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좀잠자리’의 큰 겹눈으로 쓴 시
-이상인 시인의 세 번째 시집『UFO 소나무』를 읽고
안준철
시가 써지지도 않고, 쓰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도 없을 때 그의 시집을 접했다. 순천작가회의에서 조촐하게 출판기념회를 가진 자리에서였다. 공교롭게도 그날 급한 일이 생겨서 늦게야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거지반 파장이 다 되어가는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고, 동료 시인들이 차례대로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나는 시인이 건네준 시집을 받아들고 희미한 불빛 아래서 몇 편의 시를 급하게 읽었다. 그러다가 문득 마음에 일렁이는 것이 있어서 잠깐 책을 덮고 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픔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그 일렁임의 실체는 다름 아닌 ‘시’였다.
우리는 아픔과 슬픔을 버린 지
너무 오래되었구나.
하여, 삶의 고뇌인 시여
널 여기 단단히 묶어 두고
또 다른 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시인의 말」 중에서
잠깐 책을 덮고 시인을 물끄러미 바라본 것은 느닷없이 치밀어 오른 동병상련의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나보다 더 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시인으로서 이보다 더 부끄러운 자각도 없겠지만, 그보다는 그에 대한 미더움이 더 컸다. 나도 시를 쓰고 싶었고, 그처럼 또 다른 ‘너’를 찾아 길을 떠나고 싶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이상인 시인을 안 것은 육칠년 전쯤의 일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만났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후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솔직히 난 아직도 그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그날 시인을 물끄러미 바라본 또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왜 나는 그를 몰랐을까?’ 물론 모를 수도 있다. 서로 삶을 깊이 나눌 기회가 없었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몰랐다’는 말은 그의 삶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그의 시를 염두에 두고 한 말도 아니다. 그럼 뭘까?
산행 중에 자벌레 한 마리 바지에 붙었다.//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연초록 자//
자꾸 내 키를 재보며 올라오는데//가끔 고갤 좌우로 흔든다.//그는 지금 내 세월의 깊이를 재고 있거나//다 드러난 오장육부를 재고 있을지도 모른다.//혹은 끈질기게 자라나는 사랑이나 욕망의 끝자락까지//또 고갤 몇 번 흔들더니 황급히 돌아내려 간다.//나는 아직 잴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잰 치수마저 말끔히 지워가며
-「자벌레」전문
시인은 산행 중에 우연히 만난 자벌레를 매개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바지에 붙은 자벌레는 시인을 재다가(알아가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아직 잴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듯이’ 돌아가 버린다. 혹시 나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나의 불찰일 가능성이 크다. 난 아직도 그를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아직 잴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것을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돌아볼 줄 안다는 것. 인간(시인)에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물론 시가 곧 삶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시를 통해서’ 그의 삶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의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만약 그가 자기 성찰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자벌레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런 시를 생산해내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벌레로 인한 시인의 자기응시가 일종의 ‘포즈’일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시를 읽으면서 그런 의심은 곧 사라졌다.
주먹만한 노란 향주머니들 반짝인다./가을의 무게만큼 휘늘어진 모습이/풍성하고 탄력이 넘친다./유자나무가 유자 한 알을 내게 건넨다./유자나무도 봄부터 천천히,/아주 천천히 누군가에게 받았을 것이다./그동안 천수千手에 매달아놓고/즙과 향기가 진하게 배어들도록/한 번도 편히 앉거나 누워보지도 못한 채/서서 기도하며 공을 들였던 것인데/무엇인가는 받는다는 일은 가까운 정성과/다시 전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필요한 것/유자차를 담그려고 껍질을 벗기면/처음 건네준 분의 향기가 진동한다./(생략)/나도 유자나무에게 받은 그 마음을/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있는 중이다./내 몸을 통과하여/온전히 이동하는/어디에선가 꽃눈이 불거지고, 꽃이 피고/노란 향낭으로 흔들린다는 소식이/벌써 그다음 곳까지 당도하고 있을 게다.
-「유자」중에서
내가 보기에 그는 성실한 시인이다. 그런데 시인으로서의 성실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번 그의 시집이 내게 던진 화두이기도 하다. 시인은 ‘유자나무가 유자 한 알을 내게 건넨다.’고 말하면서, 그 ‘유자나무도 봄부터 천천히/아주 천천히 누군가에게 받았을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 후 ‘천수千手에 매달라놓고/즙과 향기가 진하게 배어나도록/한 번도 편히 앉거나 누워보지도 못한’ 것은 유자나무만은 아닐 것이다. 그도 ‘유자나무에게 받은 그 마음을/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있는 중’이니 ‘편히 앉거나 누워보지 못한’ 것은 시인이 치러야할 통과의례이기도 했으리라. 이런 시 쓰기의 고단함을 잘 견뎌내는 것이 바로 시인의 성실함이 아닐까. 시 쓰기의 고단함을 잘 익히면 이런 시가 나올 법 하다.
끝내 날아보지 못한 새 한 마리
도로 가에 널브러져 있다.
부러진 갈비뼈 두어 대,
휘어진 등뼈가 튀어나온 채
누군가 그의 생을 완전히 접어놓았다.
빙글빙글 돌며 우두두 받아내던
하늘의 무수한 환호성
엄마가 아이에게 젖지 말라고 건네던
그 촉촉하게 젖은 마음을 간직한
죽은 새 속에서 빠져나온 새는
선뜻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근처를 배회했을 것이다.
나뭇가지에도 전깃줄에도
제 온기 없는 주검 위에도 앉아보다가
결국은 어디론가 떠나갔을 것이다.
비가 올 때마다
2단으로 접어두었던 큰 날개를 퍼덕이며
나는 꿈에 부풀었을 새 한 마리
-「우산」전문
‘죽은 새 속에서 빠져나온 새’가 ‘선뜻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근처를 배회했을 것’이라는 시적 상상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새든지 우산이든지 그 시적 대상에 대한 진실한 애정만이 아닌 언어의 아름다움에 가 닿고 싶은 욕망의 소산이기도 하리라.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시인이란 그 경계에서 서성이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이 경박해지지 않는 것일 뿐. 선한 욕망도 ‘자라면 자랄수록 깨지고 금이 가는 상처를 입기 쉬운 법’이다. 하여, 시인은 ‘새벽 어스름에 깨어 일어나//늘 자신이 닿아야할 하늘 한쪽을 가늠해(「운주사 탑」)’보는 것이리라.
그의 시는 읽는 재미가 있다. 거듭해서 읽을수록 맛이 진해진다. 그 진한 재미는 이상인 시인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수 있는 탁월한 언어 감각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삶에 대한 꾸준한 사색과 주변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그의 시가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언어의 아름다움으로만 치장된 시는 생명이 짧을 수밖에 없다. 이 시인에 대한 미더움도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다음 소개하는 두 편의 시가 그것을 확인해준다.
차창에 강물이 쏟아져 내린다.
지우고 또 지워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강물소리
그렇게 끊임없는 인연들이
줄기차게 이어져 내렸던 것
또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어
부릉거리는 생을 잠시 꺼둔다.
(생략)
내가 그동안 무심히 만진 것들이
서럽게 우는 것이라고 해둔다.
열심히 맛보았던 세상의 한 부분이
모래무덤처럼 있다고 해둔다.
차창엔 내가 쏟아져 내리고
여기저기 묻혀두었던 사랑들이 지워지고
이렇게 비가 퍼붓는 날
인연 깊었던 그대들은
너무도 슬프게 빛나는 모서리이고
그늘진 웃음이다.
-「강가에 주차중」중에서
수취인불명의 편지처럼
오래 접혀있던 가을의 첫 장을 펼쳐보니
뜨거운 여름을 날던 그가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죽어 있다.
주검이 이렇게 맑고 가벼울 수 있다니
죽어서도 어딘가를 열심히 날고 있기라도 하는 듯
날개를 활짝 폈다.
(생략)
이 세상의 무엇을 깨물어보고
맛보고 갔을까
그 큰 겹눈으로 어떤 장면들을
사진 찍어 담아 갔을까
-「여름좀잠자리」 중에서
실제로 그의 눈은 크고, ‘여름좀잠자리’의 큰 겹눈을 연상케 한다. 그 크고 겁 먹은듯한 눈이 바로 시인의 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에 대한 미더움이 깊어진다.
(끝)
출처 ; 사람의 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