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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탈출 1장-5장
* 1,1-7 :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되다
탈출기의 첫 단어는 ‘그리고’라는 뜻의 접속사 ‘웨’이다. 이 단어로 창세기와 탈출기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어 곧바로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을 소개한다.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1,1). 야곱의 아들 열한 명의 이름이다. 먼저 이집트에 와 있던 요셉을 제외하고 레아, 라헬, 빌하, 질파 등 어머니별로 정리된 그들은 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된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름의 책’ 으로 불리는 탈출기에 그들의 이름이 첫머리에 소개됨으로써 그들이 이 책의 중요한 등장 인물임을 암시한다.
야곱 집안이 이집트로 이주할 때 식구는 모두 칠십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야곱의 몸에서 난”(직역: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이들인데,야곱의 허리는 야곱이 야뽁 건널목에서 씨름을 하다 다친 엉덩이뼈를 가리킨다. 그래서 ‘야곱의 허리”라는 표현은 진통의 고난을 통하여 생명을 창조하게 된 그 자리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의 한 결과로서 얻어진 신학적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70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한 백성으로 크게 번성할 것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 탈출한 수와 상관없이 이집트에서 나온 야곱의 후손들임을 암시한다(신명 10,22 참조). 70이란 숫자는 7(하느님의 특별한 섭리), 10(완전한 성취) 70(하느님의 특별한 성취와 완전한 성취)를 상징하는 히브리적 숫자 표기법이다.
그 뒤에 요셉과 그 세대가 다 죽었다. 한 세대,나아가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는 마치 노아의 홍수로 창조의 한 시대가 끝나고,이집트에서 탈출한 한 세대가 광야에서 죽은 것(민수 26,64-65)과 비슷하다. 대개 이주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동화되어 사라지거나 세력이 약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그 땅(이집트 전역이 아니라 그들이 머물던 고센 지방)에 가득 찰 만큼 늘어났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그들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졌다. 그리하여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1,7). 표현을 바꿔가며 다섯 번이나(많이 낳다, 늘어만 갔다, 번성하다, 더욱 더 강해졌다,가득 찼다) 강조할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은 두드러졌다. 이런 점에서 기록자 모세가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70인'이라는 소수의 사람들이 객지인 이집트에서 400년후에 장정만 60만명(탈출 12,37)이라는 대민족으로 성장한 사실, 곧 하느님의 기적적인 보호와 번성의 은총을 밝혀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었다.
마침내 특정한 선조 야곱의 집안 이야기는 끝나고 한 백성(1절의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7절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브네 이스라엘’ 로 표기되어 같은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알린다)을 이룬 공동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란 말이 창세기에는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창세 32,33: 36,31), 탈출기에는 125번이나 나와 그들이 주요 배역임을 내비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이루었다고 추정하는 것과 달리,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형성된 다음 이집트 탈출 사건이 벌어졌다고 거꾸로 이야기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잘 보여 준다. 아무튼 백성이 형성되면서 무대는 역사와 세계로 바뀐다. 정작 문제는 그 땅이 남의 땅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토착민이 아니라 선조 아브라함처럼 기근에 쫓겨 그 땅에 몸 붙여 살러 온 이주민이다(창세 12,10-20: 15,13-16: 46,3 참조).
* 1,8-14 : 억압의 시작: 강제 노동
시간이 흐르면 상황은 바뀌기 마련이다. 다들 삶의 안정을 원하지만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것이 ‘살아 있음’ 이다. 이집트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군림하게 되었다. 히브라어 ‘알다(yada)’ 라는 말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뿐 아니라 체험하고 알게 된 지식 전체를 뜻한다. 또 몹시 친밀한 사이를 뜻하기도 한다. 새 임금이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과거에 요셉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집트와 주변 세계 사람들을 살리신 일과 그의 일가가 이집트에 오게 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알더라도 그것을 무시하여 그들과 전혀 가깝지 않다는 뜻이다. 새 임금은 후에 히브리인의 하느님 야훼를 알지 못한다고 외칠 것이다. 지금 임금에게는 현실이 중요하다. 이 새 왕은 힉소스 왕조(수리아와 아시아에서 나일강 지역으로 이주해 북 이집트를 정복한 후 B. C. 1674-1567년까지 이집트의 제 15 - 17 왕조를 형성한 이방 왕조)를 축출하고 이집트의 신 왕국시대(1584-1560)의 손자인 투트모세 1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왕은 이집트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1,9-10).
이민족(異民族) 힉소스의 침약을 받아 그들의 통치하에 놓인 바 있었던 이집트 왕조는 전략 요충지인 고센 땅에 역시 이민족인 히브리인들이 거주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더군다나 그 족속이 급속히 번성하자, 만일 전쟁시 그들이 침략족에 협조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새 임금이 취한 첫 번째 억압은 강제 노동,정확히 말하면 ‘부역’ 이다. 고대 국가에서 일반 백성은 누구나 국가 부역을 일정 부분 담당해야 했다. 하지만 요즘 말로 ‘불법 장기 체류자’ 로 간주된 이스라엘 백성은 대규모 국책사업에 동원되어 온종일 부역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로 떨어졌다. 그들이 받은 복이 이제 그들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빌미가 되었다. 평탄하던 삶이 뒤집어진 것이다.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 임금 때 성전과 대궐을 지으면서 자국민뿐 아니라(1열왕 11,28;12,18 참조) 외국인인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 사실도 기억하였다(1열왕 9,20). 강제 노동의 역사는 인류사와 엉켜 함께 흘러 왔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일제 강점 하에 강제로 징용당하고 정신대로 끌려간 아픔이 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소수민족,불법 체류자,이주 노동자,어린이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중노동은 무척 심각하다.
강제 노동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기력을 소진시켜,스스로 존엄한 인간임을 잊게 하고 죽음의 그늘 속에 묻히게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나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1,12). 벌써 두 세력 간에 우열이 드러난다. 이것이 파라오의 힘이 꺾지 못하는 하느님의 강복에서 나오는 생명력이다. 이 놀라운 힘이 민초, 민중을 받치는 하느님의 힘이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김수영의 ‘풀’) 끈질긴 힘 때문에 억압받는 이는 끝내 쓰러지지 않고 다시 서서 역사의 무대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의 힘은 억압자의 두려움을 더욱 키운다. 그들은 그 반동으로 더 강하게 억압한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종으로 삼았다. 선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실현되었다. “너희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창세 15,13).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피톰과 라메세스는 나일간 삼각주 동편에 있다. 제19왕조(기원전13세기) 셈족 인력을 이용하여 삼각주 지역에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일으켰다. 그래서 이 시기가 이집트 탈출의 역사적 배경으로 삼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으로서 할 일이 많았다. 이집트는 강우량이 부족하지만 관개수로와 운하망이 잘 짜여 있어 범람하는 나일강물을 들 구석구석까지 보냈다. 따라서 관개수로에 쌓인 흙과 모래를 긁어 내고 잘 정비하는 일은 물론 들일과 벽돌 만드는 일(1,14)도 그들이 해야 했다. 피라미드 등 주요 건축물은 나일 계곡에서 캐온 돌로 만들었지만, 일반 관공서나 주택, 성벽 등은 나일 강가의 충적토로 빚은 벽돌로 세웠다. 벽돌을 만들려면 들판에서 모은 짚과 물기 있는 진흙을 섞어 손이나 직사각형 나무판으로 벽돌 모양을 만든 뒤 햇볕에서 사흘 말렸다가 다시 뒤집어 사흘 정도 말렸다. 이렇게 벽돌을 만들려면 1주일 이 걸렸는데,보통 하루 7-8시간 동안 벽돌 삼 천 개를 만들도록 할당되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엄청난 양이었다. 라메세스 2세 15년에 기록된 가죽두루마리에는 매일40명이 벽돌8만개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 1,15-22 : 심해진 억압 - 사내아이를 죽여라
강제 노동 정책이 하느님의 거센 생명력으로 실패하자,이집트 임금 파라오(본디 파라오는 이집트어로 대궐을 가리키는 ‘큰 집’이란 뜻이었다. 마치 청와대처럼 뜻이 환유되어 18왕조부터 ‘임금’ 을 나타냄)는 더욱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 새롭게 그가 택한 정책은 신생아 살해다. 그는 산파들을 불러 히브라 여인이 해산할 때 아들이면 죽여 버리고 딸이면 살려 두라고 직접 명령한다.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1,16). 산파는 이스라엘뿐 아니라(창세 35.17: 38,28) 이집트에서도 몇 안 되는 여성 전문직 가운데 하나였다. 또 기원전 삼천년대 문헌에 나올 정도로 가장 오래되었다. 산파는 산모의 분만을 도와 갓난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목욕시키며 소금으로 피부를 문지르고 포대기에 싸 준다.
“밑을 보고”라는 말은 조산대를 말한다. 요즈음도 이집트에서는 분만 예정 2, 3일 전에 출산부의 집에 산대를 비치해 놓는다. 이 조산대는 산모의 출산 고통을 덜기 위해 고안된 특수 의자이다. 한편 조산대를 '산아 목욕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남자 아이를 구별하여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에 근거할 때 조산대를 산아의 성별 구분이 용이한 목욕통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아들이거든 죽여버리고”라는 말인 유아 살해 명령은 히브리인의 자손을 늘려 주신다는 절대자 주님께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주님만 관할할 수 있는 고귀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할 때는 반드시 그에 준하는 하느님의 징계가 따랐다. 율법서에 나오는 살인자 사형 제도가 그 한 조처이다. 한편 하느님은 80여년 후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시 이집트 장자들을 몰살시킴으로써(12,29),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한 이집트인들에게 당신의 준엄한 심판을 집행하셨다.
산파들은 이집트 임금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들을 살려 주었다. 파라오는 놀라 거듭 묻는다. “너희는 왜? 왜 살려 주었느냐?"(1,18). 산파들의 대답 역시 놀랍다. 아니 지혜롭다. “히브리 여자들은 기운이 좋아,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1,19). 하느님의 복을 받은 히브리 여자들은 기운이 좋아(생명력이 넘쳐, 건강하여),자기들도 손쓸 여유가 없었다는 대답이다. 그들의 행동은 비록 소극적 저항이긴 하나 자기 직업 정신에 충실한 것이다. 산파의 행동은 불법에 저항한 최초의 불복종 운동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들이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 문이다(1,17). 그들은 나쁜 짓을 하여 신의 보복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을 넘어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의 권위를 존중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거나 어떤 표징을 보거나 장래에 관한 어떤 언질도 받지 못했지만,현실로 드러나는 임금의 권세를 거슬러 생명의 편에 섰다. 생명은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은 그들의 믿음이 드러난 신앙행위였다.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가없이 여기시는(시편 103,13) 하느님은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산파들이 당신을 경외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잘 돌보아 주셨다. “산파들이 하느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집안을 일으켜 주셨다”(1,21).
위세 당당한 파라오가 보잘것없는 산파들에게 수치를 당했다. 죽음의 막강한 권세가 여성을 통해 돋아난 하느님 생명력의 여린 싹을 없애지 못했다. 그것이 죽음의 세력이 지닌 분명한 한계이다. 파라오로 대변되는 이 죽음의 세력을 막는 데 여성들이 생명의 옹호자로 나섰다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생명의 어머니’인 하와를(창세 3,20) 비롯하여 생명의 하느님께 생명을 받아 품고 낳아 기르는 여성이야말로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먼저 깨닫고 지키는 생명의 방패이다.
마침내 파라오는 이리저리 쓴 꾀가 여의치 않게 되자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1,22). 세 번째 정책으로,히브리인의 아들을 모두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온 백성에게 내린 것이다. 백성 전체가 이 살인 정책에 관여하고 책임지게 되었다. 은밀한 책략이 공개된 법으로,선별 제거에서 전체 몰살로,죽음의 세력이 모든 사람 위에 두럽게 내려 앉았다. 파라오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과 미래의 주인인 양 행세한다. 이로써 그의 주장과,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것이라 선언하시는 야훼 하느님의 주장이 충돌할 것이다.
이번에는 이집트인들의 생명의 원천인 나일 강이 죽임의 도구로 쓰인다. 또 다른 반전이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열 가지 표징(재앙)에서 이집트인들이 강물로 고통 받고 맏아들이 죽는 재반전이 벌어질 것이다.
* 2,1-10 : 모세가 죽음에서 건져지다
히브리인들이 받는 억압은 한층 거세지고 제도화되고 일반화되었다. 억압은 삶의 희망을 빼앗고 생명을 시들게 한다. 이렇게 만연된 억압과 죽음의 세력 속에서 생명의 불꽃이 반짝인다. 이제 초점은 한 아기에게로 모아진다. 이 단락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그 아이”로 7번 나온다). 한 생명의 탄생은 얼마나 흔한 일상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의 탄생은 종종 새 희망의 출발점이자 새 삶의 시작을 예시한다. 그를 통해 한 백성의 운명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레위 가문에 속한 어느 부부가 아기를 낳는다. 부계 혈연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모세 같은 위대한 인물의 부모 이름, 특히 아버지 이름이 명기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독특하다. 그래서인가 뒤에 족보를 제시하여,아버지는 레위의 손자인 ‘아므람’ 이고 어머니는 레위의 딸인 ‘요케뱃’ 이라고 밝힌다(6,20). 모세가 ‘레위 가문’ 출신임을 명기하여 장차 광야에서 성소를 세우고 사제들을 세우는 역할을 하리라고 예시하고 합법화한다. 그가 사제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사제들이 사회의 핵심 지도자로 부각된 유배 이후에 특히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아기의 어머니는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겨 기른다. 그 이유는 파라오의 명령으로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을 강에 던져버려라”라는 두려움에서 몰래 키운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더 숨겨 둘 수 없게 되자,왕골 상자를 구해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속에 아이를 뉘어 놓았다(2,3). 왕골은 나일 강 삼각주의 진흙지대에 무성했던 파피루스로서 필기재료로 많이 쓰였고, 신발이나 밧줄 특히 여러 겹으로 엮어 가벼운 배를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노아시대에 만들어졌던 방주과 같이 왕골 상자에는 조타장치가 없기 때문에 순전히 하느님의 인도와 보호에만 의지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물에서 생명을 구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홍수의 물 속에서 구원받는 노아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린다. 어머니는 왕골 상자를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어머니는 절망하여 아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 아기를 보호하려고 한다. 갖은 지혜를 다 쓴 후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맡긴 것이다. 갑자기 익명으로 등장한 아기의 누이도 아기를 지켜보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하는 것이다. 지금 갈대 숲에 있는 아기는 장차 갈대 바다 앞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14,13-30)을 예표하는 듯하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가 왕골 상자를 본다. 아기의 삶과 죽음이 판가름되는 긴장된 순간이다.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본 공주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즉시 ‘히브리인들의 아이’ 임을 ‘알아본다’(2,6). 파라오의 명령 때문이지만,히브라인들의 용모가 이집트인들과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긴 공주는 아기 누이의 제안을 받아 들여 히브리인 유모에게 아기를 맡긴다. 파라오의 딸은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 말하였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2,9).
그리하여 모세의 어머니는 그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 . 결국 모세는 살아났다. 상황은 다시 뒤집어졌다. 역설적으로 파라오의 딸이 파라오의 계획을 뒤집는 주역이 된다. 죽이려는 임금의 눈앞에서 죽어야 하는 종의 자식이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된다. 죽음의 물은 구원의 도구로 바뀐다. 아기를 포기했던 어머니가 다시 아기를 품에 안는다. 그러면서 그에게 히브라인의 정체성을 전수할 수 있게 된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가 꽤 자란 뒤에 공주에게 데려갔고,공주는 이 아이를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2,10).
고대 이집트에서 여성의 사회적,법적 지위는 비교적 높았다. 여성들도 모계 쪽으로 유산을 받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권리를 가졌기에 어느 정도 경제적 독립이 가능했다. 따라서 공주는 자기 마음대로 즉석에서 유모 계약을 맺고 후에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법에 따르면 유모가 자기 집에서 일정 기간 동안 아이를 젖 먹여
기르면 그에게 삯을 주어야 했다. 그리고 젓을 떼는 나이, 곧 세 살가량이 되었을 때 정식으로 양자로 맞았다.
공주는 아이에게 모세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이름은 본래 이집트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지방 신화에 따른 신의 탄생 기념일 즈음에 아기가 태어나면 흔히 그 신의 이름을 아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특히 18왕조 파라오의 이름은 거의 그렇다. 가령 투트모세(Thutmose)는 ‘Thot(지혜의 신)가 낳은 사내아이’, 라메세스(Rameses)는 ‘Ra(태양신)가 낳은 사내아이’ 란 뜻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마샤(건져 내다, 끄집어내다)라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다. 탈출기 저자는 이름의 뜻을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냈다”로 풀이한다.
모세는 ‘건져 낸 사람’이라는 능동형(moshe)보다 ‘건져 내어진 사람’이란 수동형(mashui)이 더 그럴 듯하다. 따라서 이 원인론적 이름 풀이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홍수의 물처럼 죽음의 세력에 잠겨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는 일을 맡은 사람이라는 모세의 운명과 미래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이사 63,12).
이런 맥락에서 모세는 물에서 생명을 구한 노아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 이름을 이집트 공주가 지어 주었다는 점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이 단락에서 이름이 나오는 이는 모세가 유일하다.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이름 없이 등장한다. 그럼으로써 모세의 이름과 존재가 한층 뚜렷하게 부각된다.
모세 이야기는 민담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른바 ‘버려진 영웅’ 유형에 속한다. 그중에서 이집트의 호루스 신화나 ‘사르곤 임금의 출생과 모험’ 을 다룬 바빌로니아 이야기가 모세 출생 설화의 기초 자료로 쓰였을 수 있다. 사르곤 임금(대략 기원전 2334-2279)은 아카드에 도읍을 정하고 첫 번째 셈족 왕조를 열어 최초의 제국을 세웠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여사제인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강에 던져졌다가 구해져 큰 영웅이 되었다. 그래서 모세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와 그 백성을 일으켜 세운 모세의 막중한 사명을 예시하기 위해,눈에 보이는 제국을 세운 사르곤 이야기를 빌려 왔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쓰면서 모세의 출생 기사를 참조한다. 두 이야기에서 당대의 전제군주인 파라오와 헤로데는 한 아기와 그 세대 아기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모세와 예수는 고통받는 백성 가운데 태어나 생명을 위협받지만 하느님의 인도로 구원을 체험한다. 미디안과 이집트로 도피하여 목숨을 구한 두 사람은 자란 뒤에 광야에서 일종의 유배 체험을 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를 계속 겪는다. 하지만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따라 살면서 그분의 뜻을 드러낸다. 마태오는 이렇듯 유다교의 최고 인물인 모세의 유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모세로 기술하면서도 모세를 능가하는 결정적 구원자로 고백한다.
* 2,11-22 모세가 이집트 왕자에서 미디안 목자로 되다
모세는 파라오의 궁,모든 히브리인 사내아이를 죽이려던 파라오의 집 안에서 자란다. 성경은 모세의 성장 과정을 밝히지 않지만, 그가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면 왕실 후손이나 고위층 자제들과 같이 이집트의 정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모세는 갖가지 지식과 기능을 익히면서 이집트인으로 자랐다. 아기가 젊은이로 “자랐다”(2,11)는 말 뒤에는 몸이 자랐다는 의미 외에 의식도 성장했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모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히브리인이라는 자기 신원에 대한 인식과 믿음도 굳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삶의 기존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자기 동포’ (히브리어 원뜻은 형제)들이 있는 데로 일부러 나아간 것이다. 그의 두 가지 신원 중 히브리인 신원이 처음 드러나는 순간이다.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2,11-12).
그는 동포들이 강제 노동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고,또 이집트 사람 하나가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도 보았다. 건성으로 보지 않고 주의 갚게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 맞고 있는 형제에 대한 연민,그들과의 연대감,억압받는 약자를 향한 정의감,형제들의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등이 모세를 휘감았다. 그는 절제되지 않은 채 격렬한 분노를 살인으로 나타냈다. 모세는 사태를 파악한 뒤 즉시 동포의 구원자로 나선다. 그의 모습을 동포 외에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모세는 다시 나간다. 범죄 심리학에서 범죄자는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고 하지만,여기서는 모세가 히브리인들이 고통 받는 현장을 자주 찾았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히브리인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고 끼어든다. 잘못한 사람에게 “왜 동족을 때립니까”하고 나무란 것이다. 그러자 그 사내는 즉시 모세에게 반발한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2,14).
모세는 이집트 왕자의 신분으로 히브리인들의 현장을 기웃거리면서 동정과 관심을 보인다고 히브리인의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동포를 ‘위한다’ 고 나서지만,진정 그들의 처지에서 아픔과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 어찌 그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빈정거림이다. 결국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나고야 말았구나’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보통사람의 모습이다.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고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2,15).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집트 땅에서 멀리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억압받는 형제들 편에 서기로 한 자기 결단의 결과이지만, 살인 사건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그의 행위는 파라오의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상대방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점,그것도 몰래 은밀히 하려고 한 점 철저히 자기 힘,자기 기준에 따라 일을 처리한 점 때문에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인간의 폭력으로는 상황의 최종 해결,곧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이제 꼼짝없이 수배자가 된 모세는 파라오의 손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달아난다. 아무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히브리인의 신세가 된 것이다. 미디안족은 아브라함과 크투라 사이에서 난 넷째 아들 미디안(창세 25,2)의 후예로서,탈출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묘사되나(18장 참조),민수기 이후에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로 그려진다. 5개 부족 연맹체로 결성된 미디안족은 아카바만 동편 지역부터 시리아 · 아라비아 사막을 거쳐 엘닷 서북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모세는 미디안 땅의 어느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광야와 사막에 사는 유목민에게 우물은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는 원천으로서 너무나 소중하였다. 그래서 우물을 둘러싼 분쟁도 잦았고(창세 26,15-33 참조), 우물가에 늘 사람이 모였던 관계로 소식을 주고받는 등 각종 사건도 벌어졌다. 그런데 모세가 앉아 있던 우물가에서도 ‘약육강식’ 의 현상이 벌어졌다. 여자들이 먼저 와서 물을 걷고 양 떼에게 먹이려고 하는데 남자 목자들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그런데 미디안의 사제에게는 딸이 일곱 있었다. 이들이 그곳으로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서는 아버지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 하였다. 그때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내었다. 그러자 모세가 일어나서 그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2,16-17).
여기서는 남자의 완력이 질서를 무시하는 폭력으로 행사되었다. 모세는 이 불의를 보고 즉시 일어나 먼저 온 여성들을 돕는다. 게다가 모세가 물을 길어 양 떼까지 먹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다른 때보다 일찍 집에 갈 수 있었다(2,18-19). 이는 평소에도 남자 목자들이 여자 목자들을롭히고 순서를 무시한 채 양 떼에게 먼저 물을 먹였음을 알려 준다. 2.18의 “오늘은 웬일로 일찍 돌아왔느냐?"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평범한 일상사에도 강자의 힘이 약자의 자유를 짓누르고 제 마음대로 질서를 뒤바꾸는 폭력이 넘쳤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일상사와 가까운 관계 속에 숨어 있는 폭력과 차별을 바로잡으려면 얼마만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물에서 구해진 모세는 이 우물가에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이집트에서 쫓겨난 그가 이집트 사람으로 소개된다. 이트로의 딸들이 “어떤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자신이 도운 일곱 딸의 아버지 르우엘의 환대를 받고 마침내 그 집 사위가 된다.
모세는 그곳에 정착해서 치포라(‘새’라는 뜻)와 혼인하고 아들까지 두어 새로운 미래를 일궈간다. 이렇게 모세가 우물가 연분으로 새 삶을 여는 것은 그의 선조 이사악과 야곱의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모세는 자기처지를 빗대어 아들의 이름을 짓는데,게르솜은 “내가 낯서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라는 뜻이다(2,22) 게르솜은 어간(grsh)을 고려하여 가라쉬 ‘garash’ 와 연결하면 “내쫓겼다,추방되었다”로 풀이할 수도 있다.
모세는 풍요로운 땅에서 쫓겨나 척박한 광야에서 생명을 구했다. 고대 최고의 문화와 물질문명을 자랑했던 이집트는 모세의 자유와 목숨을 위협하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반면에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는 그의 자유와 삶을 보존하는 생명의 땅이 되었다. 그 전환점은 폭력에 대한 모세의 태도 변화였다. 그는 정의를 위해 나섰다가 이집트에서 폭력으로 사람을 죽였다면,미디안에서는 약한 사람을 살렸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보장된 미래를 잃었고,미디안에서는 새로운 미래를 얻었다.
파라오 체제가 주는 안일과 안주 속에 모든 것을 잊고 살지 않았던 모세는,이제 미디안 땅의 나그네로서 형제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찾기 위해,또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온 정신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기나긴 시간을 맞이 한다. 미디안땅에서 그는 선조 아브라함의 자손인 친척과 다시 일치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영구히 정착할 땅이 아니다. 인생의 한 전환점인 그곳은 이집트와 약속의 땅 사이의 중간 거류지로 의미를 갖는다.
* 2,23-25 :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생각하시다
이야기의 흐름은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다. 이 단락은 1-2장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3장 이후에 펼쳐질 새로운 이야기를 암시하는 연결고리로 역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집트 임금이 죽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2,23).
본문은 갑자기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짧게 말한다. 얼마만큼의 시간인가? “이집트 임금”(2,23)을 비롯하여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4,19)고 할 정도로 한 세대에 걸친 긴 세월이 흘렀다. 성경에서 사람은 40세가 되어야 성인이 되며 한 세대는 40년이다. 모세의 40년 미디안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유랑을 예표하는 것일 수 있다. 모세의 목숨을 노리던 위협은 일단 사라졌다. 그가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무언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고역(멍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새로운 파라오의 지배는 그대로이다. 바뀐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이다. 혹시 바뀔까 했던 상황이 ‘역시’ 달라지지 않자 더 힘들어진 고역에 짓눌린 그들은 처음으로 “탄식하고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하고” “신음소리”를 낸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2,24-25). 이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비탄과 고통의 처지에서 야훼 하느님을 향하여 쏟아 놓는 진한 표현들이다.
몹시 힘든 강제 노동으로 자유와 생명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자들의 ‘탄식’,‘부르짖음’,‘도움 청함’, ‘신음 소리’ 와 이를 ‘듣고’,‘기억하고’,‘보고’,‘아시는’ 하느님의 행위가 맞물리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급격히 바뀐다. 감춰진 하느님의 존재가 이제 이야기의 전면에 나타나 지금까지 이야기의 주된 가락을 이뤄 온 파라오의 억압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닥친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인간사에 관여하시는 결정적인 때가 이른 것이다.
* 3,1-6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다
모세는 양 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3,1). 그는 신분이 이집트 왕자에서 목자로 바뀐 것 못지않게,살인과 동족의 배척 및 도망과 낯선 땅의 이주 등으로 격심한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삶은 평범하다. 레위 가문 출신이고 사제 집안과 혼인하였지만 종교적 일을 수행하지 않는다. 단지 목자로서 선조 아브라함처럼 이리저리 양 떼를 이끌고 다닐 뿐이다. 그 세월이 오랫동안(7,7에 따르면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이는 팔십 세) 지속되었다.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3,1). 어느 날 모세는 양 떼를 이끌어 광야를 지나가다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른다. ‘호랩’ 은 히브리어로 ‘황량한 곳,불모지,내버려진 땅’ 을 의미하는데,이런 곳에서 모세가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것은 지금도 버림받고 황폐한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벌 수 있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산 호렙산 종종 계약의 산으로서, 십계명을 부여받았던 시나이산과 혼용되고 있다. 즉 성경은 두 산의 지리적 구별을 엄밀히 하고 있지 않다. 이런 견지에서 두 산의 관계에 대한 몇몇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산의 총칭은 호렙인데 특별히 정상 부분만을 일컬어 '시나이'라 한다. (2) 한 산에 두 봉우리가 있어 하나는 호렙이고 다른 하나는 시나이이다. (3) 두 산은 동일한 산으로서 두 가지 이름을 갖는다. 이처럼 각 견해를 종합해 보더라도 두 산의 관계를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렵다.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오늘날 호렙(시나이)산은 시나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 291m의 '예벧 무사'(모세의 산)에 해당한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곳을 특별히 하느님의 산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집트에서 탈출 직전 모세가 이 산 정상에서 하느님께로부터 거룩한 소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아가 이집트 탈출 직후에 하느님께서 이 산에 나타나시어 계약의 증표로 율법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산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신 거룩함의 장소로 간주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산으로 성별되어 영영히 기억되었던 것이다.
사건의 현장은 보잘것없는 떨기나무이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3,2). 떨기나무로 옮겨진 이 식물은 광야의 마른 시내(와디)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로 추정된다. 1미터 정도 자라며 장미 모양의 작은 꽃이 피고 산딸기 비슷한 검은 열매가 달린 가지나무이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나타났다. 이것이 모세의 눈에는 떨기나무에 불꽃이 이는데도 타 없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보였다. 일상 경험이나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이 이상한 일(탈출기에는 이적과 기적이 자주 나오는데 그중 최초이다)이 모세의 발길을 잡는다. 그래서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3,3) 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서 그를 부르셨다. “모세야,모세야" (3,4) 이름을 두 번씩 부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긴급함을 나타낸다(“사무엘아,사무엘아" 1사무 3,10). 또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의 고유함을 인정하며 그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사 표명이다. 그러면서 초점이 ‘보는 이적’에서 ‘듣는 말씀’으로 옮겨진다. 모세의 경우처럼,하느님께서는 늘 먼저 찾아와 사람에게 손을 내미신다. 이제부터 그분이 모든 사건과 행동을 주도하신다.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으로 나타난 이는 주님의 천사인데,곧이어 떨기 한가운데서 말씀하는 이는 주님이시다. 성경에는 하느님을 ‘불’과 연관하여 나타낸 예가 적지 않다. “타오르는 햇불”(창세 15,17),“불기둥”(13,21 이하; 민수 14,14: 느헤 9,12.19),“불”(민수9,15-16; 신명 1,33; 에제 1,4.13.27; ; 시편 78,14) 등이 그 예이다. 특히 이 표현은 장차 이(시나이) 산에서 “불 속에서” 내려오실 주님의 나타남을 예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하느님을 불과 관련시킨 표현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두려운 신적 현존에 대한 은유 또는 상징으로 보인다. 떨기가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은 것은 거센 억압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사라지지 않고 보존됨을 뜻한다. 한편 그것은 하찮은 떨기나무에도 하느님이 계신다(신명 33,16에서 하느님께서는 “덤불에 사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곧 그분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음을 보여 준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분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응답이다(아브라함-창세 22,1.11/ 야곱-창세 46,2/사무엘-1사무 3,4.6.8/ 이사야-이사 6,8). 이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3,.5). 고대 근동에서 거룩한 장소에 들어
갈 때 신을 벗는 것은 신에 대한 마땅한 예의이자 존경의 표시였다.
지금도 불교도가 도량에 들어갈 때, 힌두교도가 사원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뿐 아니라 양말까지 벗는다. 고대 이집트에서 임금 앞에 나갈 때는 누구나 맨발이어야 했다. 어쩌면 이런 관습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사제들이 성전에서 맨발로 봉사하는 관례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한편 발은 인체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으로 간주되었기에,맨발은 인간의 약하고 추한 면,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숨김없이 신 앞에서 드러낸다는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다(2사무 15,30).
고대 근동 세계에서 거룩함’ 은 숭배되는 물체나 장소에 깃든 ‘자연적인’ 신비에서 나오는 것으로,대체로 고정되어 있었다. 특히 신의 거처로 인정된 거룩한 산은 우주의 중심축으로 거룩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는 마르둑 신의 선전을 건설하는,곧 신이 거처할 거룩한 공간을 마련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실제 공간에 한번 마련된 성소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이스라엘도 ‘하느님의 산’ 개념을 받아들였지만,그로 인해 어떤 자연물 자체를 거룩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으로 철저히 ‘자연’ 과 구분되기 때문에,하느님과 분리된 어떤 고유하고 독립된 ‘거룩함’ 이 자연 속에 있을 여지는 전혀 없었다. 성경에서 나무(창세 21,33),돌(창세 28,11-19),강(창세 32,23-32) 등을 거룩하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시나이 산과 함께 가장 거룩한 장소로 여기는 시온 산도,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다음 봉헌하여 하느님의 인정을 받은 후에야 거룩하다고 일컬어졌다. 이렇듯 성경에서 ‘거룩함’ 은 철저히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모세를 붙잡았던 기적 현상(불타는 떨기나무)은 사라지고 그분의 말씀만이 크게 부각된다. 그분의 어투도 지시하는 딱딱한 어조에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부드러운 어조로 바뀐다. 이를 대하는 모세도 ‘지켜 봄’ 에서 ‘귀 기울여 듣는’ 자세로 변화된다.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3,6). 하느님의 자기 소개이다. 이 소개말은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나 이집트인을 죽이고 현재 미디안 땅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모세의 뿌리와 신원을 밝힌다. ‘네’ 선조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며,너는 그들의 후손 곧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이다. 더욱이 ‘네’ 라는 말을 써서 모세와 특별한, 남다르게 돈독하고 밀접한 관계임을 보여 준다.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란호칭 역시 고대 근동에서 봉헌자와그의 후견인으로 돌봐 주는 신의 특별한 친분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널리 쓰였다. 성경에서 이 호칭은 아브라함, 이사악,야곱 세 선조와 연관되어서만 사용되다가 탈출기 이후에 사라진다. 이는 그 분기점인 모세의 소명 사건이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새 시대를 여는 서막임을 뜻한다. 즉 이 호칭이 이제껏 하느님께서 선조 개인과 맺은 관계를 나타내는 데 적합했다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 차원에서 새롭게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가는 단계에서는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다. 그 이름이 곧이어 소개될 ‘야훼’ 이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3,6). 모세는 주님을 만난 첫 사람이다. 사람은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을 요구할 수도,감당할 수도 없다. 그러다 직접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 극도의 두려움과 놀라움,신비로움과 황홀함이 쓰나미처럼 그를 덮친다. 그 체험은 죽음만큼이나 강렬하고 극적이며 무섭다. 그는 알 수 없는 대상에게 압도당하는 동시에 매혹된다. 그렇기에 그들의 두려움을 달래 주기 위해 보통 ‘두려워하지 마라’ 는 위로의 말씀이 함께 주어진다.
불에 덴 사람처럼, 하느님을 만난 이의 존재와 삶은 변화되어 전과 같지 않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그러하였다. 그분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한 이들은 모두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두려움과 경이로움에 싸여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마르4,41) 하고 외칠 뿐이었다.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의 삶은 뒤바뀌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상에 드러냈다.
* 3,7-12 모세가 소명을 받다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3,7). 이 모든 행위의 주체는 “나” 주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취하시는 동작은 ‘보았다, 들었다, 알고 있다, 내려왔다, 보내겠다’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신 백성의 고난을 알고 계시고 단호하게 대처하질 것이다. 인간이 고난을 겪으면 그분도 함께 고통을 느끼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난을 ‘보신다’, 울부짖음을 ‘들으신다’ 는 표현은 본래 억울하게 고통 받는 개인이 하느님께서 살펴 주시기를 청하는 탄원기도에서 나왔다. 하느님은 지지고 볶는 현실과 무관한 형이상학적 초월자가 아니라, 일상에서 빚어지는 온갖 일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들으시며’ 관계하시는 ‘현장의 하느님’ 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 백성’ 이라고 두 번이나 부르신다(3,7.10). 아직 계약을 맺지는 않았지만 이미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통해 당신을 그들의 하느님으로 인정하선 것이다(창세 17,7-8). 그렇기에 그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기꺼이 도우려고 나서신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며 지키시고, 그 백성은 하느님만 섬기며 그분의 길(토라)을 쫓는 특별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 관계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느님의 산에 왔을 때 계약을 맺으면서 공고해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밝히신다. 곧 “그래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3,8) 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단순히 파라오나 이집트인들을 개과천선시키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단숨에 없애시지 않는다. 그분의 계획은 ‘어디에서 어디로’,종에서 자유인으로,형제를 억압하는 곳에서 형제끼리 평등하게 공존하는 곳으로,파라오를 섬기는 땅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땅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곧 구원,상태의 근본적 변환이다.
구원을 위하여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의 손에서’,또 “너희(거짓 예언자) 손에서" (에제 13,21.23),“그들(거짓 목자)의 입에서"(에제 34,10),“임금의 손에”서(즈카 11,6) 당신 백성을,당신의 양 떼를 ‘빼내어’ 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파라오로 대변되는 온갖 우상과 악,파괴의 손아귀에서 ‘기필코’ 인간을 구하려고 힘있게 움직이신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인류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은 약속의 땅을 가리키는 대표적 별명이다. 여기서 ‘젖’ 은 양과 염소 등 가축의 산물을, ‘꿀’ 은 일반 꿀이 아니라 대추야자 열매와 무화과 같은 단 과일즙을 가리킨다. 사실 팔레스티나는 비가 적고 메마른 땅이다. 게다가 이 땅에는 이미 가나안족 등 여섯 종족이 살고 있다.
구약성경에 스무 번 언급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은 환상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곳은 팔레스티나라는 지리적 영토와 자연 조건을 넘어선다. 곧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어 뭇 생명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땅,하느님 나라를 뜻한다. 그 땅의 풍요로움이 강복일 뿐더러 땅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 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3,9). 이스라엘 백성이 겪고 있는 고난의 현실이 다시 강조된다. 하느님께서는 현실을 변화시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고 하신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나서 당신 일을 도와 줄 일꾼을 부르신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3,10). 하느님의 사람,그분의 일꾼으로 부르심이요,그분의 협력자로 초대하심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하느님을 만났을 때,더구나 그분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3,11).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에 부당한 자라고 느끼며 겸손하게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또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게 되는 것이 두렵고,그분의 사명을 감당하기엔 자기 능력이 너무도 보잘것없다고 느껴 막무가내로 회피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 대부분 회피하려 했다.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아모7,14) 아모스는 ‘야훼께 붙잡혀’ 할 수 없이 그 분부를 전한다(아모 3,8). 이사야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 예언자의 역할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이사6,5),예레미야는 이렇게 둘러대었다. “아,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자격이나 됨됨이를 논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를 긍정하시고 그에게 약속하선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3,12).
하느님의 말씀은 아주 간결하다. 모세에게 당신 자신이 증거라는 것을 말한다. 간결한 네 가지 보증 말씀인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은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잘 설명한다. 이어서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세에게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갖게 할 뿐더러 그가 하느님의 심부름 꾼으로 계속 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끝으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산에서 당신을 예배하리라고 예고하신다(3,12). 모세의 사명이 결국 이루어진다는 또 다른 약속이요 보증이다. 이 말씀은 후에 시나이 사건으로 실현된다.
* 3,13-15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계시하시다
모세는 즉시 순종하지 않는다. 다시 구실을 대며 은근히 부르심을 거절한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3,13). 오랫동안 그들과 떨어져 있다가 돌아온 모세의 말이나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이 신뢰하지도,쉽게 받아들이지도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것은 그 이름 자체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부르는 신적 존재를 알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은 곧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분의 이름을 알아야 관계를 맺어 예배드릴 수 있고 그분의 메시지를 신뢰할 수 있으며,그분에게서 힘을 받아 그분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창세 32,30).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3,14)고 대답하신다. 이 대답의 뜻과 발음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되어 왔다. 이 대답은 먼저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인데, 여기서 아쉐르는 관계대명사이므로 ‘에흐예’ (나는 ... 이다) 한마디로 줄일 수 있다.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은 이 단어를 ‘에고 에이미 호 온’ 으로 옮겨 ‘나는 있는 자,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풀이하였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존재하시며 다른 존재처럼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신 분이라고 그 속성을 설명하였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주장이 계속 견지되고 있으나,이렇게 추상적이고 고정된 철학 개념으로 풀이하는 것은 이 구절의 맥락에서 벗어난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이를 사역형으로 풀이하여 “나는 (무엇을) 있게 하는 자’ 곧 창조주로,또는 미래형으로 해석하여 ‘나는 ~로 드러날 것이다’ 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다시 말해 야훼는 당신을 인격적 존재로 드러내시며,그분의 정체는 이제부터 그분이 하시는 행위와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방식도 최근에야 밝혀졌다. 기원후 7세기까지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도 YHWH라는 자음 네 글자로만 전해졌다(이를 ‘거룩한 네 글자라고 부른다). 물론 처음에는 이 단어가 읽혔지만,바빌론 유배 이후 십계명 중 제2계명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엄격히 지킴에 따라,대사제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 지성소에서 작은 소리로 부르는 것 외에는 금지되었다. 따라서 그 발음은 잊혀졌고,말로 나타낼 수 없는 그 이름을 부를 때는 ‘아도나이’ (나의 주님)라고 불렀다. 그 뒤 이 관행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계속 지켜졌다. 후에 유다교의 마소라 학파가 히브리어 모음을 창안해 성경에 표기할 때에도 이 거룩한 이름 YHWH 밑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적어 그 이름 대신 아도나이로 읽게 하였다. 그런데 중세 유럽의 일부 그리스도교 학자가 이러한 유다교의 관례를 오해하여 자음 YHWH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결합한 ‘여호와’로 잘못 읽었다. 비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발음이 통용되고 있지만,성서학과 고대 근동 언어학 등 각 방면에 걸친 연구 결과 YHWH의 본래 발음이 ‘야훼’ 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되었고,이 가설은 현재 학계나 번역 성경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이 이름의 발음을 야훼로 인정하면서도 하느님 이름을 외람되이 부르지 않는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우리말 《성경》처럼 야훼라는 이름 대신 ‘주님’ 으로 옮긴 것이다.
성경은 인류가 초기부터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창세 4,26)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이름이 계시되는 시점은 모세를 부르시는 지금 여기이다. 즉 모세에게 처음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이름 야훼가 알려진 것이다. 하느님께서 새 이름을 계시하신 뜻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면모를 새롭게 드러내고,모세로 대표되는 이스라엘과 더 가깝고 친숙한 관계를 맺겠다는 암시이다. 새롭게 드러날 야훼 하느님의 면모는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관된다.
이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해방하시는 하느님이고,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하느님이며, 다른 신을 예배하면서 형제를 억압하고 괴롭히는 짓을 참지 못하는 ‘질투하는 하느님’ (34,14)이라고 뚜렷이 드러내신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걸어 물었으므로,하느님께서는 두 번이나 그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이르신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3,14). 이 말씀은 모세를 파견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 준다. 이어서 좀 더 자세히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3,15). 창세기에 자주 나오는 ‘~의 하느님’ 이라는 표현은 어느 한 씨족의 하느님을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선조들이 모셨던 이 하느님을 바로 야훼라고 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야훼께서 이루어 가실 미래까지 이어진다. 억압에서 구원하시고 생명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신 야훼 하느님의 속성이 조금도 변치 않고 역사에서 계속 드러날 것이다.
* 3,16-22 모세의 소명에 관한 지침
야훼께서는 이제 당선이 취할 구원 계획의 전개 과정을 차례로 일러 주며 모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신다.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3,16).
야훼 하느님은 모세에게 백성의 지도자인 원로들에게 당신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하신 말씀을 상세히 말하라 이르신다(3,16-18). 중요한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원로들에게 당신 계획을 알려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3,18). 두 번째 할 일은 모세가 원로들을 데리고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앞에서는(3,7-8) 모세에게만 사명을 주었는데,여기서는 그가 원로들과 함께 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였음을 파라오에게 인식시킨다. 요구 조건은 히브리인의 하느님 야훼께 제사 드리기 위해 광야로 사흘 길을 가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3,18). ‘사흘 길’은 꽤 먼 거리를 표현하는 근동의 관용구이다. 이 요구 조건은 넷째 재앙 이후 파라오와의 협상 에서 계속 제기된다(3,18: 5,1-3: 8,23).
파라오는 절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하느님께서는 이를 익히 알고 계신다. 그래서 강한 손과 “온갖 이적”으로 파라오를 쳐서 마침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것이다(3,19-20), 이 말은 앞으로 있을 열 가지 이적(재앙)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날수록 속수무책으로 당한 파라오의 무능이 한층 대비되어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과정이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네 후손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창세 15,14) 그대로 이루어져,여인과 남자 모두 요구한 대로 받을 것이다(12,35-36). 이와 같이 재물을 갖게 되는 것은 사기나 강도짓이 아니라,“나는 또 이 백성이 이집트인들에게 호감을 사도록 하여, 너희가 떠날 때 빈손으로 떠나지 않게 하겠다. 여인들은 저마다 이웃 여자와 자기 집에 함께 사는 여자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할 것이고, 너희는 그것들을 너희 아들딸들에게 지울 것이다. 이렇게 너희는 이집트를 털 것이다”(3,21-22). 털 것이라는 말은 전리품이라는 뜻이다. 사실상 이 일 자체가 ‘이적’ 이다. 그들을 부리고 그들의 자식을 죽이려고 하던 이집트인들이 야훼의 개입으로 변한 것이다. 아울러 이 사건을 통해 이집트 탈출이 야반 도주가 아니라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 하느님의 승리임이 한층 뚜렷하게 부각된다.
* 4,1-9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능력을 주시다
모세는 여전히 자기 소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3,18)고 다짐하셨건만, 그는 계속 원로들이 자기를 믿을 것인지 걱정한다. “그러자 모세가 대답하였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4,1). 파라오의 반응이 문제가 아니라 원로들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믿어 줄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이를 구실로 소명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초점은 믿음, 신뢰이다. 공동체가 지도자를 신뢰하고 권위를 인정해야 결속될 수 있다. 권위와 신뢰의 문제에서 모세에게는 과거의 상처가 있다. 어쩌면 그가 아직 야훼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문제일 수도 있다.
야훼께서는 모세의 걱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그를 당신의 참된 심부름꾼으로 ‘믿게 하려고’(4,5),또 그의 말에 신뢰와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곧바로 설명 없이 두 가지 표징을 보여 주신다. 첫째 표징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는 현상이다. 이 지팡이는 양에 대한 목자의 권위를 나타낸다. 성경에서 지팡이는 왕권,힘,권위를 나타내는 표지로 자주 언급된다.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다 돌아오는 현상은 모세에게 지도자의 자질과 권위가 부여되었음을 뜻하며,나아가 파라오의 막강한 권세를 쳐부술 수 있는 힘이 주어졌음을 뜻한다. 물론 그 힘을 주시는 분은 야훼 하느님이다. 이후 지팡이는 모세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둘째 표징은 손이 나병에 걸렸다 낫는 예이다. 여기서 나병은 한센병이 아니라 일반 피부병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레위 13-14장 참조). 물론 성경에서 나병 또는 피부병은 그 병의 실제 증상보다 인간 죄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의 표징으로 많이 언급된다(민수 12,10 참조). “주님께서 다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 보니, 그 손이 나병에 걸려 하얀 눈처럼 되어 있었다”(4,6). 이 대목에서 나병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악성 질병이므로 (레위 13.2-3). 모세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미칠 치명적 저주의 결과인 동시에 계속 소명을 거절하는 모세에 대한 경고의 표지로 보인다.
이집트의 생명줄인 나일 강 물을 퍼서 “마른 땅”에 부으면 피로 변할 것이라는 셋째 표징은,하느님의 의지가 자연을 지배하며 그것을 통해 이집트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시사한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위한 표징으로 소개되지만,뒤에서는 이집트인들에게 내리는 첫째 재앙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이 두 표징도 믿지 않고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4,9)에서 알 수 있듯이,표징이 저절로 믿음을 낳거나 키우지는 않는다.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갖는 고통스런 과정을 기술한다.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은 물론 그분이 보내신 예언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믿음은 단지 예언자가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권위를 받아들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이다. 믿음은 백성의 고통을 보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응답이다.
여기에 나타난 뱀,병,피 등은 모두 인간이 두려워하는 금기 대상이다. 그러나 본문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 안에 있으며 그분만 믿으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엉뚱하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계획일지라도 믿고 따르면 이루어진다.
* 4,10-17 아론이 모세의 대변인이 됨
두 가지 표징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다시금 소명을 거부할 뜻을 밝힌다.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말씀하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4,10). 지금 하느님과 대화를 잘 나누는 것을 보면 그에게 언어 장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설사 그런 약점이 있다 하여도,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하고 파라오와 대결하기를 두려워하는 그의 마음에 있는 듯하다.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그의 항변을 수용하신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입을 주어 말하게 만든 장본인(창조주)은 바로 당신이심을 분명히 밝히시며,“그러나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겠다”(4,12)고 한다.
모세의 첫 거부 때 당신의 현존을 약속하신 데 이어 모세의 ‘무딘’ 입과도 함께 하시겠다고,든든한 보증의 말씀을 거듭 밝히신다. 설혹 모세에게 어떤 장애와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야훼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 이 말씀에서 성경에 나타난 예언 현상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참예언자는 자신의 원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 세워진 자로서,본인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도 자신의 뜻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이 몰아 세우는 하느님의 힘과 뜻에 따라 전한다. 예언자의 말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계시에서 나온다. 예언자의 말솜씨는 그가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주시는 선물이다.
하지만 모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4,13) 하고 다시 거부하자,주님께서 화를 내신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만 익숙한 사람에게 그분의 분노는 상당히 당혹스럽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레위인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그가 말을 잘하는 줄 안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그는 너를 보면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다”(4,14).
예언서를 보면, 하느님은 종교란 미명 아래 형제에 대한 착취를 은폐하려는 자 들에게 노발대발하신다(이사 1,10-17 참조). 또 ‘법과 질서’ 와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억압자들에게 분노의 저주를 퍼부으신다(시편 58편 참조). 야훼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당신 계획을 바꾸신다. 모세가 홀로 사명을 수행하지 않도록 형 아론을 협조자로 세우시며 그의 ‘입’ 이 되어 함께 있겠다고 현존의 약속을 똑같이 하신다(4,15).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 이다.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예언자,아론은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실행하는 사제를 대표한다. 이집트 탈출이라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예언자와 사제가 함께 참여했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아론은 본문에서 몇몇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이집트에 있던 ‘레위인’ 아론이 모세의 협조자겸 입(대변인)이 됨으로써,모세를 이집트의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하고 그의 신원을 보장한다. 그럼으로써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다. 아울러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으로 그의 권위를 나눠 가지고 나중에 시나이 계약을 통해 사제직의 원조가 될 바탕도 미리 확보한다. 하지만 중심 인물은 모세이다. 그는 하느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평생 잡고 간다. 그 지팡이는 ‘하느님의 손’(7,5)처럼 표징과 이적을 일으키는 구실을 하며 모세의 권위를 입증할 것이다(4,17).
모세는 침묵 속에 승복하고 소명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모세와 하느님의 기나긴 공방전이 끝났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당신의 뜻을 따르도록 사람을 억압하거나 회유하지 않고,끈질기게 대안을 제시하며 설득하신다. 구원의 주도권은 하늘에 있지만 그분은 땅에 있는 당신의 협력자를 아끼고 존중하신다. 그분의 백성은 마땅히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 정하고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울러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하느님의 종들에게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 4,18-23 모세의 귀환과 하느님의 지시
난민,도망자,체류자,유배민 모세는 장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밝힌다. “모세는 장인 이트로에게 돌아가서 말하였다. ‘저는 이제 떠나야겠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친척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보아야겠습니다.’ 그러자 이트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게.’ 하고 말하였다”(4,18). 이 대목의 핵심어는 ‘돌아가다’(원래의 자리로 가는 움직임을 뜻하는 ‘슈브’는 신학적으로 회개를 의미한다)이다. 돌아가는 모세의 손에 하느님의 지팡이가 들려 있다(4.20). 그것은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고 있음을 반증한다. 살인이라는 돌발 사태로 인해 미디안 망명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던 것처럼, 이와 대조를 이루는 이집트 귀환도 뜻밖에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쥐어 준 그 모든 기적을 명심하여 파라오 앞에서 일으켜라. 그러나 나는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말하였건만, 너는 거부하며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4,21-23). 현재 본문의 흐름에서 가장 길게 소개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사실상 이 말씀은 5-13장에 걸쳐 이루어질 이집트 탈출 사건을 모두 요약하고 있다.
먼저 “내(야훼)가 네(모세) 손에 쥐어 준 그 모든 기적”이 부각된다(4.21). 모세의 지팡이와 손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모세가 기적을 행하더라도 그가 맡은 일은 수월하게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앞으로 진행될 모세의 사명, 곧 당신의 구원이 순탄치 않게 진행되리라고 분명히 밝히신다. 하느님의 구원은 많은 고통이 있은 뒤에 더디게 올 것이다. 그래서 조급해 하지 말고 신뢰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왜 구원이 더디게 진행되는가? 놀랍게도 야훼께서 “그(파라오)의 마음(직역: 심장)을 완고하게” 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4.21). 하느님 스스로 당신 계획을 지연시키신 것인가? “완고하게 하다”는 말은 딱딱하게 굳히는 것이다. 심장이 부드럽게 움직여야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데, 심장이 딱딱해지면 민감하게 분별하거나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져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한다’ 는 구절은 4-14장 사이에 스무 번 나온다. 열 번은 파라오 스스로 심장을 딱딱하게 하고,다른 열 번은 야훼께서 그렇게 하신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하시는가? 야훼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겠다고 모세에게 두 차례 예고하시지만(4,21: 7,3),일곱째 재앙에 가서야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9,12). 그 전에는 파라오 스스로 마음을 완고하게 한 것이다. 그의 마음이 완고해질수록 재앙이 심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라오의 선택이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야훼의 말씀을 거부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것이 자신과 나라에 총체적 이익이 된다고 나름대로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재앙과 전체 관점에서 보면,그의 선택은 ‘올바르지 않다.’ 그의 마음이 완고해지고 자기 식의 패턴으로 굳어져 올바른 선택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22절에서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여기는 파라오와 대조하여,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맏아들이라 부르신다(호세 11,1 참조). ‘맏아들’ 이란 표현은 선택받은 특별한 관계를 나타낸다(루카 2,7; 로마 8,29 참조). 이 표현 속에는 야훼 하느님의 다른 아들,곧 다른 민족들의 존재가 암시된다. 맏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를 그들의 신적 아버지로 예배하고 섬기도록 불린다.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말하였건만, 너는 거부하며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 ”(23). 파라오의 일을 하며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 예배하는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파라오가 이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주님께 맞서는 것이고,주님께서는 당신의 맏아들을 해방하기 위해 파라오의 맏아들을 죽이겠다고 말씀하신다.
* 4,24-26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음
이 대목은 탈출기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먼저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서 치포라 외에는 사람 이름이 명기되지 않은 채 전부 대명사 ‘그’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성경》에서 ‘그’ 를 ‘모세’ 라 적은 것은 해석이다). 따라서 야훼가 죽이려 한 대상이 모세인지 아니면 그의 맏아들인지,치포라가 제 아들의 포피를 잘라 댄 발이 모세의 발인지 아들의 발인지 모호하다. 둘째로 야훼께서 그를 죽이려 하시는 동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모세나 그의 맏아들 모두 죽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 셋째로 치포라가 말한 “피의 신랑”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대목은 고대의 민담한토막이 들어와 각색된 것 같다.
미디안의 여인 치포라는 사제 집안의 딸답게 날카로운 차돌로 아들의 포피를 잘라 할례
예식을 행한 것이다. 아직 그의 아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치포라는 그것을 모세의 발(남성 성기의 완독어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에 대고 “나에게 당신은 피의 신랑입니다”(25)이라고 말한다. 즉 치포라의 행위를 통해 모세는 상징적인 할례와 혼례를 치른 셈이다. 그리하여 피를 매개로 모세와 치포라,아들은 통합되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난다. 그러자 야훼께서는 그를 놓아 주셨다. 모세는 이방인 아내 치포라의 기지로 살아났다.
이 대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의식은 할례이며,중심 단어는 ‘피’ 이다. 기원 전 천년대 초반까지 이집트에서는 성인식이나 혼인식 때 할례를 행하였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는 생후 8일째에 피(생명)를 내어 신의 보호를 비는 의미로 할례를 행하였다. 바빌론 유배 후에 할례는 선조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표지로,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는 몸의 표식이 되었다(창세 17,9-27).
* 4,27-31 모세와 아론이 백성 앞에 서다
이 대목에서 부각되는 인물은 모세보다 아론이다. “주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를 만나러 광야로 가거라.’ 그래서 아론은 길을 떠나 하느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4,27). 아론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처음으로 하느님의 산에 가서 모세와 만나 입을 맞추었다. 팔로 목을 끌어안으며 입 맞추는 행위는 근동지역의 인사법이다.
이제 하느님의 이름과 그분의 일은 모세 개인을 떠나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에 선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믿었고, 그가 증거하는 주님을 믿었다.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시어 자기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살펴 주고 도와 주시겠다는 전갈은 진정 기쁜 소식이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릎을 꿇어 하느님을 경배하여 기쁨과 신앙을 드러냈다. “그러자 백성이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4,31). 이제 주님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간의 유대와 신뢰가 구축된 셈이다. 이로써 모세의 일차 소명 이야기가 끝나고 이집트에서 벌어지는 사명 수행으로 넘어간다.
* 5,1-5 파라오에게 해방을 요구함
모세가 받은 사명은 파라오에게 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그 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 (5,1). 이는 예언자들이 통치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양식에 따른 것 같다.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파라오를 알현하고 말한다. 이는 모세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므로 이에 순종해야 한다. 그 어투도 상당히 권위 있는 명령투로,직설적 표현이다.
주님의 말씀은 당신 백성이 축제를 지내도록 내보내라는 요구이다. 축제는 정해진 때에 어떤 성소로 가서 함께 드리는 종교 예식을 뜻한다. 또한 축제는 노동에서 풀려나는 쉼의 시기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성소로 이집트가 아니라 광야가 언급된다. 주님은 쓸모없는 땅 광야의 하느님이란 뜻이다.
파라오는 이 요구에 한마디로 코웃음 친다. “그 주님이 누구이기에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라는 것이냐? 나는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5,2). 파라오는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처음 들어볼 뿐더러 그 하느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파라오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을 무시하고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신을 신격화한 가짜 신 파라오와 참된 주님이신 야훼 하느님이 맞서기 시작한다.
사실 탈출기는 야훼가 하느님이심을(6,7) 모두가 알도록 그분의 놀라운 업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파라오와 이집트 백성도 모두 야훼가 주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파라오는 야훼나 그분의 뜻을 알고자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섬기지 못하도록 막아 그분의 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야훼는 파라오마저도 당신을 알게 되길 진정 바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야훼를 아는 것만이 참된 생명과 자유를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모세와 아론은 다시 간청한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그분께서 흑사병이나 칼로 저희를 덮치실 것입니다.” (5,3). 이 말은 야훼의 말씀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대표한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이다.
하지만 파라오가 누군가? 절대 권력의 소유자가 하찮은 이들의 하느님,실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드러나지 않은 ‘히브리인의 하느님’ 따위에 겁을 먹겠는가? 고대 이집트와 근동의 변두리 계층을 지칭하는 아피루,하비루들과 히브리인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지만, 적어도 일부 연관성은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히브리인의 하느님은 하층 계급의 주님일 터이고,신들의 세계에서도 하급에 속해 능력도 보잘 것 없을 것이다.
그래서 파라오는 호통친다. “모세와 아론,너희는 어찌하여 백성이 일을 하지 않도록 부추기느냐? 너희 일터로 돌아가라”(5,4). 너희는 종이고 너희 자리는 일터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너희 무거운 의무를 수행하라’ 는 말이다.
그에게 모세와 아론은 이제껏 별 문제없이 유지되던 이집트의 안정을 깨는 불순분자요, 알지도 못하는 야훼라는 신을 들먹이며 말 못하고 억눌리던 히브리인들에게 해방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는 선동가,이집트의 기존체제에 도전하고 내부 질서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여겨졌다. 그런 자의 유언비어에 넘어가면 이집트의 국익과 파라오의 위엄은 손상된다. 파라오는 이어 말한다. “그들이 이제 이 땅의 백성보다 많아졌는데도,너희는 그들이 일을 그만두게 하려는구나!"(5,5). 이 구절은 하느님의 강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불어나는 모습을 상기시키는 동시에,강제 노동으로 그들이 더 불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파라오의 속셈을 확인시킨다.
* 5,6-14 파라오의 대응 조치 - 억압의 강화
맞바람을 받으면 옷깃을 세운다.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들은 뒤 한층 완고하게 굳어져서 대응 조치를 강화한다. 두려움 때문에 억압이 더 심해지는 셈이다. 그럴수록 자신이든 남이든 자유로워지기는 어렵다. 파라오의 대응 조치는 이러하다. “너희는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더 이상 예전처럼 저 백성에게 대 주지 마라. 그들이 직접 가서 짚을 모아 오게 하여라. 그러나 벽돌 생산량은 그들이 예전에 만들던 것만큼 그들에게 지워라. 그 양을 줄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게을러져, ‘가서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며 아우성치고 있다”(5,7-8).
파라오의 조치는 매우 교활했다. 그는 더 심하게 일을 시킴으로써 히브리 민중이 모세에게 걸었던 기대가 헛된 것임을 분명히 밝혀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다. 또 그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지 여부는 야훼가 아니라 파라오 자신의 뜻에 달려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하여,파라오만을 섬기며 그에게 더욱 종속시키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다.
모세의 말,곧 해방시키겠다는 야훼의 약속이 ‘허튼 말’,거짓 약속으로 단정된다. 해방되어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은 있을 수 없는 망상으로 간주된다. 이에 작업 감독들과 조장들이 이렇게 말한다. “파라오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5,10). 말씀의 주체로 야훼 대신 파라오가 나섰다. 그리하여 야훼와 파라오가 대립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어명으로 실제 여건이 악화되자 파라오의 말에 점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흙벽돌을 만드는 데 짚은 매우 중요하다. 나일 강변의 진흙과 모래와 버무려진 짚이 그 속에서 썩으면서 내놓는 식물성 소재가 산(醒)의 작용 을하여 벽돌을 단단하게 한다. 짚을 넣지 않으면 벽돌은 쉽게 금이 가며 깨진다.
* 5,15-6,1 이스라엘 조장들의 불평과 모세의 탄원
정해진 벽돌 양을 채우지 못하자 이집트인 작업 감독 밑에서 하급 책임자로 일하던 이스라엘인 조장들이 나선다. 그들처럼 억눌리는 이들 중 일부를 뽑아 쥐꼬리 만한 특권을 주어 다른 이들을 감독하게 하는 것은 ‘분리하여 다스린다’ 는 수법이다. 뽑힌 자들은 특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억압 체제에 적극 협조하게 되는 반면,뽑히지 못한 자들은 신분 상승 기회를 잡으려고 은연중에 경쟁하게 된다.
이스라엘인 조장들은 파라오를 찾아가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잘못하고 계십니다”(5,16) 하고 항변한다. 그들은 해방이 아니라 예전 기준으로 되돌려 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파라오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자 파라오가 대답하였다. ‘너희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다”(5,17). 문제의 초점은 허튼 말을 하는 모세와 아론에게 있다고 슬며시 암시한다. 억압자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희생자들을 비난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전형적인 언변이다.
이스라엘 조장들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는지가 온전히 파라오의 뜻에 달려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을 기다리고 서 있는 모세와 아론에게,“주님께서 당신들을 내려다 보시고 심판해 주셨으면 좋겠소”(5,21)라고 악담한다.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을 살리려 하기보다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비난한다.
높다란 장벽처럼 우뚝 막고 선 현실 앞에 모세 자신도 몹시 위축되었다. 주님의 개입으로 구원이 시작되지 않고 악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모세는 주님께 돌아가 말한다. “주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파라오에게 가서 당신 이름으로 말한 뒤로, 그가 이 백성을 괴롭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무지 구해 주시지 않습니다”(5,22-23).
모세는 조바심을 낸다. 하지만 하느님의 방법은 결코 그렇지 않다. 모세는 이 절망적 현실을 견디어 내며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 힘이 빠져 있는 모세에게 응답하신다. “이제 너는 내가 파라오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정녕 그는 강한 손에 밀려 그들을 내보낼 것이다. 강한 손에 밀려 그가 자기 땅에서 그들을 내쫓을 것이다"(6,1). 눈으로 본다는 것은 직접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은 모세와 파라오의 협상으로 이뤄지지 않고 주님의 개입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 개입은 “강한 손” 곧 힘으로 행해질 것이다. 이 사실은 두 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단호하고 분명하다. 그만큼 이 해방은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거친 싸움이 펼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현실을 보면서도 그 속에서 일하시는 야훼께 초점을 맞춰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의 강한 손은 열 가지의 재앙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