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30일 경기도 파주시 판서공 휘는 인신(仁臣)의 문중 범우 회장은 후손70여명과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오림포 첨지중추부사 숭수 묘지. 포천시 가산면 광촌(너배기).
성균관진사 좌찬성공 휘는 예신 묘지. 보덕공 휘는 몽윤. 우참찬 휘는 몽량의 묘지.
영의정 백사 이항복 묘지. 백사 항복의 영정을 모신 화산서원을 차레로 찿아 참배를 하고 유적지를 둘러보며 뜻있는 행사를 가져 문중 종친들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항복(李恒福. 명종 11년(서기 1556년)~광해 10년(서기 1618년)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백사(白沙)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공의 아버지 몽량(夢亮)은 3조판서를 지냈고 당대의 명경(名卿)으로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악동(惡童)으로 골목대장이었으나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학문에 열중하더니 뒤에 학궁(學宮)에 들어가 더욱 정진하여 이름을 떨치니 당시의 재상 권철(權轍)이 듣고 만나보고서 손녀사위를 삼았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이 때에 만나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선조 13년(서기 1580년) 문과에 급제한 다음 호당(湖堂)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호조참의에 이르렀을 때에 왕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공평하게 다스려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백사 이항복 묘.
당시 사화(士禍)가 일어나 대신 정철(鄭澈)이 수괴(首魁)로 몰리어 찾아가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거리낌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 때에 정철의 죄를 태만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의 신분으로 임금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開城)에 이르렀으며 이 때에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두 왕자를 호위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때에 조정(朝廷) 대신들의 공론은 임금이 함흥(咸興)으로 피란해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공은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寧邊)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임금의 장전을 한음과 교대로 찾아가서 간청한 끝에 새벽녘에야 윤허(允許)를 받았다. 그러자 함흥으로 가자고 주장하던 대신들이 부모의 병이나 자신의 노구(老軀)를 이유로 호종(扈從)하기를 꺼리므로 공이 분연히 나서서 임금의 수레를 붙들고 진두지휘를 하였다.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가서 명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고 명나라의 대병(大兵)을 조선에 이르게 하였다.
(영당 뒷모습)
임진∼정유의 전쟁 중에 병조판서를 5번이나 맡으면서 침략자를 소탕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조 31년(서기 1598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부원군을 받고 정응태(丁應泰)가 명나라에 무고(誣告)한 사건을 바로잡기 위하여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특유의 해박한 문장으로 해명하니 명나라 황제가 오해를 풀고 정응태를 파면하였다.
이어서 영의정에 오르고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때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므로 그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의 당(黨)”이라는 혐의를 받으니 자진하여 영의정을 그만두었는데,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거듭 불렀으나 ‘성만(盛滿. 벼슬과 명예가 가득함)’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하였다. 선조는 거듭 부르고 공은 응하지 않으니 조정이 이 일로 어수선하여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영당 음력 10월 15일 향사를 봉행 한다)
때에 한 벼슬아치가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싫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자꾸 부르시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선조의 귀에 들어갔다. 선조가 진노하여 “대신(大臣)을 능멸하는 자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찾아보라”고 나무라시고 그 자는 그 길로 청풍군수로 내쳤다. 이 뒤에도 공은 끝내 복직하지 않았으나 예우는 예전과 같이 했고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공의 자문을 받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하려 하므로 변호하다가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자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에 귀양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후에 관작이 환급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포천(抱川)에 예장했고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에 사액(賜額)되었다.
공은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는 40여년 동안 당쟁(黨爭)에서 초연하였다. 저서는 『백사집(白沙集)』2권·『북천일록(北遷日錄)』2권·『주소계의(奏疏啓議)』2권·『사례훈몽(四禮訓蒙)』1권·『노사영언(魯史零言)』15권 등이 있다.
이항복 신도비
화산서원.
외 삼문
필운재
동강재.
초현문
화산서원
(창우 제관이 참배를 드리고.계시다.)
경기도 기념물 제46호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산16~1
조선 선조 때의 명신 백사 이항복(李恒福 . 1556~161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고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인조 13년(1635) 건립되었다가 숙종 원년(1675)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내린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1년 지방 유림들의 뜻을 모아 복원 되었다 현재 사당과 동.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이항복은 선조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모시고 따랐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이 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함경북도 북청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8월달에 모든 관직을 다시 회복하고 고향인 포천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문충공이다
안내를 나온 종친을 소개하는 범우 회장님.
방명록에 파주시 판서공 문중 종친일동 이렇게 적지 안앗을까요..
파주 판서공 문중 어르신들과 안내 나온 . 좌측 부터 포천시 청년회 태우 회장. 파주문중 종설 . 범우회장. 경기도 화수회 상익회장. 파주문중 창우 . 경기도 화수회 직전회장 일우 .외 여러분 비가오는 우중에 수고들 하셨습니다.
파주시 판서공 문중 종친님의들 기념 사진
이항복 선생은
나라를 중흥시킨 뛰어난 호성공신은 세월이 변하자 역적을 추천했다는 누명을 쓰고 낯설고 물선 먼 북청땅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파란만장의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외교적 역량은 우수했으나 내치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광해군은 이복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왕비를 폐비하는 큰 난리를 일으킨다. 이에 격분한 노대신 이항복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항거에 나섰다. 이항복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나오고, 끝내는 탈관삭직되어 망우리로 옮겨 은거했으나 유배명령을 받고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63세의 노정승이던 백사, 북청으로 가는 길에 눈물을 뿌리며 읊었던 시조는 지금의 우리 가슴도 슬프게 해준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원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의롭고 바른 말 한다고 늙은 재상을 귀양보내던 그 악인들, 63세의 노인 백사는 1618년 1월18일 회양의 철령을 넘으면서 피눈물이 솟아나는 시조를 읊었다. 그해 2월6일 유배지 북청에 도착한 백사는 뛰어난 시 한 수를 읊었으니, 그 마지막 구절이 너무나 답답한 심정이다.
‘겹겹이 싸인 산들이 정말로 호걸을 가두려는데(군山定欲囚豪傑)/ 고개 돌려 일천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을 막는구려(回望千峯鎖去程)’라고 읊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막혔으
면 그런 시를 지었으랴.
유배지에 도착한 후 3개월째인 1618년 5월13일 새벽닭이 울어 동이 틀 무렵에 백사는 63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평생 동안 그의 은혜를 입었고, 금남군(錦南君)이자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던 유명한 장군 정충신(鄭忠信)이 백사를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6월17일 출발하여 7월12일 도착했다. 8월4일 소식을 들은 남녀노소가 달려와 울음으로 장사를 지냈다. 일세의 영웅 백사 이항복은 그때 이래 지금까지 포천에 고이 잠들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