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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학작품이건간에 그 시작은 중요하고, 그 서두에서 작품은 독자의 시선을 작품의 세계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오페라에서 오페라의 오케스트라의 서곡에 관객들의 집중에 시발점이 되기에 작곡가들이 큰 의미를 부여하여 만들고, 영화의 처음5분안에 관객들의 몰입이 결정되어 질수도 있는 그 5분의 중요처럼,
탈출기 1장에서 2장의 문학적인 기능은 그와 같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셨다.
탈출기 1장, 2장은 탈출기 전체를 이끄는 훌륭한 문학적 서두이며,그 1장을 통해 성서기자는 독자들을 탈출기가 서술될 시간과 공간으로 초대한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장면을 설정하고, 그리고 탈출기 2장은 탈출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모세를 조심스럽게 등장시킨다.
문학적인 면에서 볼때, 탈출기 1장과 2장은 잘 짜맞추어진 내적 구성을 보여주고, 모세오경의 큰 구조의 관점에서도 앞선 창세기와 탈출기를 성공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시작을 하면서 문제가 생기는데,
* 탈출기 1,1
1 야곱과 함께 저마다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름은 이러하다.
* 탈출기 1,1 직역
그리고 이것들이
이집트로 온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이름들이다.
야곱과 함께 각각의 사람과 그의 집(안)이 왔다.
: 이상하게 책을 시작하면서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 앞에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 즉 창세기를 전제로,
'이것들이~이름들이다'는 ' 이것들이 ~의 족보들이다' 표현과 비슷하다. 이름과 족보라는 말을 바꾸면 같은 문장 구성이다.
: 또한 히브리어를 번역해 놓은 것이지만, 대단히 이상한 문장이다.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한 것에는 신학적인 의도가 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야곱이라는 말보다는 이스라엘과 함께 각각의 사람과 더 자연스러울텐데, 한번은 이스라엘, 또 한번은 야곱이라 한것이다.
: 야곱과 이스라엘에서 야곱이 더 오래된 이름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는 부분은 창세기 야뽁강에서 한번 또 다른 사건에서도 나온다.( 두번 나오기에 중요하다)
: 예문 창세기 32,27-29, 창세 35,10 내용의 설명과 더불어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름이 한 문장에 쓰였을때 야곱과 함께 그 각각의 사람이 그의 집(안)에 왔다라는 말은 일종의 역사적인 팩트이다. 따라서 야곱이라는 이름만 들었을 때는 성조, 조상, 성조사의 연관이 되는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신학적 의미의 이름이다. 그 신학적 의미안에는 (축복)을 뜻한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함께, 하느님의 선택, 축복의 신학,이런것들이 연관되었다.
: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라는 부분인데, 이 표현은 탈출기 전체를 통해서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자손들' 그리고 나중에 구약성경에 이스라엘이 쭈욱 흘러나가면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라는 말이 바로 '이스라엘'로 치환되어 하나의 민족 개념으로,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직 민족의 개념까지는 가지않고, 이전의 아브라함과 그의 집안,이사악과 그의 집안, 야곱의 그의 집안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서 더 나아가 이스라엘로, 열두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민족개념으로, 신부님은 이 부부인 탈출기 1,1-7을 '가족에서 민족으로' 주제어로 정하고 어떻게 커나아가는지에 관한 관점에서 정하셨다고 하셨다.
예문) 창세기 32,27-29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다오"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을 주시지 않으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씨름하는 모습인데,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주신 이름, 따라서 하느님과 야곱(이스라엘) 관계안에 들어섰다는 의미이자 신학적의미로는 하나의 축복이다.
예문) 창세 35,10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너의 이름은 야곱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제 너의 이름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셨다.
: 같은 이야기인데 두가지 전승이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에게 '나는 이제 부터 너를 케파라고 부르겠다.' 케파는 돌이라는 의미인데 바위와 같은 큰돌이 아니라 단순한 돌을 뜻한다. 케파라는 말인 그리스말을 기억하기 어려워서 케파 -> 페트로스 ->우리말로는 베드로로 전해짐. 우리의 교회적의미로서 반석이라고 한다.
탈출 1,1-7(2-4절)
2 르우벤, 시메온, 레위, 유다,
3 이사카르, 즈불룬, 벤야민,
4 단, 나탈리, 가드, 아세르이다.
: 요셉이 빠진 열한명이다, 그리고 탈출기 1,2절의 순서를 보면 '이름의 순서(창세 35,23-26)'처럼 레아- 라헬- 라헬의 몸종 빌하- 레아의 몸종 질파순이다. 즉 탈출기 1장을 쓴 저자는 창세기 35장을 알고 따르는 모습이다.
예문) 이름의 순서 (창세 35,23-26)
레아의 아들은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 시메온, 레위, 유다, 이사카르, 즈불룬이고,라헬의 아들은 요셉과 벤야민이다
라헬의 몸종 빌하의 아들은 단과 납탈리이고,레아의 몸종 질파의 아들은 가드와 아세르이다.
탈출 1,1-7(5절)
5 야곱의 몸에서 난 이들은 모두 일흔 명이었는데, 그 가운에 요셉은 이미 이집트에 가 있었다.
: 이 부분에서 이집트에 간 사람은? 야곱과 요셉을 포함해 72명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예문) 창세 46,26-27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간 사람들은 야곱의 며느리들을 뺀 직계 자손들이 모두 예순여섯 명이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요셉의 아들들은 둘이다. 그래서 이집트로 들어간 야곱의 집안 식구는 모두 일흔 명이다.
: 66+ 요셉아들들(2)+ 요셉(1)+ 야곱(1)= 70
: 구약에서 중요한 70(신학적인 면에서 완정성 상징)이라는 숫자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이 그리스말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집트에서 번역되는데, 번역된 전통도 70인역이라 부른다.(70명의 학자들이 번역했다. 라는 전설적인 전승과 함께, 후에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곳곳에 70명을 파견하시는데, 몇몇 수사본에는 72명으로 나온다. 따라서 70,72가 중요했다)
: 반면에 그리스말 성경에서 이 대목의 야곱의 몸에서 난 이들을 70명이었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75명이라 전한다.
: 탈출기I 내용 발췌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70명이 아니라 75명이라는 전승을 전하는데, 쿰란의 한 수사본에서도 75명이라는 숫자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요셉의 손자들의 숫자를 포함하는 또 하나의 전승이 있어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덧붙여 마지막 신약성경에서 넘어와서 사도 7,14 스테파노가 연설에서 보면 75명으로 나온다(히브리어로 된 텍스트가 아닌 그리스말 텍스트,70인역을 본것이다)
예문) 사도 7,14
요셉은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야곱과 일흔다섯명이나 되는 자기 친족을 모두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 창세 46,26-27 은 70명, 사도 7,14은 75명
탈출 1,1-7(6절)
6 그 뒤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 그 세대는 한 세대는 30년 정도이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들이 이국땅에 가서 노예살이를 400년 동안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탈출기 나중에는 이집트에서 산 기간이 430년으로 나온다. 창세기는 400년, 탈출기는 430년으로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30년인 요셉이 들어가 죽을때 까치는 노예살이를 하지 않았으므로. 즉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430년, 노예생활은 400년
그리고 요셉의 죽음에 관하여서는 (창세 50,26)
요셉이 백열 살에 죽자, 사람들이 그의 몸을 방부 처리하고 관에 넣어 이집트에 모셨다
: 성서적 나이는 달성하지 못하였지만(120살), 요셉의 주검은 이집트에 있다가, 후에 모세가 이집트 탈출때 요셉의 유해를 모시고 가고, 모세오경이 지난 여호수아기에 가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나서 요셉과 관련이 있는 도시인 스켐에 요셉의 유해를 모시고 간다.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요셉에게 충실한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탈출기 1,1-7(7절)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 이스라엘의 이름은 축복의 신학이고 , 그 축복의 내용이,첫째 "나는 너에게 땅을 주겠다." 둘째 "나의 너의 자손을 하늘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알 만큼, 흙의 먼지 만큼 많게 해 주겠다"인데 이루어 졌다. 그리하여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찼다라는 의미
예문) 창세기의 축복1,28 :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9,1 :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치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이스라엘과 만남이 구체적으로 있기이전에도 세상을 축복하시는 모습
예문) 창세기의 축복
12,2 :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28,3 :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어, 네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게 하시며, 네가 민족들의 무리가 되게 해 주실것이다.
: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창세기 12장,28장 모습
여기까지 요셉의 죽음에 관해서 그리고 후손에 관해서 7절에서 접하게 된다.
탈출기 1,1-7(7절)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식을 많이 낳고 늘어만 갔다.
그들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졌다.
: 낳고, 늘고, 번성하다, 강해지다, 가득차다의 다섯동사가 연달아 나오면서 매우 숨가쁘게 급박한 전개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세포분열이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으로 '가득찼다'의 모습은 우리말의 어감으로 "빠글 빠끌해졌다"라는 표현( 빠글빠글한 장속의 구더기의 모습?)으로 창세기전체의 내용처럼 하느님께서는 탈출기에서도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고 이루시는 분이시다. 라는 의미.
하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앞으로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노예살이이야기가 설명되어 지지 않는다. 탈출기1장에서는 그 부분을 문학적으로 준비하고 있다.6-7절에서 먼저 요셉이 죽고, 8절에서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 새 파라오가 묘사하면서 중요한 구절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라는 부분이다.
앞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는 표현은 탈출기 전체에서 125번이나 등장하고, 이것은 무대의 주인공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과 같은 개인이 아니라 다수로 이루어진 한 무리로 전환되고 있음을 뜻한다.
탈출기 1,1-7절은 창세기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번 요약함으로써 창세기와 탈출기를 연결시키고 있고, 또한 탈출기를 촉발시키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갈등을 문학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셨다.
탈출기 1,1-7절은 통해 할 수 있는 단순히 텍스트의 내용뿐만 아니라, 묵상에 대해 말씀하셨다.
1. 앞선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 앞선 역사를 되짚어 봄으로써 성서기자는 자신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이다. 나의 뿌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정체를 결정지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전해주는 부모의 역사, 가족의 역사,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는 중요한 부분이다. 신부님의 독일 생활에서 그 아이들은 괴테나 브람스는 모르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역사나 구석구석에 관한여 자세히 알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모습처럼 다가와 인상깊었다고 하셨다. 과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의 조상, 마을의 역사들, 뿌리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지,정체에 관해, 우리 세대가 아닌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바둑의 고수와 하수의 경계는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복기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이다. 대다수가 한판에서 지고 이기고를 판단하여 복기하지 못한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을 기억하는것과 기억하지 않는 것에도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세상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는지에 관한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잘 평가하고 있는지, 어떠한 틀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보고 가치를 판단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틀은 역사안에서 발견하고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너지지 않는 미래를 위해선 제대로 된 역사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에 있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시선에서 본다는 점이고, 역사의 사건,해석들을 통해 고정되어보였던 이스라엘과 야훼하느님의 정체가 탈출기를 통해 성조들의 하느님이 아닌 탈출과 해방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가족이야기에 불과했었지만 민족의 이야기로 성장하면서 끊임없는 가족사의 갈등(아브라함괴 롯의 갈등,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갈등, 야곱과 에사우의 갈등, 요셉과 다른 형제들의 갈등등 가족내의 문제가)에서 민족사의 문제로(이집트와 야훼하느님의 갈등인 창세기의 전반부와 후반부인 야훼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구조가 큰틀안에서 발전하면서) 새로 꾸며진 무대안에서 탈출과 해방의 야훼하느님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고백하게 된다.
다음시간의 파라오의 억압, 이집트의 새로운 임금이 등장
새 임금, 여기에서만 등장하는데 무언가의 변화를 의미하고, 요셉을 알지 못한다라는 표현을 통해 '알지 못한다'라는 두려움의 의미이고 요셉을 알지 못한 파라오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에 파라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해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억압하기 시작하고 두가지 형태로의 억압으로
하나는 노역을 통해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는 축복을 받아 수가 많아진 이스라엘에 대해서 전쟁 가능한 남자아이들을 죽인다.
억압의 상승의 형태로 억압을 가중한다.(처음에 산파 두명을 불러 남자아이거든 몰래 죽여라,하며 몰래하다가 달성되지 않자. 이제는 드러내어 태어나는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공포한다)
이겨낼 수 없는 억압을 당하게된 이스라엘이 부르짖자, 그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닿고, 신화적인 소재에서 잠자던 신을 깨우게되는 소리처럼, 하느님도 역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한 약속을 기억하시며 그들의 역사안에 개입하시게 된다는 이야기다.
탈출기 안에서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문학적인 구성으로 만나게된다.
나의 역사안에 기억되는 하느님은,
그리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을 하느님과의 만남을 꿈꾸어 보게 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