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제목을 Poket History라고 정한 이유를 설명하자. 본 기사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총기발달사 보다는 역사의 뒤에 숨겨진 재미난 이야기나, 에피소드 등을 소개할 목적의 기사로 주로 지면을 할애하고자 한다. 필자에게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하여주신 john deckman과 nakada hasihiro씨에게 감사드린다. 곧바로 주머니 속을 뒤져 보기로 하자!!
p.s 포켓 히스토리 시리즈 원고를 작성해준 '지훈' 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무기(武器)
인류의 발생과 더불어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영토와 식량의 분쟁이었으며 그것은 곧 ‘전쟁’의 형태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전쟁에 있어서는 무기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기의 역할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생존을 위한 수단인 공격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한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무기의 종류에 대해 논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위험이 닥쳤을 때, 가까이 있는 막대기를 주워서 상대에게 던지거나 찌르거나 후려치는 행동은 하다못해 원숭이 같은 동물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직립에 따른 손의 해방으로 무기를 다룰 수 있었으며, 이와 함께 머리의 발달과 기술의 진보는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의 위치로 올려놓았으며, 사나운 맹수들이나 인간의 천적들을 정복하며 인류 문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불행히도, 인류의 기술적 재능이 항상 우리의 삶을 더 낫도록 만드는 행위에만 쏟아 부어진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발명의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다른 인간들에게 파괴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데 이용했다. 전쟁은 기술 진보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 보였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 생활의 많은 측면들을 더 낫게 만들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살상과 파괴의 능력에 있어서 가공할 정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인간이 스스로 제작한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형체가 다양하기는 하나 크게 공격무기와 방어무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성능상으로 볼 때 아마도 공격용 무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공격무기는 다시 충격무기와 비행무기로 구분되어 지는데, 적과 맞붙어서 그야말로 난타전을 할 수 있는 무기인 칼, 도끼 등이 속하며,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돌이나 화살, 창 등을 날려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 비행무기에 속한다.
인간의 지혜와 생활경험이 축점됨에 따라 일정한 무게를 지닌 돌이 파괴력이 크고 멀리 날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재료를 구함에 있어서 가장 구하기 쉬운 돌멩이가 시초가 아니었을까? 적당한 무게가 나가는 돌멩이를 찾은 뒤 그것을 들고 다녔을 것이다. 그 돌멩이를 던지거나 그걸로 내리치거나 하다못해 끈의 한쪽 끝을 잡고 돌리다가 날아가도록 하면, 그것은 그의 팔만으로 던진 그 어느 것보다 멀리 날아가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형태가 최초의 형태의 조악한 돌팔매 끈(sling)이었으며, 이것이 최초로 원거리 무기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갑자기 왠 돌멩이 얘기냐고? 바로 던지는 형태의 원거리 무기가 근거리에서 돌을 내리치는 근거리보다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근거리로 하다보면 자신도 먼저 당하거나 다칠 수 있지만 근거리에선 안전하게 적을 쉽게 제거 할 수가 있으므로 인간의 무기발달은 필연적으로 보다 멀리, 보다 정확히, 보다 타격이 있게 (올림픽 정신처럼) 발달하기 나름이었다.
창이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처음의 창 형태는 한쪽 끝이 뾰족한 돌멩이를 구하던지 아니면 한쪽 끝을 갈아 날카롭게 만든 다음 막대기 끝에 난 갈라진 틈에 끼우고 끈으로 묶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근거리 무기는 사정거리를 늘리고, 돌멩이보다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위해 개발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탄성을 이용한 활이 발달되었으며, 활의 종류만 해도 몇 페이지를 할애 하여야 하니 다음에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 그만하자.
지금껏 말해왔던 소위 원시적인 무기들이 다 원거리 전투를 위한 무기들이다. 그것은 화약의 발명에 따라 지금껏 사람의 인력이나 물체의 탄성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강하게 날아감에 따라, 급격한 변화와 발달을 가져온다. 그럼 화약의 발명에 따라 개발된 총기의 역사의 시작은 13세기의 유럽전쟁에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유럽 총기에 논하기 전에 우리의 것을 먼저 알아보도록 하자. 우리나라의 경우 발달된 산림과 구릉 및 고지에는 천혜적으로 사냥하기에 알맞은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사람보다도 그 행동이 민첩한 이들 짐승들을 사냥하기 위해서 비교적 원거리에서 살상할 수 있는 무기, 활의 사용이 보편화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궁(弓)이 크게 발달하여 왔으며, 이는 곧 군사들의 주 무기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국의 옛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고대인들이 활과 칼, 창으로 무장하였으며, 보병전투에 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활은 일찍부터 주변에 맹위를 떨쳤는데, 조선을 지칭하는 동이(東夷)가 큰 활을 뜻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시대 각궁 <사진출처 육군박물관>
우리나라에 화약병기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전투에서의 주무기로서 그 위치를 한번 도 빼앗긴 적이 없었다. 나중에 활에 대해서는 또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올 것이다. 일찍부터 고대인들은 전투에서의 화공(火攻)의 효과를 크게 인식하여 방화의 목적으로 가연성 물질을 전투에 어떻게 활용해 사용할 것인가에 고심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견고한 적의 기지나 또는 집결된 적의 병력에 풍향을 이용하여 화공하는 방법은 예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화살 끝에 가연성 물질을 부착하여 적진에 날려 보내는 화공법도 흔히 사용되어 왔다.
중국의 송대(宋代)에는 기원 10세기에서부터 13세기 후반에 걸쳐 화약을 제조하여 이를 이용한 화기를 실용의 단계까지 끌어 올려놓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화기의 사용은 화약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14세기 중엽에 와서야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숙종 9년(1104)에 고려가 북쪽의 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였는데, 이때 발화대(發火隊)라는 특수부대가 편성 운용되었다. 발화대가 재래식 화공부대인지, 화기를 장비한 부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중국대륙을 진척시키고 있던 몽고군이 이미 화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이들 몽고군과의 교섭이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인들에게 적어도 화기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고려가 보다 확실하게 화기를 사용한 시기는 고려사에 잘 나타나 있다. 공민왕 5년(1356) 9월 고려의 중시니들은 서북면방어군을 사열하고, 총통(銃筒) 즉, 화기를 이용하여 화살을 사격했다는 기록을 남겨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늦어도 14세기 후반부터는 화기를 제작하여 실전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화기의 사용이 곧 화약의 자체 생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화기의 효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잇던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화약의 제조법을 극비에 붙여 그 기술의 국외 유출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염초의 제조법을 빼내온 선구자가 계셨으니... 최무선!!!
최무선 [崔茂宣, ? ~ 1395]
다들 최무선하면 화약을 제조한 업적으로만 기억하나 필자는 그가 자신이 제조한 화약을 시험하여 자신을 얻게 되자 조정에 건의하여 현재 국방과학기술연구소의 전신인 화통도감(火筒都監)이라는 화기 제조기관을 설치하여 그 업무를 주관한 업적을 더 높이 치고 싶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곧 고려가 화약의 자체 생산, 그것도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고려는 동양권에서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의 화기 보유국으로 등장한 것이다. 화통도감에서는 대장군포를 비롯한 18종류의 포를 개발해 냄으로써 국가병기창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고려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화약의 제조법에 관해서는 각별한 보안조치를 하였다. 화약장이라는 화약제조 기술자는 국가가 관리하였으며, 특히 적대국인 일본이나 여진으로의 유출을 예방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치가 행하여 졌다. 고려시대 화포에 관한 글만도 논문이 나올 정도 이니 이 정도에서 넘어가도록 하고 임진왜란, 특히나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조총 이야기를 잠깐 하도록 하자.
일본군의 총은 흔히 조총(鳥銃)이라고 알고 있으나 정확한 명칭은 코쓰스(小筒)라고 불린다. 1543년에 포르투갈의 사절단을 통하여 전해진 조총은 후일 일본의 기술로 자체 개량, 생산할 단계까지 이른다. 대부분의 조총은 주로 아시가루(足輕)라고 불리는 경장보병들이 들고 다녔다. 이들은 대부분 일반 농부나 낭인 계급이 많았다.
일반적인 조총의 구경이 9㎜에서 16㎜에 평균 15g정도의 탄환을 사용하며, 길이가 약 13~16㎝정도, 무게는 1.8~3.4㎏ 정도였다. 조총에 사용되는 흑색화약은 대략 염초와 유황, 목탄의 비율로 섞어 만든다. 흑색화약은 화약류 중 가장 오래 전에 발명되어 19세기 말경까지는 유일한 화약으로 사용되었다. 목탄을 섞었으므로 흑색을 띠며 불이 잘 붙고 연소화염이 길다. 표준조성은 염초(질산칼륨) 75%, 황 15%, 목탄 10%인데, 각각 40∼80%, 3∼30%, 10∼40%의 범위로 배합하면 정상적인 연소가 일어난다.
포루투갈제 머스킷 소총
전형적인 일본식 조총
각 성분을 따로따로 건조, 분쇄하고, 먼저 황과 목탄을 새의 깃털 등을 사용하여 마찰이 일어나지 않도록 섞고 이어 질산칼륨을 섞는다. 모자라는 질산칼륨을 얻기 위하여 마굿간, 변소 등을 뒤졌다고 한다.
흑색화약 중에서도 점화용과 추진용 화약은 조금 틀려 점화용 화약은 입자가 곱고 작은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화약접시에서 점화 구멍을 통해 내부까지 좁은 구멍을 통하기 때문이며, 추진체용은 폭발력이 커야하므로 입자가 거칠고 큰 것이 특징이다. 조총의 사격자세 중 무릎쏴 자세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이는 가장 안정적이며, 명중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총의 사격 순서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눠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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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단 적을 째려보고 난 다음 거리를 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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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약과 탄을 총구에 넣고 꼬질대로 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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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른손으로 화약접시를 열고 점화용
화약을 넣고 불을 붙인 화승줄을 매단다 |
4. 사격! 하면 화약접시 덮개를 연 다음
적을 한번 더 째려본뒤 방아쇠를 당긴다. |
조총수들은 재장전의 시간이 아주 길고 또한 복잡하므로 일격필살(一擊必殺)을 해야 했다. 또 비가오면 심지가 젖거나 화약접시에 화약이 물에 젖어 무용지물이 되므로 항상 건조한 곳에 보관을 하거나 심지어 화약을 말리기 위해서 불을 때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일본군 병사들이 조총이나 창을 휴대하였던 것에 비하여 사무라이계급의 무사들은 조총의 사용을 싫어했으며, 또한 그들의 특권의식으로 일본도를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 개봉한 톰크루즈 주연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나 '바람의 검 - 신선조' 등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구한말 구식 조총부대의 복장
그럼 이에 맞서는 조선군의 장비는 어떠했을까? 먼저 조선군들의 조총수들은 엄심갑(掩心甲)등의 기본적인 방어도구 없이 일반적인 군포만을 거치고 전쟁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22년)에 대마도주가 조총 2점을 진상하여 조총이 알려졌다. 또한 포르투갈에서 훨씬 신무기인 머스킷 소총이 들여져 와 총의 성능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뿌리 깊은 무(武)의 천대 경향과 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화기개발을 하지 못하여 사장되고 말았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시 27,000여근의 화약과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 대형 화포와 승자, 차승자, 대승자, 중승자, 소승자, 별승자, 영자, 측자총통 등 휴대화기와 더불어 화차와 비격진천뢰 등 실로 다양한 화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이 전투에서 연전연패한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군 격납고에 수납되어있던 각종 화기들은 전쟁 발발 직후 왕의 피난에 격분한 백성들의 분노로 단번에 파괴되어 화기 부족 현상을 빚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기의 성능에 있어 비교적 대구경 대포들이 많아 정교한 조준사격은 불가능하여 명중률이 떨어지고 화기의 규격도 많이 틀려 제작과 운용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기운용의 전술의 부재로 조선군이 화기전술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못했음을 들 수 있다.
당시 일본군은 대체로 기병과 보병으로 전투편제가 되어 있었으며, 보병은 다시 조총병, 창병, 궁병 3개조로 구분되었고, 적과의 대치 상태에서 조총병이 일괄 사격이후에 2선으로 물러나 재장전을 하면, 이어 궁병이 조총병의 사격장전 시간을 메우기 위하여 활을 쏘았고, 조총병이 계속적으로 사격을 하여 적의 전열이 흐트러지면 창병이 뒤를 따라 보병의 후방에 위치해 있던 기병과 함께 백병전을 벌임으로써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이다. 이는 원거리 무기인 총과 접전용 무기인 창을 효과적으로 배합 운용함으로써 전술적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보면 ‘신립이 충주에 도착하여 길을 끼고서 50~60리 사이에 사수, 포수를 세워 공격하면 일본군도 쉽게 진격하지 못할 것이나, 이곳을 버린 채 평야에서 군사들은 활과 화살을 가진 기병으로 일본군의 장기인 조총 전술에 대항함으로써 패하였다...’고 하면서 전술 부재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신립장군 상. 신립의 일화에 대해선 다시 설명하겠다.
그 결과 일본군은 비교적 많은 소총을 소지하지 않고서도 그들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보다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군도 당하지만은 않았는데...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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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컥 이거 완전 국사가 되어버렸네요ㅋㅋ 잘보고 갑니다~
갑자기 학창시절 국사시간 같은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