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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면 살리라! (암 5:1-15)
2000년 8월에, 러시아의 초대형 원자력 잠수함 쿠르스크(Kursk)호가 북해에서 침몰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잠수함을 인양한 후에, 그 사고 직후 일단의 생존자들이 잠수함의 최후미 격실에서 며칠 동안 생존하고 있다가 구조 작업의 지연으로 결국 사망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었던 콜레스니코브(Kolesnikov)라는 장교의 윗주머니 속에서 이런 메모가 발견되었습니다, ‘13시 15분, 갑작스런 비상사태로 인해 제6, 제7, 그리고 제8 격실의 생존 승무원 전원을 제9 격실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지금 이 곳에는 총 23명이 모여 있다. 수면으로 탈출할 길은 없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수심 불과 100미터, 그들이 타고 있던 잠수함의 길이 150미터보다도 더 짧은 거리에 그들의 생명을 살려 줄 수면이 있었지만, 그곳으로 스스로 탈출해 나갈 길이 전무했던 것입니다.
타임(Time)지 기사에서는 사고 직후 첫 일이 분 사이에 죽었던 수병들을 가리켜 ‘더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잠수함 후미에 있던 바람에 초기 폭발의 피해를 피하고 그처럼 제일 끝 격실로 탈출했던 이십 삼 명의 생존자들은 오히려 질식과 추위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공포와 고통의 며칠 동안 그 이십 삼 명의 수병들의 머리 속을 온통 채우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어떻게 살 길이 없을까?’라는 이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만 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반갑고 귀중한 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바로 그런 길이 나타납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북조 이스라엘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임박했음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모스 5장 1절로 3절에서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여기 ‘애가’라고 번역된 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하여 부르는 조가’를 뜻합니다. 아모스가 판단하기에 북조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미래가 절망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 그 전성기에는 아무 외세도 감히 범하지 못했던 그 이스라엘이, 스스로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엎드러’지며 그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베풀어 줄 ‘일으킬 자가 없는’ 때가 임박했던 것입니다. ‘천 명이 싸우러 나간 성읍에는 백 명만 살아남고, 백 명이 싸우러 나간 성읍에는 열 명만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애가 그대로, 이스라엘은 그저 죽고 죽고 또 죽는 파멸의 길로만 치닫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날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무서운 심판, 그 완전한 심판이 온 북조 이스라엘을 덮쳐 오는 날에도 놀랍게도 거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구원의 길은 아모스가 찾아내거나 뚫어 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외로 그 구원의 길은 바로 그런 대심판을 내리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열 명 중에 한 명이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던 하나님 편에서 바로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길, 그 솟아날 구멍, 그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가운데에서도 분명히 열려 있던 ‘구원의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습니까? 틀림없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 날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지옥의 영벌에 처하실 그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서도 ‘살 수 있는 길’이 과연 어떤 것입니까?
1. 살 수 있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5장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기 이전에 제일 첫마디에서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먼저 구원의 길부터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분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까지 구원해 주는 기적적인 살 길이 틀림없이 있다고 처음부터 확고부동하게 보장해 주시면서 경고의 말씀을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벧엘’과 ‘길갈’은 앞장에서 보았듯이 북조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 중심지였습니다. ‘브엘세바’는 남조 유다에 속한 성읍인데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서 역시 유서 깊은 곳이었지만, 이 당시에는 벧엘과 길갈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지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 아닌 우상을 하나님으로 혼동하지 말아야 함이 필수적입니다.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가 결코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그 곳들에는 오직 우상신들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성읍들은 오직 폐허의 장망성이 될 뿐이었고 그 곳을 찾는 자들은 포로로 잡혀갈 운명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요셉의 집’ 즉 북조 이스라엘을 온통 멸망시킬 심판의 불을 내릴 때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벧엘의 우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해 주는 데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아무 종교를 믿어도 결국 꼭 같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지, 여기 여호와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말씀 속에서 지극히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어서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고 했습니다.
‘인진(사철쑥)’은 일종의 독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 떠난 북조 이스라엘은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는’ 즉 이제 법으로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사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나 무신론의 독재자 정권이 그들의 법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죽이고 있는지는 오늘의 이슬람 국가들이나 북한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묘성’은 플레이아데스 성단(황소자리의 산개 성단)을 가리키는 말이고 ‘삼성’은 ‘오리온 자리’의 유명한 ‘삼태성’을 뜻하는 것인데, 이들은 예로부터 밤하늘 별자리의 꽃이라 불리었습니다. 우주를 아름답게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 자연 현상을 마음대로 섭리하시는 창조주만이 진짜 하나님이 되실 수 있고, 그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밖에 없습니다. 즉 아무나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가 있으신 단 한 분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신 까닭에 세상에서 아무리 제 잘난 ‘강한 자’라 해도 그 전능을 가지고 한 순간에 ‘패망’시키는 심판을 지극히 간단하게 이루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 추상적인 신이 아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이 진짜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잘못했을 때에는 일단 찾아 가서 뵙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부모 앞에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얼굴도 내 보이지 않고 그저 전화 한통으로 때우려 한다면 그 얼마나 무례한 자식입니까? 아니 용서를 비는 말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그냥 제 혼자 속으로 ‘내가 사실 죄송해 하고 있는 줄은 느끼고 계실 터이니 알아서 그냥 용서해 주시겠지.’라는 식으로 제멋대로 처리해 버린다면 그 얼마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정말 살 수 있는 사람, 마지막 심판 날에도 하나님의 진노와 벌을 피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즉시 하나님을 찾아뵙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일단 주일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으면서 자기 양심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 없이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 얼마나 목이 곧은 자세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 바로 그 자신의 입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회개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용서 구하러 간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옆자리의 아내나 자식이, 혹은 친구가 대신 사과한다면, 듣는 사람 쪽에서 시원하게 용서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겠습니까? 아니 그런 식으로 사과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큰 무례이며 죄를 더하는 행위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결코 목사가 여러분 대신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 줄 수 없습니다. 예수 잘 믿는 남편이나 아내가, 교회 장로인 아버지나 권사인 어머니라 해도 내 대신 회개 기도를 드려 줄 수는 없습니다. 고백성사만 하면 신부가 대신 용서를 구해 주고 교황이 사죄를 선언해 준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신성 모독인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정말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본인이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고 자기 입으로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이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 한 마디를 평생토록 자기 입으로 진심으로 기도해 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온 세상을 불로 완전하게 멸하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참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우상 신을 찾아다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열려 있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단체로는 만난 것 같아도 개인적으로는 사실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얼굴은 내밀었던 것 같은데 제 입으로 용서 구하는 회개 기도 한 마디 제대로 못해 본 사람에게는 결코 열려 있지 않는 길인 것입니다. ‘살 수 있는 길’, 이단 종교의 헛된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으로 장차 전 세계와 인류를 심판하실 이 진짜 하나님 여호와를 찾아뵙고 그 앞에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이 귀중한 구원의 길을 찾아내고 똑바로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모스 5장 10절 이하 13절의 말씀에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향하여 가파른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을 때 뚜렷이 나타난 증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문’은 당시 사회에서 사법, 행정, 여론의 중심지였습니다. 선지자의 설교는 이처럼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부에서 선포되어지고 작동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설교란 것이 주일날 강단에서 들리고 교회당 안에서만 잠시 맴돌다가 사라지는 소리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말씀은 반드시 받은 자의 심령에 녹음되어져서, 가정으로, 직장으로, 학교로 전달되어짐으로써, 각 신자 생활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또한 이 세상 사회의 중심가에서 선포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그저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듣는 동화,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상론, 혹은 인생의 참고 자료 정도로만 여기는 것은 바로 그 시대가 실로 ‘악한 때’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북조 이스라엘에서는 그처럼 ‘책망하는 자’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경고하는 선지자가 오히려 세상 여론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었습니다. ‘정직히 말하는 자’ 곧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해야만 살 수 있다고 바로 가르치는 선지자가 오히려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도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단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회가 되면, 그 사회는 그 속한 구성원을 ‘밟고 학대하는’, 즉 스스로 자해하고 파괴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를 싫어하는 사회에서는 ‘의인을 학대하는’ 일과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 등, 사회적 부조리가 동시에 나타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지혜자가 잠잠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어 감으로써 거기에 속한 백성들 전체가 패망으로 빠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유일한 ‘살 수 있는 길’을 선포하던 선지자가 철저히 미움을 받고 그 입을 봉쇄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유명한 언론인이 인터뷰를 하면서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를 가리켜 “지식인의 말과 글이 전혀 통하지 않는 ‘폭민의 시대’이다.”라고 개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뭐 누가 좀 옳은 말 한 마디 하면 그 말에 대해서 반대를 하더라도 무슨 사리에 맞는 논리를 가지고 나와야 할 터인데, 그런 민주적인 토론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즉각 사방팔방에서 위협과 폭력이 그 옳은 말하는 사람에게 날아드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원래 민주주의라는 것은 피차 조리 있는 공론의 과정을 거친다 해도, 대중의 어리석음이 다수의 표를 통하여 득세할 수 있는 소위 중우 정치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는 이제 그 ‘중우’의 차원에서도 한참 더 밑으로 내려가서 ‘폭민’의 시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반미 운동이 한참 드셀 무렵에,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람들과 매일 만나고 있던 저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불과 오십 년 전에 자기 나라 청년들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기까지 하면서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미국 사람들이, 혹 대한민국 사람 전체가 그렇게 반미 사상에 빠져 있는 줄로 오해할까 싶어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육이오 참전 용사 협회’에 속한 미국 할아버지들이 자동차 뒤에다가 ‘한국 전쟁 참전 용사, 잊혀진 전쟁 (Korean War Veterans, the forgotten war)’이라고 인쇄된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그들의 고귀한 희생과 공로가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는데, 그들의 피로 얼룩진 도움을 직접 받았던 당사자인 대한민국에서 그런 반미 데모가 연일 벌어지고 있으니, 그 노병들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저 혼자서라도 그 분들에게 대한민국 사람들이 결코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서 자동차 뒤에 붙이는 범퍼 스티커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한국 전쟁 참전 용사 여러분, 감사합니다. 결코 잊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Korean War Veterans, Thank You. Never forgotten, never will be.)’라는 내용의 스티커였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 스티커를 읽고 제게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미국 사람들이 몇 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제 동생 석기신 목사가 한국에서 고려신학교 한 학기 사역을 마치고 방학을 맞이하여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공항에 마중 나갔었는데, 제 동생이 제 차에 붙어 있는 그 스티커를 보더니 하는 말이, ‘이런 것 우리나라에 가서 차에 붙이고 다니면 큰일 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잘 알아. 누군가가 내 자동차를 뒤집어 놓겠지.’라고 했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그 정도면 다행이고 몰매 맞아 죽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인간들이 우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그렇게 ‘말도 글도 안 통하는 폭민’들이 설치는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까? 국회가 무슨 결정을 내리면 의례히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는 법인데, 그런 것을 두고 ‘피눈물로 악랄하게 되받아내 완전히 깨끗한 판을 만들자.’라고, 아무리 보아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구호에서나 등장하는 지극히 저질적이고도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말로 대중을 선동한다면, 이제 이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아예 포기하고 무슨 내전이라도 하자는 말입니까? 우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을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룩한 것이, 김정일이 은근히 노리고 있는, 아니 지금도 남한의 친공분자들에게 공공연하게 지시하고 있는 ‘노동자 무력 혁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했던 일입니까? 저는 목사로서 반공 문제는 결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라고 확신합니다. 공산주의 자체가 유물론적 무신론에서 나왔고 그 때문에 육이오 사변 때 공산군이 기독신자들을 죽였던 것이고 거기에다가 김정일 우상화까지 가미되었으니, 이것은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적그리스도 세력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보아도 반공은 곧 우리 기독신자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요 당연히 목사가 강단에서 외쳐야 할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목사조차 ‘반공’이란 말을 마음대로 못하는 ‘폭민의 시대’, 문자 그대로 ‘악한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설교하는 목사를 두고 어떤 장로라는 사람이 ‘목사는 그런 말로 사기 치지 마라.’하고 매도하는, 실로 그지없이 ‘악한 때’의 한 가운데를 바로 우리 조국과 민족이 지금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목사가 ‘미움’을 받고 지혜로운 사람이 ‘잠잠히’ 있어야 몰매 맞아 죽지 않을 수 있는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성문에서 크게 선포’될 수 없는 때가 되면, 이미 그 성읍과 그 나라의 장래는 끝장나고 맙니다. ‘선지자의 입이 막히게’ 되는 것은 곧바로 그 사회의 모든 ‘의인들이 학대당하고 궁핍한 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회악과 직결된다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 버리는 개인과 사회는, 곧 그들이 살 수 있는 길, 구원의 길, 유일한 탈출구를 스스로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적지에 떨어진 조종사는 오직 무전기를 통해서 아군과 연락을 취할 수 있어야 만이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인가 유고 사태 때 추락한 미군 조종사 역시 무선 연락을 통해서 그 약속한 지점에 약속한 시간에 도착함으로써 구조 헬기를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선포하는 선지자의 입을 봉쇄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지혜자의 소리로부터 귀를 돌려 버리는 것은, 바로 구조의 정보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을 스스로 꺼버리는 것이나 매 한 가지인 것입니다. 시대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성문에서 혼란과 공포가 만연할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해 주시는 생명의 말씀, 구원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모스 5장 14절과 15절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삶은 곧 하나님을 찾아 회개하며 그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 주시는 구원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악을 사랑하는’ 삶은 끝까지 우상을 따라다니면서 참된 선지자의 말씀은 무시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살기 위하여’서라면, 정말 살기 원한다면 그 사람이 가야 할 길은 물론 오직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는’ 선택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반대편 선택은 곧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른 선택을 내린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자를 가리켜 ‘요셉의 남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남은 자’ 즉 최후의 생존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면적인 심판, 전 우주와 모든 인류를 하나도 남김없이 심판하실 그 날에도 반드시 구조 받게 될 소수의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처럼 구원받는 소수에 들어가게 되는 특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침몰된 러시아 잠수함의 승무원들에게는 스스로 수면으로 탈출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외부에서 특수 구명 잠수함을 동원해서 살 길을 열어 주어야 구원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은 자국 수병들의 생사에 대한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별장에서 자기 휴가만 즐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무정한 주권자가 아니라, 실로 죄인까지 사랑해 주시는 ‘긍휼의 구원주’이십니다. 죄로 인하여 완전히 타락한 우리들 역시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나 방도가 전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틀림없이 죽게 된 이 죄인들을 위하여 완벽한 구원 계획과 최상의 연락 채널을 당신 편에서 준비해 두시고서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그 살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비하신 구조 신호를 받고, 그 하나님을 찾아서 회개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 길을 찾는, 그래서 그 구원의 감격에 넘쳐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금세에서 함께, 내세에서 영원히 찬송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