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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현답
-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고 -
2019. 06. 백란주
먼저 고백한다. 나의 치부를 들켜버렸음을, 정상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나의 이기적인 시선을.
이상한 정상가족, 역설이다. 반어다. 정상가족 앞에 붙은 ‘이상한’ 수식은 다양한 가족형태를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을 역설로 깨닫게 한다. 이상하지 않은 정상가족이라는 반어의 뜻도 함께했다. 사회의 굴절된 시선을 거두게 되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의미의 역설과 반어가 숨겨져 있는 제목을 두고 사회문제에 대해 나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며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무관심했던 나에게 던지는 질책으로 다가왔다.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일어나는 폭력, 체벌, 가족동반자살 등에 대한 권리의 주범이 되는 친권에 대해서 작가는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친권은 권리가 아니라고.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지 자녀에 대한 처분 ‘권리’가 아닌데 우리 사회는 ‘친권’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한다고 이야기 한다.
가족 바깥에서는 미혼모와 입양, ‘정상가족’으로 수출되는 아기들,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 노래는 봄이 되면 어김없이 음악차트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했다. 시험성적 때문에 계절의 온도에 민감해야할 아이들은 오히려 몸서리치는 듯했다. 시험을 앞둔 아이들은 계절이 요동칠 때마다 계절을 외면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을 두고 정서적으로 메말랐다느니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우리는 분명 아이들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잣대로 다가간 듯하다. 벚꽃이 필 때, 단풍이 짙어질 때 시험을 칠 수밖에 없는 교육시스템의 오류인 것일까, 아이들 시험기간에 때맞춰 꽃을 피우는 꽃이 잘못인걸까.
이상한 정상가족, 기준에 따라 나는 너가 될 수 있고 너는 나가 될 수 있음을 강하게 그러나 소리 없이 신음하게 하는 역설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엄마가’ ‘우리 딸은’ 친구와 나 사이에 엄마와 딸이 ‘우리’로 묶일 이유가 없음을 알지만 나는 ‘우리’라고 말하고 친구는 ‘우리’를 알아듣고 끄덕인다. 나와 친구는 그 경계의 모호함을 안다. ‘우리’라는 단어가 너무도 익숙한 가족중심주의의 삶에 살았던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미혼모, 그리고 베이비박스
딸아이만 둘 있는 나에게 미혼모에 대한 언급은 뉴스나 기사를 통해 접했던 ‘베이비박스’에 대한 나의 고착화되었던 사고를 흔들었다.
베이비박스란 원래 핀란드에서 아이들을 축하하고 성장을 지원하기위해 무상으로 제공되는 물품박스를 지칭하는 아주 기쁜 선물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대구 미혼모가족협의회에서는 ‘베이비박스’의 본의미를 찾아 신생아 용품꾸러미를 ‘베이비박스’라고 이름을 짓고, 미혼임산부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모든 아기들은 평등하게 출발한다.’라는 철학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된 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상자, ‘베이비박스’로 불리게 된다. 나또한 베이비박스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먼저 인식함을 고백한다.
소라미 공익인권법재단 공감변호사는 “베이비 박스 자체의 선악을 말하긴 어렵다. 선진국의 경우 이미 공적인 미혼모 지원 체계 등을 충분히 갖춘 뒤, 그러고도 남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베이비박스를 둘지 말지 고민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공적인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마치 베이비박스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언론 등에 의해 호도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영아유기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낮은 수준이자, 사적인 방식인 베이비박스가 미담사례로 부각되며 영아유기의 주된 원인인 미혼모 차별 해소방안 등은 정작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이종락 주사랑공동체 교회목사 역시 베이비박스가 최종해결책이 아니라는데 동의한다. 이 목사는 “처음에는 아이들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전국 각 도에 하나씩 베이비박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를 친부모에게 돌려보내거나 입양활성화를 통해 영아유기를 줄여나가 장기적으로는 베이비박스를 없애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원가정 보호(친부모의 아이 양육)을 위해서는 영아유기의 유혹에 가장 빠지기 쉬운 청소년 미혼모 등을 위한 특화된 지원 대책이 급선무로 꼽힌다.
〈베이비 박스 선악 다툼보다 미혼모 지원체계 구축이 우선〉, 2017.05.16. 한국일보 중에서 -
미혼모에 대한 특히 청소년 미혼모에 대한 인식은 그리 관용적이지 못하다. 행동에 대한 질책과 함께 책임에 대한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사회의 시선은 ‘문제아’로 낙인 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잘못으로 인식된다. 비정상적인(미혼모 기준) 사람들이 묻고 답하기 때문에 탁상공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혼모에 대한 심정으로 그들이 되어 그들이 겪는 현실적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일이 아니므로 나또한 그러했다.
작가는 말한다.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하는 일이라고.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치 자신이 겪는 양 느낀다 해도 고통의 원인을 잘못 인식하면 행동이 엉뚱해지듯 그릇된 인식이 공감을 왜곡하는 일도 잦다. 나와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기술, 갈등의 해결, 세상의 소통을 줄이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역지사지의 확대, 공감의 향상을 핵심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의 선을 정하는 게 먼저라는 말이 나는 좋았다. 일을 저지른 후 미안하다고 되풀이하는 어리석음 전에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상대방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나의 행동에 대한 선긋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어선 안 된다고 한다. 또한 공감의 제도화,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관계에선 예의, 공적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라한다.
2016년 출생아 수는 인구통계 작성 이래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302명의 갓난아기가 길바닥과 베이비박스에 버려졌다. 같은 기간 해외로 입양된 아이는 334명, 거의 하루에 한 명꼴로 아이를 버리고 해외로 보낸 셈이다. 영유아에 국한하지 않고 18세 미만의 아이들로 시야를 넓혀보면 부모에게 버림받아 시설, 위탁가정 등으로 간 아이들은 4,503명, 하루 평균 12명 이상이었다. 같은 기간 학대를 당해 숨진 아이는 한 달 평균 세 명꼴이었고, 아동학대 판정을 받은 경우는 하루 51건이었다.
한국은 참 이상한 사회다.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계속 줄어들어 ‘국가소멸’을 우려하는 판국에 왜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를 버리며 해외입양을 보내는 걸까?
참 이상한 사회 속에서 그간 나는 정상적인 사회로 인식했으며 나는 정상인이라 규정짓고 나는 안도했던 것일까. 내가 겪었던 사회를 딸아이들도 관습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의심하지 않을 것 같다. 작가가 말하는 ‘이상한 정상가족’의 범위에서 과연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혼외 출산율,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2018년 합계 출산율이 0.98로 OECD 소속 국가 중 우리나라가 첫 번째 인구소멸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26일 통계청은 ‘2019년 4월 인구 동향’을 발표했다. 해당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년 동월 대비 출생 수 는 1,700명 줄었다고 한다. 결혼인구감소, 아이 키우기 어려운 환경 등의 이유로 저출산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게 프랑스 스웨덴의 출산율은 역발상이었다.
스웨덴에서는 부모와 가족이라고 할 때 결혼제도 안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1970년대부터 결혼제도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했으며 1977년에는 이혼하거나 별거하더라도 두 배우자가 아이들에 대한 공동양육의 의무를 자동적으로 져야한다는 것이 법에 명시됐다. 스웨덴 아이들의 거의 절반은 결혼제도 밖에서 태어난다.
출산율이 저조한 일본과 스페인, 출산율이 매우 높은 스웨덴과 프랑스의 가장 큰 차이는 ‘차이’에 대한 관용의 정도였다. 출산율이 회복된 나라들에는 혼외출산을 ‘정상가족’에 대한 도전이나 일탈로 간주하며 차별하는 배타성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결혼하지 않고도 다양한 가족들이 태어난다고 한다. 가족이란 테두리 속에 우리가 느끼는 것과 다른 ‘차이’를 느끼게 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생각을 했다. 딸아이들이 만약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를 한다면 허락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내게 물어본다. 잠정적 보류. 그 때 내 손에 들어온 책이 이승연의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이었다.
팍스(PACS 시민연대계약), 프랑스가 동성커플에게도 법적인 지위를 인정하기 위해 1999년 도입한 제도. 세액 공제, 건강보험 등 결혼부부와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보장받는다. 결혼과 달리 맺고 해지할 때 법적으로 기록이 전혀 남지 않는다. 2001년 1만 6586건이었던 팍스 커플 수는 2017년 19만 3950건으로 늘었다.
동거, 팍스, 결혼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든 아이는 자라는데 있어서 사회로부터 어떤 차별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가족, 혈연 위주의 우리 문화에선 조금 색다르게 보며 곱지 않을 시선들을 거두어들인 프랑스 팍스 제도는 출산율을 높이는 방법이 되었다.
주변의 프랑스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는 파트너와 사귄 기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동거를 시작하고, 그러다 아이를 가지면 결혼을 하거나 팍스를 맺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어로는 ‘시민연대계약’으로 번역할 수 있는 팍스는 두 성인이 서로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다. 프랑스인들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교감이다. 서로에 대한 진심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결혼 사실을 꼭 알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을 했다고 둘 사이가 원만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두 성인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꾸준한 노력과 실천이 중요하다.
스웨덴의 삼보는 팍스보다 더 빠르게 정착된 동거 커플의 파트너 십 제도다. 삼보관계는 팍스보다 더 쉽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스웨덴의 동거 인구는 18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스웨덴 전체 인구가 1000만 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젊은 층에 한정해서 말하면 결혼한 커플보다 삼보관계인 커플이 더 많다. 프랑스의 팍스나 스웨덴의 삼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동거가 곧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이다.
이혼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이 전혀 없어.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세 번이나 결혼했고, 올랑드 전 대통령은 오래된 파트너와 헤어지고 재임기간에 여자 친구를 두 명이나 사귀었지. 마크롱 대통령은 고등학교 때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난 교사가 이혼하기를 기다렸다가 결혼했잖아.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팍스를 맺거나 동거하다 헤어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흔한 일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함께 사는 누군가랑 헤어지지 않고, 한 사람이랑 다툼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 이승연,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중에서 -
아주 가끔 남편은 내게 묻는다. 다시 태어나면 자신과 결혼할 거냐고. 웃으며 답한다. “아뇨!”, 그리고 이어 말한다. “다음에는 결혼을 하지 않을 거예요.” 내세의 시간을 미리 물어보는 것, 참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면서도 답을 하는 나와 남편의 모습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서로에 대해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책무로 느껴질 때, 서운함을 표현하는 문답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팍스나 삼보는 정상이 아닌 모습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타인의 의식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개인, 나의 삶을 기준으로 본다면 동거의 제도가 괜찮은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나는 딸아이들이 물어온다면 쉽사리 허락은 못 할 것 같음도 고백한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라는 말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삶을 집단적으로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 유기된 상태로 지내온 익숙함 때문인지 모른다. 개개인의 삶, 나 너 아닌 ‘우리’라는 말을 수식어로 가졌을 때 편한 느낌으로 인식하고, 이타적인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빼 보았다. 우리 아내, 아내. 우리 남편, 남편. 나와 연고 없는 제 삼자 앞에서 ‘우리’라는 단어는 본능처럼 나왔다. 상대를 나와 의미 있는 관계로 묶는 물리적인 거리 선택으로 인한 친근감의 표현도 아니었다. 습관적, 본능적으로 박혀버린 단어가 ‘우리’라는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나와 너의 개성을 존중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개인적 삶을 즐길 줄 모르게 되는 것 같다. 공동으로 움직이다 보니 언제나 서열 속에 있는 나를 보게 되며 주눅 들기도 한다. 다름에 대한 인식차이가 아니라 때로는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게 된다. ‘우리’라는 넓은 범위가 줄을 세우는 기준이 되어버림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를 벗어던지지 못한다.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이유로 소속되는 ‘우리’라는 이상한 정상범위가 때로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우리는 안다. 아니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이승연은 말한다.
결혼의 본질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노력으로 차이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다양한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평등한 가족문화가 만들어진다. 팍스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기로 한 시민들의 선택을 국가가 법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시민의 권리를 질문하게 된다. 상대에 대한 진심이 있다면 결합의 형태는 본질이 아니다.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은 말한다.
내 혈연이 아니더라도 세대를 이어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유한해도 나보다 더 크고 지속되는 전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추구와 삶의 의미도 빛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가족 ː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식구 ː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 또는 한 조직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족은 식구의 진부분집합이다. 작은 단위의 가족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니 이상하기도 하고 정상을 벗어나기도 한 느낌으로 닿을 수 있다. 넓은 의미를 갖추고 있는 ‘식구’란 단어를 기준으로 보면 지구촌은 식구가 될 것이다. 다양한 인종, 문화는 각자의 개성이며 삶의 방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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