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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목사/주님의 복음을 외치는 성도가 됩시다! (욘 1;1-16)
그대는 세상에서 정말로 가장 멋져요. 그대야말로 세상에서 정말 가장 예뼈요.
아싸! 감동충만, 아싸! 성령충만, 아싸! 행복충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중 화장실은 어디일까요? = 전봇대
지구의 값은 얼마일까요? = 만원
국사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곡은 이이의 호다. 퇴계는 이황의 호이고, 그리고 도산은 안창호 선생님의 호다.
그럼 ‘다산’’은 누구의 호일까?”
그러자 사오정이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개그우먼 김지선이요.”
다산은 정약용의 호입니다.
개그우먼 김지선씨는 4명의 자녀를 둔 애국자 중에 애국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가능하면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합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전도하는 일이고, 애국하는 일입니다.
어느 부부가 있습니다.
부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여전히 키가 153cm의 키를 끈질기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키 이야기를 즐깁니다.
“내가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남들이 큰 것이다.”
“작으니깐 번개 맞을 확률이 낮아 장수할 것 같다.” 라는 둥하면서 재미있게 삽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부인은 자신은 키가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봅니다.
부인은 “나는 키가 큰 거고, 당신은 나보다 더 큰 것 뿐이야!”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부인의 이 한마디에서 남편은 큰 충격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는 부자야. 그리고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님은 나보다 더 부자일 뿐이야!”
“나는 성공했어.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나보다 더 성공하고 건강할 뿐이야.”
“나는 행복해. 그리고 누군가는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 뿐이야.”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큰 부자이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성공도, 행복도, 기쁨도, 감사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전도할 수 있는가하면, 전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좀 바꾸어 봅시다.
우리들도 뭐할 수 있다구요? 전도요.
예, 다같이 따라 해 봅시다.
우리도 전도할 수 있다!
우리도 전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도 한번 크게 웃어봅시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헤헤헤헤!
자,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엘라의 아들 호세아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기 전에 북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서울인 니느웨성에 가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외치라고 합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Ⅱ때에 이스라엘의 북부 갈릴리지역에 살던 선지자이며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아주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36년 식민지 통치 때문에 항상 악감정을 가지고 있듯이 이스라엘은 앗수르라는 나라는 반드시 망해야 될 민족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라고 하면 치를 떱니다.
한일간에 스포츠게임을 해도 우리나라 선수들은 죽자 살자 하는 생각으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한일전은 온 국민이 뜨겁습니다.
이런 것처럼 북이스라엘과 앗수르는 항상 대치하고 앙숙관계를 유지합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하던 중에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서울인 니느웨 성으로 건너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가서 외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였을 때 니느웨 성민들이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자신은 매국노, 역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니느웨 성으로 가서 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서울입니다.
원수가 회개하여 구원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비하여 약소국가이기 때문에 약소국가출신이 전하게 되면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놈이라고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니느웨 성민들에 붙잡혀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니느웨으로 가서 외칠 수 없는 요나는 욥바 항으로 가서 저 멀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려고 합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것은 국가와 민족과 가족을 위한 길이고 현명한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요나는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으로 피하여 가서 지내는 것이 자기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 확신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중해 반대편에 있는 저 멀리 스페인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원수의 나라 니느웨 성으로 가서 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으로 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되고,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다시스로 가는 길만이 자기 민족과 국가를 살리고 구하는 길이라고 확신하면서 다시스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욥바 항으로 와서 다시스로 가는 배의 배삯을 지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여러분, 배가 다시스 항을 향하여 욥바 항구에서 출항할 때 바람은 어떻게 불었을까요?
순풍이 불었을까요?
아니면 폭풍이 휘몰아쳤을까요?
잘 생각해 봐요. 폭풍이 불면 배가 출항할 수 있어요. 없어요.
폭풍이 불면 출항하지 못합니다.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항해하기에 아주 좋은 순풍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처음에 요나를 태운 배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순조롭게 항해해 갑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되어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시스로 가는 길이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살리는 길이라 확신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풍랑으로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을 떠나면 죽는 것입니다.
출항한 지 반나절이 지났을까요?
하루가 지났을까요?
하나님은 계속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돌아와야 산다. 니느웨로 가는 길이 네와 민족이 사는 길이다라고 계속 속삭여줍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두 귀를 막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배 밑으로 내려가서 잠을 잡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살리기 위해서 급히 서둘러서 지중해 한 바다 가운데로 바람이 되어 찾아갑니다.
요나를 내놓으라고 소리칩니다.
그런데도 요나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큰 풍랑을 일으키고 배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도무지 더 이상 항해할 수 없을 정도까지 배를 흔들어버립니다.
배에 실은 모든 물품들을 바다에 던지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으러 가는 요나를 살리려 합니다.
요나를 살리는 길이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니느웨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으러 가는 길인 줄도 모르고 달려가고 있는 요나를 때려서라도 찾아오고 싶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양을 어깨에 무등 태워서 데려오는 성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지요.
그 그림은 마구 마구 곁길로 가려고 하는 양에게 “양순아, 양돌아. 거기로 가면 죽어. 거기로 가면 낭떠러지에 빠져서 죽는 거야. 날카로운 바위들이 가득한 골자기, 낭떠러지야. 그러기 때문에 가지마 가지마!” 하면서 양을 돌아오게 하려고 노력해도 양이 말을 듣지 않고 자꾸 곁길로 가려고 하니까 목자가 양의 다리를 다치게 해서 어깨에 무등을 태워서 데려오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은 아무리 요나에게 말씀해도 돌아오려고 하지 않으니까 요나를 때려서라도 요나를 찾아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분입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의 말씀을 거역하여 도망가는 요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람이 되고 풍랑이 되어서 지중해 한 가운데로 찾아가서 요나를 찾아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요나를 이방인 선장과 선원들에게 망신을 주면서 찾아오려고 합니다.
선장과 선원들이 배 밑으로 내려와서 곤하게 자고 있는 요나를 깨우면서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하면서 망신을 줍니다.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는데 원인이 바로 요나에게 있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자 선장이 요나에게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라고 하면서 다구칩니다.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인하여 발생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엄청난 손실도 감내하시는 분입니다.
요나를 찾아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배에 싣고 있던 모든 물건들을 버리게 합니다.
요나를 찾아오기 위하여 대자연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큰 손실을 당하면서 요나를 찾아오려고 할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써서라도 찾아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찾아오기 위해서 대자연을 준비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성도들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 보좌를 포기하고 찾아오신 분입니다.
요나를 붙들고 찾아오시는 분은 바로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불순종하는 요나, 자신을 떠나려고 하는 요나를 붙들면서 축복까지 주시는 분입니다.
어떤 축복을 주실까요?
요나는 선원들이 재앙의 원인을 찾아보자고 하면서 제비를 뽑을 때 제비에 뽑힌 것이 축복입니다.
제비에 뽑혀서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제비에 뽑히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요나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는 것처럼 보이지는 것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다시스로 가면 그것이 죽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것을 깨우쳐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로 인식시켜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면서 불신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확실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세상 끝까지 찾아가서 찾아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전도는 그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바로 그 하나님을 외쳐서 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돌아봅시다.
요나가 타고 가는 배는 죽음과 죄악으로 달려가는 지름길입니다.
사람들은 그 길이 죽음의 길, 죄악의 길인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달려갑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길이 사는 길이고, 다시스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살리기 위해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사는 길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의 길, 멸망의 길,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불신과 무관심과 외면과 배척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갖가지 이유로 인해서 전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전도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뿐, 사람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전도는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입을 열어 외치는 것이 전도입니다.
누가 듣든가 안 듣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전도자는 상대의 반응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입을 열어 복음을 외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입을 열어 주님의 복음을 외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십자가와 구원과 부활을 전하며 외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시고 기억하시고 붙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도자를 붙여주시는 분입니다.
전도자가 전도하려고 할 때 전도할 수 있는 담대함과 지혜를 주시고 전도할 수 있는 대상도 붙여주십니다.
전도할 수 있는 담대함과 믿음을 주십니다.
전도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영혼은 지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전도하는 길만이 지옥에 가야 될 그 영혼을 살리는 길입니다.
전도자는 전도하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를 갈려고 할 때 죽음의 길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한 영혼을 살리는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복음을 외치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성도가 전도에 전념할 때 하나님은 그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십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교회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전도자에게 커다란 상급과 면류관의 축복을 주십니다.
부지런히 전도하러 다니기 때문에 건강해지고, 전도할 수 있는 물질을 부어주시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집니다.
전도자의 기쁨, 행복,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전도의 대상은 사람이 판단하여 결정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포함되고, 나에게 악의적인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가야 되지만 자신에게 악의적인 사람은 지옥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전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람을 구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교회의 빈자리를 강권하여 채우라고 합니다.
아들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잔치를 베푼 왕은 종들에게 강권하여 산울타리와 동네 사거리로 나가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집의 빈자리를 채우라고 합니다.
사람들을 구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왕이신 하나님께서 복음의 잔치, 구원의 잔치를 베풀고 있는 교회당으로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1억원의 돈을 투자해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들의 모든 재산, 1억원을 투자하여 그 영혼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전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외치지 않으면 구원받아야 될 대상이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들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들을 수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을 수 없으면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할 수 없어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바로 전도자의 외침의 소리를 듣고 성령의 뜨거운 감동하심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하여 고백할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이웃들, 가족들, 친지들이 성도들이 믿음으로, 입을 열어 외치는 복음의 소리를 듣고 구원받게 됩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과 우리 가족들과 구원받아야 될 영혼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시면서 붙들어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에게 하늘나라의 영원한 면류관을 약속해 주십니다.
복음을 외치며 전도하는 이들에게 임마누엘과 에벤에셀의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평강과 샬롬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받는 주인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인이신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성도들은 당당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것입니다.
외칠 때 성령의 붙들리심을 받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우뚝 세워지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 산성교회에 빈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 빈자리를 전도하여 채우는 우리 산성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하여 교회가 부흥 성장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감사하지 못할 때 감사드리면|†주일말씀(2010)†
야베스 | 조회 61 |추천 0 |2010.06.30. 16:58 http://cafe.daum.net/GRACEOFJESUS/O5CB/22
감사하지 못할 때 감사드리면(요나1;17-2;10)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멋져요.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예뼈요.
아싸! 감동충만, 아싸! 성령충만, 아싸! 행복충만
치과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 무자식 상팔자라고 하는 사람
한의시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 밥이 보약이라고 하는 사람
모든 의사가 싫어하는 사람은? = 앓느니 죽겠다고 하는 사람
그러면 ‘앓느니 죽겠다고 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 장의사
어느 대머리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대머리가 되고 나니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을 누구보다 빨리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하하하”
그러면서 한마디 더하는 것입니다.
“싸울 때 더 이상 머리끄뎅이를 붙잡힐 일도 없습니다. 하하하”
진정한 유머의 맛은 바로 자신을 가지고 노는 유머라고 해요.
유머로 자신의 아픔을 가지고 놀려고 하면 아픔을 알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감사하고, 풍자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유머로 자신의 내면을 치료하며 자신을 더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영화 <꿀벌 대소동>이라는 영화의 첫 장면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벌들은 절대로 날 수 없다. 통통한 몸에 비해서 날개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들은 잘 날아다닌다. 왜냐하면 벌들은 인간의 말에는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가능”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겠지만 ‘불가능’이라는 말만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능’이라는 말만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능’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은 단순한 의견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인생 앞에는 “불가능의 사전”이 놓여있습니까?
아니면 “가능의 사전”이 놓여있습니까?
우리들 앞에 어떤 사전이 놓여 있든지 간에 “할 수 없다”, “힘들다”, “재미없다”, “어렵다”, “안 된다”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는 사람은 약간의 생각을 바꾸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따라 해봅시다.
우리도 전도할 수 있다!
우리 교회도 부흥할 수 있다 !
다같이 웃어봅시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헤헤헤헤 !
여러분, 물고기에게 잡혀 먹혀서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남미 아마존 강에는 ‘피라니아’라는 식인 물고기가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피라니아에게 잡혀 죽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종종 ‘죠스’라는 식인 상어가 사람들을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큰 물고기에 잡혀 먹혔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남 울산 옆에 울주군 강동면 어물리 황토전부락 물칭칭 골짜기라는 마을에 들어서다가 해송백이라고 하는 산기슭에 ‘고래논’이라고 불리는 물 좋은 논이 있다고 합니다.
이 논의 면적은 서마지기로서 그러니까 논 한 마지기에 200평 정도 하니까 600평 정도 되는 논인데 이 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 걱정은 아예 없는 일등 호답이라고 합니다.
이 논을 가리켜 고래 논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옛날 울산시 주전동 해안에 살고 있던 한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갑니다.
어부가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는데 갑자기 사나운 물결이 일기 시작합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웬일일까 하고 어부는 긴장하고 조심을 하는데 난데없는 큰 고래 한마리가 머리 위로 물기둥을 내뿜으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부는 당황하면서 급히 어구를 뱃장으로 거둬 올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노를 저어서 고래를 피해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추격을 해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노를 저어 봤지만 추격하는 고래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 고래는 그 큰 입을 쩍 벌리더니 그만 어부가 탄 고깃배를 쭉 빨아 삼키고 맙니다.
고깃배와 어부가 송두리째 고래에게 잡혀 먹힌 것입니다.
어부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서 한동안 잃었는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어두캄캄한 고래의 뱃속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어부는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기 시작하면서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 어부는 여기가 고래의 뱃속인데 밖으로만 나가기만 하면 살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부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다가 뱃장에 있던 칼을 잡게 됩니다.
칼을 잡은 손은 사정없이 고래의 배를 찌르고 긋고 자르기 시작합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찌르고 긋고 자르니까 고래의 뱃가족이 쭉 찢어졌습니다.
어부는 찢어진 틈으로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밖으로 탈출한 어부는 헤엄을 쳐서 물위로 올라와 길게 숨을 내쉬면서 살아났습니다.
어부는 정신을 차리고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고래와 투쟁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부와 함께 큰 고깃배를 타고 고래를 찾아 나섭니다.
바다로 나가서 고래를 찾기 위하여 여기저기를 노를 저으면서 찾아 다녔는데 그 고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고래는 이미 죽어 있었고, 고래가 떠 있는 부근의 바닷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어부와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리면서 고래에 밧줄을 걸어 묶어서 끌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고래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고래의 뱃속에서 고깃배가 나왔습니다.
이 고래를 팔아서 그 돈으로 고래 논을 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울주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전설은 진짜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꾸며낸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가 있습니다.
1891년 2월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라는 바다근해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영국의 포경선 ‘스타 오브 더 이스트’호라는 배는 이 지역에서 자주 목격된다는 초대형 향유고래를 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바다 멀리 향유고래 떼들이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포경선 이스트호애서는 곧장 작살을 던지는데 사용 하는 롱보트라는 배들을 내려 향유고래의 무리가 있는 장소로 움직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던 고래들은 갑자기 그들 옆으로 다가온 선원들이 작살을 던지자 이를 맞고 고통스러운 듯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밧줄이 달려있는 작살은 피를 흘리며 바다 밑으로 들어가는 향유고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고, 많은 피를 흘리던 고래는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듯 몇 번 수면으로 나와 큰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잠수를 하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면서 함성을 지르던 선원들은 갑자기 바다 밑으로 들어간 고래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수면으로 많은 피가 올라오는 광경을 본 선원들은 ‘좀 있으면 고래가 뒤집어져서 올라 올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며 크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 밑이 어두워지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작살을 맞아 어쩔 줄을 모르던 고래는 바다 밑으로 부터 있는 힘을 다해 선원들이 타있던 롱보트를 덮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롱보트가 박살이 나고 깨져버리고 선원들은 바다에 떨어지게 됩니다.
다른 선원들을 구조했는데 한 사람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죽어서 해면에 떠오른 향유고래를 끌어올린 포경선은 고래를 저장하기 위해 분해 작업을 시작합니다.
보통 고래의 내장을 빼내 바다에 버린다고 합니다.
고래의 내장을 꺼내서 바다에 던지려고 하는데 내장에서 꿈뜰꿈뜰거리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들어있나 싶어서 내장을 잘라내었는데 그 내장 속에 실종한 선원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선원의 이름이 ‘제임스 바틀리’라는 사람이었는데 고래내장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래의 뱃속에서 무려 15시간이나 살아있던 바틀리는 그의 몸 전체 털들이 다 빠지고 살갗이 엄청나게 하얀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약 1달간 의사들의 치료를 받은 그는 그때서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경험담을 알려 주었습니다.
고래에게 잡혀 먹힌 바틀리는 고래내장에 들어갔는데 상당히 따뜻하고 안에 소량의 공기가 있던 내장이 수축하는 느낌을 받았던 그는 정신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영국으로 돌아와서 1909년 자연사로 사망한 바틀리의 비석에는 “고래에 잡혀먹었다 살아난 사람”이라는 비문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1891년 그가 고래에게 잡혀 먹혔다 살아난 광경을 직접 목격한 모든 선원들은 일화가 사실임을 맹세하는 글을 남겨 오늘날 그의 후손들은 바틀리가 고래에 먹혔다 살아난 사람이라는 말을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틀리를 집어삼켰던 향유고래는 크기가 13m에 31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영화 백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래가 바로 향유고래라고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나 선지자에 관한 말씀을 합니다.
요나는 지옥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요나를 집어삼킨 물고기가 향유고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큰 물고기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면 고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나는 2절에서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스올이라는 단어가 바로 지옥을 말합니다.
스올은 ‘무덤, 육체적인 고통, 어둡고 무질서하고 조용한 곳’을 가르킵니다.
요나는 자신은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천국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을까요?
지옥이나 천국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며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요나서 1;2절에서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갈 수 없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앗수르는 철천지원수이기 때문에 원수의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는 꼴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욥바 항구로 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이 안 계실 것 같은 다시스로 갑니다.
가는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제비에 뽑혀서 지중해 바다 한 가운데 던져지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해 주셔서 요나를 삼키게 합니다.
요나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중해 한 가운데 던져지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물고기 밥까지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까?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지내게 됩니다.
여러분,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요나만 삼켰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물고기들도 삼켰겠습니까?
분명히 헤아릴 수 없는 물고기들을 삼켰습니다.
먹이를 먹은 물고기는 소화시키려고 온갖 소화액을 분비하여 죽입니다.
다른 불고기는 강력한 소화액으로 인해서 죽습니다.
그리고 썩어갑니다.
온갖 역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고래배속이기 때문에 공기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마음껏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찾아오십니다.
“요나야. 요나야 지금 물고기 배속에 갇혀서 고통당하는 것 자체를 감사해야 한다. 감사의 찬양을 해야 한다. 만약에 내가 너를 물고기 배속에 가두지 않았으면 너는 죽는거야. 그러니 감사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감사하며 찬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는 것은 자기 고국을 살리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고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스로 가는 길을 막으시고 물고기 밥이 되도록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요나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습니다. 곧 처절하게 지옥에 빠져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가 소화시키려고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에 서서히 죽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시간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바다 밑에서 고통, 신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두렵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에게는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먹은 온갖 물고기들로 인해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내뿜는 소화액으로 인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옛날 시골집에 갔을 때 재래식 화장실에 갔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십니까?
어떤 이들은 똥통에 빠졌다가 겨우 살았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요나가 그런 입장입니다.
물고기뱃속에서 혼자서 물고기에게 소화당하지 않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야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습니다.
죽을 수 있는 것도 복인데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은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계속 감사의 찬양을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인정사정도 없는 분, 피도 눈물도 없는 분처럼 보입니다.
전혀 감사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감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면서 감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감사는 꽁꽁 묶여진 착고를 풀어내고 저주를 끊어버립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감옥에 갇혔을 때 감사의 찬송을 드릴 때 죄수의 착고가 풀렸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찾아오셔서 요나의 마음을 다독거려주시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십니다.
감사는 자기 자신의 형편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볼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물고기뱃속에서 처절하게 지옥을 경험하는 요나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3일 동안 참고 기다립니다.
우리 생각같으면 이왕 토해낼 거. 하루 정도만 고생시키고 토해내게 하시지 3일씩이나 걸릴 것이 뭐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꼬박 3일 동안을 물고기뱃속에 있는 감옥, 지옥에 가두고 맙니다.
3일 동안 시간을 주지 않으면 요나는 처절하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토해내도록 하지 않고 3일 꼬박 걸리도록 참고 기다립니다.
요나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의미를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요나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 삼일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계시는 시간입니다.
3일이 지나야 새로운 세상을, 부활의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까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물고기 뱃속까지 찾아오셔서 요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위액, 소화액, 위산에서도 소화당하지 않게 붙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 때 물고기에게 말씀하면서 요나를 토해내라고 합니다.
1;17절에서도 하나님께 물고기에게 말씀하셔서 요나를 삼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어려울 때 우리들에게도 물고기를 준비해 주십니다.
어린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엄마의 품이듯이 우리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되는 물고기를 준비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고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죽는 것입니다.
이제 2;10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면서 요나를 토해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물고기에게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귀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발람선지지가 모압왕 발락을 만나러 갈 때 하나님은 나귀에게 말씀합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이야기하시는 분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시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놓아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요나를 토해내라고 하시니까 지체하지 않고 요나를 토해냅니다.
간혹 바다에 고래들이 토해낸 배설물이 있다고 합니다.
그 토해낸 배설물을 건지면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다고 합니다.
그 토해낸 배설물이 보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내는데 지중해 어느 지역 해안가에 토해내었을 것입니다.
물고기에게 말씀하셔서 요나를 토해내게 하신 하나님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게 붙들어주십니다.
향유고래에게 잡혀 먹혔다가 살아난 바틀리처럼 강력한 소화액, 위산 때문에 몸에 있는 모든 털은 떨어지게 마련인데 요나는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7배나 되는 무서운 불속에 던져져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요나를 지켜줍니다.
이처럼 요나가 억지로 하는 감사에도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줍니다.
하지 싶지 않은 감사지만 억지로라도, 어거지로라도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온갖 저주와 재앙의 끈을 끊어버립니다.
감사드림으로 모든 저주, 재앙의 끈을 끊어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감사드려야 합니다.
반드시 기억합시다.
감사는 저주, 재앙의 줄을 끊어버립니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를 찾아가신 하나님은 요나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요나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을까요.
한 번 찾아볼까요?
요나는 물고기의 위액, 소화액, 위산에서도 녹아버리지 않고 살아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감사의 기도와 찬송을 드림으로 지옥이 변하여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함으로 물고기의 입이 열린다. 곧 지옥문, 죽음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부활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명이 회복됩니다.
요나는 아무리 하나님이 안 계시는 곳으로 도망치려고 해도 하나님은 결국은 니느웨 가까이로 데려다 놓으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요나는 도무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감사하게 하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여건이 많습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원망, 불평, 짜증을 낼 수밖에 여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몹쓸 질병에 걸려 건강하지도 않습니다.
질병에 걸려도 돈만 있으면 최고 좋은 병원에 가서 가장 훌륭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돈이 없으니까 가까운 의원에도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부흥하지 않고 월세, 공과금도 제대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니까 아이들 교육비, 도서비도 제대로 내주지 못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돈만 달라고 합니다.
없는 것, 모자란 것들 투성이입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원망, 불평, 온갖 짜증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위대하신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해 가십니다.
우리들이 어디를 봐도, 누구를 봐도 감사하지 못하지만 그럴지라도 억지로라도 어거지로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이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여건, 환경, 처지일지라도 감사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데도 마음과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서 감사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의 마음은 대견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해 주십니다.
감사할 수 있는 여건들도 마련해 주십니다.
감사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십니다.
감사할 수 있는 은혜도 주십니다.
어느 날엔가 감사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도 깜짝 놀라게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믿음이 자라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 대견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이적을 만들어냅니다.
감사는 자신의 신앙의 수준을 성장시키고 성숙시켜갑니다.
감사하지 못할 때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감사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범사는 기쁘고 좋을 때도 있지만 슬프고 고통스럽고 실패하고 낙심할 때도 다 포함됩니다.
그러니 앉으나 서나 누워있으나 언제든지 입술만 열면 감사하는 소리가 불쑥불쑥 띄어 나와야 합니다.
성도들이 온갖 어려움 중에서도, 잘 풀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 감사를 받으시고 영광을 얻으십니다.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 삼으셨음에 뿌듯한 마음을 가지시며 필연코 성도들에게 축복하고야 말리라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할 상황인데도 감사하게 되면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자유스러워집니다. 미음,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한결 여유로워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과 삶이 귀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감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감사드리는 삶은 어렵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생각을 넉넉하게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드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와 좌절 중에도, 주변에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너그럽고 넉넉하게 가지면 주변 사람들이 우리들 안에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 부러움,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이 있음을 증거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들도 우리의 것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감사할 때 이미 주어진 축복이 우리들 자신을 향한 축복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우리들의 입술을 통해서 전도가 됩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절대로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전도할 수 있지만 능력으로 행하는 전도는 될 수 없습니다.
전도는 전도자가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사는가에 따라서 전도할 수도 있고, 전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도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우리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드리며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때 전도가 됩니다.
현대사회의 전도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전도는 관계전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으로 감사드리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입니다.
감사하지 못할 상황 속에서 감사하는 것이 바로 전도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감사드리며 전도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에 더할 수 없는 축복의 그릇을 채워 가십니다.
온 세상이 마치 자신의 세상인 것처럼 여겨지고 마음껏 즐기면서 살게 됩니다.
월드컵 축구선수들이 축구를 즐기면서 하듯이 주님의 복음으로 세상을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해집니다.
누구 앞에서도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도함으로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을 생각하면 행복의 웃음이 저절로 솟아납니다.
감사하지 못할 때에도 감사함으로 전도할 때 우리들은 축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찾아낸 감사의 조건으로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가상하게 여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산성교회 성도님들은 감사를 입에 달고 삽시다.
감사의 입에 달고 살면 그것이 바로 전도의 메시지가 됩니다.
그 감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도구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모두가 복의 진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모든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들도 감사로 전도하여 축복의 주인공, 축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가 되시는 산성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