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승천 대축일(다해. 22년)
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 치하에서 해방된 광복절입니다. 또한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광복절과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이 같은 날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는 오늘이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모님과 우리나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매일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1801년에 순교한 복자 홍낙민도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는 배교했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그가 매일 묵주기도를 빠지지 않고 바쳤기 때문에 성모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아 순교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모님과 한국교회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오늘은 리델 주교님과 드망즈 주교님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866년 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리델 신부는 중국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중국에서 리델 신부님은 여러 차례 조선으로 밀입국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69년에 조선교구 6대 교구장(즉, 서울교구 6대 교구장)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11년 동안 조선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신부로서 3년, 주교가 되어서도 8년 동안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76년에 리델 주교님은 다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6월에 중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중국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셨다가 1884년 6월 20일 선종하셨습니다. 리델 주교님은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는 동시에 성모님께 한 서약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의 루르드 대성당 안에 한글과 한문과 라틴어로 된 대리석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플로리안 드망즈 주교님, 즉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 플로리안 드망즈(한국 이름 안세화) 주교님이 1911년 대구교구에 부임하면서 성모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드렸습니다. “대구교구에 주교관과 신학교 등 기본적인 시설을 마련해주시면, 성모님께 루르드 성모 동굴과 같은 기념 동굴을 봉헌하겠습니다.”
성모님께서 드망즈 주교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드망즈 주교님의 바람대로 주교관은 1913년에, 신학교는 1914년에 건설되었습니다. 주교좌 성당의 증축 공사는 1918년 12월에 끝마쳤습니다. 그리하여 드망즈 주교님은 성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1917년 7월 31일에 대구교구 주교관 옆 광장에 프랑스 루르드 대성당에 있는 성모 동굴과 같은 아름다운 성모 동굴을 짓기 시작하여 1년만인 1918년 7월 31일에 완공한 뒤, 10월 13일에 성모 동굴을 봉헌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적인 삶을 충실하게 사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의 믿음과 삶의 자세를 본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삽시다. 작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일상적인 삶을 우리가 충실히 살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에 큰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부들의 가르침
… ‘마리아가가 복되다 일컬어지는 것은 …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마리아가 …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