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찬란한 삶을 위해
<긴긴밤> 루리 글,그림
2023.11.23 12기 고미선
나이듦에 따라 세상일에 주억거려지는 일들이 시나브로 늘어간다. 숱한 긴긴밤을 지나 제법 괜찮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 불현듯 마주하게 된 <긴긴밤>은 지난 일들을 더듬더듬 뒤적이게 했다. 예기치 못한 길목에서 복병처럼 불쑥 튀어나와 일상을 헤집어 놓았던 일들, 저마다의 그 선택은 정말 최선이었을까? 뒤척이며 지새우던 막막한 애태움의 시간 들을 뒤로하고, 이제 50대의 한 가운데를 사부작사부작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별일 없지?”라고 건네는 가벼운 그 인사가 얼마나 마음을 ᄄᆞ뜻하게 위로하는지 이제는 너무도 잘 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 기대어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가 아닌, 코끼리들 옆에 있으면 그게 순리인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뿔소 노든은 코끼리 노든으로 평화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코끼리답게 생각하려 할수록 더 분명해지는 건 코끼리가 아니라는 사실, 노든에겐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이 남은 것이다. 평화로운 삶을 뒤로 하고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노든의 뒷모습에 격려 그 이상의 애처로움이 앞서는 것은 앞으로 겪어내야 할 노든의 고단함이, 상실의 아픔이, 분노가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있기 때문일게다. 혼자 떠돌고, 그럭저럭 괜찮은 자유를 만끽하며 지내던 노든은 혼자서는 진정한 코뿔소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뿔을 가진 코뿔소를 만나 가족이 되고 곧 딸도 태어난다. 가족과 함께 한 시간들은 노든의 삶에서 가장 눈부시게 반ᄍᆞᆨ이는 시절이었고, 완벽한 한 때였다. 삶에서의 ‘완벽’은 폭풍전야의 고요만큼 위험하고 때론 속수무책이다. 노든의 삶은 더 이상 바랄게 없는‘완벽한 밤’밀렵꾼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다. 뿔이 깊게 잘려나간 채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내의 코에 노든은 자신의 코를 맞댄다. 떠나가는 아내와 홀로 남겨질 노든의 우물 같은 그 깊은 상처를 차마 들여다 볼수 조차없다. 그것이 인간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느닷없는 폭력 때문이라면 더욱 더 말이다. 누군가는 파괴하고 누군가는 그 폐허에서 희망의 손길을 내민다. 동물원에서 나고 자란 앙가부는 복수심과 분노 밖에 남지 않은 노든에게 그런 희망이다.
“바람처럼 빨리 달리고 싶다며, 나를 믿어봐.”
호기롭게 말한 노든은 앙가부와 탈출을 계획하던 중 앙가부마저 잃는다. 또 홀로 남겨진 노든, 절망에 몸부림치던 그때 전쟁의 포화로 철조망이 무너진다.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 하필 앙가부가 죽고 없는 지름이라니! 삶은 늘 이런 식이다. 마치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으름장 같은 걸까?“혼자 남으면 탈출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앙가부의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듯하다. 화염속을 피해 동물원을 나오던 노든은 양동이를 입에 문 펭귄 치쿠를 만난다. 바다를 찾아간다는 치쿠와 양동이 속의 알을 외면할 수 없어 함께 길을 떠난다. 노든은 아내와 앙가부의, 치구는 윔보의 가슴 아픈 희생을 알기에 잠들지 못하는 많은 긴긴밤을 보내면서도 바다를 향해가는 발걸음을 늦출 수 없다. 함께 하는 그 길에서 노든과 치쿠는 우리가 되고,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나누고, 희망을 얘기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치쿠에게 동물원 밖의 세상은 너무 혹독하다.
“만약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알을 품어서 꼭 새끼 펭귄이 무사히 태어나게 하겠다고 약속해줘. 그 애를 바다에 데려다준다고 약속해.”
치쿠에게 있어 자신을 오롯이 희생하며 지켜낸 ‘버려진 알’은 어떤 존재일까? 노든은 알에 신경쓰느라 치쿠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치쿠가 죽고 없는 긴긴밤, 작은 부리가 껍질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다. 노든과 새끼 펭귄은 서로에게 전부다.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줄수 있는 모든 것을 새끼 펭귄에게 내어준다. 펭귄 역시 치쿠와 윔보의 몫까지, 또 스스로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낸다. 계속되는 여정속에 노든은 지쳐갔고, 오래전 다친 다리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저기 지평선이 보여? 초록색으로 일렁거리는, 여기가 내 바다야.”
“너는 펭귄이잖아. 넌 네 바다를 찾아가야지.”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불운한 알에서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사랑받았던 행복한 펭귄은 이제 그 힘으로 자신의 근원을 찾아 홀로 바다로 향한다. 그리고 다다른 거대한 바다 앞에서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 아내의 마음을,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서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이들의 희생과 사랑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이어졌음을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 펭귄은 수많은 긴긴밤을 넘어,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 자신을 있게 한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리라.
<긴긴밤>은 “압도적인 감동의 힘”“인생의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과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의 엄숙함”“멸종되어 가는 코뿔소와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펭귄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 낸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대상을 받았다고 한다. 대상에 빛나는 책답게 어느 한 구절, 간간이 페이지를 차지하고 앉은 어느 그림 한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시리도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긴긴밤>은 두렵지만 나만의 길을 한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는 우리네 삶과 닮아있다. 어린이 동화이지만 오히려 어른들의 마음에 더 큰 울림과 위로를 주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이야기가 아닐까? 노든의 삶이 안쓰러워 오래도록 마음을 다독여야 했고, 펭귄의 씩씩하고 당찬 모습에서는 한없는 위로를 받았다. 굳이 펭귄의 이름을 짓지 않았던 것은 우리 모두의 펭귄이기 때문이리라. 펭귄의 무리에서 살짝 몸을 돌려 우리에게 웃음을 보내는 펭귄의 마지막 모습에 이젠 깊음 슬픔을 거두고, 깊은 안도감으로 가슴 벅찬 응원을 보낸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우리, ‘함께’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찬란히 빛나리라.
첫댓글 와우!!
'긴긴밤'이 미선님의 감상평으로 다시 태어난 듯 하네요. 문학소녀 미선님 멋지십니다. 피날레를 이렇게 하시는군요 ㅎ
긴긴밤을 읽고쓴 긴긴감상글덕에
가슴속에 긴긴여운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