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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회견문 >
군산전북대병원 부지 백석제 추진 중단하고,
군산 백석제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하라!
전북대학교병원과 군산시는 국내최대의 독미나리 자생지인 군산백석제를 보호하라는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를 외면하고, 전북대병원 군산분원 추진을 강행하고 있다. 특히, 부지선정과정에 부당성과 특혜의혹까지 일고 있음에도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어 전북대병원과 군산시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가운데 전북의 시민사회단체와 역사전문가의 조사결과, 군산백석제가 생태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역사·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유적지임을 확인하였다.
1. 군산백석제는 고려시대(1300년대) 이전에 축조한 역사문화유산임을 문헌을 통해 확인하였다
현강역사문화연구소 이우형 소장의 주장에 의하면 농어촌공사와 군산시, 전북대병원이 주장하는 것처럼 백석제가 1940년대에 축조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백석제와 관련된 문헌자료들을 확인한 결과, 1916 일제가 측량 제작한 1:5만 지도와, 1896년 『전라북도각군읍지』에 수록된 ‘옥구지도’에 백석제가 지도상에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또한, 1760년경 조선영조 때 관(官)에서 편찬한 『여지도서』에 백석제의 크기와 규모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고려말 충신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09)의 글과 행실을 기록한 『야은선생속집』 에는 백석제가 ‘료화제(蓼花堤)’라는 이름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우형 소장에 따르면 “고려말 대학자이며 절의 충신인 ‘야은 길재’의 문집『冶隱先生續集 卷上 五』에 길재선생이 추모하고 존경한 군산 출신의 고용현(高用賢, 1302~1392)에 대한 일대기를 쓴 「高文英公實行錄」에 백석제의 전신 ‘료화제(蓼花堤)’가 명확히 나타나며, 그 중요 내용을 번역하여 인용하면 ‘고향인 옥산(현재 군산 옥구)의 동쪽에 관직에서 물러나 거주하니 료화제 위의 한림동(한림마을)이다. 이는 공(고용현)의 9세조 이하가 세거하고 있는 터이다’<첨부자료 참조> 라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료화제가 현재의 백석제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1933년 제작한 『염의서원지』에 “한림동 -지금의 당북리 - 옥구군청에서 동북으로 2리쯤인 발리산 -옥구군의 진산이다 - 아래와 백석제 -또 다른 명칭은 ‘료화제’이다-의 위에 위치한다”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어 료화제가 곧 백석제의 과거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여러 문헌에 기록된 백석제의 위치와 규모, 이름의 유래와 변천, 백석제 주변의 마을이름과 염의서원 그리고 제주고씨의 정주 등을 종합할 때, 백석제가 료화제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한 역사유적지임이 분명하다.
2. 군산백석제는 사적 등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할 자격이 충분하다
백석제는 현재까지 밝혀진 문헌상 기록으로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한 것이 분명하며, 정밀한 조사를 실시할 경우 백석제의 초축시기가 삼국시대 이전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우형 소장의 주장이다.
백석제와 같이 문헌을 통해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가 확인된 저수지는 거의 없다. 백제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기록이 확인된 김제 벽골제가 국가 사적(사적111호)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는 상주의 공검지와 제천의 의림지의 경우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문헌자료 만으로도 군산백석제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군산백석제는 과거 군산지역의 중심지였던 옥구현과 옥구읍성, 고려충신인 고용현 선생과 제주고씨의 정착역사, 군산의 정신을 상징할 수 있는 염의서원 등과 함께 하나의 권역으로 군산시와 전라북도가 역사문화지구로 조성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3. 1천년 이상 지속된 백석제 습지와 독미나리의 생태적 가치를 재확인하였다
그 동안 전북의 시민사회단체와 생태전문가들은 백석제에 서식하는 멸종위기 식물인 독미나리(Cicuta virosa) 군락지가 국내 최대규모의 자생지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군산전북대병원의 부지를 변경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전북대병원은 ‘백석제 독미나리 정밀조사’와 ‘전략환경영향평가(초안)’를 통해 독미나리는 북방계 식물로 백석제에 서식하는 독미나리는 자생이 아니라 식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백석제 독미나리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며 무분별하게 이식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백석제의 문헌확인을 통해 군산 백석제는 그 자체만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클 뿐만아니라 수천년 동안 이어진 습지생태계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국내 최대의 멸종위기 식물 ‘독미나리’ 서식처로서 학술적·생태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4. 군산 백석제에 대한 문화재 정밀조사와 국가지정문화재 등록을 제안한다
전북대병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지표조사는 물론 고문헌에 대한 기초조사를 기본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전북대병원이 조사한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에는 백석제에 대한 문헌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염의서원에 대한 자료도 안내판에 적혀있는 수준으로 갈음하였다.
사실상, 전북대병원의 백석제에 대한 문화재지표조사는 형식적인 조사에 그친 것이며, 조사·연구기관이 사업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주기 위해 짜맞추기 조사를 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부실조사이다.
이에, 전북의 시민사회단체는 전라북도와 문화재청에 군산백석제에 대하여 정밀한 문화재지표조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 더불어 군산백석제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을 추진할 것을 공식 제안한다.
<우리의 요구>
하나. 전북대학교병원은 군산분원 부지, 백석제 추진을 즉각 중단하라!
둘. 전라북도청과 문화재청은 군산 백석제에 대한 문화재 정밀조사를 실시하고, 국가지정문화재 등록을 즉각 추진하라!
셋. 군산시청과 환경부는 멸종위기식물 ‘독미나리’ 최대 자생지이자, 1천년이상 습지생태계의 역사를 간직한 군산백석제에 대한 보호·관리대책을 즉각 수립하라!
넷, 백석제, 염의서원, 옥구향교, 옥구읍성 등 백석제와 주변권역을 군산의 대표적인 생태·문화·역사지구로 조성·관리하라!
2015년 4월 6일
#첨부자료: 군산 백석제 관련 문헌자료 정리 및 지도 등
군산민생연대 / 군산생태환경시민연대회의 / (재)군산환경사랑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 전북녹색연합 / 전북환경운동연합
(사)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 평화바람 / (하)하천사랑운동
첨부자료 1.
군산 백석제 관련 문헌자료 정리
2015. 3. 31.
이 우 형(현강역사문화연구소장)
1. 백석제 축조시기
- 백석제는 일제강점기가 아닌 고려 말에 그 존재가 문헌상에 나타남으로 백석제의 축조 시기는 최소한 고려 말 이전임.
▪ 백석제와 바로 인접한 군산시 향토유적(제5호)인 염의서원의 배향 인물 가운데 고용현(高用賢, 1302~1392)과 학문적 교우가 깊은 고려말 대학자이며 절의충신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09)의 문집『冶隱先生續集 卷上 五』에 실려 있는 고용현의 일대기「高文英公實行錄」에 백석제의 전신인 료화제(蓼花堤)가 명확히 나타나며, 그 중요 내용을 번역하여 인용하면,(별첨자료 1 - 1․2․3)
※별첨 자료출처 :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
…… (선략) (고용현을) 이태조가 극력하게 신왕조에 불러들였으나(야은 길재의 고문영공행실록과 염의서원지에서의 언급 내용에는 여러 차례 영의정의 제안이 있었으나 고려신하로써 절개를 지키며 응하지 않고) 고향인 옥산(현재 군산 옥구)의 동쪽에 관직에서 물러나 거주하니 료화제 위의 한림동이다. 이는 공(고용현)의 9세조 이하가 세거하고 있는 터이다. ……(하략)
- …… 新王御極之初 退居于玉山之東 蓼花堤上翰林洞是也 卽公之九世以下世居之遺址 …… -
▪ 한림동 료화제가 백석제의 전신이라는 보다 더 명확한 문헌자료로는, 염의서원의 모든 기록을 묶어 1933년 간행된 『염의서원지(廉義書院誌)』의 내용 가운데 「문충공고선생사적(文忠公高先生事蹟)」과 『염의서원지』 「서문」, 기타 기록에 수 없이 언급되고 있다.
이 가운데 15쪽의「명소고적」조 가운데 해당 부분을 번역하여 인용하면(별첨자료 2 - 1․2․3),
※별첨 자료출처 :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rcis/)
…… 한림동 - 지금의 당북리 - 옥구군청에서 동북으로 2리쯤인 발리산 - 옥구군의 진산이다 - 아래와 백석제 - 또 다른 명칭은 료화제이다 - 의 위에 위치한다. …… 고려 때 병부상서 고순겸(高淳謙)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그 자손들이 세거하는 곳이 되었는데, 문장과 벼슬이 세세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9세에 걸쳐 한림을 배출하니 마을 이름을 ‘한림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지금의 염의서원이 그 터이다. -
- 翰林洞 今堂北里 在郡東北二里許 鉢伊山 本郡鎭山 下 白石堤 一名蓼花 上 …… 勝國時兵部尙書高淳謙卜居于此 其後子孫因以爲世基 文苑簪纓世世蟬赫而九世翰林故名 今本院基地
위 사실을 정리하면, 군산 전북대병원 건립예정지에 대하여 백석제 축조시기를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로 보고 있었던 것은 원인자에 의해 세밀한 자료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760년경에 발간된 관찬지리지인 『여지도서』의 옥구현편 「제언조」에 기술된 백석제의 규모와, 1896년 고지도에 명확하게 나타난 백석제의 그림,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발행한 5만:1지형도에 나타난 백석제의 당시 현황들은, 조선시대~최근까지 매우 중요한 수리시설 역할을 백석제가 해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석제의 전신인 료화제는 고려 말인1300년경 이전에 존재했음이 밝혀졌고, 한림동에 제주 고씨 일문의 번영과 대대로 절의정신과 학문을 전한 사실을 종합해볼 때 고려멸망 후 고용현이 관계를 떠나 고려신하로써 절의를 지킨 사실 이전에 백석제의 전신인 료화제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백석제의 역사․고고학적 가치와 염의서원의 상징성
백석제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학술적 접근이 이루어진다면 초축 및 보완의 사실이 실증적으로 밝혀질 제방중심부의 축조형태와 원래 수문시설 지점에 대한 학술발굴조사(역사기록과 현장의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백석제의 초축시기는 삼한시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가 전북대병원 건립과는 별개로 반드시 이루어져야하며, 백석제 내부의 호소퇴적물과 유기물 층에 대한 폭 넓은 지점에 대한 시추샘플조사, 수서동식물상에 대한 객관적 조사가 장기간 정확하게 이루어져 백석제가 가지는 역사성과 고고학적인 의미, 우리 농업사와 사회경제학, 환경생태학적인 부분들을 총망라한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군산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염의서원의 상징성은 시대를 달리하여도 그 빛이 퇴색될 수 없는 매우 소중한 모두의 정신문화적 가치이며, 군산의 정체성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므로 제주 고씨문중의 정착사, 군산지역 정신문화를 이끈 역사적 사실규명, 발리봉과 백석제, 인접한 옥구읍성 일대의 원지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더 나아가 고려시대 벌열을 이루었던 군산의 대표적인 지배세력인 제주 고씨의 매장지가 밀도 있게 분포할 가능성이 높은 「군산 당북리 고분군」과 전체 구릉지 일대는 선사시대 ~ 조선시대에 이르는 주거지, 고분, 건물지 등이 유존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므로, 백석제 일원은 고부가가치의 생태자원과 결합한 종합문화유산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군산시의 미래를 위한 희망적 대안으로 자리잡아야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앞으로 병원설립예정지는 주민 및 관계자들의 합리적인 논의과정을 거쳐 대체부지로 전환하고, 그 일대는 보존되는 것이 마땅하다 판단된다.
3. 여지도서 (176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