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상 열전>에는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첫째 사리에 어두워서 토호들에게 휘둘리던 정지상이 갑자기 의사(義士)로 돌변하여 황제가 파견한 어향사와 상급자인 접반사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 체포 구금(拘禁)했다. 처음에는 정의로움에 의지하여 즉흥적으로 저질렀다가, 사태가 불리해지자 임기응변적(臨機應變的) 언변(言辯)으로 전주 향리들을 독려(督勵)하여 성사시켰는데, 마치 영웅담(英雄譚) 한 편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둘째 정지상은 “나라에서 이미 기씨(기철 등) 일당을 죄를 물어 죽이고 다시는 원나라를 상국으로 섬기지 않기로 했으며,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공민왕과 최측근만 공유(共有)하는 비밀로, 누설되면 대사(大事)를 그르치는 것은 물론, 공민왕이 폐위(廢位)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사안인데,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기 15개월 전에 정지상이 전모(全貌)를 폭로(暴露)했지만, 쿠데타는 성공하여 1356년 5월 18일 기철(奇轍)과 그 일당이 처형당하고, 부원세력이 붕괴(崩壞)될 때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다.
예스부카는 정지상에게 체포되는 치욕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 서응려(徐應呂)까지 정지상 손에 맞아 죽었으므로 정지상에게 맺힌 원한이 깊었을 것이다. 없는 죄도 만들어 덮어씌울 상황인데 왜 정지상이 폭로한 사실을 기철이나 원나라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는가? 원나라는 단사관[9]을 파견하여 정지상을 국문했지만, 정지상이 폭로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는가? 정지상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기철 일당을 죽이고 원나라와 군신 관계를 끊고 독립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잘 알려진 역사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 공민왕은 하급관료 정지상과 특급비밀을 공유(共有)했을까?
2) 왕이 폐위될 수도 있는 특급비밀을 정지상이 폭로했을까?
3) 풀려난 예스부카는 정지상의 폭로를 보고하지 않았을까?
4) 기철이나 원나라 단사관은 정지상의 폭로를 몰랐을까?
5) 기철과 원나라 조정은 왜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위에 나열한 의문에 대한 답은 정지상은 공민왕의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정지상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15개월 후에 공민왕이 친위 쿠데타가 성공하여 원나라 황후의 오라비 기철을 죽이고 원나라와 관계를 단절했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당시 역사를 간추려보면,
정지상은 1355년 2월 24일 순군옥에 투옥되었는데, 서울로 올라가다가 공주에 들러서 서응려를 때려죽였으므로 예스부카 감금사건은 2월 10일 무렵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정휘(鄭暉)가 내려와서 전주 목사 최영기(崔英起)와 사건에 가담한 향리들을 체포하여 책임을 묻고, 차포온(車蒲溫)이 예스부카를 풀어주는 등 일은 3월 초에 일어났을 것이다. 원나라 속국 고려 땅에서 상국 황제가 파견한 어향사가 모욕을 당했는데, 당사자 예스부카는 자신이 모욕당했을 뿐 아니라 죄 없는 동생 서응려까지 맞아 죽었으니, 원나라 조정과 예스부카를 달래기 위해서 누군가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스부카를 달래기에 가장 적합한 희생자는 정지상이다. 그러나 정지상은 순군옥에 투옥되어 심문을 받은 정도에 그쳤는데, 공민왕과 친분 및 원나라에 있는 누이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전주에 사는 주민들이다. 전주는 최고 지방 행정기구 전주목에서 천민(賤民)들만 살 수 있는 전주부곡으로 강등되었다. 다시 말해 전주에서 사는 양반, 향리, 양인(良人)은 모두 하루아침에 과거를 응시할 수 없는 천민 부곡인(部曲人)으로 전락하였으니,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순순히 따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기록이 없어서 확인은 안 되지만 아마도 전주에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났을 것이다.
전주최씨, 전주이씨, 전주유씨 등 전주 호족 후손들은 고려에 들어와 향리로서 대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정지상을 도와서 예스부카를 감금했고, 조정에서 파견한 정휘에 의해 체포당하여 처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가담자 처벌 정도에 그치지 않고 전주를 부곡으로 강등시켜 전주에서 사는 주민 전체를 천민으로 만들어버리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근거 문헌으로 『연촌집』<제공찬시병서>가 있다. <제공찬시병서>는 중랑장공파 4세 월당공(月塘公) 최담(崔霮)을 찬양한 <찬시집(讚詩集)> 서문이다. 연촌공(烟村公) 최덕지(崔德之, 1384~ 1455) 부탁으로 정곤(鄭坤)이 지었는데, 월당공 일대기(一代記)가 수록되어 있다. “나의 아버지(월당공)는 지정 병술년[원나라 순제 지정 5년, 고려 충목왕 원년] 4월 5일에 태어나시었다. 9세가 되시는 해에 아버지(동정공)가 돌아가시어 성인을 본받으며 자라셨다.” {영인} 지정 병술년은 1346년인데 지정 6년, 충목왕 2년으로 원전(原典)의 주석(註釋)에는 오류가 있다.
월당공이 9세가 되는 해는 1355년으로 그해에 예스부카 감금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동정공은 20대 말에서 30대 초반 나이로, 몸을 써서 행동하는 행동대장으로서 일에 앞장서기 적합한 나이이기 때문에, 구금된 정지상을 풀어주고, 어향사 예스부카를 감금하고, 또 그 죄를 물어서 향리들이 체포당하고, 전주가 부곡으로 강등될 때 저항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무력 충돌로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정공 요절(夭折), 안렴사공 최용생(崔龍生) 진주목사 은퇴, 판사공 최용갑(崔龍甲) 은퇴도 모두 예스부카 감금사건과 같은 해에 일어났고, 검교대호군 최용각(崔龍角) 수졸(戍卒) 강등은 2년 후에 일어났다. 금마저 대문 반역사건, 후백제 멸망, 예스부카 감금사건은 전주최씨 역사에서 3대 고난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 각주 ------------------
[9] 斷事官. 관할 행정 전반에 결정권을 지니고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