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학사(學事)
태조 남정북벌의 분망함도 불고하시고 왕경과 서경 두 곳에 학교를 두어 자제를 교육하였고 역대 군왕도 다 학문에 전력하도록 장려하여 제도가 완비하였더니 성종 때에 각 고을에 조서를 내려 총준자제를 택하여 왕경에 올라와 학문을 닦게 하고 생도들에게 나라에서 학비를 담당하고 포미(布米)를 주어 공부케 하고 또 국자감에 전장(田莊)을 주어 경비를 지출케 하고 6년에 또 경학과 의학박사를 택하여 각 지방 12목이 있는 곳마다 한사람씩 보내어 교학과 의료의 임을 맡게 하고 서경에도 수서원(修書院)을 두어 제생을 명하여 역사를 기록하고 왕은 다시 국자태학생(國子太學生)을 택하여 지라 송(宋)에 유학케 하고 그 나라 빈공과(賓貢科)에 합격자는 돌아와 비서랑을 명하였고 기외 교학이 일신하여 문교가 울흥하였으며 당시 관리치고는 배우지 않는 자는 채용을 허락지 않으니 일반 관리의 학력이 비상히 증진하였고 왕 14년에 령을 내려 한림원(翰林院)에서 매월 문제를 내려 재경문신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詩) 3편 부(賦) 3편씩 저술하여 나라에 바치게 하고 지방문관에게도 명하여 지여 드리게 하니 이것을 이르되 문신월과(文臣月課)라 칭하였다.
왕이 유교를 숭상하여 치국의 요도를 삼고 불교에 대하여는 점점 눌러 약하게 만드는 정책을 썼다. 대가사(大架裟) 의식을 정지하고 태묘를 세우고 또 사직을 설하여 제례를 밝히고 여러 번 각도에 사신을 보내어 백성들의 질고를 묻고 의약을 주어 병을 고치게 하고 또 효자 열부를 표창하여 일반 충교가 크게 새로워 졌으며 눈물을 머금고 숙부 욱(郁)을 원지에 유배하고 또 술집을 없이하고 강과 바다에 선척을 확장하여 수로여행을 편리케 하고 국내에 문화가 자못 떨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