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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에서의 기독교
1. 프롤로그(prologue)
지난 5월 28일 폐막된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연배우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밀양’의 흥행속도에
불이 붙고 있다. 6월 2일 현재 전국 303개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밀양’은 개봉 2주차를 지나면서 오히려 상영관을
40개나 더 늘리는 등 기염을 토하고 있다.
또 전국 스크린의 절반에 가까운 상영관을 점령하다시피 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 3편’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밀양’은 주요 영화 예매 사이트 집계 예매율도 꾸준히 올라가고 있어서 장기상영에 돌입할 것이 예측되고
있다.
이는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이라는 프리미엄뿐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독립영화전문
온라인매체 인디와이어가 ‘밀양’을 ‘올해 칸 영화제에서 꼭 봐야 할 10편의 외국어 영화’로 선정하였다는 보도와 함께
영화 자체에 대한 관객들의 호평과 입소문 등에 의해 많은 관객들이 찾아들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관객들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기꺼이 촬영에 협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밀양’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교묘하게 왜곡된 반성경적인 것이어서
이 영화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더욱더 진리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밀양’의 줄거리를 먼저 소개한 후 이 영화 속에서 뒤틀려 나타나는 몇 가지 중요한 영적인
주제들을 점검하면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지혜를 구해보고자 한다(딤후3:1-5).
2. 시놉시스(synopsis)
구름 몇 점이 한가로이 떠 있는 하늘로부터 영화는 시작이 된다. 집에서 극심히 반대하던 결혼을 했던 신애(전도연 분)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교통사고로 죽어버리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아들 준과 함께 내려온다.
그런데 밀양 외곽의 낯선 도로에서 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정비사인 종찬(송강호 분)의 도움을 받게 된다.
또 종찬의 소개로 피아노 학원과 안채가 붙어 있는 작은 집을 구해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아들 준을 유치원에 보내면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꿈꿔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곁에는 언제부터인지 종찬이 붙어 다닌다. 이웃들은 남편이 죽었는데 남편 고향으로 아들을
데리고 왔다고 이상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아들과 함께 있는 그녀는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다 그녀의 아들은 유치원 원장에 의해 유괴되어 살해된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신애는 가슴에서 터지는
극심한 고통에서 괴로워하다 교회에서 하나님(神)을 만나 그 아픔을 극복하고 신실한 신자가 된다.
그 신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러 교도소로 면회를 갔는데 그 살인자는 편안한 얼굴로
하나님(神)이 이미 자신을 용서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보다 먼저 그 살인자를 용서한
하나님(神)에 대한 분노로 신애는 하나님(神)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장로를 유혹하기도 하고, 도둑질을 한 CD로
야외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고, 또 그녀를 위해 철야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고는 병원으로 실려 간다.
퇴원 후 머리를 다듬고 싶어 종찬과 함께 들어갔던 미용실에서 그녀는 범인의 딸과 마주친다. 소년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보조로 일하고 있는 그 아이의 손에 맡겨져 머리를 자르던 중 그녀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린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위를 집어 들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그녀 옆에서 종찬은 묵묵히 거울을 받쳐 들어준다.
그 잘려진 머리카락들은 바람에 날려 볕이 드는 마당 구석으로 향한다.
3. 아이의 죽음(death of children)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플롯은 신애의 아들 준의 죽음이다. 그런데 만약 죽은 아들 준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정확히 알았더라면 신애는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인인 약사는 아들이 유괴되어 죽은 상황을 하나님 입장에서 설명해 달라는 신애의 요청을 받자
“모든 일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 ~ 저 햇살 한 줌에도 주님의 뜻이 있다.”고만 말한다. 아마도 관객들에게는 ‘주님의 뜻’이
‘인샬라’와 혼동되었을 터인데 어찌되었든 신애에게 정확한 성경적 진리가 선포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의 죽음
이후 안타까운 몸부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뜻하지 않게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신애와 같은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는 어떠한 말을 해주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대로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죽은 아이가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 정확히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롬12:15; 고전12:26; 요8:32).
먼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어린아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그들이 어린아이들을 그분께 데려와 그분께서 그들을 쓰다듬게 하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들을 데려온 자들을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며 팔로 그들을 안고 그들 에게 안수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시니라.”(막10:13-16, 이하 흠정역)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느니라. ~ 이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18:1-14)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러한 구절들은 단지 어린이처럼 순수함을 갖고 살라는 비유만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어린이는 그 상태로서는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4. 선악의 구별(knowing good and evil)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어린이와 어른의 기준이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몇 살까지는 죽으면
천국에 가고 몇 살 이후에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점에 대해서도 아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헬라어 상으로 볼 때 성경에서 어린아이인 ‘파이디온’이
자라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때를 ‘파이다리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파이디온’이
‘파이다리온’으로 변하는 때는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이다.
신구약 여러 곳에서 이 사실들을 확인해 볼 수 있지만 신명기 1장과 이사야 7장 정도만 살펴보더라도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주께서 너희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분명히 이 악한 세대의 이 사람들 중에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그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다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주를 따랐은즉
그는 그 땅을 볼 것이요, 그의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리라, 하시고 주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네 앞에 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거기에 들어가리니 그의 용기를
북돋으라. 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을 상속하게 하리라. 또한 너희가 탈취물이 되리라 하던 너희의 어린것들과
그 날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은 거기에 들어가리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줄 것이요,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리라.”(신1:34-39)
신명기 1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광야에서 불신의 죄를 지은 것을 기억나게 한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지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죄를 범했을 때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어른들은 모두 요르단 강 저 편에서 죽어 그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선과 악을 알지 못하던 아이들은 그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민14:29-31).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책임질 수 있는 나이를 알고 계셨고 또한 어린아이들은 그 죄악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버터와 꿀을 먹겠고 이로써 악을 거절하며 선을 택할 줄 알리니 이 아이가 악을 거절하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몹시 싫어하는 그 땅이 자기의 두 왕에게 버림을 받으리라.”(사7:14-16)
그렇다. 심지어 주님이신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성숙한 상태로
자라나셔야만 했다. 물론 그분께서 선을 택하시고 악을 거부하실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선 그렇게 될 때까지
자라나셔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전혀 죄를 지은 바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나이까지 자라나셨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것이다.
5. 천국(Heaven)
구체적으로 욥과 다윗의 경우를 통해 어린이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부터 죽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가 배에서 나올 때에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들이 먼저 가서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젖가슴이 먼저 가서 내가 빨게 하였던가? 그리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제는 내가 가만히 누워 평온히 지내고 잠들어 안식하였을 것이요, 자기를 위해 황폐한 거처를 세운 땅의 왕들과
조언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혹은 금을 가진 통치자들 곧 은으로 자기 집을 가득히 채운 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은 남모르게 유산된 자같이 내가 존재하지도 아니하였겠고 전혀 빛을 보지 못한 어린아기들 같았으리라.
거기서는 사악한 자가 소란을 그치고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안식을 얻으며”(욥3:11-17)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욥은 자신이 태아나 신생아나 유아의 상태로 죽었더라면 자신의 혼(soul)이 ‘거기’에
가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표현된 상황으로 볼 때 예수님 부활 이전이므로 스올(Sheol), 그 중에서도
낙원(Paradise)임을 확실히 알 수가 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주께 죄를 지었노라, 하거늘 ~ 그러나 이 행동으로 인하여 왕이 주의 원수들에게
신성 모독의 큰 기회를 주었으니 왕에게 태어난 아이 또한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니라. ~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주께서 치시매 아이가 심히 앓더라. 그러므로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청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더니 ~ 빵도 먹지 아니하더라. 일곱째 날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 그들이 이르되, 죽었나이다, 하매 이에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주의 집에
들어가 경배하고 ~ 그 앞에 빵을 차려 놓으니 그가 먹으므로 이에 그의 신하들이 ~ 왕께서 일어나서 빵을 드시니
도대체 왕께서 행하신 이 일이 무엇이니이까? 하매 그가 이르되 ~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I shall go to him)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13-23)
다윗은 자기 아이가 앓다가 죽었을 때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들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의
일반적인 행태와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이미 천국에 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현재 천국에 있을 것을 의심하는 크리스천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 난 지 일주일 만에 죽은 다윗의 아이가 어디에 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명확해진다.
다윗과 그의 아이는 분명 같은 장소에 있을 것이라고 성령님께서는 다윗의 입을 통해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신애의 아들 준과 같은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질 수 있는 신애와 같은 어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 개인의 인격적인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여야만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마1:21; 요1:12).
6. 치유(healing)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고 나온 신애는 괴로움에 구토를 연발하다가 눈을 치켜뜨면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치유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발견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손들고 노래하는 사람들,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 여기저기서
흑흑대는 분위기 속에서 결국 오열하고 만다.
처참하게 울부짖는 신애의 머리 위에 목사의 손이 얹어지고 나자 신애의 흐느낌이 잦아든다. 신애에게 하나님(神)이
찾아와 그녀를 어루만져 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신애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초연해하며 평안과 기쁨에 들떠 변화된
자신을 간증한다.
그렇다면 정녕 신애의 상처받은 영혼은 하나님의 손길로 치유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신애는 다만 위장된 치유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었다(마7:16; 12:33;
약3:12). 소위 오늘날 기독교계 내에서 행해지는 영적치유의 메커니즘이 상당부분 인본주의에 근거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신애가 진정한 치유를 얻으려면 먼저 진정한 치유자(Wonderful Counsellor)를 만나야 했었다
(사9:6).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권이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이(Wonderful), 계획자(Counsellor),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화의 통치자라 할 것이기
때문이라.”(사9:6)
그러나 신애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틀 속에 빠져서 우리의 진정한 치유자시요, 생명의 주인이시요,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출15:26; 사53:4-9; 벧전2:24; 요14:6; 행4:12; 롬3:10,23; 5:12; 6:23상; 5:8; 6:23하;
10:9,10,13).
이것은 비단 신애에게만 국한된 상황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집회, 치유집회 등을 쫓아다니며 나름대로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애와 같이 위장된 치유를 경험하고 있다.
7. 신앙의 심리학화(psychologizing of the faith)
그렇다면 인본주의 심리학의 갖가지 테크닉으로 인해 교회 내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기고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이다(롬3:23; 5:12; 6:23상). 그리고 이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14:6; 행4:12; 롬5:8; 6:23하; 10:9,10,13).
그러나 오늘날 세련되고 우아한 많은 교회 내에서 기능결손(dysfunctionalism), 피해자화(victimization), 병이나
장애(disorder) 등의 개념이 죄(sin)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는 “모든 사람들의 기능이 결손 되어 그 기능이 ‘사람들이 바라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니”로
대치되고 있다. 따라서 이의 해결책 또한 인본주의 방법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눅9:23).
그러나 신앙이 심리학화되어 가고 있는 교회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자기를 귀하게 여기라고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긍지’(self-esteem)가 강조되다 보니 요즈음 교회 안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셋째,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로 족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족해야 한다(골2:9,10; 3:4,11; 빌1:21; 딤후3:16,17;
요8:31,32; 17:17).
그러나 자기 개선 테크닉, 자기 계발 코스, 자기 활성화 원리 등이 그리스도로 족함을 무시하고 있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다’라는 그럴듯한 인본주의 슬로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있다.
넷째, 예수님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7:3). 그래서 바울이나 베드로나 전 인생에 걸쳐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였다(빌3:8-10;
벧후1:2,3).
그러나 신앙이 급속도로 심리학화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알라’ 대신 갖가지 새로운 목회 도구들을 통해
‘네 자신을 알라’라는 외침을 더 많이 듣게 된다(호6:3).
8. 자기 사랑(lovers of their own selves)
다섯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 명령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마22:37,38).
그리고 둘째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마22:39).
“그때에 그 중의 한 율법사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질문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율법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은즉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마22:35-40)
그러나 오늘날의 심리학화된 많은 교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대신에
‘자기 사랑’을 힘써 선포하고 있다(딤후3:1,2).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아주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자기 사랑의 신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사기꾼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을 읽고나서 다음과 같은 교묘한 해석을 붙인다. “우리가 그동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었던 까닭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 사랑하듯 할 수 있겠는가? 우선 제 몸 사랑하기를
바로 하고 나서야 이웃 사랑도, 또 나아가 하나님 사랑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긍을 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생살이에서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고 또 무거운 짐에 억눌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을
가득 메운 정서적인 문제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여기며 그 다음 단계의 논리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즉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려면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여 전문가의
특별 지도를 받거나 특별한 프로그램 등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사랑 예찬론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인용한 성경구절을 숙고해 볼 때 두 가지 점에서 반성경적인
속임수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첫째는 본문 안에 나오는 두 명령에다 자신들이 만든 명령을 추가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는 점이다.
9. 용서(forgiveness)
그래서 심리학화된 신앙을 통해 하나님(神)을 만나 자기 사랑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신애는 그 다음 단계인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곧 아들 준을 죽인 유치원 원장을 용서하기 위해 그를 면회하러 가기로 한다.
그런데 면회실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살인범의 모습은 어린아이를 유괴해 살해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하나님을 만난 내가 당신을 용서하기 위해 왔다.’는 신애의 내면의 목소리는 이내 다음과 같은 살인범의 신앙간증에
묻혀버리고 만다. “나는 이미 주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주머니도 주님의 품에서 지내는 걸 보니
참 다행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기도로 신애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뉘앙스까지 풍기면서 말하는 유괴살인범의 온화한 모습에
신애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용서? 하나님이 벌써 용서했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요?”
영화 ‘밀양’에서 가장 중요한 반전인 이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준이를 살해한 유치원 원장이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하여 크리스천이 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다. 진정 거듭난 크리스천이라면 자기가 죽인 아이의 엄마
앞에서 그렇게 평안한 얼굴로 당당하게 용서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었을까?
진정 하나님의 긍휼로 죄사함 받은 자라면 준이 엄마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매일매일 눈물로
회개하고 있다고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 용서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 값을 달게 받겠다고 말하며
신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았을까(마5:23,24)?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에 가져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너를 대적하는 일이 있음을 기억하거든 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아울러 중생하지 못하여 진정한 치유를 받지 못한 신애, 그래서 이웃사랑에 실패한 그녀에게도 끊임없이 이웃을
용서해야만 한다는 것과 죄의 용서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진리가 그녀 주변의 크리스천들에 의해 선포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마9:6상; 18:21,22)?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마18:21,22)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진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마9:6상)
10. 구원(salvation)
이창동 감독이 그린 하나님께 용서 받은 살인자는 회개 전과 회개 후가 별 차이 없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른 기독교인들의 모습도 대부분 가식적으로 보이고 있다.
손을 들고 고래고래 ‘주여’를 외치는 모습이나 만트라(mantras)처럼 터져 나오는 목사나 성도의 기도도 그러하지만
특별히 담임 목사를 비롯한 약사부부나 교인 모두가 신애의 슬픔에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있다.
함께 모여 신애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성숙한 크리스천이라면 신애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함께 슬피 울며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했었다(롬12:15; 고전12:26). 그러나 ‘밀양’ 속의 교인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따르라 말할 뿐이었다.
이건 이창동 감독이 철저히 의도한 부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밀양’이 말하는 하나님(神)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밀양’은 성경적 진리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마1:21; 요1:12; 3:16; 14:6; 행4:12; 롬3:10,23;
5:12; 6:23상; 5:8; 6:23하; 10:9,10,13). 신애가 자기 손으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듯이
이 영화는 보편적인 신(神)을 받아들임을 통한 ‘스스로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밀양’(secret sunshine)으로 동일시되는 ‘하나님’이나 ‘교회’가 가해자로 인식되는 반면 고통의 순간마다 신애의
곁에 있어준 보통 사람 종찬이 뿜어내었던 따뜻한 사랑이 진정한 ‘밀양’(secret sunshine)으로, 곧 구원의 메시지로
관객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11. 다른 복음(another gospel)
즉 기독교의 하나님이 하지 못하는 사랑을 오히려 속물인 종찬과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다는 ‘복음’이 ‘밀양’(secret
sunshine) 속에 비밀스럽게 녹아 있다.
이것은 이창동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밀양’은 하늘에서 시작되어 우리가 사는 땅 위에서 맺어지는 이야기이며 신에
관한 영화가 아닌 인간에 관한 영화”라고 규정한 사실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gospel)과는 완전히 다른 복음(other gospel)이다(갈1:6-10).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곧바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창3:15).
가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포된 원형복음(protoevangelium) 곧 여자의 씨(the woman's seed)를 구원자로 보내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후에도 계속 대언자들을 통해 선포되었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약속의 말씀은
성취되었다(마5:17).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무죄(無罪)한 피를 흘려 돌아가셨다(마1:21; 27:4; 눅23:33,46; 요19:34; 요일1:7). 그리고 정확히 삼일 만에 예수님께서는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눅24:1-12).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만 있게 되면 누구든지 부활하여 영생의 복을 받게 된다(고전15:12-22). 즉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롬10:9,10).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왜 예수님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한다. 석가나 마호메트나 공자나 하다못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신애나 속물근성으로 살아가는 종찬과 같은 보통 사람들 스스로도 구원자가 될 수 있지 않느냐 하며
어느 종교나 신앙에서도 다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즉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진리이지 유일주의나
절대주의는 진리일 수 없다는 사고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교계 내에서도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12. 에필로그(epilogue)
그래서 이를 반영하듯 요즈음 기독교계 내에서도 ‘밀양’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영화 속에서 기독교의 현실적이고
진솔한 모습을 다분히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가 대세인 가운데 여러 교회에서 ‘밀양’을 설교의
주제로 다루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 소모임 등에서 나눔의 소재로도 활용한다는 보도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할 점은 ‘밀양’에서 기독교 내부고발자의 시선을 통한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표와 결과는 오래전 뱀이 에덴동산에서 행했던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한다는 사실이다(창3:1-5).
그래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이이건 간에 성경적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밀양’의 현주소이다.
그렇다. ‘밀양’(secret sunshine)에서 비치는 빛은 ‘참 빛’(the true Light, 요1:9; 요일2:8)이 아니라 루시퍼(Lucifer, helel,
light bringer, 사14:12)의 빛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an angel of light)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11:14,15)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제 ‘참 빛’(the true Light)이신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요8:12)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 출처 : 차한 칼럼에서
http://cafe.daum.net/ontttc/22VK/245
첫댓글 회개와 용서... 그런데 내가 용서를 하는 것보다도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다른 글 무디 목사님의 회개와 변상도 이런 비슷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너무나 많은 죄를 짓는데, 인간적인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용기있는 일일까요?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모습들이 없으니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밀양을 보면서 혼자 답답해 하면서 .. 답을 찾고 있었는데.. 조금은 알듯 합니다.. 마지막 신애의 행동의 답이 자신구원이었군요.. 마지막 엔딩 부분에 대해서 많이 힘들어 했었거든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