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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낸 위대한 하나님
1964년6월29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
이곳에서 인용된 성경은 GOOD TV 다번역 영어 킹 제임스(흠정) 역이며
메시지 책자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편집하였음을 미리 알립니다.
고린도후서3:6.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이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 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장차 없어질 것의 종말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 날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빌립보서2: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은 다양한 여러 모습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지시하신 성막이 지워졌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오래된 해달 가죽 뒤에 감추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달가죽 뒤 속죄소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셨습니다.
우리는(솔로몬이 주의 성전을 봉헌했을 때, 어떻게 이 해달가죽 곧 장막이 거기에 매달려있었는가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으로 들어가시고 거기 뒤로 내려오셔서 자신을 바깥세상에 감추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뒤에 계심을 알았습니다.
이교도 세상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그들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거기 계심이 그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속죄소에 계셨는데, 그 사실은 큰 비밀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시대에 그 해달가죽 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바깥에 머무르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있는 것이 죽음입니다.
물론, 그것은 휘장. 곧 낡은 장막이 찢어졌을 때, 갈보리에서 장막이 찢어졌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의 앞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뀌고 있는데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성경 말씀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휘장이 갈보리에서 찢어졌을 때, 그 속죄소는 우리 눈에 환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죠?
그 휘장은 갈보리에서 피를 흘리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 매달린 채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매년 성전을 깨끗케 하고, 속죄소에 뿌리려고, 피를 사용했던 것처럼, 거기에서,
하나님은 그의 번개 같은 능력을 크고 강력하게 내리쳐서 그 오래된 해달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로 찢으셨고,
속죄소는 눈에 환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대신 자신이 몸소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고, 우리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로 그분을 더 잘 알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우리의 친족이 되어서 육체 안에서 표명하셨을 때,
하나님의 진실 된 참 어린 양은, 곧 참 속죄소는, 갈보리에서 우리 눈에 환히 보이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 속죄의 날에 그 속죄소는 온 이스라엘의 눈에 환히 전시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 당시 교회의 조상들의 전통은, 그들의 전통으로, 사람들에게서 그 참된 속죄소를 가렸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서를 알기만 했더라면, 구약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서를 배웠더라면, 그들은 그 속죄소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여기 모세가 말했듯이……이 날까지 그들은 수건(전통=인간의 가르침과 교리들)으로 앞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들의 마음 위에 가려져 있는데도 ; 그들은 그 사실을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과 속죄인 완전한 하나님이었으며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죄를 완전히 없애는 진정한 속죄소 였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회중의 눈에 환히 알아 볼 수 있게 매달린 속죄소로서 왔습니다.
그런데 대중적인 의견에 얽매인 그들은, 자 여러분들이 누구든지 간에 저는 이걸 말하고 싶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교회의 선조들의 전통이 이것들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볼 수 없도록 감추어 왔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예언된 그대로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이후, 교회들이 그들의 전통에 여전히 매달리고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한량없는 기쁨과 평화와 소망들을 교회가 오늘날 갖고 있는 강력한 권세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도록 예정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명백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곧 이 시대의 약속된 말씀을 이 세상에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전통은 막(수건)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사도 시대는 오순절 날에 시작되었고 그것은 베드로가 그 오순절 날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고 말했습니다.
언제 사도시대가 끝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을 부르고 계시다면 사도시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의 전통으로, 전에도 그렇게 했듯이,
오늘날도..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려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운이 솟아 있고,
또 그렇게 열광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집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괴상하고,
이상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 사람들은 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러한 장애를 뛰어 넘어섰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휘장을 넘어서 사람들 앞에서, 표명된 이 시대의 표명된 약속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시대에 약속된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있습니다.
요엘2장28절에서, 하나님은 이 마지막 때에 만민에게 늦은 비를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헬라어에 "하나님이 자신을 비우셨다." 라는 뜻의 “케노스(Kenos)”가 있는데,
우리가 얘기하는 식의 어떤 사람의 내부가 비워진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밖에다 부어 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습을-바꾸셨습니다.
“엔모피(en morphe)” 과거의 하나님에서 현재의 하나님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신을 인자(선지자)에서 오순절 날에는 하나님의 아들(성령)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에는 사람들과 함께하셨는데, 오순절 날을 통해서 사람들 안에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동일한 하나님이 이 위대한 시대를 통하여 그의 사역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하나님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 될 수가 결코 없습니다.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분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도록 그분을 더 가까이에서 더 자세히 느끼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성령으로 여러분 안에 들어와 사시기 위해서 자신의 직분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서에서 낮도 밤도 아닌 한 날이 오리니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리학적으로,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집니다. 그것은 항상 똑같은 태양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동방 사람인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약속된 말씀의 표명으로 나타냈을 때,
우리는 어두운 날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개혁가와 기타 등등의 사람들에게 빛이 넘쳐서 교회가
교파드을 만들고 거기에 연합하고, 조직되어 말씀에 미지근해 져서, 등등 ; 교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워 갈 때에" 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이 틀릴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날에 자신을 부어주신, 즉 케노스(Kenos), 하신 성령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 어두워 갈 때에도 똑같은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시면,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함께 맞춰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위대하고 강한 분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은 예언된 이 위대한 일들을 다시 사람들이 못 보게 하고 있습니다.
불이 내려왔던 산,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모세는 애굽으로 내려가서 교회 장로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의 이름으로 자기를 방문하신
것을 말했습니다. 그 이름은 “나는 옛날에 있었다. 나는 앞으로 있을 것이다.” 가 아니고
“나는 스스로 있다.” 라는 현재 시제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현재 시제입니다.
그것을 히13장8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것은 여전히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 때의 말씀과 이 시대의 경험을 일치시키려는 신도들은 "종교개혁자들도
말씀을 가졌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시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이 왔던 식으로
올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식으로 오리라고 예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오리라고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식으로는 올 수 없습니다 ; 웨슬리의 부흥식으로도 올 수 없습니다 ;
지금은 완전한 회복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최초의, 원 상태의 햇빛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오, 우리가 어떻게 그 문제에 대하여 성경구절을 모을 수 있을까요!
(세계 어느 곳에서 오셨든)신학자 여러분, 여러분은 그것이 사실임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그렇게 유별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그들을 유별난 사람들로 부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소 휘장이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들은 그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서가 틀릴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반론을 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의 백성 안에다 비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가서 이것을 선포한 후에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똑같은 불기둥으로 시내 산 위에 내려와서,
강림하셔서 그 산을 불 가운데 두심으로써 모세의 말씀을 입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누구에게 주셨는지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말씀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가지려고, 모세는 혼자서 산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 십계명은 말씀 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람들에게 온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선지자에게 오고, 모세는 그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말씀이었고, 요한은 선지자였습니다. 반드시 말씀은 항상 선지자에게 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강에 있는 요한에게 오셨습니다. 말씀은 선지자에게 옵니다.
그래서 말씀, 즉 계명이 모세에게 왔고, 모세는 그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나가서 표명되기 전에,
말씀이 완전히 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우뢰와 번개)를 몰라서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가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래 내가 그렇게 하겠노라.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이렇게 나타나지 않으리라. 나는 너희에게 선지자 한 사람을 보내리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연적인 법을 가진(여기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나타내듯이)
모세가 그 자연적인 것으로 그의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면, 영적인 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명되기 전에
얼마나 더 영광스럽고 얼마나 더 감추어져 있겠습니까? 얼마나 더 많이 사람들이……라고 부르겠는가!
모세는 유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성소휘장을 찢고 불기둥으로 들어갔다가 복을 받아 가지고 나온
여러분을 사람들은 얼마나 더 많이 유별난 사람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통은 항상 막(수건)을 쳐서 그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려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뭔가에 눈이 가리어져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광이 있다면, 초자연적인 것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종말이 있는 자연적인 것이 영광이 있었다면, 끝이 없는 이것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아직은 그것은 가리워져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려져 있습니다 ; 그래서 불신자는 그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가리십니다. 전통이 그것을 감추었습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인간적인 가르침과 전통으로 가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것을 가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가리개는 옛날에는 자연적인 가리개였습니다.
그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말해진 말씀을 가진 선지자 곧 예언자, 말해진 말씀을 가지고 온 자에 의하여
입증되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의 뜻을 알지 못 했습니다 ;
그래서 모세가 그 뜻을 쉽게 풀이해 주었습니다. 모세는 "이 계명은 이런 뜻이고, 이것이 그 이유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쉽게 풀이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이 풀이되기 전에는, 그 말씀은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여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나타내어지고 풀이되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가리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위대한 하나님, 즉 말씀은 인간의 육으로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자,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믿는 자에게는 나타났음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보세요. 모세는 혼자 그 불기둥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아무도 모세와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여러분은 오순절 무리와 연합함으로서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아시겠어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한 무리에게 결코 나타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에게 말씀을 나타내십니다. 오늘날도 그런 식으로 하십니다.
"나는 교회에 다녀요. 나는 이 교회에 속해 있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어느 누구라도 모세를 따르고자, 그것을 모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모방하고자 하는 것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기본적인 비교들을 들어 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행동하고자 노력하면서도 다른 생활을 하는 사람 : 술 마실 수 있고 ; 담배 필 수 있고 ;
여자들은 자기네들이 살고 싶은 대로, 세상처럼 살 수 있고 ; 집에 있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세상적인 것들을 보고, 그리고도 여전히 자신들을 오순절 교인이라고 자칭합니다.
그들은 진짜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말씀이 결코 나타내지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나타내지면, 그것은 영광이 있고 여러분들이 그곳에서 행할 때 뭔가가 여러분으로부터
그것을 없애 버립니다. 여러분은 가리개가 됩니다. 그것이 아닌데 모방하려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모세는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 말해진 말씀으로 가리어진 사람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쓰여 진 편지인데, 새로운 편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표명된 편지입니다.
그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만민에게 그의 신을 부어주시고 있다는 이 시대 약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쓰여 진 편지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들입니다.
누군가 일부러 그것을 흉내 내려고 할 때, 그것은 불리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이 현재 여러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 지불하러 오십니다. 그가 우리의 모세인 것처럼- 예수님은 오늘날의 우리 모세입니다.
수건으로 가려진 모세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표명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 육신의 피부 안에 가리어진 예수는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몸 된 지체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 약속을 믿는 사람들 속에 계신 살아있는 성령,
즉 하나님의 아들은, 이 시대의 약속으로 말씀을 나타내시며, 살아있는 말씀을 똑같이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실 것은, 모세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가 아닌 출애굽 하는 사람들에게-
단지 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 일을 하고 그 일을 표명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사도 시대는 사도들이 죽었으므로 사도 시대도 끝났어요.” 라고 말하는 이 땅의 교회들,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만 그 말씀대로는 살지 않고, 흉내만 내려 하는, 감리교도니, 침례교도니, 장로교도니,
순복음 교회, 오순절 교회들에 참여하려는 그들 교인들에게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육체의 막 뒤로부터 나오라는 또 하나의 출애굽을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단체(집단)가 아니라, 여러분의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세의 또 다른 특징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모세가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었습니다.
모세가 그 시대의 입증된 말씀인 즉 십계명을 들고 나왔을 때. 모세는 딴 사람처럼 변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같은 모임을 비웃는 인간의 막 뒤로부터 나올 때, 신의 병 고침이 거침돌이 되어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어." 하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올 때,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변할 것입니다.
거기 인간적인 막, 전통의 막 뒤로부터 나오십시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무슨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전통의 막 뒤로부터 지금 막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주의를 끄는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속해 있었던 그 전통의 막 뒤로부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처음 그랬던 것처럼 교회들의 전통들과 사람들의 가르침과 교리들의 막에 눈이 가리어져 있었다가,
여러분이 그 막 뒤로부터 나올 때, 그때엔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들은 뭔가가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가리어진 말씀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환히 드러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 당시 그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때에 그것은 한 사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저 선지자, 그저 보통사람, 보통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한 인간 안에 계신 하나님, 한 인간 속에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습니다. 한 인간 속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은 인간들 속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온 교회 안에서 자신을 표명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신성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육체에 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세세토록 자신을 가죽으로 덮고 계셨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장막 뒤에 숨겨져 있어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가죽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뒷모습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휘장 뒤에 계셨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의 피부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신 위에 가죽을 덮은 그의 몸인 참 교회 안에서 가리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그리고 지금도, 옛날처럼, 그 가죽 장막은 교회들의 전통과 여전히 부딪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들 안에서 소원을 두고 선한 일을 행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교회 안에서, 가죽 안에서-자신을 가죽으로 덮으시고-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숨기시고, 믿는 자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주십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이 가진 교회의 전통의 막에서 그들이 나올 때-말씀이 나타내어 질것이고, 그때서야 환히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금 신성이 인간의 육신 속에 가리어진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1장이 그렇게 말하고 창세기18장도 역시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사람이셨으며, 아브라함은 그분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송아지 고기와 밀가루로 만든 떡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사라가 그분 뒤 장막 안에서 마음 속으로 웃은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돔의 날과 같이, 인자(선지자)의 임하는 때에도 그러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성이 다시금 인간의 육신 속에 가리어졌습니다.
자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눅17:3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선지자)의 나타나는 날에"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자가 다시 교회에서, 인간들 속에서 나타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자가 계시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그의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들 가운데 약속하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알아봅니다. 구약에서(제가 여기 출애굽기에서 한 구절을 갖고 있는데)
그 오래된 해달 가죽, 그것이 무슨 역할을 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해달 가죽,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가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가죽 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피부 뒤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통은 지금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장막 속에 있습니다.
그 가죽, 그 뒤에, 해달가죽, 우리가 흠모할 아무런 아름다움이 없는 그 가죽의 안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을 때,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흠모할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간에 흠모 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 뒤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음,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술주정뱅이였습니다. 그 사람은 이런 일을 했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이 옛날에 무슨 일을 했는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가죽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습니까? 그 뒤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그 가죽은 사람들을 눈멀게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저 여자는 무엇 무엇을 하곤 했어. 내가 알아."하고 말합니다.
나는 이전의 그 여자를 잘 알아요.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시겠어요?
해달 가죽이었던 그 가죽이,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숨기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죽에 감싸고 있습니다.
한때는 동물의 가죽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싸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피부도 오늘 이 시간 인간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그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은혜가 충만하시며, 사랑이 넘쳐나시는 하나님을 위한 주거 장소를 만들기 위하여, 변화될 수 있습니다.
보세요, 그 오래된 해달가죽, 우리는 그 해달가죽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해달가죽 내부에는 말씀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십계명, 그 두 돌 판은 구약과 신약입니다.
그리고 진설병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궤에는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존전의 영광이 그 안에 충만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씨입니다. 그 씨는- 해가 그것을 쪼이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습니다.
씨가 열매를 맺고, 싹이 나오기 위해서는 해가 씨 위에 쪼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존전의 영광의 빛 속으로 걸어가십시오.
여러분이 행할 때, 그것은 구별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진설병 만나를 줄 것입니다.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먹도록 허락 받은 사람들뿐 입니다.
보세요, 바울은 여기에서 "영광은 영광으로 변한다." 라고 말합니다. 보십니까? 결국 그것은 오는데-
본래의 영광으로 되돌아옵니다. 그것은 마치 나팔꽃의 씨 같습니다. 꽃씨, 그것은 땅속으로 떨어집니다.
옥수수 씨가 땅에 떨어집니다. 무엇이 첫 번째 나옵니까? 그것은 올라오는데 작은 싹(떡잎)입니다.
그 다음에 그 싹은 술이 됩니다. 그 다음 술은 본래의 알곡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교회가 지나온 과정과 꼭 같습니다.
그것은 루터, 웨슬리로부터 와서 이제는 본래의 알곡, 본래의 영광, 태초에 있었던 영광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동쪽에서 떠올랐던 태양이 서쪽에서 똑같은 일을 표명하고 있는 똑같은 태양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카톨릭에서 루터로, 루터에서 웨슬리로, 웨슬리에서 오순절로,
계속해서 변했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하면서 감추어진 만나를 그 시대 시대마다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다 익어서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 하나님의 똑같은 사역,
똑같은 예수님, 똑같은 능력, 똑같은 성령을 맞이합니다.
오순절 날에 내려오셨던 동일한 분은 오늘날 표명되어지는 동일한 성령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성령의 침례를 받는 본래의 씨로 다시금, 동일한 이적, 동일한 기사, 동일한 침례로,
동일한 식으로 행하는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 동일한 능력, 동일한 감흥을 받는 본래의 씨로 돌아갑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돌아갑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곳에서 그의 영광스런 몸 같은 한 몸 안으로 이 영광으로 부터
변화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변하였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갈보리 이후로 이방인 교회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도록 청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12장에서 "우리는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고 말씀하십니다.
한 성령으로, 한 물로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가 되었습니다.
한 성령으로 우리는 모두 침례를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이제,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분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생각하면서, 현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는 눈멀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과거에 행하셨던 일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 속에 있으며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그것은 아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2장에서 그분과 동일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 받음으로”그들과 똑같은 것으로 일체가 됩니다.
그 전의 그의 모두와, 지금의 그의 모두, 과거의 그의 모두와 현재의 그의 모두가 현재의 우리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말한 살아 있는 편지들인, 남자 여자 즉 인간의 형상 속에 가려진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의 엔모피(en morphe)속에서 하나님은 또 다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내고 계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알려집니다.
그의 모든 영광을 버린 위대한 왕께서. "잠시 동안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리니, 나는 그들에게 감추어 질 것이나,
너희는 나를 보리라 ; 이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니,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 안에 있으리라.
루터에서 웨슬리로, 계속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시면서, “나는 최초의 영광으로 돌아갈 똑같은 하나님이라.”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그리고 다른 종류의 조직의 단단한 장막을 찢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위대한 정복자로 여기에 서 계십니다. 그는 오늘도 그의 백성들 사이에 여전히 서 계십니다.
그는 오늘도 교회들의 전통에 정복당하지 않은 채로, 정복당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하도록 두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단단한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오십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정말로 그 소리의 장벽을 깨뜨리고 나면 속도를 내는데 한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겠는데, 여러분이 "예수님은 옛날 그때 살았던 분이지 지금은 예수는 살고 있지 않아." 라는
그 전통적인 장벽을 깨뜨릴 때, 여러분이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에는 어떤 제한이 없으며,
그리고 이 세상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자신을 인간의 육신 속에 감추시는 엔모피(en morphe),
곧 정복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마지막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워질 영적인 부흥이 필요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그것이 모든 장벽을 깨뜨리고, 모든 장막을 찢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어떤 장막도, 어느 것도 그의 현존하심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갈급함을 갖고 있을 때,
이제 거기에는 찢어질 장막이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그저 그것에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성령으로 모든 장막이 찢겨집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기에 위대한 정복자가 서 계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 그분이 항상 하셨던 대로, 병든 자를 고치시며!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침례를 주시면서, 그분은 위대한 정복자로 지금 서 계십니다.
운명 지워진 마귀들은 도망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도망갈 운명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마귀들은 그가 주위에 있을 때 언제나 도망가야 합니다.
오 형제, 자매여, 지금은 말씀을 쓴 이 말씀의 주인인, 위대한 성령께서,
그 활을 사랑으로 당겨서 여러분의 마음을 향해 당기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완전한 가치를 알게 되며,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이 시야에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령이 오순절 날 사람들 위에 강림하셨을 때,
케노스(Kenos)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 안에다 비우셨을 때와
아주 동일하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만든 모든 전통의 장막을 깨트리고 나올 때,
믿는 자들 안에 자신의 성령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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