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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 1-14
요셉이
모세는 요셉의 주도하에 야곱의 장례가 치루어진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절은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입니다.
본 장에는 야곱의 임종 그 이후 사건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죽음은 자연적이요 의식적인 두 가지 면에서 애도(哀悼) 되었습니다.
요셉이 자기 부친 얼굴에 대고 눈물을 흘린 것은 순수하고 진실된 애정의 표시요, 애굽인들이 그를 위해 70일 동안 애도한 것은 영예를 위한 것이요, 관례적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진정한 슬픔보다는 장식과 의식적인 색채가 더 짙습니다.
죽은 자들을 이렇게 애도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최후 빚을 갚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여기서 상속자의 애도는 가면을 쓴 웃음이라는 격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때때로 진정한 슬픔이 엄습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애도를 보아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 덜 울 사람들이 남들이 앞에 있기 때문에 더 눈물을 흘리며 효성이 지극한 괴로움을 일부러 발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위로한답시고 찾아오는 친구들이 더 많은 울음을 나게 하는 엉뚱한 결과가 나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의식은 살아있는 자들이 죄 때문에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를 곰곰이 생각하도록 하는 좋은 원칙에 입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많은 잘못이 덧붙은 나머지 희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그 참 목적을 지향하지도 않고 올바른 온건에 의해서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연스럽게 자극되지 않고 우리 마음 속에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순수한 슬픔은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지킬 경우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요셉은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나타냈다해서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효성이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절제한 슬픔 때문에 맹목적인 충동에 이끌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 결과를 낳지 않으려면 스스로 고삐를 쥐고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격한 슬픔은 항상 우리를 반역으로 끌어 들이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르치고 있듯이 우리가 슬픔을 완화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장래 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절은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과거에는 장례식에 더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것도 미신취급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굽 사회 장례는 유대인들에 비해 더 비용이 많이 들고 허례적이었습니다.
고대 역사가들도 이 점을 이 민족의 가장 두드러진 관습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성한 장례 의식이 장차 부활에 대한 거울 노릇을 하도록 하는 뜻에서 거룩한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져 오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이란 언제나 사물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 이런 저런 의식을 보여주는데 열심인 만큼 참 신앙에서 벗어난 자들이 신실한 자들에 비해서 허세를 부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이 상징의 실체와 올바른 용법은 신실한 자들에게 귀속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우리와 비교할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셨던 그림자 같은 의식들이 지금에 와서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민족들과 비교할 경우에 유대인들이 취한 의식은 보다 더 온건하고 견딜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 의식이 왜 그처럼 많은 비용과 수고를 낳게 하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외적 상징의 참 기원과 올바른 용법을 보여주는 순수한 가르침이 앞서지 않는 때에 외적인 상징에만 집착하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우며 쓸데없는 일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을 묻는 것은 신앙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시신(屍身)에 향료를 바르는 것은 그것이 장차 불멸에 대한 공적인 상징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과거에는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마치 어차피 죽어가기 마련인 우리와 금수(禽獸)모두에게 공통되는 종국이라는 듯이 슬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이러한 유혹을 막아주는 충분한 버팀대입니다.
대낮 같은 광채를 아직 본 일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상징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생명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이 행한 짓은 이 거룩한 조상들을 어리석게 흉내내며 그것을 우습게 여기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향내를 맡은 가운데 죽음 뒤에도 무엇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경우 향유를 바르는 모든 의식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 자체가 신체의 영원한 파멸을 의미하는 자들이 이미 썩어버린 것을 그처럼 값비싸게 보관하려 하는 것은 성스럽고 유익한 의식에 대한 불신앙적인 모독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요셉이 엉터리없는 애굽인들을 모방한 것은 그들의 방법에 대한 판단이나 인준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혹 요셉이 애굽인들을 모방하는 실수를 범한 것은 자기 부친의 시신 상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흉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용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동일한 습관이 오늘날 '우리에게' 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뒤엎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 검소한 면을 개발해야 합니다.
3. 본문 3절은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대로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애도(哀悼)의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거나 우리가 따라야 마땅한 귀감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애도하는 날을 일정하게 법으로 정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제어하는 시간을 허용하려는 뜻에서지만 야심에 대한 면이 감안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주신 다른 규칙은 슬픔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셉은 필요 이상으로 애굽인들의 사악한 양식에 따라 애곡했는데 이것은 세상이란 관습적인 것은 전부 합법적인 것으로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우세한 것이 마치 거센 홍수 마냥 앞에 닥치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엄숙한 애도의 날로 정한 70일을 헤로도투스(Herodotus) 는 그의 두 번째 책에서 기름 바르는 날에 해당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오도루스(Diodorus) 는 몸을 단장하는 일이 30일에 끝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 두 저자는 기름 바르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이 기술이 더 발달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절차는 조상들에 의해서 전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4. 본문 4-5절은
"④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 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⑤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 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입니다.
여기에 요셉이 왕이 베푼 호의와 재가를 받아서 '2중의 굴'로 된 무덤으로 자기 부친 유해를 옮기는 문제가 간략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자신도 왕의 귀한 애호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요셉은 조신(朝臣)들을 시켜서 중재자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애굽 민족이 이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인들은 그들이 특별히 자랑하는 조국이 신성하다는 사실이 무시되는 것을 무엇보다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이 일에서 생기는 불쾌감을 남에게 전가하는 뜻에서 자신이 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부친 장사 문제는 자기 선택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야곱이 맹세를 통해서 그것을 시행할 방법을 자기에게 부과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비겁한 공포에 억눌린 나머지 자기 신앙을 감히 담대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절차에서 나올 수 있는 불쾌감을 모두 사자(死者) 인 야곱에게 돌리는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다 더 단순하고 정직한 신앙고백이 요구되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그런 핑계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여호와께 우리로 하여금 참 신앙을 증거 하도록 지도하는 확고부동한 지조(志操)의 정신을 요청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의 거침없는 고백을 허용할 때는 우리 모두 거기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요셉은 바로 왕이 내리는 재가가 아니고서는 한 발자욱도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마치 황금 족쇠와 같은 자신의 휘황찬란한 행운에 속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궁정에서 존경과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이런 식입니다. 따라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모두 자기 개인의 지휘로 만족하는 것보다 더 나은 상책은 없습니다.
요셉은 또한 자기가 풍기는 것으로 염려한 불쾌감을 다른 상황을 들어 완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 묻히고자 하는 소원은 최근에 자기 부친 마음에 떠올랐던 것이 아니라 그의 부친 야곱이 이미 오래 전에 자기 무덤을 파놓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결코 애굽 땅에 대한 혐오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5. 본문 6절은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 입니다.
우리가 본대로 한편 요셉은 적절하게 중간 노선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자기 부친 명령에 근거한 것이라는 핑계를 대는 행동은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의 이러한 온건한 행동 때문에 청탁을 더 쉽게 들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겁함이 여기서 인준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 만큼,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요합니다.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부르는 곳으로 즉각 따라 갈 경우에, 여호와께서는 원하는 문제를 상상외로 잘 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요셉의 자발적인 순종이 번창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바로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향력을 받아서 이처럼 요셉의 소원을 유쾌하게 들어주게 된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맹목적인 불신자들 사회에서마저 맹세가 얼마나 중요시되고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로는 자기 입으로 맹세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맹세한 것을 자기 권위로 피괴하는 것을 불법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너무도 사라진 가운데 인간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이는 것을 다반사(茶般事)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같은 사람마저도 저주하는 따위의 방자한 행동은 결코 벌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6. 본문 7절-13은
"⑦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⑧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⑨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때가 심히 컸더라
⑩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칠일동안 애곡하였더니
⑪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가로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 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강 건너편이더라
⑫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발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입니다.
모세는 이 장례사건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애굽인들이 또 다시 애곡하는 문제를 결코 오늘날 우리들 규범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다들 아는 대로 우리 육신은 결코 자기 제어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슬퍼하는 일과 기뻐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한계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 주민들이 경탄해마지 않은 난장판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7일을 계속해서 애도하는 날로 정하는데 있어서 당장 무슨 올바른 의도가 있었겠지만 이것도 역시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 장례가 이처럼 성대하게 치러지도록 하신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신앙에 대한 기억을 후손에게 물려줄 웅대한 기념비를 이런 식으로 세워 올려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야곱이 만약에 일반적인 가족장에 따라서 매장되었더라면 야곱의 명성은 쉽게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인간들이 고의적으로 눈을 감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들의 눈앞에는 항상 약속된 기업에 대한 소망을 고이 간직하는 이 귀한 본보기가 놓여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일어날 구출사건에 대한 깃발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보는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들의 영광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애굽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의의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일종의 횃불을 들고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신령한 부르심의 길을 갈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나안 민족들 역시 이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가운데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지식이 새롭게 성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7. 본문 14절은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입니다.
물론 요셉과 나머지 사람들은 애굽에 너무도 많은 담보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추측컨대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 곳으로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그들이 자기들 뜻대로 거처를 선택하도록 허용하신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여정을 인도하셨듯이 그들의 자손들 역시 마치 울타리로 두르듯 고센 땅 안에 감금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거룩한 조상들이 우리가 제15장 13절에서 보는 말씀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남겨두어서 그것을 마치 귀금속과 마찬가지로 신실하게 보관하도록 하셨다는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온 것은 당장 필요에 의해서만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목에 매어놓은 멍에를 자신들 손으로 벗어버리는 것이 부당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고삐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잡아 당기시고 계십니다.
그 결과 그들이 자신의 지배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지를 받은 나머지 그들에 대한 포학한 압제를 받으라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피하려들지 않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들의 성격은 별로 무겁지 않은 짐일망정 그것에 대해서 반기를 들지 않을 정도로 온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그들이 침착하고 말없이 행동을 가다듬는 가운데 최악의 노예살이를 견디게 된 것은 특별한 신앙심이 먼저 그들을 사로잡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주도한 야곱의 장례에서도 실천적으로 얻는 교훈이 많습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