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의 세계를 균열하는 ‘이름 지어지지 않은 1초’
- 이제야의 신작시에 대하여
김수이
1.
무한히 많은 방이 존재하는 우주가 있다. 방에는 각기 한 사람이 살고 있다. 이 균등하게 배분된 질서정연한 우주에, 어느 날 외부로부터 한 사람이 도착한다. 이 사람에게도 방 하나를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한’의 개념에 관한 이 수학 문제의 답은 새로 온 이에게 방 하나를 내어주고, 기존의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옆방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방이 무한하므로, 이주의 행렬 역시 무한하며, 따라서 방을 새로 만들 필요 없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다. 무한에 어떤 수를 더해도 답은 무한이기 때문이다. 무한 + 1 = 무한. 무한 + α = 무한.
덴마크의 작가 페터 회(Peter H∅eg)는 소설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에서 이 수식(數式)에 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무한’의 행렬에 대한 수학적 설명은 실은 ‘사랑’에 관한 탁월한 메타포라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거처를 옮기는 무한한 수고의 행렬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이며 사랑의 방식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숙연히 일깨워 준다. 사랑은 ‘나’를 고수하는 일이 아닌, 기꺼이 ‘나’의 위치를 옮기는 끊임없는 운동이며, 자신을 사랑의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내어주는 무상(無償)의 행위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사랑의 존재방식 및 운동방식은 환유다.
한편, 무한한 방이 있는 우주에 무한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에 홀로 거주하는 풍경은 존재의 운명과 내면의 단독성을 상징한다. 사랑의 거대한 연대의 파노라마 속에서도 인간이 지닌 단자성은 폐기되지 않는다-못한다. 고독은 사랑의 발생학적 토대이며, 고독과 사랑은 끝없는 균열을 내장한 실존의 산물이자 삶의 증거다. 그렇다면 사랑은 고독의 환유다. 사랑은 고독한 존재가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무한히 이탈하며 또 다른 고독의 장소로 이동하는, 은유(동일성)의 환유화(타자화)다. 무한의 우주에 처한 단독자의 유한한 삶이, 그 우주와 우주의 밖으로부터 삶의 생기와 의미와 경이로움을 얼마나(아주 조금이라도) 획득할 수 있는가가 이 환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2.
“갓 내린 커피 향”처럼 우리 시단에 방금 도착한 이제야의 시는 무한한 우주의 극미(極微)의 한 지점에서 단자(單子)의 존재들이 수행하는 환유의 운동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존재와 존재가 이어지는 동시에 단절되는 접(接)-리(離)의 사태는 존재와 비존재를, 이름과 이름 이전을, 기억과 망각을, 영원과 찰나를, 또 기타 등등을 연접-분리하면서, 이 환유의 운동이 은유와 겹쳐지면서 어긋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우주에서는 누구나가 하나의 방에 거주한 경험, 하나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가 본 경험(들)을 갖고 있다. 아마도 삶의 비극은, 이 경험 외에 사실 특별할 것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여기서 우주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속한 ‘현대사회’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는, 우주에 무지한 우주적 주체(?)이자, 자신이 속한 위치에서만 목격하고 발화하는 우주적 주체다. 이제야가 진술하는, “감각 없이도 기억나는 이야기”는 우리가 속한 삶의 우주가 필연성을 상실한 변화와 반응들로 포화 상태에 있음을 담담하게 역설(力說)한다.
누구나의 이름에서 갓 잊은 누가 생각난다
뜻이 없어도 반응하는 저림이 있다
자세를 가진; 동의어들이 당신이 될 때
세상 모든 사물의 첫 획이 같다고 믿었다
마른 원두 가루에서 갓 내린 커피 향이 난다
감각 없이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마주 앉은 것이 사람만은 아닐 때
아직 잔이 뜨거울 수 있다고 믿었다
1년 전 사건이 오늘의 근황이었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고도 끊길 때
존재감은 존재 없이도 그림자를 가졌다
시계의 초침은 화살표가 아니니까
어떤 일은 조만간,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으며
- 「조만간의 일」 전문
“누구나의 이름”에 스며들어 있는 “갓 잊은 누구”, “뜻이 없어도 반응하는 저림”, “마른 원두 가루에서” 나는 “갓 내린 커피 향”, “존재 없이도 그림자를 가”진 “존재감” 등은 “감각 없이도 기억나는 이야기”의 세목들이다. 물리적인 인과관계, 시간의 전후순서, 합리적인 이치 등은 여기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명쾌한 논리 역시 부재한다. “어떤 일은 조만간,/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 것, 즉 가능성과 믿음의 영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한 일일 터이다. 이 미력한 주체에게는, “세상 모든 사물의 첫 획이 같다고 믿었다”에서 보듯, 세계의 기원마저도 가능성과 믿음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다.
‘나’는 전모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현상을 극히 불완전한 형태로 목도할 수밖에 없다. 원인 없이 발생한 결과, 작용 없이 발생한 반작용, 기원 없이 발생한 산물 들은 거대한 환유의 운동 속에 놓여 있으며, 이 운동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채로 계속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것이 저것으로 연결되는 동시에 단절되는 지속의 운동이 무언가를 생산하지 못할 때, 시작과 끝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때, 이 운동은 무위의 반복과 구별되기 어렵다. “내가 이름 지은 시간은/팔과 다리가 저린, 반복의 춤”(「시간과 보낸 시간」)이라고 이제야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 속에서다. 반복의 시간이 약속하는 것은 “어떤 일은 조만간,/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며, 그 ‘어떤 일’은 지금까지 반복된 ‘일’들과 동일한 것들이다. 이제야 시의 문장들이 “~ 없이 ~이/가 있다.” “~ 없이 ~이/가 일어난다.” “~이/가 일어나기 전에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모든 존재의 ~이/가 같다.” 등의 몇 개의 구조로 압축되는 것은, 인과의 순서와 합리성, 유의미한 차이들이 반복의 운동 속에서 뒤섞이고 무화된 상황을 반영한다. 불가능성과 불합리성을 표상하는 문장 구조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겨가는 환유의 운동이 목적과 이유를 결여한 채 무위의 반복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반복, 애써 만들어낸 차이들이 유의미한 차이로 기능하지 못하는 반복, 충분한 이유나 목적 없이 계속되는 반복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이러한 반복은 아무것도 바꾸거나 창조하지 못하며, 자신이 경유한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저조한 상태로 끌어내려 서로 ‘감염’시킨다. 감염된 단어와 문장들은 다른 단어와 문장들에 기대어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간신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름(/이름 없음)’의 세계에서 ‘이름 이전’의 세계를 회복하고 공유할 수 없는 불가능성에 관한 애도나, 무미건조하고 텅 빈 수사(修辭) 정도일 것이다.
이제야의 “감각 없이도 기억나는 이야기”는 연쇄의 작동원리 및 작용점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진행되고 씌어지는 환유의 연대기다. 연대기의 조건인 시간의 체제가 무효화된 이 연대기 속에서는 어떤 존재나 일도 놀랍거나 이상한 것이 되지 못한다. ‘없음’에서 ‘있음’이, ‘있음’에서 ‘없음’이 탄생하는 우주적인 사건마저도 “감각 없이도 기억나는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흔하고 사소한 일상사일 뿐이다. ‘과잉’과 ‘적당’과 ‘결핍’, ‘감정 없는 감정’과 ‘열정’, ‘말랑한’과 ‘바삭 마른’, ‘죽음’과 ‘환생’ 등이 “다시 맴도는” “겹겹의 시간”을 형성한 세계에서, ‘다음’ 일을 예측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때 활짝이 최대의 포옹이라 믿었다
피어나던 감정 과잉이
바삭 한 줌에 적당한 안녕이 된다
담담해 줘, 담백한 맛을 부탁했다
열망은 겹겹의 시간에 다시 맴도는데
감정 없는 감정 앞에 남은 향기에
살아나 줘, 살아 있으라고 말했다
향은 옷깃에 묻혀 다시 환생하는데
(…)
말랑했던 그녀의 화요일이
바삭 마른 금요일이 된 것으로도
꽃잎은 충분히
이성적이었는데
바삭 한 줌에 다음 열정이 충분히 말라간다
- 「바삭 마른 금요일의 꽃」 부분
같은 의미에서, 어떤 존재나 일도 범상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인과 없는 인과’들로 구성되고 추동되는 이제야의 환유의 연대기는 개별 존재의 차원에서는 극적이면서 전혀 극적이지 못한 ‘달라짐[환생]’의 실존의 드라마로, 세계의 차원에서는 극적이면서 전혀 극적이지 못한 ‘일어남[발생]’의 사건의 드라마로 외화(外化)된다. 특유의 운동성을 상실한 채 작동하는 환유, 긴장의 드라마틱함을 상실한 채 이어지는 드라마에는 ‘존재’ 및 ‘존재감’ 이하의 상태에 처한 존재와 사건들이 등장하기에, 미진(未盡)과 결여는 오히려 예의주시해야 할 대상의 징표가 된다. 이제야가 날카롭게 관찰한 바에 따르면, “바람이라 불리지 못했던 바람”, “넘기지 못하는 향이 나”는 “어떤 물”, “질량 없는 것들”, “없는 무게들”, “극적이지 않은 위치에 있는 무딘 역할들” 등이 그 예들이다. “끝을 모르던 에피소드들”의 빈약한 목록들. 우리의 삶과 세계의 실체.
바람 사이를 지나는 바람을 본 적이 있다.
바람이라 불리지 못했던 바람이었다.
질량 없는 것들의 성격이 생수를 넘기는 목에서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물에서는 넘기지 못하는 향이 났다.
극적이지 않은 위치에 있는 무딘 역할들은 성실하다. 설렘과 절망 사이에서는 없는 무게들이 식물의 표정을 흔들었다.
시작과 끝의 위치는 영원할까.
영원으로 가는 동안 금세 사라질 찰나들이 피어난다.
퍼지지 못해 떠있는 얇은 오후 같은.
인연도 연인도 아닌 인사 같은.
찰나, 영원을 깼을 때 흩어지는 조각들의 이름.
끝을 모르던 에피소드들은 남았다.
이름 지어지지 않은 1초를 애타게 불렀다.
- 「찰나의 시간」 전문
저항하기 힘든 무력감과 절망감을 불러일으키는 미진과 결여의 풍경은 “~하지 못한”, “~ 없는”, “ ~ 같은” 등의 부정의 서술어나 치환의 수사를 통해서만 우회적으로 발화될 수 있다. 이 점을 간파하고 있는 이제야는 풍경의 이면을 관통하거나 소실점 직전까지를 직시함으로써 “극적이지 않은 위치에 있는 무딘 역할들”을 자임한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능동적이지도 동적이지도 않은 “무딘 역할들”은 바람이라 불리지 못한 바람, 어떤 물에서 나는 넘기지 못한 향 등과 같이 “이름 지어지지 않은 1초”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름 이전’의 세계에서 ‘존재 이하’의 존재성을 지속하고 있는 존재들, 이 세계가 무화시키는 ‘인과’와 ‘작용’의 선들을 따라가지만, 동시에 “흔들”거나 “퍼지지 못해 떠있”거나 “흩어지”거나 “남아”있는 방식으로 그 선을 균열하는 존재들은 경화(硬化)된 세계 속에 아직까지 혹은 여전히 포함되어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이제야가 “애타게” 호출하는 이 사유의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의 무위(無爲)의 형태를 띤다. 이 도저한 수동성의 시간은 ‘나’의 밖으로 최대한 나아가 “시간이 하는 일을 보”는 우주적 성찰의 시간이며, 변화의 동력과 가능성을 상실한 반복의 세계에 관한, “감각 없이도 기억나는 이야기”로부터 “팔과 다리가 저린”, 감각의 있음을 회복하고 피력하는 이야기로 이행해가는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에는
시간이 하는 일을 보았다
시간의 얼굴을 닮은
나의 의자에서 시간을 만났다
시간의 팔을 보는 일은
매일 쓰는 글자를 되감는 일
시간의 다리를 보는 일은
매일 걷는 바닥을 두드리는 일
내가 이름 지은 시간은
팔과 다리가 저린, 반복의 춤
- 「시간과 보낸 시간」 부분
“이름 지어지지 않은 1초”의 시간은 이렇게 하여 “내가 이름 지은 시간”으로 편입된(……)다. 이 편입이 불가능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은 말할 것이 없다. “이름 지어지지 않은 1초”의 시간을 사유하기 위해 “내가 이름 지은 시간”을 거기에 포개놓(을 수밖에 없)는 이제야의 시 쓰기는 이 편입의 무한한 과정으로서, “매일 쓰는 글자”들과 “매일 걷는 바닥”들 사이를 쉼 없이 옮겨 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이동의 행렬’이, ‘무한한 수고’가 ‘사랑’의 행위임을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어느 순간 불현듯, “정지한 사물들이 휘청이기 시작하”고, “나무와 지붕의 대사가 달라진”다.(「벽의 장르」) 환유의 운동성과 능력이 회복되는 시간의 징후들이다. “흔적을 걸어두면, 그림이 될까요”?(「벽의 장르」) 이제야의 질문에, 텅 빈 반복과 그 흔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답할 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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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