일컫는다. 이들은 주희보다 100여 년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주희는 맹자, 순자, 공안국, 정현, 하안, 한유 등 옛 선유들을 가급적 도외시하고 주희와 가까운 시기의 북송 유가들의 주석을 인용하여 책을 만든다. 이런 책이 주희의 성가를 높이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2가(家)들의 제자들과 후손들이 주희를 떠받듦으로써 자신들의 위상도 높아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LY2107-1※3※4참조하라.
역사적 인물들이 명성을 이룸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이율곡은 당대의 엘리트 선발, 과거 시험에 여러 번 장원급제한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을 물리친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다. 이승만은 친일과 친미의 개가 된다. 사마천은 역사서를 거짓으로 날조함으로써 漢 제국주의에 봉사한다. 역사가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는 금과옥조는 漢 민족주의의 영광 앞에 무너지고 사마천의 이름은 Chinese의 사랑을 받는다. 주희는 요새 말로 학벌 마피아를 이용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이름이 전해진 것이다.
남송(1127-1279)의 주희는 망국의 원인을 성리학에 두지 않았다. 북송의 성리학을 강화 확장함으로써 글안, 여진, 몽골에 유린당하였던宋을 부흥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LY1809※6참조). 그는 공자를 존숭하는 척하면서 공자를 까 내린다. 사마천(BCE145?-BCE86?)의『사기』에는 공자를 동성애자(homosexual)로 날조하는 글이 나온다. 사마천 사후 주희까지 1300년 동안 선유들은 사마천의 이런 말을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주희만 ‘공자 동성애’ 설을 끄집어내어서 『논어집주』에서 재론한다. 나는(愚案) 주희의 철학을 공자 동성애설 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으니 철학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본다. 주희는 겨우 전통적 어석 풀이를 한 정도이다. ☞LY1426 참조하라.
㉮와 ㉵의 풀이 2가지를 꺼내놓는다. 어떤 풀이가 타당한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독자들에게 맡긴다.
2.
주희가 지은 책은 『논맹정의論孟精義』,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논어집주論語集注』〕, 『이정외서』, 『이정유서』, 『가례』 등 10여 종이 넘으며 『주자어류』 140권, 『주자전서朱子全書』 66권, 『성리대전서性理大全書』70권, 『사서대전』 36권 등도 주희의 언설(言說)을 저본으로 삼는다. 주희 이후의 책은 누가 썼든지 간에 주희의 언설(言說)을 거론하므로 이 책의 문헌 색인에 나오는 60% 정도는 주희의 책으로 중언부언하는 셈이다. 그래서 주희의 출발이 되는 『논맹정의』와 관련된 『사고전서총목』 「제요」를 아래에 적어둔다.
주희는 『논맹정의論孟精義』를 1165년 썼다(乾道, 八年 壬辰 四十三歲 論孟精義成- 『주자연보朱子年譜』 卷一 淸 왕무횡王懋竑撰).『논맹정의』는 『요의(要義)』 또는 『집의(集義)』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들을 따로 부르면 『논어정의』 『맹자정의』 『논어요의』 『논어집의』등이라 한다. 출간 연대는 명기되어 전하지 않는다. 주자의 나이 43살 이후에 예장군에서 판각(板刻)하였다.
주희(1130-1200)는 자신보다 100세 가량 앞선 송유들 정호程顥(明道先生1032-1085)‚ 정이程頤(伊川先生1033-1107)‚ 장재張載(橫渠先生1020-1077)‚ 범조우范祖禹(成都范氏1041-1098)‚ 여희철呂希哲(滎陽呂氏1039-1116)‚ 여대림呂大臨(藍田呂氏 1040-1092)‚ 사량좌謝良佐(上蔡謝氏1050-1103)‚ 유초游酢(建安游氏1053-1123)‚ 양시楊時(延平楊氏1053-1135)‚ 후중량侯仲良(河東侯氏)‚ 윤돈尹焞(河南尹氏1070-1142) 주부선周孚先(毗陵周氏?-?) 12家들의 설을 긁어모아 펴낸 것이다(論孟精義 三十四卷 宋朱子撰 初朱子於隆興元年 輯諸家說 論語者爲要義 其本不傳 後九年爲乾道壬辰 因復取二程•張子•及范袓禹•吕希哲•吕大臨•謝良佐•游酢•楊時•侯仲良•尹焞•周孚先等 十二家之說 薈稡條疏 名之曰論孟精義 而自爲之序 時朱子年四十三 後刻板於豫章郡 … 其故號精義者曰要義 … 後又改名曰集義 見于年譜 -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 卷三十五 清 영용永瑢 기윤紀昀 等 編纂 提要).
나는(愚案) 이들 12家를 ‘송유 마피아 12家’라 부른다. 주희는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묶어서 정자(程子)라 부르면서 주희의 책에는 정자 왈(程子 曰) 바로 아래에 중니왈(仲尼曰)이라고 여기저기 갈긴다. 가증스러운 者이다. 그러므로 주희의 책에는 정자 왈(程子 曰)이 가장 많으며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이 책에는 어쩔 수 없이 ‘정자 왈’ 15번이나 나온다. ‘정자 왈’은 상투적이거나 어리석은 견해가 대부분이다. 결국 ‘송유 마피아 12家’의 두목은 朱熹다.
※4 주희는 『논맹정의』를 씀에 1000여 년 동안 전승되던 기존의 전통적 주석서를 버리고 겨우 100여 년 안팍의 송유(宋儒)들로 채운다.이는 주희를 성공으로 이끈다. 위에 든 12家의 벌족들이 주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명성을 얻은 주희는 『대학장구』와 『중용장구』로 따로 쓴다. 이들을 『논어집주』 『맹자집주』와 나란히 묶으면서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라 한다(LY0627※2). 스스로가 공자 맹자와 맞먹을 언턱거리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을 끌어들이어서 공자를 욕하면서 자신을 성인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한다. 『논어집주』에서 공자를 욕하는 주희의 간지(奸智)가 번쩍거리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이따위 흉계를 간파하지 못한 해동 유학자들의 어리석음이 슬프다.
주희가 漢代 유학의 전통을 배제하였는지 모르나, 漢代에 자리 잡은 예기에 나오는 대학과 중용을 높이 내겁니다. 그래서 漢代와 송대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漢(BCE202-CE220)은 공자(BCE552-BCE479)이후 250년 뒤에 나타나는 통일왕조 秦(BCE221-BCE206)이 15년 만에 망하는 것에서 경각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국가체계를 굳건히 하는 바에 관심을 가집니다. 한 초에는 제자백가의 사상이 漢室에 넘쳐났으며, 무제 초에는 도교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한(漢) 7대 황제 武帝(재위BCE141-BCE87)는 秦보다 훨씬 강대한 제국을 이룹니다. 그는 즉위 후에 권력이 공고화 되자 元光元年(BCE134)에 동중서(董仲舒BCE176-BCE104)의 건의에 따라 유교를 국교로 삼아 부국강병의 기초를 닦습니다. 유가로 통일한 때문인지 군사적 승리까지 더해져서 흉노를 물리치고 대 제국을 이룹니다. 이후 한의 유학은 정현(鄭玄127-200)에 이르러 체계를 갖춥니다. 정현은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 경서의 주석을 하였고, 《의례》 《논어》 교과서의 정본(定本)을 만들었다. 특히 예학(禮學)은 정현의 학이라 불리어졌다. 삼례(三禮),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의 주해를 완성하였다.
삼례(三禮)는 한(漢) 제국을 영원불망에 이끄는 Ideology, 그 자체였다.
주희(1130-1200)가 살았던 송(宋)은 북송(960-1127)이 아니라 금(金1115-1234)나라에 쫓겨나 겨우 잔존하던 남송(南宋1127∼1279)이었습니다. 이들은 국토수복을 꿈꾸었으므로 유학의 성격도 한 제국의 것과 달랐습니다. 유생들의 사고에 주입식 교육을 시켜서 행동의 변화를 꾀하였던 것입니다. 그 행동은 가미가제 특공대식의 멸사봉공의 강화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송은 몽골의 원(元1271-1368)에 멸망당합니다.
결론
대학과 중용은 한유들이 漢 제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 책이다. 이들 책의 특징은 진리를 탐색하는 자의 겸손함이 없으며, 노자 식으로 진리를 확정하고 인간에게 그 진리를 강요한다. 주희는 대학과 중용으로 망해가는 나라 송나라 선비들에게 가미가제 특공대식의 신념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죽음마저 불사(不辭)하는 교의였다. 공자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므로 유가라 말할 수 없다.
다음은 주희가 공자를 얼마나 멸시하는지 기술하고자 합니다.
주희는 공자를 조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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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墨子
儒譏墨以尚同兼愛尚賢明鬼而孔子畏大人 居是邦不非其大夫 春秋譏専臣不尚同哉
孔子泛愛親仁以博施濟衆為聖不兼愛哉 孔子賢賢以四科進襃弟子疾没世而名不稱不尚賢哉孔子祭如在譏祭如不祭者曰我祭則受福不明鬼哉 儒墨同是堯舜同非桀紂同 修身正心以治天下國家奚不相悦如是哉余以為辯生于末學各務售其師之說非二師之道本然也孔子必用墨子墨子必用孔子不相用不足為孔墨 - 오백가주창려문집五百家注昌黎文集 巻11 宋 위중거魏仲舉 編
孫曰論語君子有三畏畏天命畏大人孫曰荀子子路問魯大夫練而牀禮歟子不答以告子貢子貢曰汝問非也君子居是邦不非其大夫
孫曰子曰賢賢易色洪曰語云吾不與祭如不祭言祭如不祭者吾所不與與許也孫曰禮記孔子曰我戰則克祭則受福孫曰為孔子之學者必用墨子取其與孔子合者而已孫曰為墨子之學者必用孔子折衷于聖人之言其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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