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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리스도께서 나를 취하신 뜻
빌립보서 30:10-16
상동교회(尙洞 1929.12.8)
체부동교회(體府 같은 날 저녁)
一, 死中復活
二, 不曰已成已得.
三, 疾走.
四, 目的在前在上.
一.指目的保羅嘗曰 人若無復活, 吾爲最可憐者, 肉之生甚苦淡, 絶去酒色, 又屛恣意行樂, 人指信者曰無趣味云, 此不知有靈的人與裡的人也. 此靈的人裡的人非由食物而生也, 乃由主言而生也. 故肉雖死此人不死, 肉雖敗此人不腐也. 然則何者爲眞死, 何者爲眞生也? 靈死爲眞死, 靈生爲眞生也. 日前余往火葬場, 棺身一入火口, 經數時之後, 爲一掬之灰, 前日之肉類, 男女才子佳人, 只餘一掬之灰, 佛曰凡所有相, 皆是虛妄卽此也. 故肉生雖喜不如靈生, 肉死雖悲不如靈死也. 保羅之所欲得者靈生也. 天下之人滔滔皆死, 如노아洪水之人, 又如소돔고모라之人, 耶蘇開此一條之生路, 使其肉身釘死于十架之上, 以示克己釘殺肉身而後, 靈可生矣. 此萬古之奧意. 東洋亦有捨生取義, 殺身成仁亦此意也. 此義也仁也指復活永生而言也. 儒不明言其理而萬古取義, 成仁之人甚多, 肉雖死其名永存. 保羅欲取此經萬難而不悔, 又經萬險而不止, 彼薄志弱行, 見利忘義, 臨難懼退者可不羞哉! 保羅所欲非儒家之取義成仁而已也. 始則復活, 其次永生, 佛云輪回, 仙云長生, 保羅所欲, 又非佛云輪回仙云長生也. 以主血而贖罪, 以得救之魂, 重生于人世而後, 可得復活也. ◇二,指希望. 保羅之心, 已定已勇已勤, 自多馬色之後, 累得黙示, 登三層天, 其工可謂深切. 比他凡夫坮上萬萬, 如雲霄之一羽毛, 卓乎難及而不曰已成貪? 貪非好德而惟貪時則是好德也. 進德之心, 惟時不足, 勤勤孜孜, 故曰惜光陰 엡五章十六節. 使徒之行路甚險惡, 沮止其行者多, 故云此時惡也, 非眞積力久不可進, 邁邁不已, 時間常常不足故貪時孰如保也. 主亦曰吾忍爾幾時 太十七章十七節. 又曰傳道時勿人事, 此皆倥傯無暇之意也. 欲葬父者使之注我云, 保羅進就之心, 不可緩緩亦主之意也. 欲富而積財者, 不必告人, 又不必耀人, 倉庫滿則又擴張, 金庫盈則更造, 不言食口滿庫盈也. 我之進德完如積財, 不曰已進, 不曰已成, 曰已成者不進, 主以無窮之事業許人, 不設界限, 使進進不已也. 視保羅信前形便, 誇其門閥, 耀其文學, 自言已足於人世而信主後, 知事業之無窮故非但不誇, 常有不足之心. 主前如無或比自己以微塵物垢也. 主行異蹟曰勿告人, 此不足誇耀故也. 今人纔知已盈, 纔到已足, 揚揚誇耀, 今雖誇耀, 來日如掃如無, 花無十日紅, 今日紅顔來日白髮故不欲誇肉, 惟誇十架誠是矣. 今朝鮮人之未來, 果何如也? 皆如擊空無實, 而反歡樂現在, 櫃內有一升米則便已足放心, 箱中有一襲衣則 已盈驕溢, 不知來日竈突炎上鷰子相樂. 愚亦甚矣. 保羅之所以偉大在此. 不足之心如海, 不欲大而衆水歸之故成其大. 保羅不欲成大而衆恩歸之故成其大也. ◇三, 指方法. 主曰執耒者不顧後 路九章六二節,云, 其疾走可知也. 天使謂路得(羅得 : 롯)曰勿顧後, 顧後則爲火所擊, 路妻不聽顧之, 終作鹽柱, 故只向前疾走而已也. 人生行路悠悠不可終息, 西日易下前路無窮, 若止則落伍, 必顚覆乃已也. 南門之內甚複雜, 人若阧立不行則必爲人蹂躪, 覆亡乃已也. 雖欲不走不可得也.走有二法, 一去束縛, 二持忍耐, 前有穿門, 入此者不可重負, 古語上京者拔眉可也. 疾行者身體有拘束, 不可容易行步, 峨冠博帶不宜走者, 古者走者必掛冠東門外, 急流勇退. 古一里有好飮者, 蕩敗無餘猶好飮不已, 里長罰其飮者, 使佩고랑置于里門, 里長之女問其故, 答曰飮酒之故, 女曰父之고랑, 何時又來也? 其父恕而絶飮云, 世人多佩고랑, 而欲走不改幾希故, 脫而去之, 走者有忍耐可也. 拳兩手噤兩齒而走, 使心不動, 不達不止, 雅各與天使角力不爲祝福不捨云, 主曰終忍得救, 走者胸喘膚汗, 其苦勞不可言, 非忍可得達乎? 吾前日上京費四日而上, 一行甚苦, 行中一人至四日至漢江邊, 問曰此距京城幾里? 答曰猶費四日而後可達云, 則此人欲回行云, 無忍耐故發此言也. 故走者忍耐爲主 希十二章. ◇四指方向, 走者無方向不可, 目的在上不在下, 在前不在後也. 下與後地獄也, 上與前天堂也. 儒敎常顧後而下故無進步, 佛敎常厭世而退故無發展. 今朝鮮皆以儒彿作過去, 今以何者作未來也? 今朝鮮人之未來尙依儒彿, 故其發作皆如擊空. 卜筮風水之說, 尙支配人心, 又望鷄龍山之鄭道令, 皆儒佛之害也. 儒彿實不如此而今人誤用, 致有今日, 是無方向故也. 且顧後而退故也. 故必定方向而走, 無方向則徒勞而已也. 今朝鮮人之方向果何也? 人或誤擇方向故, 一無成就. 然必從自己之趣味而擇也. 父母不能强勉也, 擇之而後必專力可也. 期至成功不已, 不曰已成, 不曰已進, 必進進不已可也.
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二,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님.
三, 달려 감.
四, 목표가 앞에 있고, 위에 있음.
◇ 첫째, 목적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일찍이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내가 가장 불쌍한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따라서 주색을 끊고, 제 멋대로 즐기는 일을 물리쳐야 하므로 사람들은 믿는 자들을 가리켜 취미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영적인 인간, 내면적인 생명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인간과 내면적인 인간은 음식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죽더라도, 이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또한 육신이 부패하더라도 이 사람은 썩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참된 죽음이며 어떤 것이 참된 삶입니까? 영혼이 죽어야 참으로 죽는 것이고, 영혼이 살아야 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일전에 내가 화장장에 갔었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불 속에 들어간 지, 불과 두어 시간 후에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나왔습니다. 남자나 여자 중에 재능 있는 이나 아름다운 여인들도 모두 다 한 줌의 재만 남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삶이 좋다고 하지만 영혼의 삶만 같지 못하고, 육신의 죽음이 비록 슬프다고 하지만, 영혼의 죽음만 같지 못합니다. 바울이 얻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삶이었습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의 사람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도 그러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는 자기를 이기고 육신은 못 박혀 죽게 한 뒤에 영혼이 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양에도 ‘의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다.’고 하든지, 또 ‘몸을 죽여 사랑[인仁]을 성취 시킨다’고 한 것이 다 이러한 뜻입니다. 여기서 의리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것은 부활과 영생을 지적한 말입니다. 유교에서는 그 이치를 분명히 말하지 않았으나 의리를 취하여 전해 주고, 사랑을 성취 시킨 사람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육신은 죽었어도 그 이름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얻기 위하여 만 가지 곤란을 겪으면서도 뉘우치지 않았고, 만 가지 위험을 당하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약한 의지로 인하여 이익을 좇아 의리를 잃거나 고난을 당할 때 두려워 도망친 자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이 하고 싶어 한 것은 유교의 ‘의리를 취한다든지, 인(仁)을 성취하는 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처음은 부활을 위해서 얻고, 그 다음은 영생을 위해서였습니다.
불교에는 윤회(輪回)사상이 있고, 도교에는 신선사상인 불로장생[不老長生] 사상이 있습니다. 바울이 바라는 바는 윤회나 불로장생이 아니었고, 주의 피로 죄를 용서받아 영혼이 구원을 얻고 중생하여 부활을 얻는 것입니다.
◇ 둘째, 희망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마음은 안정되어 용감하고 부지런하였습니다. 다메섹에서 기거할 때에 여러 차례 계시를 받고 삼층 천에 올랐습니다. 이는 그의 공부가 깊고 절실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과 비교해 볼 때 한없이 높아져서 높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탁월함을 따를 수 없게 되었으니, 이를 두고 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탐내는 것은 좋은 덕성이 못 됩니다. 하지만, 시간을 탐내는 일은 좋은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덕성에 나아가는 데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노력하며 애쓰고 애써라.’ 하는 까닭에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에베소서 5:16). 바울의 가는 길은 매우 험악하여 그 길에는 숱한 훼방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때가 악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오래 동안 힘을 쌓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힘써 나아감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7:17). 또 말씀하시기를 ‘전도할 때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영부영할 겨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를 장사지내려고 한 자까지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나아가려는 마음을 늦출 수 없던 것도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재물을 쌓아두는 자는 남에게 고할 필요도 없고, 또 남에게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창고가 꽉 차면 또 확장하고, 금고가 가득 차면 또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덕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재물 쌓듯이 해야 합니다. 진보했다고도 말하지 않고, 성공했다고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계도 만들지 말고 중단 없이 전진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신앙을 가지기 전의 형편을 보면, 바울은 문벌을 자랑하고, 학문을 자랑하며, 이 세상에서 만족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은 후로는 자랑도 하지 않고,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주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 자신을 작은 티끌이나 물건에 묻은 때에 비유하였습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신 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랑하고 빛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자신의 분수에 차고, 자기 스스로 만족함에 이르면 의기양양하여 자랑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에는 자랑이지만, 내일은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오늘의 아리따운 얼굴이 내일에는 백발이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자랑할 게 못 됩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이 실로 옳습니다.
조선 사람들의 미래는 과연 어떠합니까? 모두 막대로 허공을 치는 것 같아 실속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세를 즐기고 기쁘게 여깁니다. 뒤주 안에 한 됫박의 쌀만 있어도 만족해하며 방심하고, 옷상자 안에 옷 한 벌만 있어도 교만이 넘치고 있습니다. 내일 굴뚝에서 불이 나서 제비집이 다 탈 줄도 모르고, 즐겁게 지저귀는 제비와 같습니다. 어리석음이 이렇게 많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족한 마음이 바다처럼 커서 바다가 더 크지 않으려고 하지만, 많은 물줄기가 들어와 그 크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크게 되려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은혜가 몰려 돌아왔기 때문에 크게 된 것입니다.
◇ 셋째는 방법을 지적하였습니다.
주께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9: 62). 천사가 롯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 뒤돌아보면 불로 멸망하리라’하였으나, 롯의 아내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앞만 보고 나가야 합니다.
인생길은 멀고멀어 쉴 수가 없습니다. 해는 서산을 넘어가려 하고, 앞길은 끝이 없는데 갈 길을 멈춘다면 낙오자가 되어 자빠지고 넘어지게 됩니다. 남대문 안길은 매우 복잡합니다. 가다가 길을 멈추고 서 있게 되면, 다른 사람에 의해 짓밟혀 넘어져 죽고 말게 됩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길을 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내심을 갖는 것입니다. 앞쪽에 문이 하나 뚫려 있는데, 거기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없습니다. 옛말에 ‘서울을 가려면 눈썹도 뽑아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가려는 사람이 신체에 구속이 있으면 쉽게 발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높은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띠고 있으면 빨리 가는데 맞지 않습니다. 옛날 길을 가는 사람은 반드시 동문 밖에서 관을 벗어 걸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급박하게 흐르는 시세의 흐름을 따를 수 없어서 용감하게 벼슬길에서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안을 다 망하게 하고도 오히려 술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 마을 이장이 그 사람을 벌주기 위해 고랑[수갑手匣]을 채워 마을 문에 묶어 두었더니, 이장의 딸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이장이 답하기를 ‘술을 좋아하여 그렇게 했다’고 하자, 그 딸이 ‘아버지의 수갑은 언제 차게 되나요?’ 했더니, 이장인 그 아버지는 술꾼을 용서하고 자신도 술을 끊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은 이와 같이 육신을 구속하는 고랑을 차고 달려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자기의 행실을 고쳐 그 구속을 벗어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달려가는 자에게는 인내가 있어야 됩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아래 위의 이빨을 꽉 다문 채 달려가되, 마음을 확고히 하여 흔들리지 말고,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할 때,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끝까지 참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길을 갈 때,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고통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내하지 않고 가히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전일에 서울로 올라오는데 나흘이 걸렸습니다. 함께 오는 일행이 모두 너무 피로하였습니다. 동행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한강 가에 이르러 ‘여기서 서울이 몇 리나 되느냐’고 묻자, ‘아직도 나흘은 더 걸려야 한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그만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인내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 가는 사람은 인내를 주장으로 삼아야 합니다.(히브리서 12장).
◇ 넷째는 지시하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방향이 없으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목적은 위에 있고 아래에 없으며, 앞에 있고 뒤에 있지 않습니다. 아래와 뒤는 지옥입니다. 위와 앞은 천당입니다. 유교는 늘 뒤와 아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진보가 없습니다. 오늘의 조선은 과거를 숭상하는 유교와 불교를 신봉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미래를 위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인의 미래는 아직도 유교와 불교를 숭상하기 때문에, 모든 일의 출발과 시작이 마치 막대기로 공중을 치는 것 같아 소득이 없습니다. 복서(卜筮)와 풍수(風水)의 사상이 아직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고, 또 계룡산의 정도령(鄭道令)을 기다리는 것도, 다 유교 불교의 폐해입니다. 유교와 불교는 원래 점복과 풍수사상이 아닌데, 사람들이 잘못 이용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는 방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뒤를 돌아보고 퇴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방향을 정해 나아가야 합니다. 방향이 없으면 공연히 수고만 할 뿐입니다. 오늘날 조선 사람의 방향은 과연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방향을 잘못 정했기 때문에 성취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자기의 취미를 따라 선택하여야 합니다. 부모들이 억지로 시킬 수가 없습니다. 방향을 선택한 뒤에는 반드시 전력을 다하여 성공을 할 때까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이루었다고 하지 말고, 또 이미 진보했다고도 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